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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젊은시인집중조명 해설/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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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90회 작성일 09-12-20 17:01

본문

|해설|
시선과 응시의 얽힘, 그리고 관계의 시학
 백인덕|시인


1.
며칠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다문화 가정’이라는 용어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불씨를 지핀 장본인은 필자가 아니었지만, 경박한 성정에 그 자리에서 학번이 가장 높다는 이유로 필자가 가장 열을 올렸던 것 같다. 생활에는 라면 한 개 값도 안 되는 얄팍한 지식, 아는 체가 늘 문제일 뿐이다. 요지는 이렇다, 포용하자, 융합하자, 하나가 되자 외치면서 실상은 ‘다문화 가정’이라는 용어 속에 그들을 가두고, 은연중에 우리와 다름, 우리와 하나 될 수 없음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손현숙 시인의 작품세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왜 이런 터무니없는 서두를 끄집어내는가, 이유는 ‘이분법’에 있다. 남자/여자, 어른/아이, 개인/집단. 시인/독자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말고 뼈 속 깊이 스며들어 있어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빗금 긋게 되는 것들, 어쩌면 그것들이 우리의 삶의 추진력이고 시의 터전이면서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 한 해 이런저런 문예지에서 손현숙 시인의 작품을 근 이십 편 가까이 보게 되었다. 첫 시집 이후의 작품들이니 관통하는 어떤 ‘시학’의 맥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전에 보았던 작품들과 이번에 주어진 열 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나름 그 ‘맥’을 찾아보고자 한다.

2.
현대인에게 ‘본다’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다. 오감 중에 ‘시감각’에게 절대적인 우선권이 주어진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의 역할을 백분율로 환산해보면, 학자마다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대략 85%이상이 ‘시각’이 담당한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청각, 촉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세 감각의 총합은 거의 97% 이상에 달한다. 시각매체에서 특히 ‘광고’들이 사용하는 빠른 프레임, 흔들림, 사운드와의 조화, 각종 톤의 배합 등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는 있는 것일까, ‘시각’의 사용, 즉 ‘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선택’의 행위다. 우리의 눈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모든 사물을 볼 수 없으므로 하나의 대상, 사물을 선택하고 집중하게 된다.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본다’는 것은 ‘배제’의 행위가 된다. 선택해서 집중한 대상 외의 모든 것을 배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움직이는 빛을 붙잡는 거다
순광은 일상처럼 담담하고
역광은 칼로 베는 듯 날카롭다
간혹 사광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비명처럼 선연한 역광을 즐긴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해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한 장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의 눈은 오래 열려 있어야 하는 거다
보이는 것 말고도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 
저 속의 내막을 자심하게 읽어내야 한다 

본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것
시선은 집요한 애무다
나는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은 태양을 등진 채 나를 본다
눈부셔라, 총 쏘듯이 카메라의 셔터를 슛팅하자 
오! 나의 아름다운 당신, 순식간 깜깜하다
―「맞서다」 전문

이 작품을 이번 글의 ‘마스코트’로 결정하면서 내심 필자는 망설였다. 시인이 수준급의 「사진집」을 발간한 적이 있다는 시단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해받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다만 어쩔 수 없을 뿐이다. 이 작품에는 시선과 응시의 관계가 제대로 드러나 있다. ‘본다는 것’, 응시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을까. 반면에 시선은 ‘집요한 애무’다. 이 부분이 좀 어렵다. 일반적으로 시선과 응시의 관계는 굳이 라깡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불편한 관계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대상을 선택해 ‘응시’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 배제된 다른 모든 것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 무수한 것들에게 동시에 무차별적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선은 ‘애무’이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워야 하리라. 그러나 화자는 이를 당당하게 ‘애무’라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선과 응시의 관계와 일반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닌, 특별한 나와 당신의 관계 맺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읽기에서 초점(포커스)은 자연스럽게 ‘당신은 누구인가’를 밝히는 문제로 옮겨가야 한다. ‘나는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싶었지만 ‘당신은 태양을 등진 채’ 즉, 화자의 역광의 피사체로서 ‘나’를 보고, 카메라(기억)에 담으려는 순간 ‘깜깜’해진다. 이 작품에서 응시는 ‘내막을 읽는 것’으로 시선은 ‘집요한 애무’로 그 목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특별한 시선과 응시의 관계만으로는 손현숙 시인의 시세계의 전모를 그려낼 수 없다. 겨우 윤곽 하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2.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계들로부터 개별적이고 특수한 관계를 추상화해낼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예술가들이 가져야 할 인식론적 자질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흔히 말하는 ‘감수성’과는 사뭇 달라서 집요한 관찰과 훈련, 수정을 가하지 않고는 좀처럼 획득하기 쉽지 않다. 필자는 손현숙 시인의 ‘산행’이 그러한 수련의 한 방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얼굴은 없고 음부만 깊이 패어있는 여자, 누구라도 그 깊은 곳을 밟고 지나서야 저 높은 봉우리에 닿을 수 있는데, 지나치는 발길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음핵을 꼭꼭 짚어 저 여성봉 아찔한 꼭대기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슬픔」 부분

이제 다 왔다, 안도하는 순간
산이 산에 숨기고 있던 저기, 불쑥 솟구치며 겁주는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
숨은 벽!
―「숨은 벽」 부분 (≪현대시학≫ 2008, 3월호에서 인용)

시인이 산행에 나서는 것은 건강 돌보기나 시간 죽이기 같은 세속적 목적보다 무언가 내면의 목적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시인이 산행 중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이름난 그 어디가 아니고 숨겨져 있거나 짓밟혀 있는, 한마디로 일그러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의 발견은 시인에게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야기한다.

노적봉은 몸 밖의 몸이다
북한산 위문에서 용암문 쪽으로 내려오다
우회해서 겨우 당도한 곳
바위산이 내 앞에 턱 버티고 선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것 같지 않은
저 완강한 침묵, 입 꽉 다문 속내
여기가 세상의 끝인 것 같다
―「꿈 깨다」 부분

시인에게 야기 된 불편의 정체는 원활한 소통이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소통불능이 아니라 그 완전한 가능성이 무언가에 의해서 자꾸 훼방 된다는 사실이다. 불능 앞에 좌절하지 않고, 방해받는 것에 불편해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이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졌음을 역으로 드러내는데, 그래서 시인은 비록 ‘여기가 세상의 끝인 것’ 같지만 ‘암흑도 내 집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산장능선 지나 영봉 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깊은 산속이어서 말이 뚝, 뚝, 끊어진다
반갑다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오는 당신은
누구시더라, 언젯적 누구시더라,
통화불통 지역을 지나자 찌르르 몸엣것이 돈다
내 속이지만 스스로는 닿을 수 없는 곳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몸의 말, 저릿하다
어느 세월에 잊혀진 누군가의 얼굴처럼
느닷없이 내 몸과의 교신 끊어질까, 떨린다 새빨갛게
아직은 한 달에 한 번, 나는 통화중이다
―「아직은 통화 중」 전문

결코 방해받지 않고, 왜곡되지도 않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기는 할까, 비록 근사치 정도라도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형태이며 방식이어야 하는가, 또는 의사소통의 어떠한 기능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가, 질문의 연쇄가 시작된다. 위에서 인용한 작품은 최소한 두 개의 질문에 답을 찾아 볼 수 있다. 전화는 끊어진다. 그것은 외부에서 ‘의미’를 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외적 조건(‘깊은 산속’)에  영향 받는다. 그러나 ‘몸의 말’, ‘내 몸과의 교신’은 비록 가 닿을 수는 없지만 끊어지지 않고 ‘통화중’에 있다. ‘몸의 말’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함축적이고 사변적인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필자의 일천한 역량으로 힘껏 해석해본다면, 우선 혈육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피와 몸으로 연결된 관계가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도 ‘새빨갛게 아직은 한 달에 한 번’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자리에서 여성성은 논외로 하기로 작정했지만, 시인의 경우 시편들 속에서 ‘엄마-나-녀석’에게로 이어지는 관계가 하나 드러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 이렇게 나이 먹도록 멀쩡하게 피둥피둥 살아 연애하고, 또 연애하고 새끼 낳고 집 지니고 밥 끓여 배불리 먹는 동안 엄마,
엄마는 불안해, 엄마는 혼자 날 향해 뭐라, 뭐라, 또 소리 질렀겠지…… 그 목소리 듣고 싶어
―「희생감각」 부분

화자가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 엄마가 혼자 ‘날 향해 뭐라, 뭐라’ 질렀던 소리는 시인에게 이르러 시인이 혼자 ‘세상 향해 뭐라, 뭐라’ 지르는 소리로 전환된다. 이것이 손현숙 시인의 새로운 관계 맺기인데 이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다음으로 ‘몸의 말’을 일상적 자아가 듣고 하게 되는 말이 아니라 ‘날 것’인 ‘나’, 다시 말해 일상과 대립하는 그 무엇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적 자아의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손현숙 시인의 시 세계는 시선과 응시라는 날줄 하나에 여러 관계의 씨줄로 직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얼마 전 후배에게서 우스갯소리 하나를 들었다. 한문학 전공인 놈이 같은 날 출강하는 중견시인께 “요즘 시가 읽히나요?” 물었더니, 그 선생께서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왈, “시 읽는 사람보다 시인이 훨씬 많지!” 라고 하셨단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적 자아는 언제 일상적 자아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가? 필자는 시인이나 독자의 수보다, 그렇지 않은가,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쳤다면, 그것은 빈틈없는 ‘계량화’ 때문일 것이다. 궁색한 내 영혼은 얼마에 팔릴 수 있을까? 아니, 웃돈을 얹어줘야 하리라. 손현숙 시인은 그 계기를 단호하게 ‘낙인’이라고 밝힌다. ‘낙인찍힘’아니라 ‘찍힌 낙인의 재확인’이겠지만 말이다.(개인적으로 필자는 ‘낙인’보다 ‘점지’를 선호한다. 낙인이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점지는 내적 필연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도 안 물어갈 개인 선호일 뿐이다.) 시인의 작품 「낙인」은 시적 자아로 환(?)하는 순간을 ‘궤도에서 이탈한 별똥별처럼 제 스스로가 빛난다.’, ‘그는 조용히 신을 버렸다.’, ‘제 몸에서 나온 것들만 믿는 거다.’, ‘어느 순간 구원처럼 나는 그들로부터 버려져 지금도 떠돌면서…….’와 같은 여러 시행들에 걸쳐 경로를 그려 보여준다. ‘낙인’은 배척당함이고, 상궤를 벗어남이고, 고립이지만 끝내는 구에의 도정이라는 것이다. 

비개인 뒤 하늘은 말짱해요 당신이 나를 빙빙 돌 듯 지구 옆에는 화성, 그 옆에는 목성, 또 그 옆에는 토성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단순하게 돌아요

당신, 돌겠어요?
―「블랙커피」 부분

일상은 너무나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다. ‘톱니바퀴’가 얼마나 억센 힘으로 서로를 물고 있는가, 정도는. 현대인에게 일상은 존재의 근거다. 우리는 그 어떤 심오함이나 진정성, 아니 그 어떤 고귀한 사랑이나 목적을 향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상은 감옥이지만 일탈도 감옥이라는 식의 르페브르의 진단은 오늘 인용 시와 같은 작품들 앞에서 무력화된다. 이제 일상은 천체의 운행과 맞물릴 정도로 대단한 ‘과학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접하게 된 손현숙 시인의 많지 않은 작품들 속에 이런 인식이 드러난다.

저절로 물이 올라 싱싱한 이파리들
마치 남자 앞에 저를 맡기는 여자처럼
햇빛을 빨며, 울며, 불며, 바람 앞에 바르르 몸을 떤다
스스로를 먹이는
녹색식물이여!
―「광합성」 부분         

직선적 경로를 선호하는 필자로서는 ‘조화’로 읽히는 작품이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선택, 그것도 양자택일 앞에서 미동하는 갈망을 읽어낼 수 있다. ‘바람’에 떨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 앞에’ 떠는 것이라는 이 함축적 표현이 그렇다. 망설임은 언제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간간이 바람 불 때 마다/나무들 안간힘으로 잎사귀 떨고 있다/나는 나무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내가 따라가고 싶은/바람의 길은 볼 수 있다/본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 없이/안다는 것인데 전화선 하나로/이어졌던 위태로운 관계는 이미 끊어졌다”(「소리가 없다」, ≪시현실≫ 2008, 봄호 인용) 시인은 ‘소리’가 아니라 ‘봄’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그것은 ‘의미’의 즉시적 실현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에 퉁퉁 부르튼 맨발,
어디 먼 길 재촉하며 가는 길이었겠다
강물도 뱉어버린
저 여자, 죽음에서도 쫓겨나
아가미 겨우 열고 닫듯 숨소리 흐리다

어디로 갈 것인가, 다시 몸을 거둬 입는다
―「봄밤」 부분

하지만 위 인용시의 음산한 풍경에서 낚시 바늘의 미늘처럼 내가 읽게 되는 것은 ‘아가미 겨우 열고 닫듯 숨소리 흐리다’라는 시행이다. 보는 것/듣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이 무화되는 곳에 시가 있을지 모른다. 시인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감각은 우리를 속이지만 영혼은 저가 속고 싶은 만큼만 속인다. 이 또한 ‘어디로 갈 것인가’ 되묻게 되는 계기가 된다. 

4.
손현숙 시인은 스스로 천명했다. ‘순광은 일상처럼 담담하지만. 역광은 칼로 베는 듯 날카롭다’고, ‘소리’가 아니라 ‘보이는’ 길을 따르겠다고, 이것은 모순어법으로 보인다. 어법은 방식이므로, 과정이므로, 시험이므로 통과하면 된다. 그러나 통과하는 그 모든 순간이 시적 화자를 사광으로 빚어낼지도 모른다. 이번에 시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서, 필자는 경로 몇 개를 그려보았다. 다시 처음 인용시 「맞서다」로 돌아가 순광=일상/역광=시라면 순광=근경/역광=원경이 되고 시적 화자가 ‘경계’에서 ‘임계’로 향하고 있다면. 선택은 초월/폭발 일지도 모른다고. 동화되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 


백인덕∙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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