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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권두칼럼/시민의 호모 사케르화와 문학이 갈 길/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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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호모 사케르화와 문학이 갈 길
이성혁
한국은 이제 집회의 자유마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도심에서 집회를 하려면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인 경우, 경찰은 집회를 허가하지 않는다. 관제 행사나 극우 집회만이 허가된다. 허가되지 않는 곳에서 촛불을 들면 무조건 현행범으로 연행해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린다. 예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적어도 시위에 단순 가담한 사람들의 경우, 몇 대 때리기는 했어도 대부분 훈방 조치했고 벌금을 물리는 일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집회에 참가하려면 큰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벌금을 통해 정부는 아예 가난한 사람들의 시위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지금 정권은 독재 정권이라는 말이 예전에는 좀 과장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집회의 자유를 말살시키는 정권은 독재정권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철거민들의 농성을 무리하게 과잉진압하면서 사람을 죽게 해놓고는,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여 그들의 죽음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하기까지 하는 것이 현재의 지배 권력자들이다. 지금까지 그들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거나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사 희생자들은 불타 죽어도 싼 범죄자로 취급된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자본주의적 프로젝트는 자신 속에 배제된 인민을 재생산”(<호모 사케르>, 338면)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용산참사다. 재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의 저항에 ‘테러’라고 명명함으로써, 지배 권력은 가난한 자국민의 일부를 국가 구성체에서 배제시켜버리고 폭력을 마음대로 가한다.
이 배제된 이들을 아감벤의 개념을 사용하여 ‘호모 사케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의 주권 권력은 일군의 사람들을 국민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작동된다. 그 배제된 사람들은 살해해도 좋은 인간들, 즉 호모 사케르로 취급된다. 용산 참사는, 저항하는 이들에 대해 지배 권력이 테러리스트라고 지명하고 이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한국에는 여럿의 호모 사케르가 존재해 왔다. ‘빨갱이’가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다. 한국 국가로부터 ‘빨갱이’라는 지목을 받으면 그는 호모 사케르가 되어 국가와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더 나아가 예외상태(쿠데타나 전쟁, 계엄령, 긴급조치 등의 시기)에선, 그들은 마음대로 살해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테러리스트’라는 호모 사케르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국가나 자본에 저항하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 ‘빨갱이’거나 ‘테러리스트’로 지목되어 호모 사케르의 처지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이 호모 사케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용산참사에서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도 생전에 자신이 테러리스트라는 명칭을 얻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평범하고 가정적인 이들이었다. 테러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이를 빌미로 국가 권력은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해버리고, 사람들의 삶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일상을 예외상태로 만든다. 그리하여 잠재적 테러리스트들로 취급되는 일반 시민들이 저항의 행동에 나설 때, 그들은 테러리스트로 현실화되고 그들의 인권은 박탈되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촛불집회를 탄압하면서 보여 준 경찰의 폭력은 시민의 ‘호모 사케르’화를 잘 보여준다. 경찰이 시위자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구타한 사건은 국가기구가 이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벗어던지고 이들을 국민으로부터 배제시켜 폭력을 마음대로 가해도 좋은 호모 사케르로 취급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촛불이 청계 광장에서 켜진지 1년, 지배 권력은 촛불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조건 호모 사케르화하여 국가 폭력에 노출시키는 것은 그 반응을 잘 보여준다. 그만큼 정권이 촛불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촛불만을 들고 저항하는 시민들은 몽둥이든 구금이든 벌금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 폭력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문학은 어떠해야 할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리토피아가 이번 호에 「21세기 현실 참여와 문학」이라는 제목의 좌담을 특집으로 내세운 것은 그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본지 편집위원인 고명철 평론가가 사회를, 이재웅 소설가와 신용목 시인, 이윤주 기자가 좌담에 참여해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시원스레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현재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고, 또 문학의 참여 문제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에 대해 독자의 생각을 촉발시킬 수 있는 흥미 있는 좌담이라고 생각된다. 일독을 권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정치적인 것과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는지 잘 알게 된 요 근래였다. 문단에서는 문학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가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시민들은 경찰의 무장력 앞에서 촛불만을 들고 저항하고 있는데, 문학이 이를 외면한다면 결국 문학은 시민들에게 외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사유는 문학의 미래와 관련된 것이기에, 문학 자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 어떤 결론이 내려지기를 성급하게 기대하는 것보다는, 그 사유를 끈질기게 진행시켜 그 사유가 문학 생산의 저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작품에서 저항의 지표를 성급하게 찾는다기보다는 작품 창작에 저항 정신이 관류하도록 고민하고 실험하는 과정이 생성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더 효과적인 일일지 모른다. 이는 좋은 작품의 생산이 정치적인 것을 내면화하고 정치적 열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다소 고전적인 문제로 회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를 두고 낡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회귀가 옛 문제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새롭게 돌파할 수 있는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회귀를 두려워하거나 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009년 5월
이성혁(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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