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4호(2009/여름)/특집/좌담/21세기의 현실 참여와 문학
페이지 정보

본문
21세기의 현실 참여와 문학
일시_2009년 4월 14일 오후 7시
장소_인사동 산골물
참석자_고명철(사회, 문학평론가), 이재웅(소설가), 신용목(시인), 이윤주(기자)
정리_정지윤
문학의 위축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명철_우선, 여기서부터 얘길 꺼내보죠. 항간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대중음악상을 받고 대중의 폭발적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아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거든요. 영화계만 하더라도 독립영화인 「워낭소리」와 「낮술」 등의 작품들이 장편 극영화의 흥행 못지않게 흥행을 얻으면서 예술성과 상업성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중가요계와 영화계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견해가, 우리들은 이렇게 하고 있는데 너희들 문학계에서는 이런 참신하고 대중성을 갖춘 ‘물건’이 빈곤한 게 아니냐, 좀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문학 나름의 새로운 미학성을 확보하면서 문학적 지성을 겸비한 작품들이 없는 게 아니냐, 하는 얘기들이 솔직히 있어요. 오늘 이 자리에는 젊은 문학의 전위에서 창작을 하는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문학 안팎의 동향들을 취재하는 문학담당 기자와 함께 작금의 문학 전반에 대해 허심탄회한 얘기들을 주고받았으면 합니다. 먼저, 현재 문학계에서 왜, 이러한 작품들이 빈곤한 것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최근 젊은 문학들의 존재 양상을 고려하면서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신용목_안 나온다고 단정 짓기엔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다만 장르적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영상 미학인데요. 영상이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극과 음악의 결합이라면 문학은 그것보다는 활자나 텍스트 위주이기 때문에 생산에서 소비까지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죠. 그래서 장기하의 몇 만 부와 문학의 몇 만 부는 비교 대상이 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문학도 몇 만 부씩 팔리는 책이 간간이 있잖아요. 조금씩 다른 차원에서 해석해야 될 부분이라고 할까요. 말씀하신 신선함은 현실의 핍진성을 드러내는 부분일 텐데요. 어쩌면 문학은 오히려 너무 핍진하게 보여줘서 독자들이 식상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기대치 또는 기대 지점이 다른 것 같아요. 가령, 장기하가 신선하다는 것은 그동안 음악이 보여주었던 것과 다른 것일 뿐, 그 자체가 문학이나 여타 장르가 가진 현실의 핍진성을 앞선다고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우리 문학은 그것을 아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고, 이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독자들이 원하는 거겠지요. 장기하도 그렇지만 우리가 「워낭소리」에 열광한 이유는 산업자본의 영향 아래 대중적 코드에만 집착하는 영상에서 이탈해서 시대의 아버지상을 그려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문학은 자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시대의 진정을 찾으려는 노력이 어느 장르보다 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쪽이 원하는 신선함과 문학 쪽이 원하는 신선함은 차이가 있겠죠.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웅_우선은 이 질문이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일부이긴 하지만 위기의식 같은 것이 질문 밑에 있는 것 같구요. 대결의식도 좀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어느 정도 그런 의식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영화가 이렇다, 음악이 이렇다, 대중음악이 이렇다, 또 다른 장르가 이렇다,
고명철 문학평론가
그런데 문학은 왜 이런가, 여기에는 콤플렉스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근본적으로 고려해봐야 할 것은 우리가 갱신하는 법, 문학이 이러니까 이렇게 갱신하자 이런 결의라던가, 또는 이렇게 해서 갱신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방법론적인 거라던가 시스템의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콤플렉스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질문도 간단한 예가 될 수 있고요. 그 연장선상에서 그럼 우리가 가졌던 권위가 뭐였나? 그런 게 있기는 했나? 우리 권위의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 정밀한 숙고를 좀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물질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문학이 출발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윤주_예로 드신 장기하와 얼굴들 같은 대중음악이나, 「워낭소리」 같은 영화는 대중과 굉장히 밀접한 예술장르라고 생각이 드네요. 독립영화, 인디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대중하고 접목된 것들이 많잖아요. 클래식이라든지 아니면 회화, 무용보다도 훨씬 더 대중성을 갖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사회문제 의식이 반영된다고 보거든요. 문학이 요즘 사회와 연관성이 떨어진다라고 얘기를 하지만 전체적인 역사라든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문학만큼 사회하고 밀접한 소통이 되었던 예술장르는 사실은 없었다고 보고, 이만큼을 한 것도 어느 정도 문학의 성과라고 보거든요. 요즘이 80년대 90년대에 비해서 좀 덜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전체적으로 문학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고 두 번째로 용산 철거사태가 나왔을 때 언론에서 ‘참여문학, 다시 불을 지핀다’라고 썼는데 사실 기사를 만들기 위해서 기자들이 거기에 관련된 문학작품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던 거겠죠. 그런데 찾으면서도 저희가 많이 끼워 맞춘다라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왜냐하면 용산참사가 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뭔가 시가 나오고 소설이 나오고 이렇지는 않다고 생각을 해요. 용산참사도 그렇고 촛불시위도
이재웅 소설가
마찬가지이지요. 한 사건이 있고, 하나의 시발점이 있고, 그게 생각으로 만들어져서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 될 때까지는 체득화 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예전에 다문화주의 문학과 관련해서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 보니까 ‘베트남을 위한 작가들의 모임’에 소속된 작가들이 길게는 10년이 지난 뒤에 작품집을 내더라고요. 더디게 작품이 발현되는 것도 아까 말씀하신 문학의 장르적인 특징들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을 해요.
고명철_질문과 답변 속에 여러 가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거죠. 말하자면 장르상의 차이라던가 소통방식에 분명히 차이가 있죠. 사건과 대중들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장르의 속성이 문학에 비해 영상과 노래가 상대적으로 미적 반응의 속도가 빠르다면, 문학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특정 사건이나 경험의 양상들을 체화하는 숙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요. 그렇지만, 현실 핍진성이 문학에서 과잉되니까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데에는 궁색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향해 미적 갱신이 요구되는데요. 미적 갱신이란 부분들을 많은 비평가들도 얘기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미적 갱신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이제 창작자들이 제대로운 ‘물건’으로서 보여줘야 되잖아요. 작품으로 보여줘야 되는데 시나 소설에서 봤을 때 일반 대중들은 불만이 많단 말이죠. 말하자면 창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런대로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갱신을 지금도 하고 있고 그런 작품들이 나오고 있지 않냐 하는데, 실제 우리나라 독자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나름대로 문학 교육 수준도 높고 그 독자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보면,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수준 높은 혹은 품격 있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 있느냐, 손에 꼽을 수 있는 작품들이 별로 없다는 반응들이 대다수란 말이죠. 독자의 이러한
이윤주 기자
반응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변론도 할 수 있는데, 냉정히 말해 그런 독자들의 반응들이 현실적으로 있어요. 혹시 창작하는 입장에서 독자들이 뭘 놓치고 있는지, 아니면 창작계와 독서계가 잘 맞물리지 못하는 불협화음이 있는지요.
신용목_대중들이 영화에 대해선 굉장히 관대합니다. (웃음)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도 관대한데, 어떤 활자를 직접 옆에 놓고 이야기하는 문학에 대해서는 물론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문학이 세계를 갱신시킬 수 있는 어떤 요소들을 제시해 주길 원하는 거죠. 그것이 역사적으로 문학이 지금까지 해왔던 역할이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앞서 ‘체화’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오래 걸린다고 했는데, 저는 단순한 체화가 글쓰기의 전제이지는 않은 것 같다고 봅니다. 만약 작품 생산이 지연된다면 그 이유는 근본에 다가가려는 노력 때문이겠죠. 사실 영화에서 「공동 경비구역 JSA」가 나왔을 때 다들 대단하다, 시대를 저렇게 재밌게 다루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루어왔던 거잖아요. 다만 문학의 공명은 대부분 문예지를 통하고 영화의 공명은 대중매체를 통하잖아요. 그래서 영화는 시대적인 성찰이 조금만 배어 있어도 마치 엄청난 일을 성사시킨 것처럼 대중적 확산이 폭발적으로 진행되죠. 반면 문학은 그 동안에 여러 역사적인 텍스트를 통해 축적되어온 기대치가 이미 상존하고 있고, 그 상존한 기대치 속에서 문학을 바라보기 때문에 더 냉정해지는 것 같아요. 앞서 말했듯 장르적 차이겠죠. 앞서 위기의식을 이야기하고, 대결의식도 이야기했지만 위기의식과 대결의식이 사실은 조급증에서 발생한 것일 텐데, 그 조급증이 오히려 우리 문학을 위태롭게 하는 건 아닐까요? 문학 텍스트를 읽는 것은 텍스트와 대화를 하는 과정입니다. 신선한 충격을 요구하고 열망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좀 더 현재 우리 문학 텍스트가 가진 미학적 자질들에 대해 진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신용목 시인
‘의미 있는 전위’가 있는 것처럼 ‘의미 있는 반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우리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도 폭력이지만, 80년대에 그 얘길 다했기 때문에 지금 해선 안 된다는 것도 폭력이겠지요. 문학이 낯설거나 진부하다면, 우리 삶의 모습이 낯설거나 진부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굳이 그것에 대해 조급해하거나 위기의식을 가지거나 하기에는 이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명철_아까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감이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크다고 했는데요. 한국의 독자들 문학교육 수준이 문학교육이 잘 됐던 못 됐건 간에, 어쨌든 한국의 경제성장의 속도에 맞춰서 볼 때에도 대중들이 갖고 있는 문학 독해력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다보니 문학에 거는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어요. 70, 80년대 우리 선배들의 문학작품을 보면, 문학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근원적 탐구와 함께, 이 기자가 문학의 현실참여를 말했듯이, 현실에 대한 작가의 대응 태도에 관심을 많이 갖거든요. 물론, 여기에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작가의 현실에 대한 대응이 미학으로 제대로 정립되어야 하는 문제들이 자리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독자들이 문학을 향한 대사회적 기대치가 높고, 심하게 말한다면 강박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사실, 소설에서는 특히 그런 부분이 더 급진적으로 많이 진행됐었잖아요. 소설가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를 놓고 요즘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얼핏 보기에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인 경우 문학의 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문학에 거는 기대가 더욱 큰 데, 예전에 70, 80년대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최근 소설들에게도 그러한 요구를 하거든요.
이재웅_제가 듣기에는 고명철 사회자께서 어떤 면에서는 독자 반응론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시는 거 같습니다. 타당한 질문이긴 한데요. 그런 질문을 할 때 역시 염두에 두셨겠지만, 독자라는 주체가 대단히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라는 걸 유의하셔야 할 듯합니다. 독자들은 세대, 지역, 개인적 취향, 종교관, 등등이 섞여있어 다르니까요. 그래서 제가 느끼기에는 80년대에는 문학이 무엇인가를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성장하고 있는 독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독자의 프리즘은 다양하니까요. 이렇게 전제해 놓고 보면, 독자들의 요구도 다양하다고 생각할 수 있구요. 그래서 꼭 문학이 어떻게 해야 생명력이 있다 하는 것은, 심적으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모호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까 영화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연장해서 말한다면, 역시 뻔한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만 자칫 현재 영화의 생명력을 문학의 생명력과 혼재시켜서 생각해버리는 잘못이 있을 수도 있을 듯해요. 출판시장에서 그런 요구가 있는 듯도 하구요. 예술이란 매체가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자본과 정치라는 개념과 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영화의 경우는 좀 더 밀접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영화가 오늘날 이만큼 성장한 이면에는 사실 영화인들의 열정이나 대중들의 지지 못지않게 자본이 집약되고 정치적 환경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어떤 정치적 역할이 있었다는 본질을 놓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것이 곧 문학의 생명력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영화라는 특성상 자본이나 정치적인 역할들이 더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면에 문학은 오히려 그런 지점이 적을 수 있다는 차이에서도 명확해 보이구요. 부연하면 출판마케터들 입장에서는 분명 그 입장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문학은 자본이라든가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력은 오히려 외형적으로만 보면 분명히 위축되고 위기이고 대중하고 소통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오히려 거기에서부터 생명력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70년대 80년대 대사회적 역할을 말씀하셨는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현재에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문학 외적인 환경, 그러니까 판매나 이런 측면에서도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와 2000년대가 큰 차이가 있느냐 물으면 전 그렇지 않다고 봐요. 단지 우리가 그렇게 단절적인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일종의 공동체의 정신적 투영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와 2000년대하고 출판시장의 유통, 독자들의 기대가 그렇게 다른가라는 측면에 조금 의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문학이 어떻게 생명력을 획득할 것인가 이런 지점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문학의 생명력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하는 지점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 단순히 외형적으로 위축되니까, 대사회적인 어떤 역할들이 후퇴했으니까, 이런 것으로 인해 생명력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는 역시 의문입니다.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
고명철_그 부분에 대해서는 문학시장이라든가 그밖에 출판부문도 얘기가 나왔지만, 이러한 동향들은 창작하는 사람보다는 문학담당 기자들에게 오히려 피부에 와 닿는 문제로 파악이 될 듯해요. 조금 전에 참여문학의 아젠다 만드는 역할을 얘기하셨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생각이 드는 게 있습니다. 지금 왜 그런 참여에 대한 아젠다를 저널 쪽에서 먼저 잡아내고 부각시키려고 했는지 그게 궁금해요. 왜냐하면 창작하는 두 분 얘길 들어보니, 문학의 그런 역할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역할들이 과거에 비해서 외형적으로 보면 축소된 거 같습니다. 하지만 실직적으로 내밀하게는 또 요즘 시대에 맞게끔 진전된 것도 있고, 문학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역할들이 더 다변화 됐고 다각적인 면이 있는데, 저널감각에서 사회참여를 아젠다로 부각을 하게 되면 다소 진부해지는 게 아니냐하는 문학계 내부의 시각도 있거든요. 그래서인데요. 이런 아젠다를 부각시킬 때에는 문학계에 모종의 어떤 것에 대한 저널감각이 있을 거 같아요.
이윤주_사회문제를 부각시킨 작품에 대해 언론이 주목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2000년대 초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문학이 사회 참여적이다’라는 특징을 감잡을 수 없었던 거 같아요. 언론에서 항상 이슈를 만들 때에는 이전에 없었던 상황들, 보편적이지 않은, 특이한 상황들에 눈이 가게 마련이지요. 2000년대 경우에는 어느 평론가가 ‘무중력상태’라고 얘길 했잖아요.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문학, 사유의 끝까지 밀어붙인 문학, 이런 작품들이 문학시장에서 작가들이 얼마만큼의 많은 문학 양상을 해내느냐를 떠나서, 일단은 문학상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베스트셀러로 두각을 나타내는 신예 문학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주목을 받는 형태였거든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촛불시위라든지 아니면 용산참사라든지 그런 사건들이 터졌을 때 예전 같으면 대부분의 문인들이 관심을 가졌을만한 상황이지만, 2000년대 문인들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하고 변화를 시도하는지에 대해 기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거 같아요. 그리고 참여문제라든지 사회의식을 드러내는 행동을 지금 2000년대 문단은 어떤 식으로 풀어가고 있나, 어떤 작가들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나, 소개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문학계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신용목_저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가령 80년대는 공동체의 정신적 투영이 가능했던 시대였고, 지금은 그것이 약해졌죠. 여기에서도 조금 다른 시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령 80년대적 상황은 정치적 생명성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시대였죠. 그것은 삶의 바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싸움이기 때문에 만약 사회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뉘어져 있다면, 하부구조의 요구를 어떻게든 상부구조의 체계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했겠죠. 이를테면 어떤 응어리를 언어화시키는 것. 욕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등등 말입니다. 그것이 미학적 승화일 텐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문학이었죠.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진실을 형상적으로 파악하는 일일 테고, 진실을 형상적으로 파악해야만 전망을 꾸려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다른 것 같아요. 촛불집회만 봐도 일단 ‘촛불’이라는 미학성을 바탕에 깔고 있잖아요. 이미 집회를 미학적 이상으로 승화시켜놓고 출발한 형태죠. 그리고 현실을 반영하고 진실을 형상적으로 파악해 주는 수많은 네티즌들과 시민기자들이 있죠. 또 전망에 대해서도 시민들 스스로가 토론을 하고 대안을 작성하잖아요. 분명 그것은 과거에는 문학에 요구했던 것들이죠. 이제 그것을 문학에 요구하는 사람은 사실 문학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밖에 없죠. (전체 웃음) 그러면 이제 문학이 왜 그런 역할을 안 하고 있는가보다는, 이
“참여문학이라든지 사회의식을 드러내는 행동을 지금 2천년대 문단에서는 어떤 식으로 풀이를 하고 있나, 어떤 작가들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나 소개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문학계 새로운 소식을 전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시대에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될까라는 것으로 고민의 방향이 전환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그동안 문학이 스스로 새로운 역할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고, 또 그 고민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어떤 견고함에 대한 저항이겠죠. 그것은 단순히 정권과 시민의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나아가 자본주의와 인간성의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정권 자체, 시민 자체, 자본 자체, 인간성 자체에 대한 물음일 테고, 또 자체 자체 자체라고 믿는 자체 ‘자체’에 균열을 가하는 행위일 겁니다. 근본을 되묻는 거죠. 물론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 몇몇 소설가들이 내면으로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고 비판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 역시 세계의 근본을 되묻는 또는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가하기 위한 모색의 한 과정일 겁니다. 그래서 어떤 대사회적인 부분이 약해지거나 없어졌거나 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매체와 시민과 독자 또는 관객, 어떤 커뮤니케이션 방식들이 계속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문학적 상상력을 모색하는 과정으로서 2000년대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이재웅_참여문학의 입장이든, 문학의 자율성에 무게중심을 두는 입장이든, 문학적 생명력에 대해서 고민하는 작가들은 많을 거에요. 하지만 각자의 개인적 고민과 창작이 문학 환경이라는, 예를 들면 대중독자군이나 사회와 같은 무형의 공적 영역에 표출되었을 때, 그 무형의 공적 영역에서 담보되는 문학적 생명력이 반드시 창작자 개인적 고민이나 창작형태, 바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닐 듯해요.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생명력이지요. 이 두 가지를 전제로 하면, 미적 갱신의 요구가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도 당연하고, 또 미적 갱신이 문학환경 속에서 어떻게 소통되는가도 중요한데, 여기에서 정신이라는 문제가 조금 등한시 되고 있지 않은가 싶어요. 미적 갱신이라는 말은 더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면, 정신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한 작가의 정신의 갱신이나, 그 시대에 대한 어떤 갱신이 있지 않을까요. 형식과 내용을 뗄 수 없다는 아주 상식적인 명제를 일단 접어두고 생각해보면, 사실은 미적 갱신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공허하고 형식적이거든요. 역시 형식의 물질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못지않게 비평가들은 작품 속에서 형식적인 전이가 아니라 정신의 꿈틀거림, 정신적 전이를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듯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2000년대 우리 문학의 생명력이라는 것이 문학의 어떤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가는 각기 다를 수도 있지만, 어떤 공통분모도 있어 다 느끼고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곳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정신적 전이라는 것이 전제되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지점도 있지 않은가 싶어요. 그런 면에서, 소설적인 것과 소설, 시적인 것과 시의 혼재된 양상도 나타나는 듯하구요. 이런 양상 속에서는 시적인 것이 어느 순간 시 자체로 전이되거나, 시의 전이성을 갖거나, 혹은 그렇게 규정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나 싶어요. 이것은 우리가 어디까지를 소설로, 또 어디까지를 시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하고, 그런 면에서 추상적인 감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말이지만, 어쨌거나 소설적, 혹은 시적인 것들과 소설과 시가 혼재된 양상에서 전자가 후자로 명명되어버리는 현상도 있는 듯해요. 말하자면, 한 편의 시 속에서 시적인 것과 시가 공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이것이 시인가 아닌가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비평의 논리로, 혐의는 사라져 버리고 시적인 것이 하나의 시로 옮겨져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생명력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 지를 짐작할 수 있고, 또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분명히 어떤 혐의도 분명히 있는 것이구요. 그러니 시적인 것을 시라고 소설적인 것을 소설이라고 쉽게 명명해 버리는 것들은 조금 조심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신용목_말의 취지나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렇게 시와 시적인 것을 분리시키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재웅 작가의 요지는 형식적 전이보다는 정신적 전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김수영이 왜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고 했을까요? 방을 바꾼다는 것은 형식에 대한 전환이죠. 접시에 국을 담을 수 없듯이 형식이 바뀐다는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담겠다는 의지겠죠. 아니면 내용의 전환이 서둘러 형식의 전환을 불러왔든지, 형식이 의도하는 어떤 다른 게 있을 거에요. 그래서 시적인 것으로 시를 대체하고 싶은 욕망은 시라는 그릇 자체를 바꾸겠다는, 전혀 다른 시를 담고 싶다는 일종의 선언이겠죠. 오히려 미래파와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반성은 다른 지점에서 시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많은 모색이 진행되어 왔는데요. 그 모색의 단계를 마치 완성의 단계인 것처럼, 그것이 형식적 전이이든 정신적 전이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과정 중인 것을 마치 완성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것을 하나의 가치로 승격시켜 유포하는 행위에 문제가 있을 겁니다. 제 기억으로 미래파 논쟁도 처음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죠. 젊은 시인들이 가진 가능성이었는데, 어느 순간 누구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그것이 미학적 기준인 것처럼 포장되어 버렸죠. 가능성과 가치는 다르죠. 그때부터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비평의 과잉이 문제다
이재웅_어느 정도 과잉된 평가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한 창작가의 세계를 가능성으로 판단하느냐, 아니면 일부분 완료된 형태로 판단하느냐, 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전에도 그랬겠지만 비평의 언어가 과잉되었다는 측면은 있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과잉평가들이 오히려 타 장르에서 주는 위협보다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위험성으로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해요. 제 입장에서 문학의 미래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런 과잉 평가가 미치는 훼손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고 봐요.
고명철_하여튼 속내를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지금 현재 2000년대의 비평가들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사실 뜨끔한 면이 있군요. 제가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내는 것보다 한 번 더 들어보겠습니다. 문학이 갖고 있는 이른바 당대 현실과의 관계들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 못지않게 인접 분야에서 더 급진적으로 일반 독자들의 요구를 충족 시켜줄 수도 있거든요. 문학이 다른 인접분야와는 다른 내용의 형식을 갖고서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성찰하는 부분을 더 고민해야 했지 않느냐 하는 점에 대해, 우리 스스로 너무 자명한 것으로 인식하면서도그 동안 진지하게 생각을 안 해 왔어요. 하긴 그런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다보니까 작품의 성과들에 대해서 평가의 과잉들이 문제가 되어 자명한 문제에 대해 쉽게 간과하지 않았느냐, 아마 이런 문제 제기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기자 입장에서 보면 최근 비평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잖아요. 그러면서 새로운 신진 평론가들이 나와서 나름대로 자기 평가기준을 대고 지금 이와 같은 얘기들에 대해 비평적 발언도 하는데, 과잉평가로 인해 2000년대의 젊은 문학이 갖고 있는 미학의 갱신, 정신적인면과 형식적인 것이 한데 어우러진 전위에 대해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지, 아니면 뻥튀기 식으로 읽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떠세요.
이윤주_다른 인접분야하고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들었던 생각이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문제를 건드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문학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인식이 있었던 거 같기는 해요. 저의 언론사에 한정을 지어서 얘기를 하자면 선배들이 그런 얘기를 하시거든요. “왜 ‘김훈 박래부의 문학기행’이 그렇게 폭발적인
“비평의 언어가 과잉되었다는 측면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과잉평가들이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타 장르에서 주는 위협보다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위험성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해요. 제 입장에서 문학의 미래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런 과잉 평가가 미치는 훼손이 작다고는 할 수 없다고 봐요.”
반응을 얻었느냐?” 그때는 다 일간지도 검열을 당했잖아요. 정치나 사회면에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문학이라는 우회적인 장르를 통해서 드러냈기 때문에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거죠. 문학도 그때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작가의 소임이나 역할을 어느 정도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인정을 해줬던 거 같은데, 2000년대 같은 경우에는 신용목 시인이 얘기하셨던 것처럼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어떤 플러스알파적인 요소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된다는 기대치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부분 문단에서 소위 말하는 주목을 받는다는 작가들의 경우 사회문제를 쓰기는 하는데 그것을 소재로 끌어 쓸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문제를 계기로 자기 내부인식을 계속해서 밀고 들어간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기사를 준비하면서 읽게 되는 텍스트들을 예로 들어 보면 김숨 작가의 「철」이든지, 김애란 작가라든지, 박민규 작가라든지, 모두 사회문제를 직시하기는 하지만 그자체가 하나의 중심 화두가 아니라 그 작가의 문학의 미적 완성도를 위해서 쓰여지는 소재들 같다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그 자체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들이 아니라, 그런 시도들이 시장이나 평단에서 ‘굉장히 새롭다’거나, ‘현실 인식을 계속 끌고 가지만 새로운 미학적인 스타일도 갖춘 작가다’라고 해서 계속해서 주목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그것이 사회문제와 상관없이 자기 인식만으로도 작가들이 부각되는 현상까지 가는 거 같고. 그래서 ‘그런 작가들이 과잉 평가를 받은 것이냐?’ 라고 말씀을 하신다면 저는 문학으로 좁혀서 말하기보다는 전체 예술장르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자들도 전문가들께 여쭤보거든요. 예를 들어서 “회화나 음악분야에서 어떤 것들이 위대한 작품으로 남습니까?” 미술사나 예술사 하시는 분들께 여쭤봅니다. 그러면 “이전의 스타일을 깬 그런 형식들이 대부분 남는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인상파 화가가 그때 당대에서는 비주류였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이지요. 그리고 19세기 20세기 작곡된 음악들 중 살아남은 경우에도 이전에 멜로디 중심 음악에서 무언가 어떤 특징들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예술장르의 코드들을 파괴를 하는 형식으로 장르의 새로운 영역을 넓혀 나갔던 것들이거든요.
저는 문학도 예술 장르의 하나로 본다면 서사나 언어를 파괴하는 시도에 대한 평가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런 것들이 과잉이 됐다, 과잉이 되지 않았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런 입장에서 보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상당히 주목을 하고 독자들이 주목을 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완연한 형식의 소설, 완연한 형식의 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신선하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그런 발상들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예전에 있었던 모든 문학 코드들을 다 이해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발상들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의미들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죠.
고명철_자연스럽게 여러 얘기들이 나오는 도중에 ‘새로움’을 얘기하게 되는데요. 결국 인접 예술 장르의 예술사에서 자리매김 되는 예술가, 혹은 예술 작품들이 미학적 갱신에서 최선두 주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건데요. 그것을 갖고 있는 것은 기존 예술전통이라던가 그 축적 과정 속에서 한 단계를 도약하는 예술적 비약의 힘들이 형식과 내용이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죠. 작고한 김현 비평가는 내용+형식이 아니라 ‘내용형식’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조합했는데, 그게 말하자면 새로운 미학적 도약을 이룬 작품들이 갖춘 새로움의 미덕을 파악할 때 살펴봐야 할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새로움의 가치’가 중요한데요. 무작정 ‘새로움’을 추구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새롭되 어떤 새로움인가, 그 새로움이 어떠한 미적 가치를 보증하는가, 삶의 근원적 성찰에 이르기 위한 어떤 전위적 미의 가치를 지니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우리시대의 젊은 시인, 소설가들이 새로움의 미학에 대해서 추구 안 할 수가 없죠. 자기 나름의 미적 가치를 갱신시키는 건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해석하는 측면을 미적 정치성의 맥락으로 실행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거든요. 가령, 21세기 신자유주의 질서라던가, 미국발 금융위기나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문명 등 우리가 대면하는 정치사회적 징후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 징후 속에서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미적 새로움의 가치를 추구할 텐데요. 그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문학의 생명력’도 좋고 아니면 문학의 또 다른 대응력도 있겠죠. 그래서인데요. 이러한 징후와 새로움의 미학적 가치를 갱신시키는 문제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비평가 입장에서 상당히 궁금한 측면이에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비평을 이야기해보죠. 비평의 과잉이 갖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제 동료 비평가 내지 후배 비평가들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이런 것들이에요. 새롭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새로운 작품들에 대해서 의미 부여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비평가들은 그 의미 부여를 통해 새로움을 주목하고, 그것의 가치를 또한 주목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주목을 해줘야 되느냐 하는 거죠. 그 작가 시인들이 갖고 있는 내적인 창작 고민, 세계와의 해석, 그 과정의 싸움에서 겪는 고민의 끝자락을 붙잡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러한 비평적 고민들이 육화된 언어들을 마주치기보다 온갖 외래종의 담론들이 많아요. 가령, 최근 비평을 접하다보면, 슬라보예 지젝은 이미 한물 건너갔고, 아감벤이나 랑시에르 같은 이론가들이 곧잘 인용되고 있습니다. 뭐 이런 걸 갖고 최근작들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와 함께 새로운 미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단 말이죠. 과연, 창작들은 이러한 비평가들의 의미 부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잉된 해석과 평가, 창작의 실상과 거리가 먼 온갖 외래종 이론들의 난삽한 향연들이 한국문학의 창작과 비평의 토양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지요. 저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곤 합니다. 오해해서 안 될 것은, 그렇다고 제가 이론 자체를 혐오한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창작의 실재와 이반된 이론, 이론을 위해 억지로 끌어당기는 창작, 외래종 이론의 실험 무대로 전락한 한국문학비평, 왠지 그에 동참하지 않으면 낡고 구태의연한 비평이 아닐까 하는 서구콤플렉스로부터 의연하지 못하는 작금의 비평 풍토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심하게 말한다면, 비평의 식민지화 현상에 대해 둔감하다고 할까요.
신용목_ 소수의 일이긴 하겠지만, 비평과잉이라는 표현보다는 국부적인 오류를 범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제가 요즘 몇몇 평론가들한테 느끼는 점이 있다면, 물론 그것이 비평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비평을 읽고 나면 비평의 대상이 된 텍스트의 전언은 사라지고 비평의 전언만 남아요. 원 텍스트는 마치 그냥 하나의 모티프일 뿐인 것 같고 비평문 자체가 하나의 문학으로서 기능을 전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히려 원 텍스트는 계속 왜곡되죠. 앞서 제가 했던 말을 부연하자면, 80년대는 담론의 시대였고, 90년대가 미세담론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해체라기보다는 담론을 내면화시킨 시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가 그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내면이라는 것이 이 견고한 세계와 홀홀단신으로 맞선 내면이라는 거죠. 이 세계와 부딪쳐서 파괴되거나 부서지거나 뒤죽박죽이 된 내면상태를 무대화시켜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의미가 있다는 것이 곧바로 이 시대의 미학적 가치로 치환되는 건 아니에요. 황병승 시 같은 경우에는 젠더의 문제나 국적의 문제, 곧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전대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치환해서, 그동안 사회적인 문제였지만 미학적인 문제로 환원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인호 시의 경우에도 어떤 성장기의 경험과 성장 후에 맞닥뜨린 세계의 경험이 충돌하면서 뒤죽박죽이 된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의 중요한 지점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세계를 보여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이 사회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거나 묘사하는 방법도 있지만, 내면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사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물론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가령 몇몇의 경우를
“세계를 보여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이 사회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거나 묘사하는 방법도 있지만, 내면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사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물론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가령 몇몇의 경우를 보면, 내가 이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저것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을 전략적으로 선택한다는 거죠.”
보면, 내가 이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저것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을 전략적으로 선택한다는 거죠. 비문을 예로 들면 분명합니다. 내 속에서 폭발하는 의미들을 정문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때 빛나는 비문이 탄생하는 것이죠. 그런데 억지로 내가 이 형식을 만들어놓고 나를 거기에 담으려고 한다면 흘러내려 버리고 쉽게 들켜버립니다. 들켜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데, 하긴 그것이 또 비평의 주제가 되기도 하죠.(웃음)
그래서 세계와 어떤 문학 작품과의 얼개를 지속적으로 잘못 생산해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데요.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진은영이란 시인의 좋은 시가 많아요. 그런데 누가 봐도 진은영의 시 중에 태작에 가까운 시를 불러다가 그것이 그 시인이 도달한 미학적 상한선인 것처럼 포장하는 비평을 봤는데요. 그것은 비평을 위해 텍스트를 희생시킨 거죠. 그런 작업들이 지속되었을 경우, 이를테면 수작의 가치를 방기하고 태작을 미화시키는 작업이 반복되면, 작업자뿐 아니라 우리 미학 전체에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겁니다. 세계와 작품과의 얼개가 삐뚫어지는 거죠
이재웅_이런 생각도 들어요. 근대사회라는 것을 도식화해보면, 두 가지 문화양태가 질적으로 결합된 형태인데, 부르주아의 추락한 형태로서의 소시민 사회와 그 문화양식이고, 또 하나는 단순한 군중이 민중으로 명명되면서 세력화되는 양태에서의 사회와 그 문화양식이죠. 근대는 이 두 가지의 거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봐요. 물론, 지역별로 세태적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는 이 문화적 에너지가 맞물려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단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보한다고 할 때, 한쪽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맞물린 상태에서 그 양태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질적인 변화라는 것을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데요. 그렇게 봤을 때, 우리 작가들의 고뇌가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통합성의 결여라고 할까요? 비평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평도 공동체의 지성이라는 것, 공동체 지성의 한 작업이라고 규정했을 때, 질적인 근대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총체적 고민의 양태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신용목 시인의 말대로 비평과잉을 하는 평론가가 소수일수도 있지만, 소수냐 다수냐를 떠나서 어떤 비평가가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고 또 마치 비평계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느냐가 중요한 듯해요.
신용목_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출판메카니즘이지 문학메카니즘은 아니지 않을까요?
이재웅_그런 것만은 아닌 듯해요. 분명 거기에 편승해가는 작가도 있고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이미 의식 자체가 거기에 동질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소수이냐, 다수이냐, 이 문제가 아니라 대중독자와의 관계에서 무형적이고 암묵적인 권력이 어느 쪽에 있느냐는 문제이겠지요.
한국문학의 대사회적 상상력의 결핍
고명철-얘기 들을 때마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네요. (웃음) 권력을 잡았어야 되는데 못 잡았습니다. 오늘 참 재미있네요. 왜냐하면 작가들이 만나면 이것저것 눈치를 보느라 이런 얘기가 공식적으로 전혀 안 나오죠. 조금 속도를 낼게요. 하다보니까 재미있는 얘기가 이제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죠. 이 기자가 촛불문화 용산참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건들에 대한 문학적 지성의 목소리에 대해 언론들이 즉각적 관심을 가졌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거든요. 문학이 갖는 반성적 성찰, 삶의 근원을 인식하는 언어에 대해 사회가 귀 기울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듯해요. 이제는 냉정히 말한다면 사회가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듯해요. 문학도 넓은 범위에서 미디어에 속한다고 하는데, 문학을 제외한 다양한 첨단의 미디어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가치론적 해석보다는 누가 더 빨리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느냐, 그리하여 그 정보에 대한 일차적 해석을 누가 더 빨리 갖고 있느냐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보니,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 촉수로서 문학이 갖는 가치론적 해석을 보증하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이 크게 위축된 것이죠. 여기서 창작자와 비평가들이 용산 사태와 촛불문화제에 대해 문학의 몫을 다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즉 문학인들이 그 부분들에서 멀리 있지 않았고, 나름대로 문학적으로 숙고하고 있다, 라고 하는 발언들은 매우 옹색한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국면에서 작가들의 문학적 언어들이 자연스레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부분들에 대해 자기 삶과 밀착한 사회적 상상력이 육화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육화라는 게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평소 이 부분에 대한 창작의 긴장이 결여되다보니, 탁 건드리면 당연히 그에 대한 반응이 나왔어야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그만큼 사회적 상상력이 둔감한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요. 여기서 문학의 언어가 갖는 매력을 짚고 넘어가보죠. 아시다시피 문학의 언어가 현실정치적 언어에 비해 가장 힘이 없으며 나약하고 낮은 언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더 폭발적 힘을 갖는 언어들이에요. 현실정치에 예속되지 않은 비판적 자유의 속성을 띠기에 현실정치를 가차 없이 비판할 수 있는 것이죠. 말이 길어졌는데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21세기 한국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한국문학은 그 특유의 현실대응력을 보여주지 못한 게 아니냐, 그것은 육화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보다는 한국문학의 대사회적 상상력의 긴장이 현저히 위축되었고, 그러다보니 다른 미디어들보다 신뢰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때요 솔직하게 한 번 얘길 해보죠.
이윤주_예를 들어서 이재웅 작가 같은 경우에는 첫째,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 생산되는 문학과, 두 번째, 민중에서 생성되는 힘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잖아요. 신용목 시인도 나름대로 시인들이 사회를 반영하는 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이 두 분이 소설가를 대표해서 혹은 시인을 대표해서라기보다는 개별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방법, 세계를 보는 시선에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거든요. 비평가도 마찬가지이지만 모두 개인적 입장에서 피력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왜 촛불시위에서 사회적 문제들이 발현되지 않았느냐?” 혹은 “용산참사가 내적으로 성숙하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느냐?” 하는 문제들은 전체 집단으로 봤을 때 아쉬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시인 아니면 소설가 개별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한테 가장 절실한 문제가 그게 아니라 다른 문제일 수도 있는 부분인 거든요 아까 황병승 시인 같은 경우의 이야기를 하셨지만, 예를 들면 성적 담론이 그 분에게는 가장 절실한 문제, 절박한 문제일 수도 있고, 이것도 어떻게 보면 ‘성의 정치학’에서 사회적인 문제 이슈로도 분명히 나갈 수도 있는 문제인데 황 시인에게 “용산참사에 대해 왜 쓰지 않느냐?”, “참여문학에 대해 왜 쓰지 않느냐?”라고 하면, 어떻게 보면 그것은 강요이자 폭력일 수도 있거든요. 세대가 달라지면서 파생되는 부분인 거죠.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 크게 민감해하지 않는 세대에서 발현된 작가들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는 게 어떻게 보면 이전에 80년대 문학관을 가지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재웅_제가 말한 것들 중엔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제된 것들을 무시하고 말한 것도 있어요. 이번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여러 층위가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단순히 활동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둬야 될 것이고, 작가의 창작적 영양분이 촛불집회 같은 곳이어야만 하는가. 또 개인적인 작가의 기질,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나 뭐 일상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면 사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있죠. 왜 작가가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는가는 여러 이유에 대해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가능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접어두고 얘기하면, 앞서 미적 갱신을 얘기했지만, 다른 차원에서 말하면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대의 미학의 발견에 눈뜨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촛불집회나 기륭이나 대추리를 다니면서 거기서 생성되는 문학적 발언 또는 문학 작품들이 80년대 이후의 정신적 울림보다 과연 큰가 하는 의문도 들구요. 솔직히 그 한계를 느끼기도 하구요. 그래서 창작가들은 물론이고 비평가들이나 독자들도 외면하는 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려가 되는 것은, 나는 여러 가지 이유
“여기서 창작자와 비평가들이 용산 사태와 촛불문화제에 대해 문학의 몫을 다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즉 문학인들이 그 부분들에서 멀리 있지 않았고, 나름대로 문학적으로 숙고하고 있다, 라고 하는 발언들은 매우 옹색한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로 참여할 수 없다라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것과 무관하게 생성되는 작품들로부터 시대적 미학을 건져 올리는 것도 위험하다고 봐요. 아주 조악한 예를 들면, 예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을 때 대단히 혁명적인 리듬이다 전위성이다, 하고 이야기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 속에서 시대적 미학을 구하려고 했던 그런 현상이 있었던 듯해요. 일종의 쏠림현상이지요. 그 쪽의 시대적 미학이라는 것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 문단에서 많이 언급되는 시대적 미학이라는 것도 그 현상과 멀지 않은 거 같아요. 한쪽의 시대적 미학은 아직 전세대를 극복할만한 울림, 정신적 울림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계가 있는 듯하고, 다른 한쪽의 그것과 무관한 언어적 환경 속에서 생성되는 작품에서 건져 올리는 시대적 미학은 제가 보기엔 쏠림현상이 없지 않은데, 이런 것들이 맞물려 있다고 봐요. 제 생각에는 한국문학은 당분간 그런 현상을 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신용목_촛불집회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이재웅 작가회의 사무처장도 있고, 선배 작가들도 열심히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저도 촛불집회에는 여러 번 참석했지만 작가회의 깃발 밑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작가라는 존재는 소프트웨어적 존재들이지 하드웨어적 존재들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하드웨어적 측면이 필요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겠죠. 지금도 기륭전자 문제나 대추리 문제, 용산 문제 등이 세계자본주의 폐해의 최첨단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전처럼 어떤 시대적 전형성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면 다른 이야기가 보태져야 할 겁니다. 분명 문학적 시각에서는 구분되는 문제입니다. 돌려 이야기하면 황석영 선생이 기륭전자나 대추리나 촛불을 안 썼다고 해서 그 시대에 대해 발언 안 한 게 아니죠. 이미 몇 년 전에 「손님」이란 작품으로 다 해버렸어요. 우리가 촛불 들고 있을 때 옆에서 기독교 어르신들 나와서 한쪽에서 태극기 흔드셨죠. 「손님」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태생적 문제와 시대의 태생적 문제를 함께 짚은 것입니다. 그처럼 근본의 문제를 어떻게 침잠해서 그것을 어떤 문제로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는가, 문학은 그런 작업들을 전부터 하고 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 경우에는 순발력이 필요했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순발력보다 이 세계에 대한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대겠죠. 현재적 시점에서 촛불을 다루면 그냥 표면적 국면으로 빠지거나 어떤 가십거리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을 통과해나가는 지점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문학적으로 체화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다만 작품은 조급함이나 위기의식을 이런 것을 통과해 나가는 지점에서 세계와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재웅_그것과 관련해서 백무산 시인이 작가는 기륭이라든가, 용산참사라든가, 사업장에 참여하는 것이 활동가나 전문가보다 나을 수 없으므로, 작가는 더 거시적인 것으로 예를 들면 억압적인 국가체제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공감해요. 물론 송경동 시인처럼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진행하려는 시인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작가들이 고민하고 싸워야 하는 것은 현장이 아니라 그 현장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전세계적인 시스템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현장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이 그것을 달성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도 고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회의가 없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지 않은 작가들은 언어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 추동되는 문학환경은 어떤 면에서 후자 쪽에서 시대적 미학을 자꾸 건져 올리고 그것이 최첨단인양 자꾸 과잉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작가들 스스로 어떤 인식상태가 좀 더 본질적인 대상이나 그 대상에 대해 고뇌하는 지점으로 가는데 폐단이 있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현상들이 그렇게 판단되는 현상이냐 하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일단 문학청년들이 어떤 작품들을 표본으로 작품을 쓰느냐, 텍스트의 어떤 물질성을 느끼느냐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 의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역시 의식이 동질화되는 현상이 있겠지요. 그렇게 상정해놓고 보면, 문학청년들의 국가든, 경계든, 자본주의든, 비체제에 대한 인식적 언어들을 어디에서 취득하느냐 하는 지점과 또 포장되어 있는 시대적 미학의 한쪽에서 건져 올린 포장된 언어들을 두고 어떻게 고뇌하느냐 하는 지점을 놓고 보면 좀 명징해지지 않나 싶어요. 그것은 예심을 봐도 나타나는 현상이고요. 대학에 가서 합평을 해봐도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이재웅_이런 것들을 따져 물어봤을 때, 성장하고 있는 문학청년들이 과연 반 또는 비체제의 인식적 언어들을 취득할 수 있을 것이냐, 아니면 포장되어 있는 시대적 미학이라고 한쪽에서 건져 올린 포장된 작품을 두고 고뇌할 것이냐 물어봤을 때 명징하다는 거죠. 매체를 예심을 가서 봐도 나타나는 징후 현상이거든요. 신축문제 예심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고 제가 대학에 가서 후배들 작품 합평을 해보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것들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자꾸만 무시한 체, 한쪽에서 계속 시대적은 미학을 건져 올리는 행위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제가 보기엔 폐단이 있다라고 보여지는 것이죠.
삶의 복판과 대면하는 문학의 언어가 절실하다
고명철-그 점을 경계를 하면서, 아쉬운 면이 있어요. 저는 비평가 입장에서 아랍문학을 사례로 들고 싶은데요. 우리나라에 아랍문학이 많이 소개되진 않았어요. 최소한 소개되고 있는 아랍의 문학들의 경우 걸프전 당시에 아랍인에서 쓴 시들이 소개되었어요. 팔레스타인의 시도 그렇지만 아랍계열에서 쓴 시들이 결코 지금의 용산이라든가, 기륭, 촛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바로 현장에서 쓰여진 시임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참여미학이라는 부분을 보더라도 한국문학보다 훨씬 완숙한 경지의 언어들이 나온단 말이죠. 시간의 격차를 둬가지고 그게 체화가 되고 안 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거 같아요. 말하자면, 아랍문학에서는 문제의 현장에서 씌어진 시들이 미학적 정치성을 훌륭히 담보한 시들이 쓰여지고 있는데, 한국문학의 경우는 그에 못지않게 현장성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적 정치성을 갖춘 시들이 왜 나오지 않느냐, 하는 다소 어리석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듯해요. 이 문제를 아랍과 한국의 특수성 차이로 환원시키는 게 아닌 ,미적 정치성의 차원에서 얘기할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죠.
신용목_아마 우리가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셔서 다시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요. (웃음) 그 전에 하나만 말씀드리지요. 현장 미학을 끌어올리는 시인들이 완성도가 있느냐? 회의적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고대 이후로 낭송시와 읽는 시는 분리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행사용 시는 따로 있어요. 그때 미학은 전혀 다른 미학이 적용되어야겠죠.
이재웅_완성도나 용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대가 구축해놓은 정신적 울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용목_개인적으로 그런 시는 응원가라고 생각합니다. 격려시고, 낭송시고, 행사용 시고, 별개의 장르가 있는 거죠. 이제 그것을 떠나 아랍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 문학적 조건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우리의 문학인들의 사고방식이 아랍의 문학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겨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랍관계자들이 들으면 화낼만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아랍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인간 본연의 문제와 굉장히 밀접합니다. 기륭이나 대추리가 세계자본주의의 첨단이긴 하지만 본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지요.
고명철_인간 본연의 문제와 와 닿지 않는다는 거지요.
신용목_와 닿지 않는다기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의 거대한 매개를 하나 통과해야 된다는 거죠. 세계자본주의라는 것, 지금 우리에게 기륭이나 용산이나 대추리는 단순한 자본과 노동, 민족문제로 치환하기 힘든 복잡한 알레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되어 종교문제도 있고, 외세문제도 있고, 민족 문제도 있고,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서 계속 돌면서 부차적인 사건들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80년 광주는 시대의 전형이었죠. 그 시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니까요. 아랍은 지금 모든 상황들이 그들 시대의 전형이 될 수 있는 상황인데 반해 우리는 끝없이 국지적 면들만 표출될 뿐입니다. 그 속에서 전형을 찾으려면 굉장히 두꺼운 벽을 통과해야 된다는 것, 그것이 좀 다르지 않을까요?
고명철_지금 중요한 지점을 지적한 거 같아요. 그래서 바로 그 점인데요. 말하자면 아랍이라는 것은 지구적 문제와 정면으로, 어떻게 보면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닥뜨린 가운데 그들의 언어가 곧 세계 중심부의 복판을 찌르는 언어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언어들은 그렇게 가지 못한 중간 매개물을 한 단계 거쳐야 한단 말이에요. 그 매개물 넘어 세계의 문제와 정면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지루한 싸움을 벌여야 되는데 그것이 한국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세계 미학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단 말이에요.
신용목_그래서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의 단순한 자본가의 횡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FTA 문제를 통과해야 하고, 보수정권의 문제를 통과해야 하고, 심지어 분단의 문제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재웅_저는 좀 좁혀서 말을 하고 싶어요. 예를 들면 우리가 삶과 대면하느냐 언어와 대면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은 아니고요. 창작방식은 다양하니까요. 단지 최근에 있어서는 시든 소설이든 삶 그 자체보다는 삶을 다룬 언어, 예를 들면 철학이 되겠죠. 삶의 세례가 아니라 철학적 세례를 받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일종의 허위의식이 될 수도 있구요. 그런 면에서 젊은 작가들의 경우에는 언어적 환경에 자신이 갇혀다는 것을 잘 모르는 지점도 있는 듯해요. 삶은 삶이고 시는 시이다 이것이 아주 그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팽배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고명철_이 대목에서 이야길 하다보니까, 이야길 들어보니까 어떤 거 같아요. 이 기자가 보기에 문학 바깥에서는.
이윤주_이재웅 소설가가 신춘문예나 문학상 심사에서 공통적으로 명징한 징후들이 보이고 있다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 공통점들이 삶의 언어보다는 언어 안에서 구축되어지는 문장 미학들에 집중하는 거 같다는 느낌들을 얘기를 하셨습니다. 소위 말해서 지금 문단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는 작가들을 인터뷰 해보면 실제로 그분들 경우에는 본인이 문단에서 보여 지는 평가라든지 아니면 평론가들의 비평이라든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자기 작품에 대해 발문을 붙이더라도 ‘그 사람은 내 텍스트를 읽었다’는 생각만 하는 거죠. 그리고 저는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게 또 작가라고 보거든요. 그 친구들한테 “서사 파괴나 언어 파괴 같은 왜 공통점이 있을까요?, 사회문제보다 내면의식을 쓰는 건가요?”라고 이야길 했을 때, 대부분이 세대가 같기 때문이라는 말들을 많이 했었던 거 같아요. 같은 문화를 보고 같은 텍스트를 읽어왔고 그런 것들이 오히려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문단 안에서 더 많은 중요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말이죠.
신용목_글쓰는 사람에게 삶은 언어로 구축되지요. 물론 글쓰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작가가 단순히 언어에 빠져 있어서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되려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에 빠졌느냐 삶에 빠졌느냐보다는 각자의 작업이 성공한 것이냐 실패한 것이냐라는 기준이 따라야 하겠죠.
이재웅_오해가 있는 듯해서, 부연하면, 삶에서 오는 언어가 아니고 철학적 언어라든가 그런 지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신을 삶 속에서 성장시킨다거나 거기에 고뇌가 담겨 있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철학적 명제와 밀착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자의식 또는 심적 구조를 가지고 작품을 완성해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 추상적인 말을 많이 해서 사실 좀 걱정이 됩니다. 글로 옮겨놓으면 독자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기도 하고, 뻔한 말을 왜 이리 돌려서 말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래요. 추상적인 방향이 좀 부정적으로 갔나본데,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요.
고명철_우리가 짦은 시간 안에 이것을 풀어내면 아마 중요한 얘기들이 빨리 풀릴 거 같아요. 저도 오늘 많은 걸 공부하게 되는데 마무리를 좀 지어야 될 거 같아요. 이 좌담의 큰 주제가 ‘21세기의 현실 참여와 문학’인데 끝으로 자신의 미진한 이야기를 보완해도 좋고, 약간 풀어서 설명할 것도 있는 거 같은데요.
신용목_별로 한 말도 없는 것 같은데, 또 했던 말 반복해야겠네요. (웃음) 대체적으로 작가는 현실에 굉장히 민감하고 현실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문제인데 간혹 그 표현이 성공적이라면 현실이 그 속에 잘 담겨있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어떤 방식이건 간에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성공작과 실패작이 있는 거겠죠.
이재웅_제 생각에는 정치성을 가진 작품이 꼭 현실참여적인 것이냐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너무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가 삶 자체를 다루는데 그 삶속에 과연 어떤 정치성이 내재되어 있는가, 이런 걸 다루는 게 훨씬 더 정치적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과거의 어떤 민중문학들이 성취했던 성과들을 또 다시 우리가 단절된 하나의 연속으로 생명력을 가지고 가자한다면, 그 지점 없이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단순화 시켜서 미적인 정치성만 가지고 현실참여를 하는 것 가지고는 어렵고, 삶의 정치성을 어떻게 형상화 하느냐 하는 고뇌가 있어야 할 듯해요.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정치성을 어떻게 전면화하고 같이 고뇌할 것인가 이 지점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된다하고 생각해요.
이윤주_문학이 변한다, 무중력이다, 감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렇게 변하는 것 자체가 변화된 사회상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용산참사에 대해서 작가들이 왜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는가, 대추리 사건에 왜 반응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이야길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거기에 대해서 무감각해진 젊은 세대층을 반영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사회가 깊어지고 불안한 문학들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하면, 그만큼 불안해하는 시대상이나 젊은 세대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여전히 반응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명철_제가 어제 「더 리더」라는 영화를 봤는데, 두 남녀의 사랑이라는 주 테마가 있고, 역사의 해석과 처리라는 만만찮은 문제가 있더군요. 매우 감명 깊은 대목은 나치 친위대원과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그 여성의 치명적 결점인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요.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남자가 법정에서 진술하기만 하면, 나치대 친위대로서의 여러 가지 누명이 벗겨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문맹이라는 그녀의 수치심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거든요. 결국 그 여자는 무기수로 살게 되고, 그녀를 위해 책을 읽은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보내죠. 저는 그걸 보면서 한국문학의 여러 면이 포개지는 게 개별자의 진실들이 역사적 명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삶에 육박해들어가는 아름다움과 마주치게 되었다고 할까요. 저는 그게 아까 여러분이 이야기한 삶의 정치성 또는 생명의 소중함, 문학의 생명력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어떤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한국문학에서 좀 더 소중히 갈고 다듬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의 젊은 창작과 비평이 선배 세대들의 문학적 후광 속에 숨을 게 아니라, 한국문학의 새로운 아름다운 가치를 적극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문학의 모험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아주 밀도 있는 이야길 나눴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천1
- 이전글34호(2009/여름)/신작단편/바람의 집/유애숙 09.12.20
- 다음글34호(2009/여름)/권두칼럼/시민의 호모 사케르화와 문학이 갈 길/이성혁 09.12.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