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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단편/생각하니 점점/이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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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니 점점
이상섭
누나는 노을이다. 기다림의 황홀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저 골목에서 이제 누나가 짜잔, 하고 나타나겠지 상상하는 즐거움. 그때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중에서도 ‘설레임’이 제일 좋다. 지금처럼 설레임의 꼭지를 물면 누나의 젖꼭지를 빠는 기분이니까. 야, 인마. 넌 어째 어른한테 인사도 할 줄 모르냐!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뒤통수에 탁, 하는 충격까지 전해진다. 그 바람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까지 톡 떨어진다. 돌아보니 ‘완꼭수’ 형이다. 형의 얼굴을 보니 노을처럼 붉게 달아오른 내 감정의 체온이 뚝, 떨어진다. 그렇다고 불알 속에 숨긴 용기를 꺼내 ‘맞짱을 뜨’지도 못한다.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뒤통수가 금이 간 건 아닌지 어루만지면서 소리만 지를 수밖에. 왜 아침부터 재수 옴 붙게 뒤통수를 치고 그래요? 그래도 꼭수 형의 태도는 되레 당당하다. 이 새끼, 표정이 영 불순하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내가 되쏜다. 형이 뭔 어른이에요? 자식이 말하는 꼴 좀 보소. 너, 나이키 어찌 되냐? ‘나이’야 군대 갈 만큼 먹었고 ‘키’야 백칠십육이죠. 그러니까 하는 얘기잖냐. 12살 띠동갑이라면 몰라도 넌 나하고 13살씩이나 차이가 나잖냐? 더 이상 입 섞기가 싫다. 더 길게 이었다가는 내 꼭지가 돌아버릴지 모른다. 안 그래도 욕지거리를 무슨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잡종이니 말이다.
맞은편 누나의 횟집은 여전히 문이 닫힌 채다. 출근이 제법 늦다. 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괜히 조바심이 나서 창밖만 기웃거리게 된다. 퀵서비스119 사무실 안은 여전히 휑뎅그렁하다. 경기가 위축되면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앉은자리를 털고 떠났다. 내가 오고 난 뒤 두 사람이 더 떠났다. 그래서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꼭수 형이 이러다간 고스톱도 못 치는 거 아냐? 하는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처지다. 그렇다고 남은 사람들이 의욕이 넘치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니 ‘칼퇴근’은 있을지 몰라도 ‘칼출근’을 하는 이가 없다. 사무실은 그저 잡것들이 모여 잡다한 ‘썰이나 풀’면서 시간만 죽이는 곳이니까. 그나저나 좆만아! 형은 종만이란 이름을 두고 꼭 좆만이라고 부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형이 다시 말을 잇는다. 너 준화씨 어디가 그리 좋냐? 순간 내 마음을 들킨 듯 어깨가 움찔한다. 하지만 실토할 필요는 없다. 내가 불퉁스럽게 대꾸한다. 그렇다고 싫어할 이유도 없잖아요? 그럼 물어보자, 좋은 이유가 뭐냐? 그냥요. 그냥이라니, 사나이는 말이야 좋아하는 데는 백 가지 이상의 이유를 댈 수 있어야 돼, 인마. 또 잘난 척 풍월이다, 우리의 완꼭수씨. 자기는 좋아할 이유가 없어 여자도 못 만나고 노총각으로 살면서. 덕분에 내 입에서 핏, 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무실 앞에 세워둔 형의 오토바이가 보인다. 완꼭수라 불리게 된 건 저 오토바이에 붙여놓은 로고 탓이다. 물론 맡겨만 주시면 꼭 완수하겠습니다, 라는 뜻이지만 ‘꼭’을 강조해 가운데 박아놓다 보니 ‘완꼭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나저나 씨부랄, 오늘도 죽 쑤는 거 아냐? 형이 소파에 등을 묻으며 딴소리를 한다. 하긴 배달전화가 없으면 사무실 폐업 신고를 해야 한다. 형은 퀵서비스의 사장이다. 형의 돈으로 사무실을 내고 일정액의 수수료를 챙기면서 운영하니까. 지금은 그마저 힘들어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까지 뛰는 중이고. 한 때는 밤마다 대리운전 기사로 뛰면서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좆 볼 짬도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볼일 보고 거시기 볼 여유가 너무 많아 큰일이라며 불퉁거린다. 하여튼 형한테는 세상은 이래저래 씨부랄이다.
내가 꼭수 형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건 찬우 형 때문이다. 찬우 형은 애인에게 차이고 너무 아파서 진통제 삼아 술 마신 뒤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직업정신을 발휘해 오토바이는 무사했지만 몸은 그렇질 못했다. 뼈가 붙으려면 최소한 삼 개월 이상은 누워 있어야만 했다. 꽝, 소리가 나서 정신을 차리니 난간인 거 있지. 하마터면 찍, 소리도 못하고 하늘로 직장 옮길 뻔했다니까. 찬우 형은 팔다리에 깁스한 채 낄낄거렸다. 그래도 형은 열심히 사니까 인생의 종점에는 꽝, 소리는 없겠지. 내가 최고의 병문안 선물을 안기듯 설레발을 쳤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중 갑자기 형이 제안하고 나섰다. 혹시 너, 입대 전까지 알바 뛸 생각 없냐? 폐건전지처럼 방구석에서 뒹구는 것도 좀 그렇잖아? 나쁠 것도 없었다. 악수로써 계약이 완료되자 찬우 형이 한마디 덧붙였다. 일할 때 꼭수 형, 조심해. 왜? 성질이 개 같거든, 개는 원래 인내를 모르잖아. 그래서 알았다, 완꼭수란 양반이 인내가 약한 직립 동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무엇보다 결심을 굳히게 한 건 준화 누나다.
사실 난 동갑내기나 동생뻘 되는 계집애와 사귀어 봤다. 하지만 내 가슴은 선천적으로 불구였던지 별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게 엄마 없이 커서 그런지 모른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에는 아버지의 직장이 멀었고, 할머니마저 시장통에서 노후를 보내는 중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나에게 누나가 나타났다. 누나만 보면 가슴에서 샘물이 퐁퐁,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누나랑 사귀면 좋은 점도 많잖은가. 뭐, 실수를 해도 귀엽게 봐줄 수 있다는 점, 억지나 떼를 써도 가능하다는 점,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 이따금 모성애도 느끼게 해준다는 점, 미래를 약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등. 하지만 아직 누나에 대해 얘기라면 할 말이 없다. 나이? 모른다. 사는 곳? 모른다. 결혼 유무? 그딴 거 관심 없다. 대신 이름은 안다. 준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냥 편하게 ‘주나’로 부른다는 것까지.
배달 사건 이후부터 그냥 내 마음은 누나에게 쑤욱, 끌려가고 말았다. 무슨 배달 사건이냐고? 그러니까 내가 입대날짜를 앞두고 집에서 노란 이불만 칭칭 감은 채 핫도그처럼 뒹굴 때였다. 하루는 발가락이 간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찬우 형의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실에서는 한창 화투판이 벌어져 있었다. 벌써 개평으로 소주에 탕수육까지 시켜먹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헌데 유독 찬우 형만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일해서 벌고 포커 해서 따고 오늘은 죽여준다야. 그 와중에 전화가 울었다. 꾼들은 모두, 이 늦은 시각에 웬 전화람?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이가 바로 준화 누나였다. 배달 한 번 시키지 않더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람, 귀찮게? 꼭수 형이 투덜거렸다. 그렇다고 이웃이니 일방적으로 거절할 수 없어 난감한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던 찬우 형이 먼저 엉덩이를 들자 꼭수 형이 비꼬고 나섰다. 그래, 따서 확 튀어버릴라고? 그러더니 내게 키를 집어던졌다. 맨정신인 사람은 너밖에 없네? 대신 수입금은 오대오! 심심하던 차에 용돈까지 벌 기회까지 주시다니. 그런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곧장 파도횟집으로 앰뷸런스처럼 달려갔다. 준화 누나는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혀가 꼬여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산복도로 종점! 누나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배달할 짐은 어디 있나 살폈다. 헌데 오토바이 뒤에 누나가 올라타는 게 아닌가. 내가 놀라 눈망울을 키우자 누나가 입을 열었다. 왜? 사람은 퀵서비스 안 하냐? 이것들이 완전히 배불렀구먼! 잠시 난감해 망설이는데 다시 소리쳤다. 빨랑 가, 너무 늦었다구! 호사다마라더니 일이 이렇게 꼬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할 수 없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먹였다. 달리자마자 누나는 왼쪽, 오른쪽, 직진, 샛길, 참 옹골차게도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던 누나가 갑자기 으슥한 골목 앞에서, 멈춰! 하고 명령했다. 누나는 으슥한 곳으로 혼자 비틀비틀 걸어가더니 치마를 까고 앉는 게 아닌가. 기사 양반, 눈깔 저리 안 돌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정말 환장할 퀵서비스 물건이었다. 문제는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누나는 이제부터 걸어간다며 오토바이를 세웠다. 이웃들이 보면 쪽팔린다나. 그런 거야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었다. 문제는 외상이라는 거였다. 외상이라니? 용돈이 한 방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그날 나는 이 도시의 여성 취객 하나를 노상방뇨까지 시켜가면서 안전하게 귀가시켜준 셈이었다.
택시비를 조금 아끼려 자신을 퀵서비스하는 여자. 그런 여자라면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니 집 앞까지 가지도 못하는 건 당연지사. 왜냐, 요즘은 잘 사는 게 찬양받는 시대이지 않은가. 그러니 보여줄 만한 집이 아니란 거지. 그렇다고 자원봉사활동으로 끝낼 순 없었다. 다음날, 파도횟집으로 찾아갔다. 아줌마, 택배비! 횟집 문을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테이블을 닦던 누나는 대뜸 인상을 구겼다. 아줌마는 무슨 아줌마, 누나라 불러! 누나라니? 이거 초장부터 ‘쎄게’ 나가 택배비를 떼먹으려는 수작 아냐? 솔직히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택배비는 건넬 생각 없이 회덮밥부터 건넸으니까. 이거 고마워서 밥 먼저 주고 돈을 주려나? 헌데 정말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누나로 부르고 싶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모자라면 얘기해. 주고 욕먹고 싶진 않으니까. 배를 골아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그 말 때문이었을까. 누나가 갑자기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아마 헛소리가 터졌을 것이다. 최소한 누나라 부르려면 나이키는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누나가 피식, 웃었다. 너만 한 동생이 세트로 와장창, 있다, 그럼 됐니? 어쨌든 누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천우신조로 찬우 형이 사고를 당해준 거고. 찬우 형, 정말 베리 쌩큐!
내가 아이스크림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 지금처럼 날씨가 선득해지면 그 맛은 더 죽여준다. 문제는 아이스크림을 군대에 가서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거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피엑스가 없어졌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 아저씨도 하나 드실래요? 아저씨라니? 꼭수 형이 발끈하며 눈을 부라린다. 형이라 부르지 말라면서요? 그거야 씨부랄, 그냥 해본 소리지. 장가도 못간 놈을 아저씨라는 게 말이 되냐? 형은 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뺏더니 쭉쭉 빨기 시작한다. 그때 맞은편에 횟집에서 누나가 나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나보다. 누나의 얼굴을 보자 어둡던 속이 환하게 개는 기분이다. 순간 내 입에서 어어, 소리가 터진다. 누나가 계단을 밟고 잠시 한눈을 판다 싶더니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나는 얼른 달려가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인데, 형은 킬킬대며 흰소리다. 준화씨 엎어진 걸 보니 불판이 따로 없네, 후끈 달아오르는 게. 개 눈에는 뭣만 보인다더니 오나가나 그 생각이다. 하긴 여자를 무슨 먹는 걸로 여기니 여자가 붙을까. 붙자마자 포장지도 안 뜯고 달려들 테니 말이다. 다행히 누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치마를 털더니 걸음을 재촉한다. 헌데 한쪽 발을 절룩거린다. 괜히 입 안이 쓰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꼭수 형의 표정이 험하다. 이런 씨부랄, 마수부터 어시장이냐? 하여튼 꼭수 형은 화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양반이다. 툭하면 언성을 높이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니 말이다. 그런 양반이 나를 흘낏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야, 좆만아. 니가 출동해라, 어시장 안 영아네 냉동창고! 또 좆만이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터진다. 내가 아무리 작아도 형 좆보다는 클 걸요? 형의 인상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헬멧을 쥐고 밖으로 나선다. 누나를 만나려면 서둘러야 한다. 시동을 켜서 급발진! 사실 어시장은 기사들도 꺼리는 곳이다. 물건이 거의 생선 종류이기 때문이다. 포장을 아무리 야무지게 해도 비린내 풍기기는 당연지사. 그러니 깔끔한 척하는 꼭수 형이야말로 질색할밖에. 하지만 나야 어차피 찬 것 더운 것 가릴 수 없는 한시적 인생이 아닌가. 게다가 묻어봤자 내 오토바이도 아니잖은가. 시장 입구에 다다랐다 싶은데 장바구니를 들고 나오는 누나가 보인다. 벌써 장을 다본 모양이다. 빵빵, 클랙슨을 누른다. 누나가 눈망울을 키운다. 어디 가는 길이야? 누나 태우러 왔잖아요! 배달 가는 길 같은데? 괜찮아요, 그리 바쁜 배달도 아니거든요. 그럴 필요 없어, 네 볼일이나 봐. 내가 짐을 빼앗다시피 오토바이에 싣는다. 그러자 누나도 마지못해 오토바이에 엉덩이를 걸친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근데 누나, 오늘 왜 이리 늦었어요? 그럴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요? 그냥 집안일일 뿐이야. 짐도 무거운데 다음부터 택시 타세요. 택시 탈 돈은 누가 그냥 준대니?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파도광장으로 달려가고 싶다. 누나에게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힘내라고 ‘삼삼칠박수’라도 쳐주게 말이다.
배달 두어 군데 돌고 나니 점심때다. 요즘 내가 찾는 메뉴는 정해져 있다. 회덮밥. 누나가 해주는 회덮밥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다. 오늘도 나는 누나의 식당으로 갈 것이다. 랄라룰루. 물론 내가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따로 있다. 무지개송어 요리. 상상해 보라, 무지개처럼 가슴에 주황의 무늬가 새겨진 물고기를. 그런 물고기가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더군다나 그런 무지개송어를 누나와 함께 먹는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꼭수 형은 또 딴소리다. 인마, 너 입대 전에 여자 맛보고 싶어서 만날 가는 거지, 그렇지? 정말 품격 높은 말씀만 하신다. 난 형을 향해 사팔뜨기 눈을 해보이고는 식당으로 잰걸음이다. 근데 횟집 앞에 검정색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다. 누나의 가게에 모처럼 대형 손님이 왔나보다. 헌데 들어서고 보니 분위기가 냉랭하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 씩씩거리고 누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허리를 꺾고 있다. 점심 손님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분위기 쇄신하려 내가 부러 소리친다. 여기 회덮밥 하나 후딱 좀 주쇼! 누나가 주방으로 향하자 마지못해 남자가 일어선다. 이런 일로 장사까지 방해하고 싶진 않소. 대신 두 번 다시 바쁜 사람 발걸음하게 하지 마쇼. 그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남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돌아선다. 잠시 뒤 자동차 시동 켜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멀어진다. 누나, 저 건방진 놈은 누구야? 누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꾸한다. 응, 이 가게 건물주인. 짧게 대답했지만 누나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인다. 내가 흰소리를 치고 나선다. 저런 놈은 원래 중고 오토바이예요. 누나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민다. 왜?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소리를 큰데 힘은 하나도 없거든요. 누나가 설핏 웃는다. 그다지 기분 나쁜 건 아닌 모양이다.
밥을 먹고 돌아서려는데 홀에 꼬마가 보인다. 헌데 꼬마 손님 표정이 야릇하다. 얼굴 가득 먹구름이 쫙 깔린 게 여차하면 울어버릴 태세다. 그렇다면 아까부터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왜 난 못 본 거지? 주위를 둘러봐도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알은체를 한다. 안녕, 꼬마야. 이름이 뭐니? 꼬마는 아무 말이 없다. 그때 누나가 주방에서 외친다. 참, 은비야, 인사해. 종만이 삼촌이야! 그제야 아차, 싶다.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란 찬우 형의 말을 왜 흘려들었을까. 갑자기 장이 꼬이는지 속이 아리다. 근데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꼬마가 대뜸 반말하고 나선다. 안녕, 쫑만이 쌈쫀! 이게 무슨 혀 끊긴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근데 문제가 더 커진다. 주방에서 또 꼬마 하나가 걸어 나온다. 오마이갓, 혹을 둘씩이나 단 이혼녀라니!
*
정말이지 참이슬을 따지 않을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며칠간 고민의 바다에 빠져 지냈다. 출근을 해도 횟집은 거들떠보기 싫었다. 점심 메뉴도 바꿔버렸다. 틈만 나면 파도광장을 찾아가 가슴에 박힌 몹쓸 여자 좀 빼달라고 용왕님께 빌기도 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역시 난 운명적으로 물고기자리를 타고난 모양이었다. 바다의 물고기가 그물에 잡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전진만 할 줄 알았지, 후진을 할 줄 모른다는 거다. 물고기는 그물코가 앞을 가로막으면 꼬리의 힘으로 앞으로 더 밀고 나간다. 제 깐에는 그러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게 자신의 운명을 더 옭죈다는 걸 몰라서 그렇다. 내가 그 꼴이었다. 누나가 혹이 둘이나 달린 아줌마라면 대시하는 걸 포기해야 하잖나. 근데 하루가 다르게 은비와 유비가 나를 따르자 생각도 점점 달라지는 거였다. 사실, 다섯 살이 된 은비는 좀 모자란다. 그러다 보니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인 유비에게 늘 당한다. 유비가 여기 때렸어. 응, 알았어. 조금 있으면 안 아플 거야. 그리고 잠시 뒤면 또 사무실로 쪼르르 달려와 쌈쫀, 유비가 여기 때렸어, 했다. 아마 그날은 같은 말만 수백 번은 되풀이했을 것이다. 물론 그 주된 이유가 아이스크림 탓이었겠지만. 내가 이런 실정이니 누나는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을 하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서 은비가 사무실에 오는 걸 막지 않았다. 은비는 우리 사무실이 제2의 어린이집인 셈이다. 그렇게 자주 봐서 그런지 은비가 전혀 바보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됐다. 꼭수 형의 눈치를 보다가 소리를 빽, 하고 지르면 쏜살같이 내빼니까.
배달 나갔다가 돌아오니, 은비가 생각보다 일찍 사무실에 와 있다. 이상하다. 오늘은 어린이집에 안 갔나? 그렇다면 몸이 아프다는 얘기인데 여기는 웬일이람? 헌데 사무실로 들어오는 그 순간 일이 터지고 만다. 꼭수 형이 은비가 쥐고 있던 수화기를 잡아챘을 때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런데도 수화기를 쥔 채 여보세요, 여보세요 외쳐댄다. 그래도 저쪽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는 모양이다. 이런 씨부랄, 끊겼네? 결국, 은비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야, 이 코딱지만 한 게 남의 영업까지 방해해. 후딱 니네 엄마 가게로 안 꺼져? 은비가 놀란 듯 꼼짝 않고 섰다. 내가 비꼰다. 꾸지람도 참 윤리적으로 하시네, 애한테 웬 큰소리예요? 그럼 큰소리 안치게 생겼냐? 배달 전화가 아닐 수 있잖아요? 내가 되쏘자 형의 안색이 변한다. 은비는 한 번만 너 나무라면 저 바로 울어버릴 거예요, 하는 태세다. 형이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은비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꺼내 은비에게 건넨다. 괜찮아. 은비가 잘못한 거 없어. 삼촌 도와주려고 전화 받은 거잖아, 그치? 은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밖에서 형의 목소리가 울린다. 준화씨, 은비 안 데리고 갈래? 우리 사무실이 무슨 탁아소야? 잠시 뒤 횟집 문이 열리고 누나가 얼굴을 디민다. 지금 손님 있는 거 안 보여? 꼭수씨한테 애 보라고 한 건 아니잖아! 누나가 되레 큰소리를 치자 형이 되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꼴에 안 봐도 훤하다. 또 이런 씨부랄, 하고 욕지기를 내뱉었을 것이다.
파도광장으로 향한다. 바람이 제법 선득선득하다. 사람들은 이런 날씨 때문에 한마디씩 한다.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는다. 보란 듯이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올 자신이 있다. 다만, 이년 뒤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그게 걱정일 뿐이다. 하긴 그래도 지금보다 더 성숙해 있겠지. 그러면 인생을 다시 생각해볼 작정이다. 대학도 다니고도 싶고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지구 끝까지 달려도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갈 수 있는 곳은 파도광장일 뿐이다. 파도광장이 보인다. 이곳의 주빈은 당연히 파도다. 계단참에 앉아 있으면 마치 웅장한 바다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들을 수 있다. 몰려왔다가 몰려가는 파도 더미들. 그건 바다가 지을 수 있는 유일한 표정이자 목소리일지 모른다. 나는 울적할 때마다 이곳에 와서 바다가 건네는 음악을 듣는다. 그러면 나는 한 마리 물고기로 변한다. 온몸에 무지개 빛깔을 반짝이며 헤엄쳐 나가는 멋진 물고기.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답답했던 가슴도 풀리고 마음도 정돈되는 기분이다. 은비는 먹을거리는커녕 볼거리도 없자 금세 몸을 비튼다. 은비야, 오늘은 왜 어린이집에 안 갔어? 엄마가 가지 말래. 왜? 몰라. 어디 아퍼? 아니. 그럼 왜 가지 말래? 몰라. 은비의 대답에 나는 생각만 깊어질 뿐이다. 은비야, 그럼 네 아빠는 자주 연락 와? 내가 묻자 은비가 말한다. 몰라. 모르는 게 어딨냐, 아빤데? 그냥 몰라. 은비는 성의 없이 말하고 돌을 찾아 돌아다니기 바쁘다. 갈수록 은비의 대답이 아리송하다.
초저녁부터 거리가 어수선하다. 어디선가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다. 근데 들으면 들을수록 목소리가 귀에 익다. 재빨리 누나의 가게를 살피니 검은 그림자가 잔뜩 엉겨 붙어 있다. 나도 모르게 누나의 가게로 달음박질을 치고 만다. 누나, 무슨 일이예요? 양 손을 허리에 붙인 채 누나가 거친 숨을 내몰고 있다. 얼굴이 불쾌한 손님이 입을 연다. 아니, 손님이 그런 말도 할 수 있지. 장사하는 양반이 그런 것도 이해 못하고 장사 해먹겠어? 누나가 되받아서 소리친다. 여기가 무슨 싸롱이에요? 왜 그딴 짓을 해요? 내가 장사한다고 사람 그리 만만하게 보여요? 손님이 대꾸한다. 그럼, 싫다고 말을 하든가. 우리가 남의 속까지 알 수가 있어? 그만 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잖아요! 허허 그참, 하며 손님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나선다. 점잖은 분들이 좋은 음식 놓고 왜 그러세요. 이 집도 장사해야 하니까 그만합시다. 안 그래도 술맛 버렸어. 이 집에 두 번 다시 오나 봐라. 손님이 투덜대며 엉덩이를 든다. 누가 오라고 해요? 누나가 앙칼지게 소리친다. 잠시 뒤 홀은 고요함을 되찾는다. 그제야 누나가 다시 입을 연다. 글쎄, 나더러 뭐라 그러는지 아니? 하루 얼마 버냐고, 오늘 수입금에 배로 줄 테니까 같이 가자더라. 그게 할 말이니? 내가 입을 연다. 먹고 살려고 벌인 장산데, 그런 말은 못 들은 척해야죠. 누나가 말꼬리를 잽싸게 잡아챈다. 나도 참았지. 근데 계속 치근거리잖아. 옆에 앉으라면서 가슴까지 더듬고. 내 눈이 커진다. 그때까지는 참자 싶었어. 나란 년이 별 건가 싶어서. 좋게 술 마시러 온 손님 기분 잡치게 할 것까지도 없고. 근데 이건 팬티 속의 거시기에 손가락까지 집어넣는 걸 어떡해? 그걸 어떻게 참냐구. 듣고 보니 누나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다. 다른 건 참아도 내 속까지 들어오는 걸 참아가며 장사하고 싶진 않아. 어느새 누나의 눈이 촉촉하다.
먹고 싶은 횟감 말해, 다 해줄 테니까. 누나의 말에 내가 되쏜다. 갑자기 웬 선심이세요? 너한테 고마워서 그래, 오늘도 그렇고 또 은비 아이스크림 값도 많이 들었잖아. 괜찮아요, 차라리 그 돈으로 은비 어린이집 회비나 주세요. 누나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연다. 어차피 은비는 더 이상 다닐 처지가 못돼. 왜요? 그건 다음에 얘기해줄게. 어서 고르기나 해. 누나가 다그치니 생각나는 생선이 있다. 하지만 그건 바다에서 자라는 물고기가 아니다. 빨리 말하라니까! 마지못해 내가 입을 연다. 무지개송어 먹고 싶어요. 무지개송어?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왜 먹고 싶은데? 이름이 멋있잖아요, 마치 눈앞에 무지개가 아롱대듯이. 내 말에 누나는 무지개송어를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잠시 무연한 눈빛을 한다. 그러더니 누나가 묻는다. 그냥 감성돔을 무지개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메뉴에도 없는 생선을 끝까지 고집할 나도 아니다. 좋아요, 감성이란 말도 끌리는 이름이잖아요! 누나가 환하게 웃는다. 웃음은 일종의 관계 형성의 사회적 신호라 했던가. 그렇다면, 누나와 나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다. 주방으로 향하는 누나를 향해 소리친다. 누나는 너무 예뻐요. 누나가 돌아보며 묻는다. 어느 정도로? 계절로 비유하자면 가을과 많이 닮았어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드는 점에서요. 누나가 또 웃는다, 약간은 서글프게.
누나는 정말 예쁘다. 바라보면 내가 서글퍼질 정도로. 어떨 때는 아이를 둘이나 낳은 아줌마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옷도 비린내 나는 장사를 하지만 결코 허드레옷이 아니다. 그러니 누나가 이곳에서 장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둘 다 깔끔하다. 옷이라도 더럽혔다가는 준화 누나의 성미에 가만있질 않는다. 해서 은비나 유비도 옷에 무엇이 묻는 걸 엄청 신경 쓴다. 그런 ‘깔끔을 떠는’ 성미이니 이런 시장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인지 여기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니 이혼녀라는 소문도 쫘악 깔렸을 것이다. 누나는 이따금 영업을 마친 다음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비싼 손님용 맥주는 건드리지 않는 눈치다. 볼 때마다 올라와 있는 건 소주병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물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누나가 신음 소리를 길게 끌며 대답했던가. 인체의 칠십 프로가 물이래, 그러니 액체 덩어리인 셈이지. 근데 난 내 몸이 단단하다고 믿었으니 착각이지 뭐야. 내가 물었다. 누나는 왜 이혼했어요? 이혼은 무슨. 그딴 거라도 했으면 이 짓하고 있겠니? 누나의 말을 듣자 누나의 과거를 뚜렷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누나의 몸으로 수없이 많은 파도가 지나갔을 거라는 짐작은 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완꼭수 형, 흥이 도질 대로 도졌다. 노래를 부른다는 건 배달이 계속 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부터 뛰어, 앞만 보고 뛰어,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형의 오토바이가 어두워지고 있는 거리를 달려 나간다. 멀어지는 형을 보니 부럽다. 사실 형은 조숙한 나이에 사회에 입문했다. 고교시절부터 상 타는 것보다는 오토바이나 타는 걸 더 신나했다. 그래서 화류계에도 일찍 등단했단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이트클럽에서 손님 비위 맞추며 어두운 조명 아래 사는 게 죽기보다 싫더라고 했다. 사정없이 나비넥타이를 풀어버린 후 곧장 이 길로 걷게 되었다. 하지만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사이에 세월만 흘렀단다. 언젠가 형이 말했다. 어떤 여자든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는 여자만 있다면 과거는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직 멀었다. 욕도 줄여야 하고 성깔도 죽여야 한다. 하지만 흥이 나면 사람이 백팔십도 달라진다. 노래를 부르면 거리를 주름잡는 형. 그런 모습만은 이상하게 싫지 않다.
*
쌈쫀, 우리 집에 이상한 쌈쫀 있어. 은비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성가셔 죽겠다. 배달하는 짐이 무거워 허리가 아직 뻐근하다. 망할 놈의 계단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럴 거면 차라리 비상계단이나 치워놓던가. 짐 들고 빠져나가려다가 하마터면 입대 전에 ‘체험 삶의 현장’에서 순직할 뻔했다. 쌈쫀, 우리집에 이상한 쌈쫀 있어. 은비가 계속 치근댄다. 일 때문이 아니라 은비 때문에 지쳐 쓰러지겠다. 그래, 일단 가보자. 겨울배추 뽑듯 힘들게 소파에서 엉덩이를 뽑는다. 누나의 가게 앞에 서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젊은 여자가 경우가 있어야지. 벌써 몇 달째야. 나는 뭐 자선 사업하라는 거요? 그러고 보니 전번에 봤던 주인 남자다. 은비는 무서운지 쪼르르, 달려가 제 엄마의 치마 뒤에 숨는다. 누나가 말을 잇는다. 죄송해요, 워낙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장사가 돼야 말이죠. 남자가 되쏜다. 장사가 안 되면 가게를 빼면 되잖아. 그 돈도 안 내고 공짜로 돈 벌 작정이었소? 누나가 대꾸한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하는 순간 남자가 누나의 말을 가로챈다. 일 없어요, 그깟 얼마 되지 않는 월세 못 내놓을 거면 내일 당장 물건 들어내슈. 안 그래도 세 들어올 사람 줄을 섰으니까! 누나가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되도록 빨리 마련해볼게요. 남자는 누나의 말도 듣지 않고 돌아선다. 스치고 지나가는 남자에게서 냉기가 훅 끼친다. 남자가 나가자 누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진다. 내가 지원사격에 나선다. 주인이란 새끼 꼬라지를 보니 돈만 밝히게 생겨먹었네. 누나가 나를 향해 흐릿하게 웃는다. 난 괜찮아. 만날 당하는 일인데, 뭐. 누나가 다시 영업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누나의 얼굴에는 그늘만은 어쩌지 못한다.
누나 생각 때문일까. 다가오는 입대날짜 탓인가.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완꼭수 형은 그런 내 감정도 모른 채 아침부터 히죽거리고 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양복까지 차려입고 손에 선물꾸러미까지 쥐고 있다. 평상시 같으면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겠지만 오늘은 영 기분이 아니다. 야, 좆만아. 이 형님, 폼 좀 나냐, 어떠냐? 대답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냥 멀뚱멀뚱 형만 쳐다볼 뿐이다. 오늘 이 형님이 드디어 니네 형수님 만나러 간다. 형수는 뭔 형수람. 기껏 해봤자 선이나 보러 가는 주제에. 형은 혼자 신나서 계속 떠벌린다. 나라고 홀아비로 늙을 수는 없잖냐? 안 그래, 좆만아? 내 목청이 커진다. 끝까지 좋은 이름 두고 좆만이라 부를 거예요? 아, 씨부랄. 이 새끼 좀 보소? 왜 나라고 좋은 말 안 하고 싶을까. 이왕이면 나도 멋진 형수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격려사를 퍼부어주고 싶다. 그래야 뒤통수치는 일도 없을 테고. 하지만 몸이 무거워 입 벌리기도 싫은 걸 어쩌란 말인가. 형은 내 속도 모르고 또 히죽댄다. 하긴 가려우면 긁기 마련이라고 되게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옜다, 받어. 엉, 해가 서쪽에 떴나 내게 선물을 다 주다니. 이걸 왜 나줘요? 아, 씨부랄. 입대 얼마 안 남았잖아, 인마! 형은 벌쭉하게 서 있더니 무안한 듯 밖으로 나가버린다. 나는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멀어지는 형의 오토바이만 쳐다본다. 형이 좆나 멋있어 보인다.
은비 할머니도 대단한 여장부다.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니 말이다. 근데 할머니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나도 모르게 횟집으로 눈길이 쏠린다. 야, 이건 아이엠에프보다 더 무섭다. 어째 이리 배달이 뚝 끊기냐? 이런 세상을 뭐라는 줄 아냐? 꼭수 형이 투덜거린다. 내가 눈을 반짝이자 형이 말한다. 이런 세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좆같다는 거지. 요즘은 위기는 산이고 기회는 바늘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니까. 형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미국발 금융 쓰나미가 몰려오고 나서 사무실 전화기가 우는 게 끊겼으니까. 그러면서 대신 울게 된 건 하루벌이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겨우 서류 봉투 하나 배달하고 나니 일감이 뚝 끊겼으니 오죽하랴 싶다. 그렇다고 끼니까지 끊을 수도 없잖은가. 할머니가 무슨 일로 고함을 내지르는지 상황이라도 파악하고 싶은데 마뜩한 핑계도 없다. 잠시 머리를 궁굴리니 핑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냉동고에 넣어둔 아이스크림을 들고 밖으로 나선다. 홀에 할머니 한 사람이 모둠 숨을 올려 쉬고 내려 쉬고 해댄다. 누나는 고개를 외로 틀고 앉았다. 두 사람의 눈치만 살피던 은비가 내게 달려온다. 쌈쫀, 유비가 여기 다쪘어. 은비가 머리를 만지며 말한다. 그래, 유비 많이 다친 거야? 응, 유비가 여기도 다쪘어. 이번에는 다리를 가리킨다. 짐작건대 유비가 많이 다친 모양이다. 그래, 걱정 마. 동생은 곧 나을 거야. 유비에게 쥐고 온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그때 할머니가 입을 연다. 그래, 다시 물어보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 왜 내가 늙은 나이에 아픈 다리 질질 끌어가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애들 뒤만 쫄쫄 따라다녀야 하냔 말이다? 누나가 대꾸한다. 그럼, 집에 계시면서 애도 못 챙겨줘요? 그럼, 밖에 못 나가게 애새끼 다리라도 묶어놓으랴? 금방 집에 있던 애가 밖에 나가서 다친 게 왜 내 잘못이냐? 네 잘못은 없어? 어머님도 알다시피 저는 여기 매인 몸이잖아요! 그래서, 밤늦게 술까지 퍼먹고 와서 시어미더러 해장국이나 끓이는 일로 또 부려먹어? 그게 왜 부려 먹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어른 모시는 거냐? 누나의 말이 잠시 끊긴다.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연다. 너만 가슴 내려앉았냐, 나도 내 새끼 잃고 내려앉은 지 오래다. 순간 내 귀가 번쩍 뜨인다. 할머니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병원 가서 치료하고 돌아와 전화한 사람한테 어디 언성을 높여? 그게 사람한테 할 짓이냐? 걱정되니까 순간적으로 그렇게 한 거잖아요? 그렇다고 시어미한테 소리를 질러? 아, 이런 수모 두 번 다시 당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니들이 싸질렀으니 데리고 나가든지, 친정에 맡기든지, 고아원에 버리든지 니 맘대로 해라. 할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횟집을 나선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나는 얼굴만 파묻고 있다.
어라, 저게 누구지. 복덕방 장씨 아닌가. 그런데 저 양반은 또 어떻게 누나의 가게로 들어가는 걸까. 괜히 눈길이 쏠린다. 따라온 남자도 장씨를 따라 횟집 안으로 들어간다. 기어이 누나가 가게를 내놓나? 하긴 이 거리에 주인 바뀌는 일은 흔하디흔하다. 새로운 가게가 개업을 한다 싶으면 문을 닫기 일쑤다. 그래서 꼭수 형의 말마따나 이 거리에 오래 살다 보면 세상이 보인다. 한때, 공구거리에 화장품 가게와 아동복 가게 들어서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둘 사라졌다. 그게 바로 장사가 안 된다는 거고, 그만큼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는 거다. 헌데 지금은 분식점이나 식당 같은 가게도 변하는 중이다. 그 정도로 사는 삶이 더 팍팍해졌다는 거다. 근데 누나마저 떠난다면 어쩐담? 갑자기 어깨가 폐가 지붕처럼 푹, 내려앉는다.
생각보다 꼭수 형이 일찍 돌아왔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입이 가만있지 않는다. 내 삶이 너무 위험해 보인다더라. 내가 보기엔 지가 더 위험해 보이던데. 내가 눈을 키운다. 그래도 형의 말은 계속된다. 하긴 몸이 우람하니 겨울엔 보온성 하나는 끝내주겠더라만. 장가가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형의 기분도 풀 겸 내가 ‘급제의’를 하고 나선다. 형, 우리 회식 한 번 하죠. 기분도 꿀꿀한데? 형이 이맛금을 새기면서 되받아친다. 파도횟집이면 안 간다? 내가 씨익, 웃으며 대꾸한다. 누나도 먹고살아야죠. 아예, 살림 합치고 입대해라, 그냥. 형도 내 제의가 그다지 싫지 않은 기색이다. 퀵서비스 식구들이 몰려오자 주방에 있던 누나의 눈이 커진다. 누나를 보자마자 꼭수 형이 흰소리를 친다. 준화씨, 오늘은 함 주나? 누나가 테이블에 덤 안주를 올리며 퉁바리를 먹인다. 주긴 뭘 줘? 일행이 키득거린다. 그러자 꼭수 형이 또 입을 연다. 시치미 떼기는, 여자들이야 줄 게 뭐 있나, 딱 정해져 있지. 그러자 누나가 쏘아붙인다. 주더라도 완꼭수씨는 안 줘. 종만이면 몰라도? 꼭수 형의 눈이 커진다. 이제 둘 사이를 공공연하게 소문을 내누만. 누나가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 바람에 얼굴이 홧홧거린다. 하필 나를 들먹이다니. 사람들이 한 소리씩 보탠다. 종만이는 좋겠다, 누나가 준다니 말야. 그러고는 지들끼리 또 낄낄거린다. 그러자 완꼭수 형, 또 나서신다. 나도 은비한테 아이스크림 사줄까 싶다, 그럼 줄라나? 그제야 누나도 정색을 한다. 농담은 그만해, 나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합죽입이 된다. 꼭수 형, 농담했다가 자존심만 수제비처럼 뜯겨나간 듯한 인상이다. 꼴이 영 말이 아니다.
누나마저 합석하면서 자리가 거나해지고 말았다. 밤도 제법 깊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털면서 홀에는 누나와 나만 남았다. 오늘따라 누나는 폭음을 하다시피 했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누나, 혹시 가게 내놨어요? 누나는 말이 없다. 대신 소주잔만 꺾는다. 오늘 복덕방 장씨가 보이던데? 내 물음에 누나는 엉뚱한 말을 뱉는다. 우리 오늘 이차로 모텔 갈래? 갑자기 웬 모텔이에요? 가기 싫어? 갈 수도 있죠, 근데 모텔 가서 뭘해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누가 하고 싶대요? 그거야 네 맘대로지. 내가 잠시 머뭇거린다. 넌 누나가 떠나도 이 누나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누나가 엄청 취했다. 이전에는 하지 않던 말까지 한다. 빨리 일어나요, 애들 기다리겠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 안 그래도 애들 생각하면 미치겠으니까. 누나가 소주잔을 또 비운다. 거리의 간판은 불이 꺼진 지 오래다. 할 수 없이 내가 뒷정리를 위해 일어선다. 나도 제법 마셨는지 어지럽다. 이런 상태라면 오토바이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찬우 형 생각이 난다. 오늘 모텔 안 가면 절대 집에 안 들어간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냥 기분이 그래. 혼자 잠이 드는 게 왠지 외롭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를 어쩐담? 시간도 늦었으니 취한 사람 데리고 또 술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없고. 낭패가 따로 없다. 그때 뇌리에 뭔가 스친다.
야, 저게 뭐야? 수족관을 보면서 누나가 소리친다. 저게 바로 무지개송어예요. 와, 예쁘다. 누나의 반응에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배달하다가 우연히 봤거든요. 밤이라서 좀 그렇지만 멋있는 놈이죠? 그래, 저거 먹으면 진짜 마음에도 무지개가 솟는 기분일까? 그럼요, 아마 그 어떤 풍랑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걸요? 누나가 되묻는다. 근데 어쩌니, 식당이 문을 닫아서? 괜찮아요, 다음에 누나랑 와서 먹으면 되죠. 그럼, 우리 소주 사서 모텔 갈까? 또 모텔 타령이다. 까짓 거, 누나의 소원이라니 나쁠 것도 없겠다. 휴식이 최고의 간호사라 했으니 가서 푹 쉬자. 우리는 편의점에서 술과 안주를 산 다음 모텔로 향한다. 오늘 우리가 머물 곳은 무조건 무지개모텔이라 부르는 거다. 내가 화답하는 의미로 환하게 웃어준다. 누나는 방에 들어오자 술병부터 그러쥔다. 너한테 하나만 묻자. 내가 사는 게 어때 보이니? 내가 대답한다. 열심히 사는 게 너무 좋아 보여요. 진짜 그렇게 보여? 그럼요. 내가 고개까지 끄덕여 보인다. 근데 왜 난 이리 힘든 거지? 은비도 불쌍하고 은비 할머니도 불쌍하고 나까지도 왜 자꾸 불쌍하단 생각이 들까? 나는 할 말이 없어 술만 마신다. 내가 왜 모텔 오자고 했는지 아니? 모텔에 오면 은비 아빠 생각이 나거든. 나도 모르게 눈을 치뜬다. 병신 같은 게 호텔도 아니고 꼴랑 모텔에서 자살해 버렸어. 그깟 사업 부도내고 빚만 남겨놓고서. 어느새 누나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갑자기 입 안에 얼어붙은 듯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누나가 계속 말한다. 난 절대 무책임하게 자살하진 않을 거야. 악착같이 살아서 아이들 보란 듯이 키워내고 말 거야. 두고 보라구. 어느새 누나의 눈에는 조개국물같이 진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을 잡고 어깨를 쓰다듬는 일밖에는 없는 듯하다. 그러자 누나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는 듯이 펑펑, 울기 시작한다. 마치 목 놓아 울 곳을 찾아 들어온 것처럼.
*
살면서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느껴야 할 것이 있다. 누나는 내겐 이 둘 다를 깨닫게 해주었다. 게다가 누나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얼마나 외로운 건지 알았다. 모텔에서 누나는 한동안 혼잣말을 해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사는 게 힘든지 코 하나는 끝내주게 힘껏 곯았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누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누나를 세상에 팽개친 채 먼저 죽어버린 누나의 남자를 원망했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것과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다르다고. 처음 사랑을 알게 해준 사람. 아이 둘의 엄마일지라도 내게 누나는 처녀였다. 나를 위해 기꺼이 옷을 벗은 처녀. 나를 구원해준 천사. 그래서 팬티를 다시 입으며 코 고는 소리처럼 힘차게 살기를 바랐다. 제발 이제는 외로워하지 말라면서. 누나의 곁에는 내가 항상 있을 거라고.
누나의 가게가 새로운 인테리어 작업에 들어갔다. 인부들이 몰려와 파도횟집 간판을 떼어내기 시작한다. 꼭수 형과 나는 멀뚱거리며 창밖만 내다본다. 형의 손에는 헬멧이 쥐어져 있다. 벽에서 떨어진 간판이 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그 모습이 물고기 한 마리가 지느러미를 흔드는 것 같다. 아주 먼 곳을 향해 날아가고 싶다는 듯이. 모텔에 간 그 다음날부터 식당 문은 점심때가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다. 혹시 주방 일에 정신이 없나 싶어 안을 기웃거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은비와 유비마저도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기쁨의 절반은 기다림의 황홀에 있다고. 냉동고 아이스크림은 거들떠보지 않은 지 오래다. 몸은 플라이급인데 마음은 점점 헤비급으로 바뀌는 것 같다. 누나가 사는 산복도로 골목 앞을 서성였지만 허사였다. 이제 누나를 만날 기회는 강아지처럼 도망갔다는 걸 안다. 아, 씨부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사도 없이 그냥 가냐? 기어이 꼭수 형도 입맛이 쓴지 한마디 뱉는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선다. 파도횟집 간판이 서서히 땅으로 끌려 내려오고 있다.
이상섭∙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2년 ≪창비≫ 신인 소설상, 2004년 부산 소설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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