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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단편/내가 사랑하는 모자/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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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모자
박 원
방方은 오늘도 모자를 쓰고 출근한다. 삼십 분 지각이다. 아침 회의가 끝난 뒤에야 앙고라 털이 보송보송 올라있는 빵모자를 푸욱 눌러쓰고 천연덕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 모자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애교로 사용되는 무기인 셈이다.
연일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코스닥 동향 분석에 관한 아침 회의는 내내 식은 모닝커피처럼 들척지근하고 미지근하게 진행되었다. 생식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나온 내겐 달고 진한 자판기 커피가 무척 썼다. 인스턴트 수프처럼 처음에는 부드럽게 넘어갔다가 곧 위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메스꺼워지는 것이 자판기 커피를 입 속으로 탁탁 털어 넣고 있는 샐러리맨의 운명인 것 같았다.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깔끔하고 담백한 다섯 잔의 커피를 쟁반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뒤 일곱 명의 직원에게, 지점 로고인 굿모닝 윙크와 함께 서빙하는 일은 당연, 상반기 신입 사원인 방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면접날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정시에 출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점의 문제 여사원인 그녀를 바라보는 지점장의 눈빛은 여전히 느끼하고 미끈거렸다.
“어이, 방은영씨. 요즘 컨디션이 영 아닌가? 조금만 일찍일찍 다니면 금상첨화련만. 내 욕심이려나?”
유체이탈流體離脫. 그녀를 향한 지점장의 목소리는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언제나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다. 마치 내가 언제, 당신의 굼뜨고 느린 몸의 일부였냐는 듯 말이다.
여자 형제들 틈에서 자란 나는 누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바로 독립을 선언했었다. 드세고 목소리가 큰 여자 동창들과는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 것도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방은 말이다. 매사 제멋대로인데다 상관에게만 깍듯한 것이다. 결국 그런 그녀가 광화문 지점으로 오면서부터 나는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의 남성 콤플렉스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다섯 누나들에게 당한 수모와 자존감의 상처가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겨우 단잠을 청하던 내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둘째 누나의 출현으로, 다시 가위에 눌리는 기분이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방은 여전히 모자를 쓴 채 데스크에 와 앉는다. 보라색과 흰색 앙고라 실이 묘한 체크무늬를 이루고 있는 모자다. 나는 다섯 누나들을 통해 모자가, 웬만한 패션 감각 없이는 외출복에 썩 잘 어울리기 힘든 매우 사치스런 소품이란 걸 알고 있었다. 셋째 누나는 겨울이면 곧잘 모자를 사들고 오긴 했다. 물론 남대문 시장 노점에서 팔고 있는 싸구려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모자를 쓰고 외출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검은 색 비닐봉지 속에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모자가 거울 앞에 선 주인의 몸에 걸쳐지는 일은, 쇼핑에서 마악 돌아와 아직 감흥이 채 수그러들지 않은 바로 그 시점뿐이었다. 셋째 누나는 곧, 어떤 옷에도 방금 사온 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정한 현실을 깨닫곤 했다. 행어에 드문드문 걸려있는 몇 벌 안 되는 재킷들을 이것저것 입어본 뒤, 푸우- 한숨과 함께 실망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소비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충동적으로 선택되었다 버려진 모자들은 다음 모자에 의해 대체되기까지 옷걸이 위에서 뽀얀 먼지만을 뒤집어쓴 채 잊혀져갈 수밖에 없었다.
누나들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모자들을 용감하게 쓰고 다니는 점이 조금 색다르긴 하지만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세련되었거나 그리 감각이 있는 타입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모자 속에 숨겨진 대책 없는 웃음 때문이었다. 헤프고 실속 없는 웃음이, 때로는 식상한 유행가처럼 한물 간 외모를 정답게 만들어 주고 있는 거였다. 사실, 그나마 그녀가 웃지도 않는 모습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주걱턱에 비쩍 마른 몸. 잔 새우의 왜소한 몸매처럼 작고 가는 눈에 골이 잔뜩 낀 모습이란 정글의 암 오랑우탄을 떠올리기에 충분할 만큼 엽기적이니까.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을 이런저런 손맛으로 반죽하여 내 놓은 음식의 그럴듯함. 주먹구구, 얼렁뚱땅, 천방지축, 그러니 순간순간 나타나는 그녀의 습관적인 웃음마저 없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만약 방에게, 아무리 까다로운 고객 앞에서도 모든 걸 대책 없는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업무과정 중의 테크닉마저 없었다면, 그 벌칙으로 그녀 머리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모자는 순식간에 그녀의 촌스런 얼굴을 사정없이 덮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목구비가 각기 제 멋대로 바닥에 툭툭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이리저리 채이다 아무의 얼굴에나 뚝뚝 붙어버리는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지금도 내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다섯 살쯤 되는 소년이 아빠의 커다란 벙거지 모자를 쓰고 모래사장에서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단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유행처럼 소년의 것과 비슷한 스타일의 모자를 쓰고 다니었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소년의 모자는 아이들의 머리에 씌워지는 날부터 아이들처럼 날마다 조금씩 자라기 시작하였단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게 자라기 시작했단다. 아이들의 머리를 덮고 눈을 덮고 얼굴을 덮어가다가 이윽고 몸 전체를 휘감았단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소년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커진 모자에 덧씌워져 질식하여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는 조금 끔찍한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그랬다. 이단 교주의 기부금을 받은 혐의로 교단에서조차 외면당한 한 종교 방송국의 라디오 피디였던 아버지는, 실직한 사십대 중반부터 우리 동네에선 소문난 고물장수였다. 역세권의 이십 평짜리 아파트를 오로지 꺼져가는 회사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기부하고 장렬히 퇴직한 뒤, 여덟 식구를 방 두 개짜리 반 지하 연립주택으로 끌고 갔던 대책 없는 가장이었다. 그런데 집에선 잘 웃지도 않던 아버지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5분 거리인 봉천 9동 벌집 아이들에겐 꽤 인기가 있었다. 아마 아이들 눈엔 그저 신기하고 우습기만 한 대머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물을 주우러 다니면서부터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동안童顔이었던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머리카락이 재봉틀에서 실이 풀리듯 한 올 한 올 빠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민둥산처럼 매끈하게 되어 버렸다. 백오십 센티미터의 단신인 아버지는 볼까지 옴폭 꺼져 들어가자 급기야 팔십 년대 만화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변해 갔다. 자라지 않는 얼굴 때문인가. 아버지는 목소리조차 변성기 전의 소년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런 아버지는, 다섯 가구에 하나씩 지어진 공중 화장실 앞으로 아침마다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어느새 동네에 새로 출현한 개그맨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리어카에는 부서진 의자, 다리 한 짝을 절고 있는 세 발 자전거. 재수가 좋은 날은 어쩌다 구닥다리 앉은뱅이 철제 책상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버지가 조금만 손을 보면 산동네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아버지에겐, 금방 뚝딱 고쳐 쓸 수 있는 물건들과 구제불능인 것들을 가려내는 눈썰미가 있었다. 왜소한 몸매를 부풀린답시고 큰 벙거지 모자에 롱 원피스, 스카프까지 두른 아버지는 그들 눈엔 밤무대나 나가는 늙은 여가수로 비춰졌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방송국에서 같이 쫓겨났던 동료들에게 아버지는 뭔가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말이면 으레 아버지에게 놀러와 고스톱을 치며 조촐하고 쓸쓸한 파티를 대신하던 그들은 방학숙제를 껴안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던 내게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아버지 참 멋지시지?
그때마다 난 참 어이가 없었다.
―아빠가요?
―으응, 저 모자가 말야.
발칙하고 당돌한 나의 대꾸에 무안해진 아버지 친구들은 엉겁결에 벽에 걸린 심하게 구겨진 모자, 꼬질꼬질하게 손이 탄 낡은 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프라이드, 아버지의 위엄 같은 모자를. 어쩌면 그건 무조건 가족을 위해 지나치게 굽신거리거나 비굴하게만은 살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단호한 의지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아버지가 난장이인 줄만 알았다. 이건 십대 중반이 되도록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진지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아버지는 자기보다 십오 센티미터나 큰 어머니 앞에서 그리고 다섯 누나들 앞에서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앳된 목소리는 마이크를 들이대어야 들릴 수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흐릿했다. 생태학자들이 밀림을 쑤시고 다니며 찾아낸 희귀곤충의 음향처럼 해독불능의 코드들을 조합해 놓은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당장 무능한 가장을 가장의 권좌에서 밀어냈다. 초등학교 산수 담당 평교사로 정년퇴임한 어머니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곧잘 아버지에게 적용하곤 했다. 어머니의 해법에 의하면 첫째, 아버지는 존재하되, 그 흔적은 집안 어느 구석에도 남아 있지 않아야 했다. 둘째, 아버지는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부자 아빠를 꿈꾼다.”
무능한 아버지, 모든 가족에게 무시당하는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장남인 나는 몇 번이고 이렇게 부르짖곤 했다. 오로지 부자 아빠가 되는 것만이 나의 남성男性을 보장해 줄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였다. 대학 4년간을 오로지 증권회사 입사 시험에만 몰두해야 하는 명분이었다. 일찍이 돈맛을 아는 부자 아빠가 되는 꿈 말이다.
오후가 되자 점심시간 전까지 북새통을 이루던 지점 안이 조금 평정을 되찾은 듯하다. 나는 이번 달 내내, 집중 투자하고 있는 G그룹의 주가 시세를 점검해 보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동안 격심한 변동을 보이다 지난 달 갑자기 천정부지로 치솟던 상한가는 비자금과 관련된 그룹회장의 구속사건을 타고 잠시 주춤거리는 듯하다. 다행이다. 모니터에서는 14%라는 숫자가 흐리고 진하기를 반복하며 명암을 달리하다가 점점 뚜렷하게 도드라진다. 얼었던 호스에 비로소 구멍이 뚫리는 조짐이 보인다. 주가가 상승하면 펀드 매니저인 나도 상승하는 법이다. 나는 J일보의 표 기자가 취재를 나온 걸 뻔히 알면서도, 벌떡 일어나 굽신거리지 않는다. 양 호주머니에 채워진 빳빳한 지폐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상하리 만큼 침착하고 여유로운 기운이 내부의 혈관으로부터 은밀히 전달되는 듯 편안하다. 기분이 썩 좋다.
“어이, 신 대리. 오늘 G그룹 건설 종목은 좀 어때?”
표 기자가 묻는다.
“뾰족한 수가 없어요. 어디로 굴러갈지 예측을 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공은 둥글다. 주식도 둥글다.”
나는 능청을 떤다.
“그래도 경제 담당 기잔데 기사를 선문답으로 쓸 수야 있나.”
표가 은근히 나를 떠보는 것이다.
“요즘 누가 신문을 봐요. 장場은 투자전문가의 말과 반대로 간다잖아요.”
나도 되받아 친다.
“그럼 우량주 나타나면 정보 좀 줘. 나도 부자 아빠를 꿈꾼다구.”
표가 우리는 ‘동업자’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한다.
“아, 네에.”
나도 윙크를 날린다.
“기사 쓰고 나올 테니까, 저녁 같이 하자.”
표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좋죠.”
내 목소리가 유난히 맑다. 곧이어 표는 지점장 전용 노트북실로 사라진다. ‘블루칩은 아무나 챙기나? 훗’ 코웃음이 난다.
‘저녁은 무슨…….’
저녁엔, 인사동에서 석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대학 동창회가 있다.
약속 장소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오랜만에 우리 학번 메이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소례’가 나온다고 녀석들은 난리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십년 동안, 처음 듣게 된 그녀의 소식이다.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고액의 명품 만년필 같던 그녀는, 내겐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조소례. 그래, 그녀에겐 분명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하고 세련된 무엇이 있었다. 캠퍼스 라이프인가 하는, 대학생을 겨냥한 잡지의 표지 모델로도 나올 정도였으니까. 연예인이나 전문 모델처럼 깎아지른 듯 완벽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한없이 밝은 듯하면서도 한 겹만 벗겨내면 차갑고 우울한 그늘이 덧씌워져 있는, 마치 애플파이처럼 달콤새콤한 빵이 여러 겹으로 쌓여있는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중적인 표정이 풍기는 야릇한 묘미 같은 것 말이다. 우아하면서도 촌스럽고 평범하면서도 독특하고 소탈하면서도 예민한. 어쨌든 그녀의 크고 둥근 얼굴에 큼직큼직하게 배치되어 있는 이목구비는 십년 전만해도 꽤 미인형에 끼던 외모였다.
입대를 앞두고 과 동기들이 조촐한 환송회를 열어주었을 때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신촌 어느 주점에서 막걸리를 퍼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위해 나와 준 친구들 중에 그녀도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 외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차분한 어조에 심사가 배배 꼬이고 있었다. 입대 전, 나의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과 그녀의 발랄하고 안정된 목소리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심한 괴리감이, 점점 나를 충동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 후문의 친구 녀석 지하 자취방에 얹히어 살던 대학시절의 나는, 시험 때마다 종종 그녀에게 바칠 엄청난 컨닝 페이퍼를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우곤 했었다. 시험에 임박해 그룹 스터디를 만든다, 족보를 훔쳐온다, 유난을 떨던 덜떨어진 녀석들과 달리, 가방 속에 늘 케이스 채 들어있는 파카 만년필로 1번부터 또박또박 정자체로 답안을 적어나가는 그녀가 굳이 내 페이퍼에 눈독을 들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만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분명 대가없이 바라고 한 일이었지만, 군대 입대를 앞두고 있던 불안한 내겐 일말의 보상 심리가 카펫 위에 흥건하게 엎질러진 물처럼, 허무하게 비어버린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오고 있었다. 어떤 위로로도 달랠 수 없이 그것은 이미 깊이 곪아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섭섭한 마음들은 이미 분노의 감정을 넘어선 뒤였다. 알 수 없는 수치심. 좋게 말해 열정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는 실연의 상처가 울컥 올라오고 있었다.
나쁜 년.
그녀가 나를, 나의 페이퍼를, 나의 존재를 무시해왔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그녀는 나를 늘 웃으면서 대했었다. 화려한 리본으로 묶여진 무관심을 포장한 웃음으로 말이다.
이미 마음이 뒤틀려 버린 내 옆에는 그녀의 부티 나는 빌로도 모자가 차분하게 놓여있었다. 그녀는, ……모자였다. 한 끼 천원의 학생식당 정식으로 4년 내내 점심을 해결하던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값비싼 모자. 나는 콧날이 시큰해졌다. 모자에 비해 내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슬프고 화가 났다. 빈속을 달래보겠다고 우적우적 씹어 넘긴 포테이토, 골뱅이 소면, 샌드위치, 비엔나 소시지 양파 볶음, 뒤엉킨 소스들 같은 나.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의 모자 안에 안주를 토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저런,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고 그녀는 곧 울상이 되었다. 나는 잔을 들고 취한 척하며 슬쩍 다른 자리로 옮겼다. 고의적인 요소가 다분한 실수였다. 하지만 분명, 의례적인 사과라도 했어야 했다.
결국 오늘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이리저리 눈길을 피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급기야 친구들이 하나둘 내리고 자정이 가까워 온 지하철 안에서 그녀와 단 둘이만 남게 된 것이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어쩌면 취기 때문에 피돌기가 갑자기 안면 근육 쪽으로 몰리고 있는지 모른다. 문득 그녀와의 첫 데이트가 생각난다. 어느 여름 대학로에서 자판기 콜라를 뽑아 마시던 기억들. 뉴질랜드의 활화산이 터져 마그마라도 발밑에 흘러 다닌다면, 지금 이대로 그녀와 함께 화석이 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그녀의 옆에 내가, 아니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는데 말이다. 평범하고 온난한 서울의 날씨는 우리를 끝내 갈라놓았던 건가. 하얗게 하얗게 하얀 길을 만들어 가고 싶던 우리를.
하지만 이젠, 너무나 평범하게 변해버린 그녀에게 예전의 귀족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젊은 나이의 이혼이 그녀의 주가를 삼켜버린 듯 이십대의 신선하고 경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착한 얼굴에는 잔주름만 퍼져 있다. 벌써 삼십대 중반의 허무가 묻어나고 있다. 그녀의 비쩍 마른 얼굴에 스며있는 애처로운 미소에서 나의 우울한 삼십대가 녹아 있는 것만 같다. 무엇이든 이루어야 하고 무엇이든 되기 위해 어떤 그룹에도 끼어야 하는 비열한 서른다섯.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그렇게 빨리 늙어가고 싶지 않다.
“나, 여기서 내려야 돼.”
그녀와 함께 열 정거장이나 지나쳐오면서도 안부 한 번 따뜻하게 물어보지 못하던 나는 목적지보다 두세 정거장 먼저 내리기로 결정한다. 실은 그녀가 모자 사건을 끄집어낼까봐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추억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왕이면 십년 전의 사과를 지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마저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모자 사건은 결코 너의 고의가 아니었을 거야, 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마저 숨어 있는 것 같다. 아님, 그냥 내 쪽에서 운이라도 떼주기를, 제발 무슨 말이라도 먼저 걸어주길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내리겠다는 내 말에 소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린다. 그동안 나의 불편했던 심사를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듯 말이다.
제기역인가? 차간이 유난히 넓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을 치다 나는 조금 휘청거린다. 지하철은 다음 역을 향해 출발하고 그녀는 손을 오른쪽 귀에 가져다 대며 전화하자는 모션을 암호처럼 건넨다. 나는 답례라도 하듯 핸드폰을 꺼내 멀어져 가는 그녀의 얼굴을 담는다. 넘버 05에 저장한다.
그녀의 생활과 나는 이제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풍부한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고 나는 그녀와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내 의지나 선택 없이 직, 간접적으로 엉키고 엮이게 되는 인간들과의 관계만도 피곤했다. 대학 때의 순정은 내겐 이미 지나가 버린 감정이었다. 어디선가 우연히 소례를 다시 만난다 해도 이젠 담담할 것 같았다.
하지만 화폐로 유통할 수 있는 거래만큼은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애널리스트 홍洪은 지난달부터 고정 게스트로 출현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M음반사 주식을 투자 유망종목이라고 추천하고 있다. 오늘까지 M음반사의 주식은 하루 동안 만이천 원이 오르면서 칠만칠천 원으로 장을 마쳤다. 한 펀드가 지난 달 주식시장에서 지분을 사들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가가 크게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투자자들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다. 곧 M음반사의 주식은 800선을 웃돌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동안 주식 시장에서 단련된,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조화된 나의 간단한 조작만 합세한다면 입술 한 번 ‘앙’하고 깨물어 1억 원 정도의 시세차익을 챙기는 일쯤은 사우나에 누워 있는 일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미 홍은 내부적으로 M음반사와 인수 계약을 맺고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삼십 대의 부자 아빠를 꿈꾸면서 투자의 속성과 원칙을 알고 있다는 건, 준비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 기대수익이 크면 위험도 크다는 것. 그 문구를 적은 쪽지를 나는 늘 양복 안주머니 포켓에 넣고 다닌다. 명분 없는 대박은 꿈꾸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윤리 의식만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므로.
다음은 태도다. 순리적으로 주어지는 배당에만 만족할 것이냐 보다 공격적으로 발품을 팔 것이냐의. 이 때 내가 가진 배짱을 어떻게 활용할까 결정하는 것은 한 차원 위의 감각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얼마만큼 신뢰가 두터운 사람과 한 팀이 되느냐에 따라 나는 모자에 숨은 난장이도, 대로大路에 출연한 거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대박을 꿈꾼다면 거래 비용 따위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으니까.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다년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 현장에서 뼈가 굵은 파트너들만 골라낸다면, 그래서 그들과 산뜻하게 거래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수 있다면 일찍이 이처럼 명쾌한 인간관계를 꿈꾸던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던 아이를 신동이라 부르던 예전과 달리, 이천년 대의 영. 유아기의 풍속은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먼저 눈에 익히는 데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노인네와 어른을 구별하는 기준 역시 컴퓨터 애용도에 있을 것이다. 주식투자는 퇴직 이후의 지적인 노인들이 집안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부업이다. 손익에 대범하고 약간의 수리 능력만 있다면 하루 밤 사이에도 일이 천은 쉽게 벌고 또 잃을 수 있는 스릴이 있으니까. 당연 경영 계통 학생들의 재택 아르바이트로도 손색이 없는 거다. 경제력이 곧 경쟁력이 되는 사회에선 누구나 부자를 꿈꾸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법이다. 물론 이들이 웃고 울 수 있는 자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조금 유감스러울 뿐이지만. 부자를 꿈꾸는 거인들의 검은 손은 마음만 먹으면 소인들의 여리고 흰 손을 맥없이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회사는 바빠지고 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객장엔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있다. 매번 보는데도 시뻘겋게 물들어있는 시세 판은 해독할 수 없는 UFO의 암호처럼 낯설다. 연말 부실 증권사와 투신사를 정리해 개인들의 자금에 손해가 없게 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이 경제신문마다 머리기사로 실려 있긴 하지만 부실 증권사든 부실 투신사든 간판만 걸어놓으면 객장 안으로 모여드는 것이 그 개인들이다.
“신 대리님! 지점장님 호출이세요.”
방이 빙긋 웃으며 내게 콜을 한다. 지점장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지는 꽤 오래된 것 같다. 나는 조금 의아하다. 책상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서류들을 한 곳으로 모아 놓고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지점장은 오른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며 앉아 있는 회전의자를 오른쪽 왼쪽 십오도 각도로 비틀며 빙빙 돌리고 있다. 거기 앉으라는 듯 턱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시선을 내 정강이께로 고정시킨다. 유난히 상체가 짧은 탓인지 양 가슴살만 도드라져 보인다. 스모선수처럼 목에서 가슴, 가슴에서 배로 연결된 동선이 지극히 짧다. 그의 탁한 눈엔 무엇인가 내게 털어놓지 않은 말들이 숨어있는 거 같다. 이제부터 그걸 얘기해야 할 텐데 아직 뜸이 들지 않은 듯 모니터 속의 증시변화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순간순간의 자금 변화에 애써 대범해지려는 듯 그는 짧고 흔한 감탄사조차 삼간다.
‘저 인간 또 분위기 잡기 시작하는군. 제발 힘을 빼고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해 보란 말야. 서투른 충고를 하고 싶어 온갖 알리바이를 갖다 붙이지 말고 솔직, 담백, 칼칼하게. 나, 참…….’
나야말로 하고 싶던 말들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그렇게 일, 이 분 지났을까. 지루하고 길게 느껴진다. 그가 나를 벌세울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분위기를 미묘하게 몰고 가는 그에게 한껏 화가 나고 독이 오른다. 훗. 마침내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반항이 콧소리로 표출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참는다. 윗사람에게 사근사근하지 못하고 붙임성 없다는 고약한 소문 때문에 필요 없는 허물을 잡히고 싶지 않다. 그때다. 문 위에 매달려 있는 종이 두어 번 흔들거리며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지점장과 나 그리고 출입자의 눈이 동시에 유리문 위에 매달린 종의 피사체로 초점이 모아진다. 애널리스트 홍이다. 그가 거기 서 있다.
‘저 양반은 또 웬일인가.’
나는 지점장을 외면하려고 고개를 돌리다 홍의 당황한 눈빛과 마주친다. 지점장이 벌떡 일어난다. 그가 이제껏 기다리던 사람이 홍인 것 같다. 어느새 하체가 곧게 뻗어 있는 그의 두 다리가 성큼성큼 홍과 나 사이를 가로질러 오고 있다.
“어서 오세요. 홍 선생님. 아, 신 대린 아직도 서 있었나?”
마지막 어미에 뼈가 서려 있다. 예상은 별로 빗나가지 않는다. 지점장은 앉자마자 반말로 지껄이기 시작한다.
“당신들이 요즘 무슨 짓하고 돌아다니는지 내 맞춰볼까? 이런 일 처음은 아니지. 하지만 당신들은 너무 용감했어. 내 선에서 봐 줄 수 있는 용량을 잘도 넘어가고 있더군.”
지점장은 홍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빈정거린다. 홍도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눈치다. 하지만 홍과 나는 이내 평심을 되찾는다. 지점장 따위에 벌벌 떨 그와 내가 아니다. 나는 종이컵 속에 놓여있던 녹차 팩을 들어 슬그머니 탁자 바닥에 옮겨 놓는다. 연두 빛의 차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사각 팩이 유리를 깔은 탁자 위에 천천히 주저앉는다. 수분을 한껏 흡수했던 곱게 말린 차 팩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오그라들기를 반복한다. 말기 신장병 환자의 콩팥도 이처럼 힘들게 수축 이완 작용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식어버린 미지근한 물만 혼자 출렁거리고 있는 종이컵을 나는 힘껏 그러쥔다. 의외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과 달리 거친 감정들이 울컥 손아귀에서 출렁거린다. 지점장을 똑바로 쳐다본다.
다행히 홍이 먼저 입을 연다.
“당신이 요구하는 게 뭐요?”
지점장이 썩소를 날리며 되받아친다.
“간단해. 분배의 법칙. 아, 물론 조작에 필요한 머리를 나도 잠깐 빌려줄 테니까.”
이를 갈고 있던 나는 드디어 다 쓰러져 있는 녹차 팩을 지점장 쪽으로 집어 던지며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가 이제껏 뜸들인 게 얼만데 당신을 끼어줘?”
지점장의 눈 밑으로 지리고 강한 녹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특유의 그 재수 없는 웃음을 날리며 천천히 말한다.
“선택은 빠를수록 좋아. 승자는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지. 설마 이 바닥에 칠 년째 있었으면서 순간의 판단 착오로, 감방에서 세월 보내느라 상한가로 치솟은 인생 주가를 종치고 싶진 않겠지? 정확히 이십 사 시간 후 결과는 문자로 알려 줘.”
홍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일어선다. 홍이 지점장실의 유리문 자동 버튼을 힘있게 누른다.
“불로 소득에 도통한 인간답군요.”
홍이 내 귓가에 대고 말한다. 기가 막히고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홍은 방송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앉는다. 각종 경제신문과 주식과 관련된 서적들, 내게 얼마간의 여유자금을 운용해 달라고 맡긴 고객들의 명단, 그리고 서류들이 외계에서 배달되어 온 물건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몇 번 숨을 고르다 객장으로 나간다. 나의 복잡한 심사와 상관없이 그곳은 오후를 넘도록 활기에 넘치고 있다. 아침 오픈 때부터 들이닥쳐서 자판기 커피를 여섯 잔 째 마시며 죽치고 앉아 있는 중년 신사의 뒷모습도 그 활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아버지처럼 늙어버린 사람들, 나와 언젠가 한 번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객장에 몰려 있는 것 같다. 평생을 고물 장수로 고물처럼 산 아버지에게 나는 모터를 달아 주고 싶었다. 내가 취직했을 때부터라도 아버지의 인생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목표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후진하던 트럭을 피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까지 내내 고물장수로 살다갔다. 아마, 온통 벽에 소례 사진으로 도배를 하고 다녔던 대학시절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세상에 있는 아버지가 객장을 기습 방문한다 해도,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가를 알게 된다면 그는 여전히 쓰디쓴 미소로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갔을 거다. 학자가 되라던 아버지. 다 읽어버린 책까지도 화폐로 재생산되던 시대는 가요 속으로 숨어들고, 지나간 지식은 냄새나는 ‘가래’로 취급되는 시대에 나마저 가난한 아빠가 되란 말인가. 나는 아버지의 조용한 유언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는다.
사람들이 잠시 앉았다 떠나간 소파에는 따뜻한 온기만 간직한 채 분화구가 움푹 패여 있다. 이름과 생각을 숨긴 채 익명匿名으로 왔다가 익명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사람들의 인상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건강한 희망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오늘을 또 어떻게 견디다가 돌아간 걸까. 푹신한 소파 사이사이에는 지나간 과월호 여성 잡지들이 펼쳐져 있다. 침대에 벌렁 누워 있는 듯 묘한 안정감을 준다. 나는 선 채로, 건성건성 몇 페이지를 넘겨본다. 그러다가 거리에서 무슨 헌팅 인터뷰인가를 한 사진에 손길을 멈춘다. 낯익은 얼굴, 그녀는…… 사진 기자의 실수로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가 겹치는 부분에 얼굴이 접혀져 나온, 너무 웃고 있어 입가에 주름이 심하게 접혀 있는, 소례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녀와 마주치지 않길 바랬다. 아니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동창회 사이트에도 들락거렸고, 그녀와 헤어졌던 1호선 지하철을 혼자 타고 갔다가 제기역에서 내리기도 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가끔 그녀가 생각났다. 아직 내 구토물이 지워지지 않았을 그녀의 빌로도 모자 때문일까. 이제는 심하게 곰팡이가 피어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을, ……악취. 마술 모자에 얽힌 아픈 상처들을 쿡쿡 쑤셔 대곤하던, 늘 내 몸에서 나던 냄새들 때문일까.
처음 입사했을 때 가평으로 신입사원 수련회에 갔던 나는 일찌감치 튀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사원 장기자랑에 자원했었다. 모자를 이용한 마술 묘기였다. 나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마술쇼를 흥미진진하게 보곤 했었다. 공 공칠 본드걸과 같은 늘씬한 미녀와 함께 나오던 그는 늘 캡이 큰 모자를 쓰고 나왔다. 주문만 하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튀어나왔다. 그런 그가 관객 앞에서 모자 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을 때마다, 저러다가 물건을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마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무엇이든 부르는 대로 튀어나오던 물건처럼 그가 모르는 또 다른 얼굴이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이상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매주 보톡스 주사를 맞으러 다니는 늙은 여배우처럼 너무 팽팽해서 현실감이 없는 얼굴, 웃는, 우는, 화난, 보통의 어떤 표정도 사라진, 어떤 감정도 없는 그런 얼굴 말이다. 그가 만약 내게 그런 가면을 하나 만들어 준다면 나는 서류 가방 속에 애완인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나를 바꾸고 싶을 때마다 적절히 사용할 텐데.
내가 시도한 마술 묘기도 비슷했다. 관객들에게 가장 소중히 아끼던 물건 한 가지씩을 받은 다음 모자 속에 넣고 기합을 넣어, 비둘기가 튀어나오게 하는 조금 난이도가 있는 마술이었다. 모자 위에 보자기를 씌울 때 재빠르게 모자 안주머니에 비둘기를 넣는 게 핵심이었다. 완벽한 묘기를 보여 주기 위해 개인레슨을 받기도 했었다.
드디어 마술이 시작되었다. 지점장들만 모인, 자리가 자리인지라 거둬들인 소지품에는 고가의 물건들이 많았다. 외국 바이어에게 받은 명품넥타이, 스카프, 심지어 다이아몬드 1캐럿 결혼반지까지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모자 속에 쑤셔 넣고 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아무리 다정하게 불러도 비둘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둘기는…… 잠이 들어 있었다. 너무 활동적으로 날개짓 하는 걸 막기 위해 공연 전 수면제 오분의 일을 잘라 먹인 게 화근이었다. 오줌까지 싸 놓고 잠이 들어 있었던 거다. 나를 사라지게도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게도 할 수 있는 어떤 모자, 가파른 출세를 꿈꾸다 저지른 실수였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내 사물함 앞에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선다. 책상 서랍에서 그때 썼던 마술 모자를 꺼낸다. 내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인다. 헛된 욕망 때문에 부끄럽다.
“나라는 인간의 파일을 삭제하거나 수정해 주렴, 제발.”
주문을 외운다. 거울에 비친 나를 향해 외친다. 떳떳하지 못한 자아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그렇게 모자를 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 흔들거리는 진실 속으로 안전하게 도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게 한참을 쏘아본다. 그런데 문득 거울 속에는 제기역에서 나를 바라보던 소례의 착한 눈이 마술처럼 떠올라 있다. 그건 군대에 입소하던 날 논산 훈련소까지 나를 배웅 나와 준 그녀의, 작은 격려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녀는 그때도 모자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고 나 역시 용서를 구하지 않았었다. 그냥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아 주고 있었다.
이제야 나는 그때의 이십대가 그립다. 비록 가난하고 서툴렀지만 그 시절의 소례를 다시 한 번쯤은 만나고 싶다. 나는 저장번호 05의 사진 파일을 천천히 불러온다.
박원∙1971년 생, 2004년 ≪세계의 문학≫에 「브로콜리로 장식한 송어」로 등단. 「당신은 새물청어를 닮았다」, 「달콤한 잠」, 「애니메이터」 등을 발표. 현재 명지대학교 글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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