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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②/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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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②
내 시탁詩卓은 조촐하게 빛난다
복효근의 시집 <마늘 촛불>
이중기의 시집 <오래된 책>
이덕규의 시집 <밥그릇 경전>
문신의 시집 <물가죽 북>
열림:맛있는 시가 그립다
천진스럽게도 나는 이런 말을 꺼낸다. 맛있는 밥처럼 맛있는 시가 그립다. 나는 정말 찰지고 감칠맛 도는 그런 시를 먹고 싶다. ‘신서정’이나 ‘다른 서정’을 내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시가 맛없는 것은 아니다. 시가 깊은 사유를 드러내지 못한들 또 어떠랴. 그런다고 해서 시의 맛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시는 시 자체로 맛깔스러울 때 가장 먹음직스럽다. 시욕詩欲을 자극하지 못하는 시는 엄밀히 말해서 시다운 시가 아니다. 물론 시욕도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최근 활발하게 씌어지는 ‘낯선’ 시들에서 가장 왕성한 시욕을 느낄 것이다. 걸지게 차려진 낯선 시상들에서 풍성한 시탁詩卓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신선하지만 낯선 시상은 질린다고. 소화 불능의 난경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고. 푸릇푸릇한 야채는 상큼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감성이 더부룩해진다. 익지 않은 상상력과 낯선 감성이 끊임없이 속을 긁어대는 것이다.
난 이제 내 혀에 익숙한 시상을 찾아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시편詩篇들을 먹고 싶다. 요즘같이 진위가 거꾸로 도착되는 시대에는 그것만이 위안이자 위로이다.
더 이상 뒤틀린 감성과 비틀어진 이성에 현혹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그것이 새로운 경지의 연상과 창작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고 할지라도 나는 거부하고 싶다.
기갈 든 삶을 풀어주는 시들이 간절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뾰족한 감성을 달래주고 의심의 사유로 번득이는 이성의 눈을 위무하는 시, 그런 시들 어디 없을까.
그런 때 내 눈에 안착한 시들이 복효근의 <마늘 촛불>, 이중기의 <오래된 책>, 이덕규의 <밥그릇 경전>, 문신의 <물가죽 북> 등이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다들 농촌 전원을 펼쳐놓고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촌놈임을 자인하면서 이 계절을 이 시들에 바친다.
고백하자면 나는 한동안 ‘농農자’로 표상되는 시들을 피해 다녔다. 내 부끄러움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까닭이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무거운 비애를 받아 안기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 시들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한편으로 버겁고 또 한편으로 후련하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기쁜 것은, 이 시들은 틀림없이 최근의 ‘주류적 흐름’인 ‘묘한 서정’이라는 질곡들에서 비켜나 있다는 점이다. 은근히 자족적인 이런 시들이 있어 내 시탁은 조촐하게 빛난다.
1. 복효근:삶의 긴장을 다독이다
복효근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한결같이 그의 시는 맛깔스럽다. 천연의 맛을 시詩 촉에 깃들여 놓는다. 이런 초지初志의 시도詩道가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럽겠지만, 내게는 참으로 다행스럽다. 나는 그에게서 돌아가 누울 수 있는 모성의 품안을 발견한다. 그는 맛 잃어 찾아가면 되살려주는 뒤안의 장독대 같기도 하다. 그가 끓여주는 곰삭은 시 맛은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삶의 긴장을 토닥토닥 다독인다. 이번 시집 <마늘 촛불>에서 그의 시 맛은 한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복효근, 「마늘 촛불」 전문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이 구절만으로도 나는 감격한다.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 아니라, 정말 환하게 내 맘에 불 밝힌다. 이럴 때 촛불은 촛불이라기보다는 등대 같다. 등대의 사랑 같다.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낼 뿐만 아니라,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천지를 향해 쏟아져 가는 불빛인 것만 같다. 초록색 심지에 붙은 불이 생명으로 자라나 청계광장에도 불 밝히고 민주광장에도 불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마늘아기의 현신이다. 여전히 꺼지지 않는 내 마음 속 촛불이 순간 마늘 촛불과 오버랩되면서 전설 하나를 엮어낸다.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울컥 솟구치면서 “조금은 매콤하고 아릿”한 마늘아기씨 사랑 같은 게 그려지는 것이다. 물론 그 전설은 촛불광장에서 마늘 촛불로 애틋하게 타오를 테지만.
그런데 그런 전설이 마늘 속에만 있는 건 아니다. 정령처럼 상수리나무에게도 깃든다. 이때의 상수리나무는 마을 원로쯤은 되어서 삶의 지혜나 예지 같은 것을 “넌지시 들려주”기도 한다. 그 자체로도 여럿 생명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때려대는 사람들에게 “굵은 눈물 같은 상수리를” 한 소쿠리씩 골고루 나눠주는 상수리나무에게서 나는 촌로를 본다. “벗겨진 제 상처를 안으로 오그리며” 가진 것 모두를 골고루 나눠주는 상수리나무는 곧 우리 모두의 에미애비인 것이다.
이 마을 숲엔 몇 십 년 묵은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모여 산다
하나같이 허리께에 커다란 웅덩이 같은 상처가 있다
그 옛날 마을 사람들 떡메를 지고 와서
나무둥치를 쳐 울려 상수리를 땄기 때문이다
나무를 쳐댈 때마다
나무는 굵은 눈물 같은 상수리를 한 소쿠리씩
쏟아 냈을 것이다
벗겨진 제 상처를 안으로 오그리며
나무는 하늘로 더 멀리 가지를 뻗었을 것인데
그 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썩어가는 둥치 속으론
버섯이 자라고
청개구리가 기어들고
또 풍뎅이가 알을 깐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나무는 무슨 이야기 같은 것 혹은 노래 같은 것을
이것들의 입으로 날갯짓으로 들려주곤 하는데
내 살아갈 길을 넌지시 들려주는 것도 같은데
한 계절도 아니고
한 해로도 끝나지 않아서
아예 이 숲에 살림을 차려서 모시고도 싶다
―복효근, 「상수리나무 스승」 전문
2. 이중기:흙의 양심은 솔직하다
이중기는 아프다. 스스로도 아프고, 시도 아프고, 읽는 사람도 아프다. 그 아픔은 물론 그의 것이 아니다. 본래는 환희여야 할 생산의 기쁨을 앗아간 자본주의에게 돌려주어야 할 아픔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함께하는 자는 거의 없다. 흙과 농부와 곡식들만 동병상련으로 앓고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에게 농경農耕은 농경農經이 아니다. 농사를 경시하거나 경멸하는 의미의 농경農輕이 된지 오래되었다. 이중기 시집 <오래된 책>은 그래서 아픈 시집이다. 쿡쿡 쑤시는 것처럼 아프지만, 벼리는 각오는 단단하다. 흙을 향한 애정과 농민적 삶의 태도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각별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솔직한데 나는 그것을 흙의 양심이라 생각한다.
흙은 스스로를 결코 속이지 못한다.
엄청 나이를 많이 잡수신 책이 있다
비바람 눈보라를 배경으로 일주문은 초라해도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걸어야 옛날 경전에 닿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책으로 생을 연마했으나
철없는 것들이 번역본으로 읽어 오해가 많다
이 책은 원문으로 읽어야 티끌 같은 세상이 잘 보인다
허리 구부정한 부족국가 늙은이들이
불량기 많은 비바람 눈보라 노역을 시켜
단절 없는 인간의 시간을 집필한
오래된 미래,
흙으로 만든 책
―「오래된 책」 전문
“오래된 미래,/흙으로 만든 책”은 인류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경전이자, 생명의 서이다. “비바람 눈보라를 배경으로 일주문은 초라해도/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경전이다. “사람들은 이 책으로 생을 연마했으나/철없는 것들이 번역본으로 읽어 오해가 많다.” 나는 번역본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찌 우리 먹거리를 번역할 수 있겠는가. 번역할 수도 변혁될 수도 없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우리 먹거리는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우리 것이다. 모든 영양소를 대체하는 화학 캡슐이 등장한다 해도 사람들은 먹는 즐거움을 기꺼이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농경에는 또 노동 이전의 교류와 교감이 있다. 천지만물의 조화 없이는 농사지을 수 없다. 자연의 배려와 더불어 나 아닌 것(식구, 이웃, 동물)들과의 소통에 대부분 등 기댄다. 물론 작물과의 교감은 말할 것도 없다.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
밥이나 먹고 보자며 짜장면 집으로 몰려가자
그걸 지켜보던 밥집 주인 젊은 대머리가
저런, 저런 쌀값 아직 한참은 더 떨어져야 해
쌀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
밥은 안 잡숫고 뭐! 거시기 수입 밀가루나 처먹어?
에라, 이 화상들아
똥 폼이나 잡지 말든지……
그 말이 가슴을 쳤다
나는 그 말 듣고 내 마음의 일주문을 부숴버렸다
일주문이 박살나자 적반하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 말이 가슴을 쳤다」 전문
가슴을 칠 만한 말이다. “똥 폼이나 잡지 말든지……” 속이 다 후련하다. 똥 폼 잡는 사람, 똥 폼 잡는 일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밥이나 먹고 보자며 자장면집으로 몰려가”는 행위만이 똥 폼 잡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행위는 실은 사소한 똥폼에 속할 것이다. 민중을 기만하고 역사를 속이는 위정자들의 똥폼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애교에 불과하다. 똥폼을 지적하면 그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적반하장의 몽둥이를 휘둘러대고는 했다. 몽둥이로 입막음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런데 참 어이없게도 이게 옛날 일이 아니다. 번개보다도 빠른 인터넷시대에 사람들 입을 막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법놀음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비판하는 낌새만 보이면 엄정한 법집행과 체포라는 협박부터 꺼내든다. 그야말로 경찰국가가 아닐 수 없다. ‘엄정한’이란 말이 설사할 똥폼이다.
이런 행태를 에둘러 내 엉거주춤한 생의 똥폼을 뒤적여 본다. 부끄럽다.
3. 이덕규:의뭉스런 변전이 꿈틀거리다
넉넉한 해학과 여유, 느긋한 시선과 직정의 몰입. 이덕규 시의 미덕이다. 그는 바삐 가지 않는다. 서두르지도 않는다. 골골이 새겨진 주름살 같은 이랑 속에는 격랑의 숨결 가쁘지만, 겉으로 뵈는 외양은 한가롭다. 분노마저도 사그라든 것처럼 비친다. 한량이라 할까. 예지와 본능은 살아 번득이는 한량. 그리하여 그의 시에서는 의뭉스러운 변전이 무시로 꿈틀거린다. 이번 시집 <밥그릇 경전>에서는 그 점이 더욱 풍요롭게 번져간다.
입 속이 궁금해지면
고추장 항아리 속에 묻어두었던
어머니 팔뚝을 꺼내 먹습니다
종아리를 꺼내 먹습니다
어느 소슬한 가을 저녁의
살 오른 근심을 말갛게 닦아
통째 절여두었던 당신
찬물에 밥 말아
미라처럼 쪼글쪼글해진 당신의
그 짜디짠 생살을 씹어 먹으니
오, 면면히 유구하겠습니다
―「장아찌」 전문
발상 자체는 괴기스럽다. 저절로 식인 습관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는 맛있는 장아찌 먹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모성을 그리면 참 대단한 애정을 나는 이 시에서 만난다. 우리는 모두 살모사 새끼가 아닌가. 어미의 살 저며 먹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통째 절여두었던 당신”의 “살 오른 근심” 덕분에 우리는 말갛게 우리의 삶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미라처럼 쪼글쪼글해진 당신의/그 짜디짠 생살을 씹어 먹으니/오, 면면히” 내 삶은 “유구하겠”다.
특이하게도 맛난 어미를 나는 이 시에서 맛본다. 우리 시에서 이렇게 어미를 맛나게 그린 시는 아직까지 없었다. 불효의 기막힌 반전이다. 이런 시를 일컬어 골계미의 진미珍味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덕규의 골계미는 성적인 것과 결합할 때 한결 풍요롭다. 대지를 해석하는 그의 시선은 곧잘 성교性交로 표현되고는 하는데 그게 참 오묘하게 아름답다. 전혀 추잡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오입쟁이 늙은이의 비참한 말로가 참으로 애잔하게 그려지는 다음 시도 그렇다.
쟁기질하던 낡은 경운기 한 대가 보습을 흙 속에 박은 채, 밭 가운데 그대로 멈춰 서 있다
평생 흙 위에서 헐떡거리다가
한순간 숨이 멈춰버린 늙은 오입꾼처럼
평소 그에게 시달렸던 잡초들 우북이 달라붙어 그를 헐뜯는 동안
마지막 남은 양기를 한 끝에 모아
땅속 깊숙이 쥐어짜 넣듯 일의 뒤를 즐기고 있다
어디든 오래 묵어 자빠진 비알 밭의 속살에 탱탱하게 선 날을 밀어 넣으면
고압 전류에 감전된 짐승처럼 심장이 터져라 부르르 떨며 달려가던,
그가 지나온 이랑마다 푸른 정전기 일듯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던가
어느 집도의가 급하게 열었다 대충 봉합해버린 가슴 언저리 볼트 몇 개가 느슨하게 풀려서
무시로 드나드는 바람을 따라 그의 몽롱한 의식 속으로 들어서면
조용하다, 먼지 한 톨 없는 엔진실
이모노합금 바닥에 아직 남아 굳어가는 검은 기름의 침묵이
꺼진 흑백 화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거기, 한 사내가 이제 막 일을 마친 듯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묵한 눈망울을 굴리다 간다
―이덕규, 「복상사腹上死」 전문
알고 보면, 낡은 경운기가 보습을 밭에 댄 채 삭아가는 모습을 그린 시이다. 그게 성적인 묘사를 통해 참으로 활인적으로 살아나 생동감 있는 시세계를 펼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양기를 한끝에 모아/ 땅속 깊숙이 쥐어짜 넣듯 일의 뒤를 즐기고 있다”라든지 “어디든 오래 묵어 자빠진 비알 밭의 속살에 탱탱하게 선 날을 밀어 넣으면/ 고압 전류에 감전된 짐승처럼 심장이 터져라 부르르 떨며 달려가던”과 같은 표현은 볼 사알짝 발그레해질 만큼 생생하다.
아마 경운기를 보고 복상사를 떠올리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덕규는 그런 점에서 우리 상상력의 한 곳을 살짝 틔워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 문신:애련한 듯 함초롬하다
새로운 시인과 시집을 만나는 일은 큰 즐거움이다. 거기에 자기만의 무늬와 상상력을 키워가는 시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문신이 그렇다. 나는 그의 시집 <물가죽 북>에서 어눌한 듯 참신한 시경詩境을 읽는다. 완전히 농農은 아니어서 위의 시집들과 같이 읽는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범농계(?)라 아주 다르지는 않다.
너무 길어서 여기에 다 인용하기 어려워 내려놓은 시 중에 「뚜껑」이 있다. 길게 늘어뜨려 서사적으로 ‘뚜껑론’을 펼치는데 그 밑자리에 놓인 남도 가락 같은 전라도 정서가 애련한 듯 함초롬하다. 요즈음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정조를 담아 두고 있다. “이땅의 흙과 물과 불로 빚고 우리 숨결을 덧입혀 놓은/남도 여자 같은” 그런 뚜껑과 “배를 맞추어 두고 뒤란 모퉁이 볕 바른 자리에 살림방 한 번 차려보고 싶다”고 그가 읊을 때 나도 딱 그러고만 싶다.
문신의 이런 정조는 표제작 「물가죽 북」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애련과 함초롬 위에 적적한 무심결을 살근 얹힌다.
새벽, 저수지를 보면
끈 바짝 조여 놓은 북 같다
야트막한 언덕이 이 악물고 물가죽을 당기고 있어서
팽팽하다
간밤 물가죽에 내려앚은 소리들이 금방이라도 솟구쳐오를 것 같다
낮고 빠르게 다가온 검은 새 한 마리
둥-
물가죽 북을 울리고 가는 동안
물가죽 북에 이는 파문은
무심결이다
물가죽 북이 울어
소리를 눌러두고 있던 반대편 하늘 가죽도
맞받아 운다
검은 새 한 마리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그것들 번갈아가며 냉큼 받아 먹는다
―문신, 「물가죽 북」 전문
내가 이 시에서 관심 기울이는 부분은 ‘물가죽 북’에 있지 않다. 나는 이 시의 절정을 5연에 둔다. “물가죽 북이 울어/소리를 눌러두고 있던 반대편 하늘 가죽도/맞받아 운다”라는 상상력은 단순치 않다. 천지의 조화를 그는 물가죽과 하늘 가죽으로 풀어내고 있다. 눈 깊게 드리울 대목은 또 있다. 그 조화행의 시초도 검은 새이고 그 조화음의 수혜자도 검은 새라는 점이다. 천지를 열고 닫는 것이 검은 새이다. 삼족오 신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이 새는 영험한 존재이자 빛의 주관자이다. 새벽을 여는 자인 것이다. 저수지에서 시작된 연상이 검은 새를 지나 창조의 새벽까지 가닿는다.
이런 연상이 나는 시를 지극하게 한다고 본다. 저속하고 괴기한 이미지의 연속상이 연상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문신이 써갈 시의 연대기를 주목하고 싶다.
닫힘:이땅의 존재감에도 눈 돌리자
마감하면서 아쉬운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의 부재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농업 무시 정책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 농촌경제가 바닥에 떨어져 거의 파탄 날 지경이다. 한미무역협정이 통과되면 촛불항쟁에서 드러난 쇠고기 파동보다 더 심한 무역 불균형이 심화될 테고 가뜩이나 위축된 우리 농촌은 갈가리 찢길 것이다. 그러면 농민의 삶은 근저까지 파괴될 것이고 피폐된 농촌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쯤 되면 농촌은 위기가 아니라, 백척간두 벼랑에 내몰린 셈이다. 그런데도 이중기의 <오래된 책>을 제외하고는, 시집들이 이런 위기 상황에 다소간 둔감하게 반응한다.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관조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더라도 이런 생각의 편린들이 이들 시집 어딘가에는 반드시 자리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어느 누구보다 이들은 이 땅과 흙에 더 밀접하게 자기 시의 모태를 묻고 있는 까닭이다.
근심과 우울에 싸인 저 들과 산의 신음을 들어보라. 늙고 병든 절망의 한숨소리 아닌가. 이건 시적 경향이나 관점 이전에 존재에 관한 시적 물음이다. 이렇게 말하면, 가끔 ‘나에게 미학을 포기하라는 말이냐’라고 눈 부릅뜨는 분들이 계신다. 그럴 리가? 나는 오히려 미학을 심화시키라고 드리는 말씀이다. 미학은 묘사나 형식을 둘러싼 외피가 아니다. 삶의 전부면을 능히 감당하는 미학은 실존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발 디딘 이 땅의 존재감에 눈 돌릴 때이다.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가 있음.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펴냄.
- 이전글34호(2009/여름)/젊은시인집중조명/가난한 성에서 외 9편/문동만 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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