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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젊은시인집중조명/가난한 성에서 외 9편/문동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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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만
가난한 성에서 외 9편
가끔 들르는 이곳은 나의 일터
두 팔을 벌리면 베란다 창이 다 막아지는 도시의 누옥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과 미쳐서 말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이 아래위집에서 배수구로 말을 소통하는 곳
혼혈인 듯 눈이 깊은 아이가 자전거를 타며 싱그럽게 웃는다
여자들은 억센 음절이거나 묵음으로 홑겹의 몸에 닥칠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저들은 어디에서 쫓겨났거나
가까스로 성주로부터 세간 한 칸을 얻은 사람들
제 정신이 아닌 소녀는 무턱대고 아무 차문을 열고
입정거리를 나꿔채 가고
상한 간肝을 돗자리 위에 널어놓고
화투를 치는 몇몇의 머리맡에
몇 남지 않은 적단풍이 떨어진다
아홉 평 칸칸의 새한도 속으로 들어가는 노부부의
병노한 행색이 나의 전생 같으다
가난이 그치지 않는 성에서 나는 가깝고도 먼 곳을 본다
강 건너엔 땅을 너무도 사랑하여서
땅을 사면 그 땅에서 돈다발이 열리고
집을 사면 집이 새끼를 쳐 번성한다는
기이한 풍속도 눈에 선했다
시래기처럼 밤새 바스락거리던 몇몇은 각혈을
멈추고 끝내 강을 건너 운구되기도 하리라
물에 에인 날들
더운 날일수록 틈이 많은 사각빤스가 좋을 것이라
짐작하겠지만 계단을 죽어라 오르다 보면
싸구려 빤스의 밑단 때문에 허벅지가 쓸리고
땀은 까진 살갗을 시리게 한다
물에 살을 에인 날들
직선을 보수하는 것이 나의 업
계단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무용지물로 만들수록
유능한 기술자가 된다
생각보다 계단만큼은 극구 걷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직선이 고장 나면
참지 못하고 간혹 뒤통수에 욕을 하거나
언제까지면 직선이 수리되겠느냐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욕을 먹어야 밥이 나온다
밥은 나를 서두르는 사람으로 조련시켰다
성실해야 할 인간으로 나는 오인되거나 규정되어졌다
오늘은 부자들의 호화아파트의 직선계단을 고쳐주러 간 것이다
아파트 로비에는 대리석이 그 위에 양탄자가 그 위에 가죽소파가
그 위에 대형텔레비전을 보다 그 위에 잠들었으면 싶었다
어머니 그깐 마늘일랑 그만 까세요 내 허벅지처럼
손가락이 쓰리잖아요
그런 잠꼬대나 하고 싶었나 보다
사각빤스를 입어 사타구니께가 쓸리는 날
나는 포경수술한 아이처럼 한쪽으로 기우뚱하다
미로가 분명한 회로도면 위로 땀방울이
빗발 같고 공구를 집어던진 채
나는 아득히 길을 잃고 싶었다
수직의 배반자
엘리베이터는 수직으로 운동하지만 동력은 회전체다
도드레가 쇠줄을 돌려 직선의 운동력를 만든다
미세한 힘들이 수직의 탄 듯 만 듯한 승차감을
탄생시킨다, 수직의 어머니는 곡선
맞물려 돌아가는 곡선의 아귀힘으로 수직이 산다
하여 방자해진 수직은 자주 모체母體를 은폐한다
편리함 아늑함 속도전 그 따위 밑에 숨어서
어떤 가증스런 수작이란 걸 숨기며 내달린다
먼저 땅이 인간에게 부장 당했다
이제 계단도 옵션인양 걷는 시대
거기서부터 형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팽팽한 쇠줄들이 죽은 땅을 끌어올리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곡선이 죽으면 후레자식이었던 직선들이
따라 죽게 될 것이다
아마 땅을 칠 땅도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집게발
약간의 불안과 불온이 있는 개펄에서
순식간에 농게의 집게발이 사라졌다
작심하고 던진 흙덩이 하나 때문에
안전한 구멍으로 사라진 집게발
더듬이를 들어 다시 사위를 살피는 집게발
아득바득 체제를 아끼며 살다
평온이 지루해지면 기어 나오는 습성을 지녔다
성실히 먹이를 찾거나 구멍을 파는 생활은
누구에게나 공인 받는다
밥벌이를 핑계 삼아 간혹 자주 숨는 집게발!
가끔 거리에서 팔뚝질하다
다시 얕은 구멍에만 숨는
그러다 못 견디겠다는 척,
다시 드는 나의 집게발!
암癌
그 병원의 수술대기실은 모두 암덩어리들의 식구들이다
그들의 말 속에 주어는 ‘암’ ‘암’ ‘암’일 뿐이다
뚜껑을 연다-는 말은 생살을 들어 안에 자란
‘암’의 실체를 본다는 것인데,
어떤 젊은 여자는 암을 달고도 떼어낼 수 없다하자
온 식구들이 그 암을 부여잡고 운다
암, 암, 하고 울부짖자 암이, 배시시 웃는 것이 보인다
저 암은 후레자식처럼 붙어서
제 모친과 함께 죽으려는 것이다
죽음만이 암을 죽일 수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부당한가
그러니 가벼운 암들은
그 앞에서 희망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러니 희망은 또 얼마나 정당한가
환관의 무덤
*
아파트 부지를 파헤치다 무덤 수백 기가 드러났다
환관 내시들의 무덤이리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거세되었지만 발굴되었다
거세의 권능이 있었던
왕의 성기性器는 어디서도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떼무덤은 낙관의 징표
단절되지 않는 王은 없다고,
모든 뼈다귀들은 똑같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
비석치기라던가
봉분 위에다 여자를 눕히는 자들도 있고
무덤을 들춰 밥벌이를 하는 도굴꾼들도 있다
무덤을 옮겨 일당을 맞춰야 하는 포크레인 기사도 있고
청약통장을 들고 무덤 위에 들어설
새집을 기다리는 성실한 가장의 시간도 있다
한 사람이 실존을 견디다 못해 십오 층 베란다에서
담뱃불인양 낙하하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금 발굴된 무덤 위에도
입주와 동시에 장만한 장롱 위에도 똑같이 흘러간다
시간만큼은 수평이어서 지나치게 적나라한 평등이어서
나는 생활을 위안하기도 하고
지지하지 않는 자가 왕이 된 것도 서러워하지 않는다
왜 배당하지 않는가
시위로 길이 막히고 장사꾼들의 가게가 분주하지 않았으므로
손해보상이 청구되었다
물경 수천억 원의 손실이 그래프로 제시되었다
그리하여 순치된 자들이
어떤 이의도 없이 신호등을 지켜 보도로만 차분히 걷기 시작하였다
광장의 잔디는 밟히지 않아 보리순 같이 자랐고
호객의 꼬드김과 게워낸 구토물이 넘치는
활기찬 밤거리로 복원되었다
그리하여 날마다 평온으로 얻은 부가가치가 천문학적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 사람은 궁금해 묻기 시작했다
이의는 갖은 방법으로 통제되었으나 입을 찢진 못했다
왜 국가는 날이면 날마다 차고 넘치는 평온의 적립금을
왜 배당하지 않는가?
예외 없이 마이너스인 나의 통장에 당신의 통장에
말 궁둥이를 두들기는 꿈*
말들을 방목하던 마들, 일제 특경에 쫓기던 전설적 노동계급 출신 사회주의자 이재유가 잡힌 곳, 한사람을 잡으려 스물일곱 명의 잠복한 사냥개들이 달려들어 포박해놓고는 기념사진을 찍을 때, 발목 부러진 사내는 덤덤하게 오지 않은 미래를 쳐다본다. 1호선과 4호선이 엇갈려 지나간다. 마치 1호선은 시작하는 선이라면 4호선은 끝으로 가는 선 같이 가로질러, 나는 짐짓 회고하는 양 길다란 길을 매달고 가는 전동차의 흐릿한 꽁무니를 본다. 60년 전의 사내를, 쫓기고 쫒기며 마실 물도 얼어버린 중랑천 가에 쓰러져 우는 하얀 옷의 붉은 사내를, 낡은 누비옷 사내를 등허리에 메고 어딘가로 숨겨주고 싶었던 그날을, 나는 한 점 불빛도 없는 토굴 속에서 언 알몸을 부둥켜 비벼 겨울밤을 나더라도 그를 살려냈으면 싶었던 모양이다. 중랑천은 탁하게 흐르고 60년 전의 바튼 숨소리가, 그가 흘린 각혈이 삼성래미안 금호어울림 현대아이파크 골조 아래 수맥으로도 흐를 것인데, 닫힌 새장에서 먹이만 기다리는 세상이 잠시 서러웠던 모양이다. 방목을 거부하고 자유의 들을 달리고 싶었던 갈기 세운 말들의 튼실한 궁둥이를 냅다 두드려보고 싶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는 짐짓 회고하는 양, 흐릿한 전동차 궁둥이 먼지를 털어 몇 대 먼저 보낼 뿐이다
* 안재성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수록내용과 기록사진에서 참조하였다.
직설의 강물
―實用이를 찾아서
실용이란 놈을 찾으러 문경새재부터 달래강까지 숨차게 뛰어다녔다.
실용아 어딨니 실용아! 나보다 300살은 더 먹은 주목에게도 물어보고
새재를 넘는 사람들 굽어보다 일제 때, 송진 강제 공출하느라
몸에 깊은 칼을 맞은 조령 적송에게도 물어보았다.
관문에서 어묵을 파는 아저씨한테도 물어보고 백두대간에서 풍찬 노숙하기를
집인 양 하던 산사람에게도 물어보았다.
달래강의 다슬기에게도, 얼음장 밑에 숨은 꺽지에게도
무르팍이나 적시고 말 수심의, 종이배나 띄웠음 적당할
강물에게도 물어보았다. 한결같이 안다는 답이 없었다.
섬진강가에서 잔뼈가 굵은 쌍칼 형님께도 물어보았다.
그 강도 댐을 막으니 물길이 탁하고 물이 줄어 옛날에 비하면 어림도 없더라고
강가의 숫염소처럼 순한 풀을 씹을 뿐이셨으나,
그의 머리에도 단단한 뿔이 돋고 있었다. 여차하면 들이받을 듯,
묵언으로 살고 흐르는 것들은 실용이니 참여니 국민이니 독재니
전에도 살았던 것들이고, 저 잡것들이 기저귀 차기 전에도
순명대로 흐르고 살았던 것들이어서 그런지
숨 가쁘게 달려가는 것들을 너그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모래톱은 어떻게 말했던가.
수백만 년 풍화를 겪으며 알알이 밀려 온 모래톱은
실용이란 놈이 모래무지처럼 제 품에 숨은 적도,
품어준 적도 없더라고 하였다.
여차하면 시멘트에 제 몸을 섞어주지 않을 듯하였다.
그래, 모래는 낱낱이 흩어짐으로 산하를 도와줘야 하리라
벙어리 삼룡이도 아니고 유령이 實用이!
연암, 다산이 생환하신다면
곡학아세의 표본들을 수원화성 기중기에 달아 삼박 오일 간 북어처럼
말려 때려줄 놈이로다 하실 것을 직감하면서
대답 없는 실용이를 찾아 부르고 불러보았다.
혹 그는 짝퉁 이순신이었던가
―짐에게는 하루 12척의 바지선을 운송할 수 있는 운하가 필요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업자들과 토호들의 이익과 정권 유지를 위하여
능히 반대를 위한 반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졸지에 물리쳐야 할 왜적인 양 오인 표적된 우리는
실용이를 찾아 족치러 날밤을 새며 쫓아다녔으나 빌어먹을
탄금대에 빠져죽었는지 남한강에 쓸려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단언컨대 아무리 실용적으로 실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실용이는 들어간 만큼 돈을 되돌려줄 자도,
만인을 강물에 띄워 평온히 유람시킬 자도,
물이 썩으면 그 모든 강물을 갈아줄 자도,
똥물을 더불어 마셔줄 자도 아니었으며,
국내산 생수가 떨어지면 에비앙 생수, 바이칼 호수를 공수해 들이킬 자들,
그리하여 실용이는 이 나라 이 산하가 제 것이 아닌 것들.
내가 얼핏 본 실용이는 전봇대 뽑힌 자리에 여전히 전봇대가 있는 줄 알고
‘개발’을 높이 들어 조건반사 하듯 오줌이나 갈기는 것들.
자신의 멀쩡한 내장을 스스로 파헤쳐 건강하게 살아가는 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작 20년도 못 살 인간의 망상을 비웃으며 강물은 흘러가고
은유가 아니라 직설로 직설로 욕지기를 뱉으며 흘러가고
서정과 정치는 딴 몸이 아니라 꾸짖으며 흘러가고
눈 털어낸 솔잎은 더욱 푸르게 허공을 찔렀다.
그리하여 강물은 곡선이었고 비명은 직설이었다.
망중한
산수유 쭈그렁 열매가 다 떨어지기도 전에
꽃이 왔다
할매가 태기를 얻은 줄 알았으나
아, 갓 핀 꽃이 쭈그렁 세월을 품는다
무슨 심심한 일이라도 벌이라고
아, 꽃이
꽃만 왔다
문동만∙1969년 충남 보령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창간호로 작품 활동 시작. 1996년 시집 '나는 작은 행복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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