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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젊은시인집중조명 해설/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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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68회 작성일 09-12-20 23:19

본문

|해설|
노동자의 시선과 곡선의 시간
 이성혁|문학평론가


1980년대 노동자 시인의 대거 등장은 문화 혁명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경제적 불평등뿐만 아니라 심각한 지적 문화적 불평등을 겪어야만 했다. 장시간 노동해야 했던 그들은 교육과 고급문화-문학과 예술-로부터 차단되어 있었고, 이러한 차단이 도리어 그들을 인간 이하로 보는 시각을 정당화했다. 당시 은밀히 통용되었던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하적인 표현은, 그러한 시각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적 불평등과 이에 따른 노동자에 대한 멸시의 시선은 노동자 스스로 자기 비하를 내면화하게 되기 때문에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지적 문화적 불평등을 생산하는 사회 시스템에 문제를 던지지 못하고 노동자 스스로 자신들이 ‘원래’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자기 비하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그대로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급문화는, 그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대중문화는 고단한 노동 후의 노동자들을 위무해주면서 동시에 그들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나 예술가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예상하고 창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창작 그 자체, 고급문화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의 수용 상에서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과 이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효과다. 그렇기에 노동자들 스스로 ‘시’라는 고급문화를 직접 창작해냈을 때, 그것에 대해 부르주아 문화에 그들이 흡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것은 부르주아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효과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즉 노동시의 대거 등장은, 지식과 문화의 차별을 통해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동시에 노동자들 스스로 그 배제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 등장은 지배적인 문화가 가진 계급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지식과 문화의 수용이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피지배 계급 스스로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고를, 더 나아가 불평등한 문화의 생산과 수용 시스템이 변화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사고를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 시인의 등장에 대해 문화 혁명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노동시에서 예전의 노동시가 가지고 있었던 문화 혁명적 의미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문화가 네트워크 식으로 조직되는 경향이 생기면서 좀 더 중층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1990년대 중반 이후 진행된 노동시 퇴조의 이유에 대해 말하려면 여러 가지 분석과 설명이 필요할 터인데, 여기서 말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더 나아진 것은 없다는 것은 말해두어야 하겠다. 노동자들을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 그들을 문화에서 배제하는 분위기는 예전보다 약화된 건 사실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투쟁-문학 면을 포함하여-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적 문화적 불평등은 존속되고 있으며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빈부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커졌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속성은 사회 관계 속속들이 스며들어 사람들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손익을 따지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여러 면을 따져보면, 어쩌면 현재 노동자들의 처지가 1980년대보다 더 악화된 측면도 있는 것이다. 
자본이 만들어놓은 계급적 인간관계를 비판하면서 그 관계에서 탈주하기 위한 연대를 추구해왔던, 그리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노동시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가 네트워크 식으로 짜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손익과 실용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자본의 권력은 그 관계 속으로 침투하여 더욱 교묘하게, 또는 더욱 노골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상의 분자적 수준에서도 자본 시스템의 지배가 이루어져서 사람들의 삶 자체마저도 지배되어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주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적 문화적 경제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노동자 시인들은 이 지배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예민한 정신으로 인식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고 추구한다. 그들은 지배적인 문화에 의해 은폐되곤 하는 그러한 불평등을 주시하고 드러내며 이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면서 다른 세계의 도래를 희망한다. 노동자 시인들이 그렇게 하려는 것은, 여전히 노동자들은 자본에 의해 직접적으로 착취되고 있고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여러 불평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문동만 시인도 자본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노동자 시인 중 한 명이다. 
「물에 에인 날들」을 보면 문동만 시인이 노동하는 현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보수하는 노동자다. 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그는 계단으로 ‘죽어라’ 걸어 올라가 그것을 수리해야 한다. 여름에 그러한 일을 해야 할 때는 “싸구려 빤스의 밑단”이 땀에 젖어 허벅지가 쓸려서 괴로워해야 한다. 어머니 역시 마늘을 까느라 손가락을 쓰려 했던 것처럼, 노동자인 아들 역시 쓰린 허벅지로 일 해야 하는 것이다. 대를 잇는 가난은, 이 모자가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일을 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그런 고생을 한다고 해도 노동자는 아파트의 주민들로부터 빨리 수리하지 못한다고 욕을 먹을 뿐이다. 엘리베이터의 운행은 직선의 행로에 따른다. 그래서 시인은 엘리베이터를 ‘직선’이라고 표현하는데, 아파트 사람들은 그 직선에 순응되었기 때문에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야 하는 “계단만큼은 극구 걷지 않으려”고 한다. 직선은 자본주의의 특성을 추상한 것이다. 잉여가치를 더 빨리, 그래서 더 많이 창출하려고 하는 자본은 시간을 특질 없는 직선으로 변화시킨다. 즉 시간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질 못하고 단축시키려고만 하는 것이다. 
생활의 편리함도 얼마나 빨리 수행될 수 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자본에 포섭된 삶은 시간을 빨리 단축시킬수록 합리적이라고 여기고 실용적으로 이익을 본다고만 여긴다. 아파트의 사람들이 계단을 걷지 않으려는 것은 ‘쓸 데 없이’ 몸도 힘들뿐더러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적 화자를 윽박지르고 시적 화자도 “서두르는 사람으로 조련”된다. 그들은 그를 “성실해야 할 인간으로” 규정한다. 그 성실함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계단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에 의해 판단된다. 그의 업은 “직선을 보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에 고용되어 노동해야 한다. 그의 노동은 자본을 재생산하고, 그리하여 자본의 직선도 재생산된다. 자본에 고용된 시적 화자 역시 그 직선을 보수하여 작동시켜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편리함을 위해 투여되는 그의 노동은 곡선으로 걸어 올라가 힘들게 행해져야 한다. 곡선의 노동이 직선을 지탱한다. 반대로 그의 노동은 직선에 의해 추동된다. 그는 빨리 빨리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곡선의 노동이 직선처럼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삶은 더욱 고통 받는다. 스프링을 늘려 직선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보다. 스프링은 탄력을 잃어버린 채 삐뚤삐뚤 일그러진 흉한 철사가 될 뿐이다. 
원래 곡선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활동은 자본의 직선을 위해 투여되면서 고통스러운 노동이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의한다. 노동자는 곡선의 활동을 해야 하나 직선적인 노동이 강제되고 있기 때문에, 그는 편리성과 합리성을 자랑하는 자본의 직선이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여러 국가 장치들이 각종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스러운 노동이 결국 직선을 보수하는, 즉 자본을 재생산하는 노예 노동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그는 그 호화 아파트의 주민과는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가난을 면치 못하는 그의 노동에 의해 혜택 받는 이들이 대리석으로 장식된 호화 아파트의 거주민임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노동이 무엇을 위해 행해지는지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노동자는 「가난한 성에서」 묘사되는 도시의 누옥에서 일을 할 때도 있다. 그 누옥의 세계는 호화 아파트의 세계와 180도 대조적이다. 시적 화자가 “가끔 들르는”, “가난이 그치지 않는 성”인 이 누옥에는, “어디에서 쫓겨났거나/가까스로 성주로부터 세간 한 칸을 얻은 사람들”,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과 미쳐서 말이 끊이지 않는/사람들”이 “겨울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각 건물을 돌아다니며 건물을 수리해야 하는 그의 노동은 이렇듯 대조적인 세계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게 한다. 한 편의 세계는 쫓겨난 사람들의 세계로, 그 속에서 사람들은 파괴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삶의 활력을 빼앗긴 가난의 세계다. 반면 그가 엘리베이터를 수리해주었던 아파트가 있을 강 건너 편 세계는 “땅을 사면 그 땅에서 돈다발이 열리고/집을 사면 집이 새끼를 쳐 번성한다는/기이한 풍속”의 세계다. 그것은 투기로 이룩된 부의 세계다. 이렇게 지척의 거리에서 대조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빈부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는 이 세계의 모순을 드러낸다. 시인이 이 분열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세계 다에서 노동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립자의 입장에서 투시한 것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입장에서 투시한다. 죽어라 노동해야 하는 그에게 가까운 세계는 강 건너 세계가 아닌 누옥의 세계다. 땅과 집이 돈을 벌어 이룩된 강 건너의 부에 대해서 시인은 ‘기이한 풍속’이라고 비꼬면서 거리를 둔다. 자신의 노동에 의해 지탱-‘보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욕을 해대는 부의 세계에 대해 시인은 비판적인 인식을 할 수밖에 없다. 저 호화 아파트로 대표되는 직선의 세계를 만들고 지탱시키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저 부의 세계의 거주자들은 자신을 건설한 노동자를 부에서 배제시키고 더욱이 일을 더 잘하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욕을 해댄다. 하지만 그 노동자들은 저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은 저 부의 세계를 직접 만들고 수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 세계의 번드르르한 겉모습의 내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는 시인 역시 저 거주자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 직선을 그리며 수직 운동하는 엘리베이터의 동력이 회전체라는 것이 그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수직으로 운동하지만 동력은 회전체다 
도르레가 쇠줄을 돌려 직선의 운동력를 만든다
미세한 힘들이 수직의 탄 듯 만 듯한 승차감을 
탄생시킨다, 수직의 어머니는 곡선 
맞물려 돌아가는 곡선의 아귀힘으로 수직이 산다   
하여 방자해진 수직은 자주 모체母體를 은폐한다 
편리함 아늑함 속도전 그 따위 밑에 숨어서
어떤 가증스런 수작이란 걸 숨기며 내달린다
먼저 땅이 인간에게 부장 당했다 
이제 계단도 옵션인양 걷는 시대 
거기서부터 형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팽팽한 쇠줄들이 죽은 땅을 끌어올리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곡선이 죽으면 후레자식이었던 직선들이
따라 죽게 될 것이다 
아마 땅을 칠 땅도 없을 것이다
―「수직의 배반자」 전문

그래서 이 노동자는 “수직의 어머니는 곡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노동자가 곡선을 그리며 계단을 올라가 노동을 해야 직선이 유지되듯이, 돌아가는 도르레의 “곡선의 아귀힘”이 수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직선의 세계, 자본의 세계, 부의 세계는 노동자들의 노동, 즉 “미세한 힘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세계의 거주자들은 이를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부를 누리기만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방자해진 수직”의 세계는 “모체를 은폐”하는 것이다. 모체를 은폐하면서 표면을 장식하는 것은 “편리함 아늑함 속도전”이다. 하나 그 표면 자체가 곡선의 힘, 노동자들의 협력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시인은 투시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저 모체를 잊어버린 수직의 세계는 땅마저도 버리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땅이 인간에게 부장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베이터 바닥은 죽은 땅이다. 자신의 발판을, 대지를 잃어버린 직선은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지하여 위로 상승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순리에 거슬러서 무리를 계속 범하다가는 파국이 올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엘리베이터, 그 죽은 땅을 끌어올리던 곡선의 쇠줄이 끊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곡선의 힘, 노동자의 힘이 끊기면 직선의 세계는 땅으로 추락하여 파괴될 것이다.
노동자의 비판적인 시선은 영원할 것처럼 위용을 과시하는 자본의 한계를 포착한다. 그는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유지되는 자본의 내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환관의 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아파트 부지를 파헤치”는 노동을 하는 그는 환관의 무덤은 발굴되지만 왕의 성기는 발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거세의 권능이 있었던” 왕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노동자는 아파트를 파헤치는 노동을 통해 알게 된다. “시간만큼은” “적나라한 평등”이라는 사실을, “단절되지 않는 王은 없”으며 “모든 뼈다귀들은 똑같다”는 사실을 저 환관의 무덤은 알게 해준다. 그래서 “저 떼무덤은 낙관의 징표”이다. 그렇다면 역시 지금의 지배 세력의 권력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 역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지하지 않는 자가 왕이 된 것도 서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낙관의 힘 덕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직선이 곡선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결국 곡선에 의해 직선은 지탱된다는 낙관, 권력 역시 영원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지금의 지배 세력 역시 단절될 것이라는 이 낙관은, 노동 과정 중에 발견된 사실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므로 관념적이지 않고 단단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노동자의 시선은 자본이 영원히 승리할 것처럼 보이는 외면의 이면을 투시한다. 그래서 이 시선은 ‘실용’이라는 현 정부의 이데올로기의 이면 역시 투시할 수 있다. 「왜 배당하지 않는가」에서 시인은, 당연시되어 배포되는 그 이데올로기를 브레히트처럼 낯설게 만들어 뒤집는다. 파업 시에도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듯이 촛불시위대 때문에 길이 막혀 손해를 봤다며 장사꾼들이 배상을 청구하는 행위는 삶의 존엄성 문제를 경제적 손익 문제로 환원하는 ‘경제 이데올로기’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막대한 보상금 지불을 요구하는 행위는, 손익이 민주적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을 밑에 깔고 있다. 국가는 이 보상체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본과 ‘장사꾼’의 손을 들어주어 사실상 파업권과 집회의 권리를 시민과 노동자들로부터 박탈한다. 하지만 소통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가로막은 자는 국가였고, 그래서 장사꾼들은 불이익을 받은 것이다. 평화적 시위였기에, 경찰이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장사는 더욱 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국가에게 있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하려면 국가에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위 때문에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국가의 논리는 거짓이요 이데올로기다.
국가가 경제 논리를 들먹이며 보상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시민 및 노동자들을 ‘순치’시키기 위해 이의를 “갖은 방법으로 통제”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하지만 국가는 사람들의 “입을 찢진 못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논리에 대해 “몇 사람은 궁금해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손해 보상을 제기한다는 협박은 어느 정도 먹혀들어 이제 사람들은 “어떤 이의도 없이 신호등을 지켜 보도로만 차분히 걷기 시작”했고, 또 “호객의 꼬드김과 게워낸 구토물이 넘치는/활기찬 밤거리로 복원되”어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여 “평온으로 얻은 부가가치가 천문학적으로/쌓이기 시작했다”면, 그 물음은 과연 그렇게 쌓이기 시작한 부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손익 논리를 거꾸로 뒤집는다면, 그 평온은 시민들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므로 평온의 적립금은 다시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비판하기는 「직설의 강물―實用이를 찾아서」에서도 행해지는데, 그 시에서 시인은 현 정부의 공식 이데올로기인 ‘실용’에 대해 직설적으로 공격을 가한다. 뒷부분을 읽어보자.

단언컨대 아무리 실용적으로 실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실용이는 들어간 만큼 돈을 되돌려줄 자도, 
만인을 강물에 띄워 평온히 유람시킬 자도,
물이 썩으면 그 모든 강물을 갈아줄 자도,
똥물을 더불어 마셔줄 자도 아니었으며, 
국내산 생수가 떨어지면 에비앙 생수, 바이칼 호수를 공수해 들이킬 자들,
그리하여 실용이는 이 나라 이 산하가 제 것이 아닌 것들. 
내가 얼핏 본 실용이는 전봇대 뽑힌 자리에 여전히 전봇대가 있는 줄 알고
‘개발’을 높이 들어 조건반사 하듯 오줌이나 갈기는 것들. 

자신의 멀쩡한 내장을 스스로 파헤쳐 건강하게 살아가는 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작 20년도 못 살 인간의 망상을 비웃으며 강물은 흘러가고
은유가 아니라 직설로 직설로 욕지기를 뱉으며 흘러가고
서정과 정치는 딴 몸이 아니라 꾸짖으며 흘러가고 
눈 털어낸 솔잎은 더욱 푸르게 허공을 찔렀다. 
그리하여 강물은 곡선이었고 비명은 직설이었다.

운하를 파면서 대지를 망가뜨리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정부는 ‘실용’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시적 화자는 ‘실용이란 놈’을 직접 찾아본다. 하지만 실용이는 찾을 수 없었고 “업자들과 토호들의 이익과 정권 유지를 위하”는 현 정부의 실체만 시적 화자는 발견한다. “아무리 실용적으로 실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운하는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현 정부가 내세우는 실용이는 “국내산 생수가 떨어지면 에비앙 생수, 바이칼 호수를 공수해 들이킬 자들”일 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하를 파는 것이 실용이라는 정부의 논리는 “자신의 멀쩡한 내장을 스스로 파헤쳐 건강하게 살아가”자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다. 이 인간의 망상에 대해 강물은 “직설로 욕지기를 뱉으며 흘러”간다. 가치의 생산은 노동이 하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마실 물을 주는 강물처럼 자연이 한다. 바로 직선을 지탱시켜주는 곡선인 자연을, 그것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자연을 실용이랍시고 파괴하려는 이 정부에 대해 강물은 욕지기를 하고 비명을 내지르게 된다. 비명을 지르며 욕지기를 하는 것이기에, 그 말은 직설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의 모태를 파괴하고 있는 이 ‘실용’정부에 대한 시적 대응과 비판은 비명의 직설을 내지르는 강물처럼 직설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때 직설의 서정과 정치는 결합하여 “꾸짖으며 흘러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서정과 정치가 결합된 직설의 시가 어떠한 것이 될지, 이번에 발표된 신작시들에서는 구체화되어 작품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한편, 이 시에서 시인은 인간 삶의 모태이자 가치 창출자인 자연을 따라 사유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순식간에 사라지는 집게발」에서도 그러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이 시는 자본에 포획된 생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불안과 불온이 있는 개펄에서/순식간에” “안전한 구멍으로 사라”졌으나 “더듬이를 들어 다시 사위를 살피는” 집게발에서, 시적 화자는 “아득바득 체제를 아끼며” “밥벌이를 핑계 삼아 자주 숨”다가도 “평온이 지루해지면 기어 나”와 “거리에서 팔뚝질하다/다시 얕은 구멍으로 숨는/그러다 못 견디겠다는 척,” 다시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삶을 혁명에 쏟아 붓는 혁명가의 저항은 아니지만, 시적 화자는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저항도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촛불 집회에 나온 이들도 그러한 저항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게릴라식 저항이 격렬하거나 삶을 다 거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더라도, 효과 면에서는 현 상황에 걸맞으며 그래서 또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생활 속에 묻혀 있는 대중들이 언제 어디서 저항으로 나설지, 권력자들이 가늠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많은 이들이 저항에 참가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저항하는 자신에 대해 자기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위의 시의 어조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받는데 그러한 저항이 비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저항을 비하까지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생활인의 저항을 모두 부정하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말 궁둥이를 두들기는 꿈」에서 혁명가 이재유를 생각하면서 그를 살려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생각에 대해 “나는 짐짓 회고하는 양”이라고 자기 풍자적 어조로 말하는 것을 보면, 진정한 저항은 집게발과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진정한 저항은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에서 연상될 수 있는, 달리는 말의 모습이라고 시인은 생각한 듯하다. 트로이카는 마차를 끄는 세 마리 말이라는 뜻의 러시아어다. 1930년대 경성의 혁명운동을 이끌었던 이재유(1차, 2차), 이현상, 김삼룡(1차), 이관술(2차) 등이 경성 트로이카로 불렸다. 혁명운동을 이끄는 이들의 모습에서 시인은 진정한 혁명가를 발견했을 터, 이 시를 다시 읽어보자.

말들을 방목하던 마들, 일제 특경에 쫓기던 전설적 노동계급 출신 사회주의자 이재유가 잡힌 곳, 한사람을 잡으려 스물일곱명의 잠복한 사냥개들이 달려들어 포박해놓고는 *기념사진을 찍을 때, 발목 부러진 사내는 덤덤하게 오지 않은 미래를 쳐다본다. 1호선과 4호선이 엇갈려 지나간다. 마치 1호선은 시작하는 선이라면 4호선은 끝으로 가는 선 같이 가로질러, 나는 짐짓 회고하는 양 길다란 길을 매달고 가는 전동차의 흐릿한 꽁무니를 본다. 60년 전의 사내를, 쫓기고 쫒기며 마실 물도 얼어버린 중랑천가에 쓰러져 우는 하얀 옷의 붉은 사내를, 낡은 누비옷 사내를 등허리에 메고 어딘가로 숨겨주고 싶었던 그날을, 나는 한 점 불빛도 없는 토굴 속에서 언 알몸을 부둥켜 비벼 겨울밤을 나더라도 그를 살려냈으면 싶었던 모양이다. 중랑천은 탁하게 흐르고 60년 전의 바튼 숨소리가, 그가 흘린 각혈이 삼성래미안 금호어울림 현대아이파크 골조 아래 수맥으로도 흐를 것인데, 닫힌 새장에서 먹이만 기다리는 세상이 잠시 서러웠던 모양이다. 방목을 거부하고 자유의 들을 달리고 싶었던 갈기 세운 말들의 튼실한 궁둥이를 냅다 두드려보고 싶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는 짐짓 회고하는 양, 흐릿한 전동차 궁둥이 먼지를 털어 몇 대 먼저 보낼 뿐이다

마들 근처의 역, 시적 화자는 이곳에서 일제 경찰에게 잡힌 경성 트로이카의 주역 이재유를 생각한다. 그리고 전동차의 흐릿한 꽁무니를 보면서 마차를 이끌던 말들의 궁둥이를 연상한다. 결국 감옥에서 죽은 그를, 시적 화자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숨겨주고 살려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6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이재유가 꿈꾼 세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어쩌면 혁명의 희망이 살아 있던 그때가 지금보다 더 큰 세상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닫힌 새장에서 먹이만 기다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각혈이 스며들어 있을 땅에는 현재 각종 아파트만이 답답하게 들어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서럽다. 그는 “방목을 거부하고 자유의 들을 달리고 싶었던 갈기 세운 말들의 튼실한 궁둥이를 냅다 두드려보고 싶”다. 자유의 혁명을 이끌 말들이 다시 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무리일지도, 꿈일 뿐일지도 모른다. 즉 트로이카는 현재화되기 힘들어서 ‘회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은 말 대신에 먼지 쌓인 전동차만이 있을 뿐이다.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의 튼실한 궁둥이가 아니라 “흐릿한 전동차 궁둥이”만을, “먼지를 털어 몇 대 먼저 보낼”수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재유의 각혈이 수맥으로라도 흐를 것이라는 진술은 혁명의 트로이카가 다시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시인이 여전히 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흐르는 피가 언제 지상으로 터져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시 나타나게 된다면, 그 말(馬)은 옛 혁명 운동의 역사를 매달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망중한」에서의 “쭈그렁 세월을 품는” “꽃이 왔다”는 표현은 바로 그 말이 귀환했을 때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산수유 쭈그렁 열매가 다 떨어지기도 전에” “갓 핀 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응축시키는 순간을 드러낸다. 그 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직선으로 흐르는 과정 위의 한 점이 아니다. 그 순간은 작년에 핀 꽃이 다시 피는 것이니 과거가 회귀한 시간이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열매가 떨어지기도 전에 핀 꽃이니 미래의 도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 꽃이 핀 순간은 곡선의 시간이다. 「말 궁둥이를 두들기는 꿈」과 연관시켜 생각해본다면, 그 지금 막 핀 꽃은 과거 말 달리던 시절의 회귀이면서 미래에 존재할 해방의 도래이다. 하나 개화는 하나의 잠재성으로서의 회귀와 도래를 나타낸다. 그 회귀와 도래는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고, 그래서 “꽃만” 온 것이다. 그 현실화는 우리의 몫인지 모르겠다. “무슨 심심한 일이라도 벌이라고” 꽃이 온 것이니 말이다. 저 꽃을 보니 무슨 일을 벌이긴 벌려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을 벌려야 할까. 시인은 그 과제를 독자인 우리에게 내준 셈이다.


이성혁∙1999년 ≪문학과 창작≫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불꽃과 트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명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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