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4호(2009/여름)/초점/파리와 경성, 그리고 시/조재룡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79회 작성일 09-12-20 23:41

본문

|非․比․批|
파리와 경성, 그리고 시
―보들레르와 이상李箱, 그리고 벤야민
조재룡|문학평론가



“여기는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이상, 「自傷」


0. 19세기 중반의 파리와 20세기 초반의 경성

보들레르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계몽주의 같이 구체적이고 확고한 하나의 신념을 고스란히 누릴 수 없는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이상 유교적 전통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같은 신학문 중 어느 하나를 고스란히 끌어안을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였지요.

보들레르 노동자들과 반혁명 세력들이 끊임없이 갈등을 빗어내는 가운데 절망과 희망의 극단을 오고가곤 했었지요. 이게 계속 반복되다보니 뭐가 옳은지 쉽사리 분간하기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절망이나 멜랑콜리는 무엇 하나 딱히 꼬집어 확신을 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 같아요. 만물의 조화를 ‘보편적으로 유추’(an

-alogie universelle)해보는 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지요.

이상 개화라는 혼란 속에서 식민지세력과 민족운동 간의 간헐적인 무력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유교와 근대 지식이 서로 각을 달리해 혼란으로 휘발된 시간들의 연속이었답니다. 좀 지나자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도 그랬고, 나중엔 또…….

보들레르 그 와중에도 기술과 과학, 의학과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산업혁명이 가속되자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상품의 물결은 파리의 일상 전반에 자본주의가 정착되는 데 기여했지요. 근데 이게 황제로 분한 나폴레옹의 손자가 마셜 플랜 비스무리 한 걸 실행한 결과였다 데 제 비극이 놓여있는 게 아닐까 해요. 부당한 권력을 얼버무리기 위한 대공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유행인 듯하네요. 덕분에 파리가 정비되고 대도시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거든요. 일자리도 제법 늘어나고…….

이상 경성에도 미국과 러시아, 특히 일본에 의해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선이 연결되고, 철도가 깔리고, 대로가 닦여지고, 철교가 생기는 등, 도시 근대화로 인하여 물질화가 촉구되고 자본주의가 기형적이나마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전차, 대로, 서울역, 광교나 수표교 같은 다리들, 시청(소설가 구보 씨가 즐기던 산책 코스이기도 했지요)은 처음 보는 것들이라 조선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조선말 최한기 같은 과학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게 아니었다는 데서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지요.

보들레르 기술문명이 수공업에서 복제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파리에서도 뭔가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재화를 생산해내는 사람들이 정작 그것의 ‘주인 될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물건을 생산한 주체가 물건으로부터는 정작 소외되기 시작한 겁니다. 마르크스 선생이나 벤야민 선생이 천착하고 있는…….

이상 일제에 의해 안착된 경성의 공장지대에서 ‘복제된’ 제품들이 생산되어 시중에 나돌기 시작해 우리 산업이 발전할 싹이 아예 잘라나갔고, 또 그걸 누릴 수가 없을 만큼 비싸거나 귀해서 대중들에게 이중의 고충을 안겨 주었어요. 인도에서 영국산 제품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당시 조선에서도 물산장려운동 전후로 어떤 강박관념이 생겨났거든요. 새 것(일제)의 세련됨을 인정해야했지만, 우리 것을 구입해야한다는 도덕적 강박은 ‘충격’과 ‘욕망’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화두를 제공해주지는 않았나합니다.

보들레르 철골로 치장한 근대식 아케이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파리는 그야말로 상품교환의 화려한 중심지가 되었어요. 파리는 소비를 촉진하는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유럽에서도 백화점하면 파리를 떠올리게 되었지요.

이상 제가 동경에서 보았던 미쓰코시 백화점이 경성에도 등장하면서 식민지 치하에 근대 도시가 갖추어야 할 소비시장이 형성되었답니다. 경성 한 복판에 근대식 감옥이 들어선 것도 바로 이 때고요.

보들레르 문학예술 이야기 조금만 할게요. 당시 파리에서는 낭만주의의 붕괴 이후 산문 문학이 각광받으면서 장르가 뒤섞이기 시작했는데, 저도 한몫 거들었답니다. 물론 사진술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의 등장으로 문화예술 전반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고요. 현실을 그대로 찍어대는 사진의 정교함은 화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을 거여요. 그래선지 제 친구 마네도 다른 걸 시도하려다 ‘인상파’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죠.

이상 경성에서도 일어본 중역을 통해 보급된 책들을 통해 서구의 문학사상이 하나씩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에서 문학 장르가 섞이거나 새롭게 분화될 조짐이 보였고요. 안서岸曙 같은 사람의 노력이 컸다고 봐요. 제 기하학적 상상력도 바로 이걸 거들었다고 하데요. 일본어와 다소 유사한 한문과 조선어 구어가 뒤섞인 혼종적인 글쓰기가 ‘국어’라는 신개념을 창출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요. 조선의 풍경화가 부침을 겪은 것도 사진기가 경성에 등장하면서부터 같아요. 그런데 사진이나 일제가 들여온 서구의 의복을 경성에서 맞이한 건 호기심보다는 온갖 미신들이었어요. 서재필 같은 분이 미국 부인이랑 팔짱을 끼고 경성의 대로를 산책할 때는 워낙 그 ‘아우라’가 강해서 감히 처다 볼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식민지의 망령들이 문화예술 주변을 배회하다가 그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죽음의 굿판을 벌이기 시작한 건 아닌가 해요. 제 시가 천착해온…….

보들레르 파리는 식민지 쟁탈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자본가와 정치세력 간의 결탁과 공모가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답니다. 아마 제1차 세계대전이 십년 만 늦게 발발했어도 세상 천지에 땅 쪼가리 하나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 거예요.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모두 병에 걸렸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상 경성에도 식민지 수탈이 본격적으로 가속되면서 유교와 민족주의가 맥을 같이하고 개화가 이것의 ‘대항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일제와 결탁한 정치 세력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지요. 나중에 대동아 공영으로 치닫는 시점에는 대부분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에 공감할 수밖에 없지나 않았는지…….


근대화의 물결에 휩싸인 경성이나 대도시의 꼴을 갖추어가던 19세기 중ㆍ후반 파리에서는 청아하고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젊은 시인을 찾아볼 도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 대도시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문화 자체가 변화를 겪게 된다’는 벤야민의 평범한 가설이 문학작품을 통해 제 증거를 호출하게 되는 것도 바로 여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도시로의 변모와 더불어 ‘새로운’ 삶의 양식이 동반되었고 이것이 사유 방식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이 가설이 대로가 등장하고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등 하루가 다르게 근대화의 청사진을 투영해가던 파리나 경성에서 살아야 했던 시인들에게는 그리 유쾌하게 검증되지는 않았다는 데 놓여 있다. 대도시라는 일반명사가 정치적 반동들로 각인된 파리나 경성과 고스란히 중첩될 때, 일상공간의 실질적 주체인 개인들의 자의식이 심하게 뒤틀리면서 어떤 굴절을 겪게 때문이다. 이 때 도시의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체현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모습으로 ‘전도’되어 버린다. 그 중 예술가, 특히 시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이러한 전도는 예언적이거나 예방적인 형태, 즉 암시와 비유, 해체를 통해 문학내부의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상상적 공동체’에서 한참 빗겨나 있는 이 변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구분하게 해주는 어떤 척도를 만들어낸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동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에 자신의 시인임을 온전히 헌정하지 않는 두 사람, 그리하여 현대성(modernité)을 향해 일보를 내딛은 보들레르와 이상이 특히 그러했다. 이들의 대화를 좀 더 들어보기로 하자.


1. “대도시가 버린 것, 잃어버린 것, 낭비한 것, 소홀히 한 것, 망가트린 것”

이상 개화기를 막 벗어나 식민치하에서 진행된 근대화는 문학과 시, 소설과 에크리튀르의 형성과정 전반에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주었던 게 분명해요. 문학적 발현이나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만, 타의에 의해 진행된 정치ㆍ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우리 작가들의 인식과 표현 양태가 선생님 네 파리와 어떤 공통점을 보이는 게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랍니다.

보들레르 당시 반동적 정치성을 등에 업고 진행된 초기 자본주의식의 급조된 개발은 타자에 의해서 뭔가가 진행되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봐요. ‘내가 그 주체가 아니다’, ‘배제되었다’, 뭐 이런 감정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팽배했었죠. 때문에 근대화와 도시화가 인공적인 질서를 통해 새로운 문명을 이식하고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지만 우리 같이 민감한 시인들에게는 벤야민 선생의 표현처럼 ‘경험의 충격’을 동반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결국 문제는 기억의 굴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문학작품이라는 데 놓여 있는 것이지요.

이상 철도와 신작로가 등장하고 전기와 근대식 건물들이 기존 삶의 양식들을 하나씩 잠식해나가기 시작했을 때, 문제는 이에 앞서 웅장함과 근대라는 ‘인식’이 당당하게 무언가를 표상하고 있다는 데서 발생한 건 아닐까요? 때문에 문학과 시의 양식도 변모하는 거고요. 변화와 충격을 담아내기에는 당시 계몽의 주된 담론 역할을 해왔던 번안소설보다는 선생님이나 제가 천착해온 시적 모험이 더 적절하지 않았나합니다. 어쨌든 쓰는 사람에게도 무엇인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막연함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비유는 또 필연적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게 물질의 변화에 앞서 나타나기도 하거든요.


근대화와 도시화, 나아가 활자매체 자체에 대한 경외감이 어떤 자괴감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아온 ‘갑작스런’ 변화가 정치적 ‘온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힘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 시는 첨병에 서서 긴장감을 드러내고 제 역할을 수행해 온 것으로 보인다.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신작로나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튼튼하고 강건한 철교가 실상은 무언가를 실어 나르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교차되는 희비는 시 속에 가장 깊숙이, 가장 변형된 형태로 각인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들레르나 이상이 변화의 한 복판에 놓여 있던 이곳에서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들레르 당시 파리가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등장한 풍경들은 제게는 낯설고도 새로운 것이었어요. 이걸 몸소 겪으면서,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기이한 흥분”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왜 흥분이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지네요.

이상 저도 약간은 비슷했던 것 같아요. 동경을 방문했을 때 “내가 생각하던 ‘마루노우찌삘딩’―속칭 마루비루―는 적어도 이 ‘마루비루’의 네 갑절은 되는 웅장한 것”이었는데, 어쨌든 “이 도시는 몹시 ‘깨솔링’ 내가 나는구나! 가 동경의 첫 인상”이었고, 그럼에도 “우리같이 칠칠치 못한 인간은 우선 이 도시에 살 자격이 없다”(「東京」)고 느꼈던 것 같아요. 경성으로 돌아와서는 이러한 자괴감이 보다 구체화되었죠.

보들레르 제가 ‘기이한 흥분’을 느낀 건 대도시 자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새로 들어선 건물이나 대로 같은 것이었다기보다 오히려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여분처럼 대도시와 ‘아울러’ 등장하게 된 어떤 풍경들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풍경들에 그냥 호기심이 일고 이상한 느낌을 받고 그랬어요. 막연할 테니 거칠게나마 꼽아 볼게요. 길거리를 배회하는 유리 장수(당시 유리는 근대화가 낳은 산물이자 부르주아의 계급성을 상징하는 표식이었거든요), 자본의 행렬에서 이탈되어 도시의 구석진 곳에서 구걸하는 거지들, 대로를 지나면서 아무 때나 마주치게 되는 무표정한 얼굴의 행인들, 군중들로 둘러싸인 서커스의 광대들, 공원에 버려진 쭈그렁뱅이 노파들, 버려진 음식물을 핥고 있는 개들, 골목에서 서성이며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경찰관들, 아케이드에 진열된 상품 주위로 몰려든 군중들의 아우성 같은 것들이 정작 제 관심을 끄는 무엇이었지요. 쥘 라포르그라고 하는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벤야민 선생이 지적하더군요.


“보들레르는 수도 파리를 일상적인 저주들(매춘의 바람에 흔들리며 거리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가스등, 레스토랑과 그곳의 환기구, 병원, 도박, 톱으로 켠 나무가 장식이 되어 정원의 포석 위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 화롯가, 고양이들, 침대, 스타킹, 주정뱅이, 근대 제조법으로 만든 향수)을 통해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다. [……] 그는 추한 것에 항상 예의를 갖추었다.”


뭐 고마운 일이지요. 벤야민 선생도 파리가 배출해낸 온갖 잡동사니에 제가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여기 수도에서 하루 종일 쏟아낸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대도시가 버린 것, 잃어버린 것, 낭비한 것, 소홀히 한 것, 망가트린 것 모두를 그는 분류하고 수집한다”고 했는데, 사실 이게 당시의 제 관심사를 정확히 대변해주는 것 같아요.

이상 저에게 경성은 정말이지 ‘이상’했는데, 제 필명가지고 장난하자는 건 아니고, 이상했다는 표현 이상 떠오르 게 없어 이렇게 이상하게 말하는 겁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당시 막연하나마 무언가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보들레르 선생님 시에서 목격되는 해체가 그런 긴장감의 발로는 아닐까요? 선생님의 해체를 놓고 항간에서는 “조선의 근대정신이 처음으로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지적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기존의 문학적 답습을 붕괴시켜야한다는 그런 절박함이 선생님의 의식 기저에 막연하나마 자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요. 그러니 섞은 거지요. 혼종을 실험할 수밖에 없는, 이걸 계기로 근대정신을 활짝 열어 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네요. 메쇼닉 선생이 현대성을 “끊임없이 재개再開되는 일종의 투쟁”이라고 한 것도 결국 이런 게 아니었나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정과 반 사이의 혼합과 붕괴일 테고, 또 문학적으로는 장르의 혼용混用이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작품에서 도시가 차지하는 가치는 현대성에 대한 알리바이처럼 보인다고나 할까요? 혼종과 혼합, 장르 간 영역의 붕괴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선생님께서 감행하신 대다수의 시적 실험은 경성과 연관 지어 볼 때, 서로 비등한 비중을 갖추고 있는 몇 몇 양상들이 교차하면서 서로 엉겨 붙은 꼴을 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볼까요?


2. 복제, 아케이드, 예술작품

이상 잠깐,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방금 말씀하신 장르의 붕괴와 혼합과도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건데, 벤야민 선생, 이 양반이 정말 특이한 거 같아요. 왜냐하면 파리나 경성에서 문화예술 전반에 찾아든 근본적인 변화의 ‘이면’을 보려고 했거든요. <파리의 우울>의 서문에서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대도시’와 글쓰기 문제, 그리고 대도시의 위상을 반영하는 아케이드의 등장, 또 이 아케이드를 가득 메우던 대도시의 실질적인 구성원 ‘군중들’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 유명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론」을 필두로 해서 벤야민 선생이 위 세 가지를 당시 문화예술이 ‘재편’되는 키워드로 여겼다는 게 제겐 중요해보이거든요. 심지어 아케이드는 기술복제시대 파리의 면모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 같다고도 여겨지는데, 저도 경성에서 “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근대 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철근 철골, 시멘트와 세사 이것부터 선득하니 감응하느냐”(「종생기」) 할 정도로 어떤 의구심이 든 적이 있었거든요. 철골이 등장했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게 아케이드라는 주제와 맞물리게 되면서 예술의 변화와 밀접히 관여하기 시작한다는 게 벤야민 선생의 요지였거든요.


건축이 철골 건축의 등장과 함께 예술에서 분리되어 홀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면, 회화에서도 파노라마의 등장과 함께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파노라마의 보급이 정점에 달한 시기는 아케이드가 등장한 때와 일치한다.


한 마디로 ‘풍경’, 즉 사물과 그걸 보는 우리의 방식이 변화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건데, 물질적인 조건을 앞서 고려해야했다는 면에서 마르크스 선생의 영향력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암튼 철골이 등장했다, 건축이 예술이기를 포기했다, 아니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대강 이런 지적인 거 같아요. 그 다음에 나온 파노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회화가 풍경화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거겠지요. 더 이상 자연을 곁들인 야외의 풍경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는 지적인데, 이게 언제부터냐가 벤야민 선생에게는 중요했어요. 암튼 파리에 아케이드가 우후죽순처럼 늘어가기 시작하면서 풍경화를 대거 양산하던 시대는 이제 빠이빠이라는 말이지요. 그럼 뭘 그리게 되었을까요?

보들레르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될 것 같아요. 첫째, 풍경을 야외에서 그리되, 단순히 모방하지 않는다는 거고, 둘째, 아케이드, 대로, 군중, 따위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거겠지요. 여기까지 해두고, 아케이드에 관해 남긴 다른 지적을 잠시 보기로 해요.


산업에 의한 사치가 만들어낸 새로운 발명품인 이들 아케이드는 유리천정과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의 소유주들이 투기를 위해 힘을 합쳤던 몇 개의 건물을 이어 만들어진 통로이다. 천장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통로 양측에는 극히 우아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리하여 이러한 아케이드는 하나의 도시, 아니 축소된 하나의 세계이다.


이상 아케이드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건데, 그렇다면 당시 파리에서 아케이드는 무슨 기능을 담담했던 걸까요?

보들레르 벤야민 선생의 위 지적에 대강 나와 있는 것 같은데요? 당시 파리에서는 물건을 팔 수 있는 백화점 비슷한 것들이 아케이드 안에 대거 들어서 있었는데, 거기서 무슨 물건을 파는지, 여기서 파는 물건이 수공업시대 시장에서 내다 파는 물건들과 뭐가 다른지, 뭐 이런 물음을 이제부터 던져야 할 것 같네요. 물론 시장에 내다 팔던 물건은 당근 아니죠. 왜냐하면 아케이드는 당시 파리에서 최첨단 과학이 집약적으로 펼쳐진 공간이었고, 최첨단 기술이란 항시 자기의 위용을 과신할 수 있도록 제 메커니즘을 담은 상품들을 전시하거나 파는 것을 전제로 등장하게 마련이죠. 할머니들에게 영상 폰이나 MP3를 선전하지 않는 것처럼요. 당시 이 최첨단이란 바로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파는 상품들은 복제품이었던 거예요. 그럼 복제품을 누구에게 팔았는지가 또 궁금해지는 데, 이게 예술과 연관을 맺게 되는 대목은 아닌가 합니다.

이상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무명의 대중들이나 길가는 행인들이 그 주체였다는 거지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구매자들에게 물건을 팔았다는 얘긴데, 암튼 스쳐지나가면서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낚는’ 사람들도 등장했겠군요.

보들레르 아케이드의 등장과 이곳에서의 구매행위는 재화(생산물)와 인간이 맺는 관계 전반이 바뀌게 되었음을 나타내주는 징후라고 벤야민 선생은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낸다. 복제 기술은 복제품을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또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이 말을 한 번 설명해 볼게요. 수공업시대에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 일은 나무를 자르고 깎는 등 수작업으로 진행될 거예요. 일단 용도에 맞추어 잘라놓은 나무 조각들, 등받이를 댈 푹신한 천 조각 따위를 만든 후, 공들여 그걸 조립하겠지요. 장인정신이 강한 사람이라면 등받이틀 같은데다가 궁서체나 HY목각파임B체로 제 이름을 새기거나 앙증맞게 자기를 표시하는 문양 따위를 그려 넣고선 지워지지 않게 니스칠을 하기도 하겠지요. 그리하여 어여쁜,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의자 하나가 완성되었다고 칩시다. 그런 다음 이것을 재래식 시장에서 내다 팔아야 하겠지요. 이 의자는 직접 만든 것이며,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말이죠. 이 때 이 의자는 ‘진품성’(authenticité)과 ‘유일무이한 현존성’(hic et nuc)을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벤야민 선생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 의자에는 “옹기그릇에 도공의 손 흔적”과도 같은 것이 남겨져 있는 셈이지요.

이상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분의 고충을 생각해서 벤야민 선생이 남긴 말 하나를 이쯤에서 불러내는 게 어떨까요?


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까지를 포함하여 그 사물의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이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물론 이때 이 증언 가치만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이로써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


“사물의 권위”라니? 이게 대체 무슨 신소릴까요? 사물이 복제되면서 사물 자신의 권위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니! 나 원 참.

보들레르 다시 ‘의자’로 돌아와서 한 번 생각해보죠. 수공업시대의 의자는 그것을 만드는 자의 영혼을 담고 있다는 거 아닐까요? 마르크스 선생처럼 말해보면, 재화와 노동자 사이의 소외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거, 즉 의자를 만든 사람은 의자에 애착을 갖게 되며, 비록 그것이 팔려나간다 해도 자신이 공들여 만든 의자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거겠지요. 이 때 노동자는 자기가 만든 재화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고 합디다. 이렇게 재화가 온전히 노동자의 노고와 정신을 담고 있는 데 비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이런 관계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똑같은 제품을 공장에서 찍어내어 판다고 할 때, 이 재화에는 더 이상 노동자의 “손 흔적”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는 거겠지요.

이상 아케이드 안의 상점에 진열되어 있던 제품들은 바로 기술복제를 통해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는 얘기가 되네요. 또 노동자는 재화를 생산한 주체이면서도 이 재화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게 되겠네요.

보들레르 재화와 노동자 사이의 소외가 발생하게 되어 “도공의 손 흔적” 따위는 더 이상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게 요지인 것 같은데, 벤야민 선생이 말한 “사물의 권위가 흔들린다”는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도 누가 만들었는지를 묻지 않고, 또 누구나 동일한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인류는 최초로 자신이 만든 재화로부터 소외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산물을 점유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거죠. 19세기 중반은 이런 식으로 인간과 물질이 맺고 있는 질서를 바꾸어 놓았고, 복제될 수 있음으로 해서 진품성이나 유일무이한 현존성도 사라지게 된다는 게 벤야민 선생의 생각인 것 같아요.

이상 게다가 이런 상품들은 아케이드 안을 어슬렁거리는 군중의 몫이며, 누가 구입했는지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굳이 누가 만들었는지도 묻지 않는 거죠. 상표만 찍혀 있고, 또 상표가 도공의 권위를 대신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인간과 물질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재화의 소외를 필연적인 조건으로 삼으며 작동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생리인 셈인데, 그렇다면 이 때 예술은 어떤 식의 변화를 겪게 될까요? 벤야민 선생이 궁금해 한 것도 바로 이거 아니었나요?


3. 장르의 해체와 散文적인 시의 등장

보들레르 이쯤해서 선생님의 시로 돌아와 볼까요? 아까 말하려다 못한 거 계속해볼 게요. 저는 벤야민 선생이 말한 근대적인 변화의 공간에서 선생님의 시를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대다수 시적 실험은 경성의 변화와 연관 지어 생각할 때야 비로소 현대성을 드러내 보일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발간이 중단되는 등 세간에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던 13인의 “아해兒孩”가 질주하는 거, 저는 이걸 도시화를 근간으로 하나씩 뻗어나가 당시 격을 갖추기 시작한 경성의 대로들을 질주하는 거라 보았거든요. 물론 이 아이들이 도달한 곳은 경성의 ‘막다른 골목’이며, 또 여기서 ‘막다르다’ 함은 선생님의 절망과 막막함을 표현해주는 어떤 수사이겠지요.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게 여전히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겁니다. 어떤 시인은 훗날 이렇게 패러디 했더군요.


어느 날 한 사람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간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간다.

어느 날 네 사람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간다.

어느 날 사만 명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간다.

어느 날…… 어느 날……

어느 날 지구는 잠잠 무사하고

―최승자, 「문명」


이상 당시 모든 게 죽음을 가장한 어떤 행렬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네온사인은 섹소폰과 같이 수척하여있는”(「가구街衢의 추위」) 것처럼 보였고, 저도 선생님처럼 여인들을 등장시켜 도시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기도 했지요.


북을 향하여 남으로 걷는 바람 속에 멈취 선 부인

영원의 젊은 처녀

지구는 그와 서로 스칠 듯 자전한다

―이상, 「習作 쇼오윈도우 수점數點


보들레르 이 시도 경성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 또 도시에서 ‘걷는 걸’ 모티브로 삼았잖아요. 모든 주제가 경성의 현대성과 떼어 놓고 볼 수 없다 이거죠. 근데 선생님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인들은 유곽 같은 데 어울리는, 즉 순수함이 보장된 곳보다는 상처로 점철된 곳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외람된 말이지만, 사실 선생님한테 경성은 커피 한 잔이나마 편하게 마실 수 없는 곳 아니었던 가요?


여러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 나는 그래도 경성역을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코오피. 좋다. 그러나 경성역 호올에 한 걸음 들여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빡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또 아득하였다. 나는 어디선가 그저 맥없이 머뭇머뭇하면서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날개」


여기서 제가 목격하는 것은 ‘새 것’(“코오피”, “자동차”)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 근데 이 ‘새 것’이 타자에 의해 대도시로 탈바꿈한 경성의 특징이라는 데서 오는 어떤 갈등 같은 거예요. 선생님에게 경성은 의식을 온전히 가늠할 수 없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이며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진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좌불안석인 것처럼 말이죠. “개아미집에 모여서 콩크리―트를 먹고”(「대낮」) 사는 공간처럼 보였다고 할 정도로 삭막해진 건, 의도적인 거부의 몸짓이 있었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상 그랬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근데 선생님의 시에서 주로 목격되는 것도 대도시의 군중들이나 여인들 아니었나요? 더구나 선생님께서 묘사하신 여인들이 ‘늙은 노파’같이 아름다움이랑 멀어도 한참 먼 걸 보면, 선생님에게나 저에게나 변화의 요로에서 차츰 비대해져가던 두 도시의 흔적이 강하게 남겨졌다고 느껴지네요. 유명한 <파리의 우울> 서문에서 “강박적인 이상은 특히 비대한 도시들과의 빈번한 접촉, 그리고 이들 도시들의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의 엇갈림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하신 거 잊으셨어요? 이왕 군중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꺼내는 말인데,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산문시는 “도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도시를 배경으로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대중들”과 “대중들의 시대”에서 표출되는 가치를 담아내었다고 평가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선생님 이후에야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당시로는 새로운 영역이자 그저 세속적이라 여겨져 시에서 천대받아왔던,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주체, 바로 그 안으로 시가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참 얄궂게도 벤야민 선생은 “시인들이 일상적인 것에 대해 가지고 있던 주제들을 보들레르 자신이 자신의 창작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으셨더군요.

보들레르 칭찬도 아니고 뭐 그렇네요. 오히려 “따스한 봄을 마구뿌린 걸인과 같은 천사”로 비유하신 “거리의 음악사”(「흥행물천사」)나 “빌딩이 토해내는 신문배달부의 무리”(「대낮」) 같이 선생님이야 말로 대도시를 메우고 있는 일상과 군중을 구체적인 시적 모티브로 삼은 것 아닌가 해요. 중요한 사실은 선생님에게나 저에게나 이 대도시는 어느 정도 ‘탈신비화’되어버린 장소였다는 거죠.


4. ‘아우라를 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이상 방금 탈신비화 말씀을 하셨는데, 이와 관련되어 선생님의 시 「후광의 상실」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제게는 경성이 되겠지만 선생님에게는 파리 한 복판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의 ‘일상성’이 그 대상이 되겠지요. 재미있는 건 선생님께서 이걸 “시장의 척후斥候”이자 “군중의 탐사자”인 산책자의 시선을 통해 포괄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서 벤야민 선생은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주제를 여기서 끌어내면서 선생님의 작품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더군요.


산문시 「후광의 상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이와 관련해 충격의 경험에 의해 아우라가 위협받는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점에서 참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 더 나아가 특히 결정적인 것은 이 작품의 결말인데, 아우라를 과시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엉터리 시인의 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아우라를 과시하는 것”이라고 한 게 무엇이냐는 거죠. 이걸 알아야 선생님이나 제 작품에서 목격되는 ‘혼용’이나 ‘탈신비화’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아우라를 먼저 짚어봐야 할 것 같네요. 아우라!

보들레르 벤야민 선생의 테제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문학과 연관되어 언급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게 아우라 아닐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어떤 ‘권위’에 대해를 말하려 한 것 같아요. 절대적으로 고수되어 왔고,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해왔던 그런 거 말이죠.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해요. 이걸 고수하거나 준수하지 않으면 예술작품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 아니 사회적으로 그렇게 여겨져 왔던 것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뭐,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초등학생들이 시를 암송하지요. 운율이 있고, 규칙적이면서 각운도 딱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시를 아이들에게 달달 외우게 시키는 거죠. 저는 이게 바로 ‘아우라’ 아닐까 합니다. 전통이라는 틀 속에 갇혀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아니 변화될 수 없는 성질을 고집함으로써 제 권위를 얻어가는 어떤 규칙 같은 거 말이에요. 물론 이것을 고집하게 만드는 사회적 환경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이상 이걸 어떤 학자는 “보편적으로 재생산되는 어떤 테크닉”이라고 했는데,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말인 즉, ‘누구나 인식하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예술작품을 지배해온 법칙’이라는 건데, 시에 한 번 대입해보면, 수사학적 기법 전반을 모두 포함한 정형률이나 기법 같은 거다, 뭐 이런 결론이 나오겠네요. 사실 이런 것들이 시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심지어 컴퓨터로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건데, 셰익스피어 선생의 소네트가 그저 소네트이기 때문에 반드시 시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건 아니잖아요. 재미있는 사실은 선생님이 산문적인 글쓰기를 실천한 어떤 동기마저 여기서 설명되고 있다는 거지요. “나는 단지 시에 할당되었던 한계들을 넘어서는데 성공” 하고자 했다고 친구 분께 고백한 게 유력한 증거라고 봅니다. 더구나 ‘시’를 ‘Poésie’, 이렇게 대문자로 큼지막하게 적어놓으셨네요. 그러니까 모두가 인정하는 시, 고로 전통시를 의미하며, 결국 여기서 벗어나고자 산문시를 썼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죠.

보들레르 들켰네.


보들레르나 이상에게 파리나 경성은 제 상처를 시 속에서 물질화해 가는 장소이며, 이 비대해진 대도시는 압축적이고 전통적인 율격의 틀 안에서 더 이상 가두어둘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 두 사람은 대도시를 빽빽이 매우고 있는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투영하고 평가할 ‘시적 정신’을 탈신비화라는 이름으로 함께 창출해 나아갔다. 우리는 이것을 ‘산문정신’, 혹은 ‘산문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대도시에서, 아니 대도시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두 시인의 시적 정치성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이다. 보들레르가 보았던 무엇, 보들레르가 겪었던 경험이 체현되는 것도 바로 파리에서 경성으로 힘차게 펄럭이는 현대성의 날갯짓인 것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개인됨의 정당성과 그 특수성을 목격하였고, 산재되고 파편적인 이것을 대도시에서 나타난 물질의 소외와 연관 지으면서 탈신비화의 정치적 맥락을 읽어내려고 하였다.


서정시의 양식이나 유파들의 해체는 보들레르 앞에 ‘대중’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장의 보완물이다. 보들레르는 어떠한 양식에도 의존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유파도 갖지 않았다. 그에게는 양식이나 유파가 아니라 개인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발견이었다.


5. 흩어지기, 무작정 걷기

보들레르나 이상에게서 목격되는 탈신비화나 율격의 파괴는 대략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는 장르의 혼합이 ‘현대성’의 속성으로써, 대도시라는 편재된 공간을 주요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충격의 경험’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상 선생님께 찾아온 탈신비화라는 변화는 형식과 주제의 차원에서 동시에 행해진 어떤 시적 침투처럼 구현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거 아닌가 합니다. 기술복제시대 이후에 비로소 시의 영역 안에 포착하기 시작한 군중, 광대, 늙은 여인, 경찰, 유리장수, 행인, 몰락한 왕, 등등 선생님께서 앞서 언급하신 주제들이 ‘성스러움’과는 대척점에 있는 주제들, 즉 대도시의 출현과 더불어 생산되고 확산된 세속적인 무엇에 해당되었을 텐데요. 벤야민 선생이 선생님의 작품 「군중」에서 기술복제시대 예술작품의 ‘개별화과정’을 목격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파편화된 채 도처에 산재하고, 하나로 모여지지 않는 성질, 대략 ‘산문성’이라고 이걸 부를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암튼 한국어로 산문散文의 ‘산’은 ‘흩어지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산책이나 배회, 어슬렁거림 같은 주제가 대도시의 특징인 만큼 시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관여했던 것 같아요. “서정시의 양식이나 유파들의 해체”=‘산문적 글쓰기’라는 가설이 성립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보들레르 사실 선생님의 작품에서 목격되는 일련의 해체의 경향이야말로 서정시의 양식을 파괴하고 시의 유파를 부정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해골과 흡사”한 “사기컵” 같이 단단한 걸 깨부수는 행위, 그럼에도 “산산이 깨어진 것”이 “그 사기컵과 흡사한 내 해”(「詩第十一號」)라는 데서 오는 일종의 아이러니 같은 거 말입니다. 이시우 같은 몇몇 시인들도 시도해 보았고, 또 나중에 조향도 그랬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시가 도시적인 공간, 즉 당시 경성의 탈신비화와 정치성을 담아내었다고 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의 시는 달라요. 예컨대, 이런 거예요.


一層위에있는二層우에있는地上庭園에올라서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地上庭園밑에있는三層밑에있는二層밑에있는一層으로내려간즉東쪽에서솟아오른太陽이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솟아올라하늘복판에아있기때문에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은맞는것이지만時計는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이상, 「운동」


이걸 어떻게 봐야하나요. 일어로 쓰였건, 한국어로 썼건, 이건 산문도 시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라고 볼 수 있지요. 전적으로 도시적인 주제라 할 “시간”을 모티브로 삼아 그것을 전달해 주는 “시계”가 낯설고 또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아니 당시로서는 새로운 문물 중 하나였던 그것을 덥석 믿지 못하겠다는 내면적 저항, 이런 내면적 저항의 물질화와 그 소외에 대한 알레고리가 이 글처럼 절묘하게 표현되기는 쉽지 않죠.

이상 당시 제게 경성은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어요. 사람이나 사물 모두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분리되어 파편화되고 소외되고 있는 가운데, 제 자신이 억지나마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 같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뒤섞거나 어떤 틀을 아예 부정하고자 했던 건 분명해요. 사실 제가 수학에 아주 능하거든요. 수학 공식이나 기하학적 도상도 여인과 나누었던 질퍽한 정사를 표현할 수 있다, 뭐 이런 당돌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되도록 쇼킹한 방식으로 경성에서 느낀 낯설음을 표현해 내려고 했어요. 고석규 같은 평론가가 “산문적 요소가 보다 두드러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제 시의 핵심적 가치를 운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폴리그로티즘”을 시도한데서 발견한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아요. 수식이나 숫자를 도입한 걸 “형태상의 일대 모험”이라고 봤거든요.

보들레르 벤야민 선생이 기술복제시대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아케이드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대중들과 대중들이 북적거리는 “magasins de nouveauté” 즉, 백화점을 꼽았다면, 이러한 현상은 백화점이 하나씩 지어지던 1930년대 경성의 풍경을 그려본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고 여겨집니다.


AU MAGASIN DE NOUVEUTES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비누가通過하는血管의비눗내를透視하는사람.

地球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儀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

去勢된洋襪. (그女人의이름은워어즈였다)

貧血緬袍, 당신의 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平行四邊形對角線方向을推進하는莫大한重量.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香水의마지한東洋의가을

快晴의空中에鵬遊하는Z伯號. 蛔蟲良藥이라고씌여져있다.

屋上庭園. 猿猴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彎曲된直線을直線으로疾走하는落體公式

時計文字盤에XII에내리워진一個의侵水된黃昏.

도아-의內部의도아-의內部의鳥籠의內部의카나리야의內部의嵌殺門戶의內部의인사.

食堂의門깐에方今到達한雌雄과같은朋友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角雪糖이三輪車에積荷된다.

名啣을짓밟는軍用長靴, 街衢를疾驅하는造花分蓮.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下半은저남자의上半에恰似하다.(나는哀憐한邂逅에哀憐하는나)

四角이난케-스가걷기시작이다(소름끼치는 일이다)

라지에-타의近傍에서昇天하는굳빠이

바같은雨中. 發光魚類의群集移動


근데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기이한 흥분”을 느끼게 하네요. 제 시의 주된 대상이었던 “대도시가 버린 것, 잃어버린 것, 낭비한 것, 소홀히 한 것, 망가트린 것”과도 동일한 일련의 주제들이 여기서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어요. 와우! 좀 복잡하긴 하지만 해독해보면 대개 이런 것들이지요.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여장을 한 남자’(“거세된양말”), ‘병들어 창백한 환자’(“빈혈면포”), ‘제 무게조차 지탱하지 못하는 절름발이’(“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가진 척하는 위선적인 여자’(“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모아젤”), ‘출세주의자’(“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만취한 사람’(“침수된황혼”), ‘감금된 사람’(“감살문호의내부의인사”) 같은 것들……. 재미있는 건 아케이드(백화점의 내부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를 메우고 있는 이런 무리들을 휘 둘러 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정원” 올라가 ‘창밖 빗속의 거리에서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바깥은우중.발광어류의군집이동”)을 굽어보면서 느끼게 된 절망적인 운명을 선생님이 주사위(“사각이난케이스”)에 비유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경성에서 ‘내가 내 자신임을 온전히 점유하지 못한다’는 소름끼치는 비극이 여기서 탄생하는 거죠. 벤야민 선생이 제 작품을 두고 “장르로써의 독특한 점은 여자와 죽음의 이미지들이 파리의 그것인 제3의 형상과 뒤섞여 있는 데 있다”고 말한 것과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갑자기 “비에 젖은 서울의 쌍판은 마스카라 번진 창부 얼굴 같구나”라던 장정일의 시 구절이 떠오르네요..

이상 선생님의 작품에서 장르의 해체는 오히려 ‘행위의 해체’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선생님의 작품이야 말로 벤야민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결코 고향 찬가 같은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도시를 응시하는 “알레고리 시인의 시선, 소외된 자의 시선” 그 자체이자, 또한 “산책자의 시선”, 즉, “어슴푸레한 빛 뒤로 대도시 주민에게 다가오고 있는 비참함”을 감추고 있는 “베일에 싸인 군중”을 통해 바라본 시선이 투영되어 있잖아요. 아마 파리의 한 복판에서 익명의 존재인 행인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이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더욱이 대도시의 군중은 처음 목격하는 자들에게 당시 파리의 정치상황을 대변한다고 할 ‘불안’, ‘역겨움’, 그리고 ‘전율’ 같은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여집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거예요. 벤야민 선생이 복제예술의 특성으로 꼽았던 ‘촉각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보자는 거죠. 복제된 이미지들을 지각하는 방식이 시각적이 아니라 ‘촉각적’이라는 건데, 사실 제가 경성에서 느꼈던 것도 이와 엇비슷한 감정, 즉 이성적 판단에 기대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 깊숙이 각인하게 되는 어떤 추상적인 체험은 아니었을까 해요. 대도시의 군중들이 사회의 체계 속으로 편입시키기가 매우 힘든, 어딘가 “야성적인 면”(벤야민 선생의 표현)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도 이 복제 이미지들의 ‘촉각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보들레르 저는 이 ‘촉각성’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산책과 연관되는 것 같아요. 제가 파리를 걸으면서 유달리 행인들과 그들의 시선을 의식했다고 한다면, 선생님은 경성 대로를 걸으면서 전통, 즉 아우라가 붕괴되는 것을 훔쳐보려 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좀 절룩거리면서 걸었던 것 같아요. 식민치하의 한국문학에 ‘근대’라는 의식을 가져다준 선생님이나 박태원 선생 같은 분들이 집착했던 ‘산책’을 한 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연작시 「오감도」나 「건축무한육면각체」, 단편 「날개」나 「생기」 같은 작품들은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던 경성에서 일어난 일대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한 “충격의 경험”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만한데요. 당시 현대적인 문화의 공간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카페에 대한 턱없는 집착(“티룸”)이나 백화점에서 경성의 33번지에 이르는 산책로를 한 번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저와 동일한 충격이나 동일한 주제, 아니 동일한 문제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닌가 하고 가정해본다면, 가령 이런 구절 때문이기도 합니다.


밤이면 나는 유령과 같이 흥분하여 거리를 뚫었다. 나는 목표를 갖지 않았다. 공복만이 나를 지휘할 수 있었다.

―「날개」

나의 보조步調는 단절된다

언제까지도 나의 시체이고자하면서 시체이지 아니할 것인가.

―「BOITEUX BOITEUSE」


프랑스어로 ‘절뚝이는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제목이 암시하듯, 선생님은 경성에서 힘차게 걷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절면서, 시체가 되어 걸었다고 하겠는데, 그럼에도 계속 걸었지요. 여기서 잠시 대도시의 한 복판을 배회하는 행위와 관련되어 구보와의 유사성을 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구보에게도 선생님처럼 단절된 무엇, “두통을 느끼며, 이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피로”로 인한, 글에서는 주로 쉼표를 동반해서 읽는 사람도 그만 쉬게 되는 그런 지점들이 자주 나타나요. 구보도 힘차게 걷지 못한다는 거죠. 아마 당시 경성의 화려함 이면에 드리워진 음울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보는 게 옳겠지요.


6. 욕망의 폐허 위에서:개인됨을 찬양함

이상 걷는 주체는 ‘개인’이지요. 아무도 동반하지 않고 홀로 걷는다는 것은 개인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SCANDAL”(「詩第六號」)인 셈인데, 선생님과 저의 접점은 대도시를 걷는 이 개인이라는 존재를 탈신비화의 맥락에서 형상화했다는 데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걸으면서 저는 “풍설風說보다 빠”른 “도시의 붕락崩落”(「파첩」)을 느꼈고, 그럼에도 제 “신경神經은 창녀보다도 더욱 정숙한 처녀를 원하고”(「수염」)있었던 것 같은 데, 사실 그 자체로 보면 모순된 표현이지요. 아마 벤야민 선생이 이 구절을 보았다면 경험의 충격에서 비롯된 알레고리의 한 방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또 이런 감정도 느꼈던 것 같아요.


시청은 법전을 감추고 산란한 처분을 거절하였다

「콩크리―트」 전원에는 초근목피도없다 물체의 음영에 생리가없다.

―「파첩破帖


대체 제 의식의 기저에 뭐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렇게 썼을까요? 근데, 이것만은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시 조선에서 벌어진 대다수 논쟁은 바로 ‘희망’의 멀고 가까움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는 거죠. 식민지가 지속되었다는 게 문제인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계몽의 의지도, 혁명에의 희구도, 시간적ㆍ공간적으로 제약 받게 되었고,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게’ 바로 근대문물의 상징인 대도시 경성이었어요. 1920년 후반에는 축음기로 음악을 듣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가정이 하나씩 늘어갈 정도로 경성에는 근대라는 문물이 차츰 잠식해 나가고 있었거든요. 당시 조센징보다 더 경멸적인 뉘앙스로 조선인을 칭했던 ‘요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 편승하는 거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문화적 침투는 ‘촉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봐요. 사실 희망이 가까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누군들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이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멀리 있을 거라고 판단하게 되면 인내할 수 없어지고, 또 인내의 가치도 사라지게 되어 버리는 거죠. 그런데도 물질화는 계속 진행되는 거죠. 누구도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이걸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재단할 수 없었죠. 이런 가운데 경성이라는 공간의 근대적 변화는 희망과 경멸이라는 극단적인 두 가지 축을 단순히 왕복하면서 환대와 경멸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 되어갔어요. 몹시 야누스적이라고나 할까요? 공간의 물질적 신비함을 쫓아 욕망을 표출할 한 축, 정신적 폐허였던 경성에서 여인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켜켜이 쌓아 올렸던 죽음의 제단이 나머지 한 축을 구성한 것 같아요. 제 시가 배회했던 공간은 바로 이 사이가 아니었나 합니다.

보들레르 당시 파리를 지배하는 것이 성직자나 계몽의 윤리가 아니었듯이, 선생님에게도 경성에서 ‘예외적인 상황’을 선포할 수 있는 자는 ‘병’(각혈)과 ‘돈’이나 ‘깡패’(“알카포네”), 혹은 현해탄을 건너 맞이하기 전에 이미 느끼고 있었던 죽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基督은 남루한 행색行色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아아ㄹㆍ카아보네는 감람산橄欖山을 산채로 처리

―「烏瞰圖」


이거 우리가 지면을 너무 차지한 것 같아요. 서둘러 마무리 해야겠네요. 그 전에 잠시 한국시단에 선생님께서 끼친 자장을 언급해야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영향력은 한마디로 놀라울 정도에요. 사실 황지우, 박남철, 최승자 같은 시인들은 신동엽과 김수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질로 시인이 되었다기보다는, 대도시에서 선생님이 남긴 탈신비화의 그림자를 훔쳐 그것을 80년대 ‘예외적 상황’이 선포된 서울에 걸쭉하게 토해내면서 어떤 촉각적으로 감지했던 ‘공포’와 탈신비화를 통해 표현하는 법을 환기시켰고, 또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적 의식을 나름대로 검증했던 건 아닌가 합니다. 물질화에 몰두했던 이하석 같은 시인도 조금은 닮아 있고요.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상징을 부정하거나 자유로운 연상을 바탕으로 한 기발한 상상력도 바로 선생님의 시가 남긴 흔적들이겠지요.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

걸어가는 詩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

오리가 되었으면 嘔吐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발톱 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工場이

되었으면……

―이성복, 「口話」

[……] 타인의 그림자는 위선넓다. 미미한 그림자들이 얼떨김에 모조리 앉아버린다. 앵도가진다. 종자도 연멸한다. 정조도흐지부지―있어야 옳을박수가 어째서없느냐. 아마 아버지를 반역한가싶다.

―이상, 「가외가전街外街傳


시에 정치성을 도입한 김수영에게서 자양분을 얻어 제 살을 찌웠던 김광규나 오규원도 실상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고 하면 제 억지일까요?

이상 사실 제가 맑은 눈으로 경성을 바라보지 못했던 만큼이나 해방 이후 서울도 그랬던 것 같아요. 최승호나 황지우 같은 시인들은 공간에 엄청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김현 선생의 지적처럼 그 과정에서 특히 황지우는 “파괴를 양식화하고, 양식을 파괴하는” 그런 글쓰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죠. 저는 이걸 散文적인 글쓰기라 부르고 싶어요. 이런 散文적 글쓰기의 정치성은 역설적으로 시적 글쓰기를 견인할 어떤 분노를 추동하는 힘이었다고 여겨져요. 황지우의 몇 몇 작품을 보면 저보다 더 전투적이고 구체적이고 독설적인 것 같아요. 선이나 도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기 전 그에게 서울은 이데올로기가 남긴 상흔이 욕망 그 자체와 결합된 모순의 탈신비화 공간처럼 각인되어 나타나지요.


거리는 女色이 가득하다. 썩기 전에.

잔뜩 달아오른 화농처럼. 부강한 근육이.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무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

―황지우, 「활로活路를 찾아서」


보들레르 대담을 마무리하기에 부족할 것 같지 않은 것 같은데요?



조재룡∙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저서 <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시학, 번역, 주체> 등. 역서 <시학을 위하여․1>, <앙리 메쇼닉:리듬의 시학을 위하여> 등. 

추천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