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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시/황사 외 1편/서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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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정
황사 외 1편
삼월과 사월 사이, 비가 내렸다 빛이 내렸다
마른 땅이 젖었다 말랐다 꾸들꾸들 구겨지기도 했다
실컷 차려 놓은 밥상 저쪽 숟가락이 빠져버린 듯
진달래 꽃잎으로 속옷 만들어 주고 싶은 그 사람
늘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온 산에 꽃불 놓고도
천지사방 티끌이란 티끌을 다 긁어모아야
겨우 가릴 수는 있을 거야, 잘 나나
못 나나 누구에게나 갈망이라는 눈꺼풀은 있다
지금 누가 감춰둔 울음 꺼내 울며 간다고 가고 있니
우리에겐 황사라는 새로운 막부가 있다
사월이 가면
기차피리 불어 먹고 살던 정거장에
누렁개 한 마리 멀뚱멀뚱 남는다, 삐릿삐릿 삘릴리
동백 제단
웬 모자를 쓴 낯선 중년여인이 아주 우아하게 인사를 해
두 발 두 손 모으고 공손히 받아주고 고개를 드니
밑 다 빠지고 모자로 남은 아르헨티나 범선 한 척이
덩그러니 떠있네,
온몸을 휘감아 도는 비린 바람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끈적끈적 세 들어 살던 나락의 세월
뉘우치고 또 뉘우치며 가라는 듯
기를 쓰고 백사장에 기어 나온 파도는
패인 발자국마다 하늘을 가득가득 퍼 담는데
단죄의 전열을 바삐 가다듬는 수평선
불륜이었다, 비련의 그늘을 이고 툭 모가지 떨 굴 통꽃
오로지 정염과 격정으로 버틴 동백 앓이 가슴들
산산이 부서지는 소릴 물 조리개 높이로 듣더라도
작고 예쁜 발 씻어주고, 무릎 허리 어깨 만져나 보고야
독을 발라온 쌍바늘 서로의 명치끝에 대고
구경꾼들 앞에서 와락 끌어당겨야할
이 붉은 원죄의 제단, 연습도 없는 생 연습부족이었을까 마는
서규정∙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겨울수선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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