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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시/동지冬蜘 외 1편/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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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안
동지冬蜘 외 1편
밤이고
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
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
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
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
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아이들이 가슴팍에 부엌칼을 숨긴 채
숨 가삐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는 계절이다.
머리에서 달을 닮은 뿔이 자라나고,
술에 취한 가난한 아비들이 밤마다 거미집에 걸려 전화하는 계절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아비들의 목소리가 해가 뜨고 나서야 屍班처럼 퍼지는 계절이다.
손가락 끝으로 거미의 배를 누른다.
거미는 몽당연필처럼 작아지고
손가락 끝이 파랗게 언다.
손가락이 솜사탕보다 맛나던 계절이다.
자꾸만 손가락이 없어지던 계절이다.
온종일 방이 없는 집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도
慙愧하며 구름을 생산하는 계절이다.
* ‘동지冬蜘’의 한자 ‘冬蜘’는 김안 시인이 만든 조어입니다.
유령림*
선생님은 살아남는 자는 늘 빠르다고,
나머지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죠.
가로수마다 惡疽가 부풀어 오릅니다.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한때 우리가 작고 보드라운 묘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 그때는 비가 와도 아무도 젖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아도 이 세계에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그 시절을 알고 계시죠?
선생님의 오래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 비열한 추억의 정직함만 같습니다.
선생님, 비가 옵니다.
제 뼈보다 희고 굵은,
제 뼈보다 무겁고 뜨거운 비입니다. 투두둑,
우산살이 하나하나 부러집니다.
선생님의 그 오래된 풍경은 아직도 젖어 있나요?
선생님, 전 어린 시절 개에게 물려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몽둥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개의 정수리를 내리쳤습니다.
개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개보다 큰 비명을 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먹장구름 사이 드문드문 빛나는 별은 죽은 개들의 안광만 같습니다.
선생님, 저를 보세요.
온몸에 뿔을 꽂고 있습니다.
가로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깁니다.
온몸을 비벼 惡疽를 파헤치면 작고 보드라운 묘혈
그 속으로 들어가 웅크립니다.
개가죽을 뒤집어쓴 채 흘러가는 세월을 봅니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하얀 유령림이 됩니다.
* 10년 이하의 어린 나무들로 이루어진 산림.
* 이지형의 노래 「한때 우리는 작고 보드라운 꽃잎이었네」.
김안∙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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