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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시/차는 떠나고 외 1편/이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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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민
차는 떠나고 외 1편
황망한 그의 눈빛이, 흩날리는 눈발에 섞여있다
언젠가 눈 쌓인 멕킨리 벤치에서
작별도 없이 돌아오지 못한 멕킨리봉의 고상돈을 들먹이며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고, 서둘러 작별의 말을 굴렸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내가 던진 이별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는 그가
어깨위에 쌓이는 쓸쓸함을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다
얼어붙은 산 중턱에서 그가 뱉은 작별을, 지그시 삼킨
내 오장은 오랫동안 비리고 아팠다
멕킨리의 빙하만큼 차갑게 흘러내리는 혈관의 피들과
숨을 쉴 때마다 늑골에서 새어나오는 매캐한 아황산가스로
위험하게 뒤틀리는 몸뚱이는 아스팔트에, 가죽나무에
수시로 등대처럼 붙들려 있었고
뜨거운 커피는 늘 식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리고 빽빽했던 통증을 게워내고
잠시 머물렀던 불온한 정지선에서 다시 시동을 건다
떠나고 돌아가야 할, 순번을 정하려는 것인지
앞 다투어 부스럭 거리는 추억들이 눈발보다 거세다
물고 있는 이별을 그가, 삼켰는지 뱉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는 떠나고
함박꽃 흐드러지던 그의 뜨락은 지금
눈에 덮여 겨울을 지나고 있다
고흐를 그리며
화병에 꽂힌 수레국화와 양귀비사이에서
쓸쓸히 시들어가는 당신을
광기어린 해바라기 또는 태양을 훔친
범죄자라 부르지만
라뉘 카페에서 내 눈을 멀게 한 죄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도랑물소리를 끌고 무던히 걷는 사이
물은 깊어지고 발밑의 시간들은 단단해졌다
당신이 그려놓은
키 큰 싸이프러스도 닿을 수 없는 노을이
내 머리에서 흘러내려 열 개의 손가락에 걸려 있는데
때로, 당신이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
너무 오래 혼자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큰 상심이 된다는 것을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삶이 있다 해도
여전히 난, 당신을 그리고 있다
이채민∙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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