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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시/어쩌다가 나는 모기 외 1편/윤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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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정
어쩌다가 나는 모기 외 1편
철새처럼 더위가 몰려와
모기장 밖에 모기 모기장 안에 나도 모기
모기는 내 피를 빨고
나는 아주 작아진 나를 봐
나도 모르게 나를 쳐
부풀고 가려운 내 살은 모기의 무덤
무심히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살 밖으로 나온 피가 필사적으로 말라
나는 뻣뻣하게 말라가는 죽음을 펼치는데
모기가 윙윙거리는데
어쩌다가 나는 모기로 태어나
사라진다는 불안,
부우울아아안을 잊게 하는 관성으로
더위 탓만 하는 나
모기장 안팎을 허물며
모기는 성스러운 피를 필사적으로 소유하는데
소비하지 않는 성스러운 소유는 없어
나는 소비할수록 커지는 나를 봐
내가 키우는 부우울아아안을 잊으며
나도 모르게 나는 먹고살아
모기의 무덤에서 피가 부패하는데
다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
온갖 모기들 중에서 나는 모기
철새처럼 더위가 몰려간 후에도
어쩌다가 나는 모기
나는 전혀, 성스럽지 않은 나
꼬치
닫힌 입술만큼 뭉텅뭉텅 잘려 꼬챙이에 꿰인 당신들이 불 위에 나란히 모였다
뜨거운 당신은 불꽃처럼 빨갛다
연기의 허연 이빨이 허공을 깨물었다
아프게 꿰인 허공일지라도 되도록 살아봐야 한다는 당신과의 꼬들꼬들한 저녁이 모였다
─매일 술렁거리는 거리와 침묵에 절여진 거리 바람이 흔드는 나무와 나무가 흔드는 바람 생사를 초연하는 아파트와 노병을 번복하는 아파트 번쩍 날이 서있는 책과 먼지에 덮인 채 오래 꽂혀 있는 책
입속에 넣을 만큼 당신들을 자르고 꿰어서 맛있게 익은 저녁을 잘근잘근 먹기로 했다
뜨거운 당신을 만나고 모든 당신들을 꿰기로 했다
윤석정∙2005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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