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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시/레드카펫 외 1편/조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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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27회 작성일 09-12-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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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호
레드카펫 외 1편

세상엔 레드카펫이라는 생명체가 있다네. 레드카펫은 비오는 날의 시사회처럼 비릿하다네. 그렇다고 멍청한 물고기라는 말은 아니네. 레드카펫 위를 걷는 당신이란 생명체, 불안한 빗방울, 방독면을 뒤집어쓴 사람의 목소리, 동반자살을 한 시간 앞둔 연인이 찻집에서 주고받는 고양이 같은 농담이랄까? 이를테면 레드카펫은 혓바닥 같은 언어에 가깝다네. 레드카펫은 인간 외外에 언어를 지닌 최초의 생명체라네. 나는 레드카펫과 딱 한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네. 레드카펫은 손목을 긋는 성냥불처럼 몽환적이었다네. 레드카펫과의 대화는 영안실 냉동고 속에서 꺼낸 아버지의 나체를 바라보는 슬픔 같았고 휘어지던 형광등을 바라볼수록 똑똑 떨어지던 눈물은 백색의 수은水銀방울 같았지. 어둠 속에서 양초처럼 허물어지던 스물넷의 나를 깜빡깜빡 비추던 추억 같았어. 레드카펫 앞에서 나는 서서히 죽음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지. 피사의 사탑인 양 비스듬한 어깨로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말이네. 자네는 혹시 죽음을 연기한 최초의 배우를 알고 있던가? 그는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끊고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익사체 바로 부조리극 같았지. 나는 그의 무표정한 표정과 초콜릿을 비교연구한 적이 있었다네. 그 둘의 공통점은 바라볼수록 녹는다,는 거였지. 한 시간 후 다가올 피의 밸런타인데이. 한 시간 전 찻집에서 나온 연인이 레드카펫 위에 화려한 배우처럼 누워 있다네. 입 밖으로 피를 토한 채.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진다네. 레드카펫은 할로겐전구 아래 붉은 도마, 붉은 도마 위 뾰족한 생선머리가 가리키는 곳이라네. 말하자면 레드카펫 끝엔 인간의 형상을 한 트로피가 서 있다네. 레드카펫은 인간이란 황금빛모서리*라네.

 




흑백의 왈츠
―염색공장의 가축들


염색공장 불 지핀 드럼통 속에서 색이 끓고 있네. 소(牛)와 양(洋)가죽이 소용돌이를 내뱉네. 염색물이 콸콸콸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네. 공중에서 외줄 타는 광대처럼 가죽들이 울긋불긋 흔들렸네. 드럼통 밑으로 뜨거운 잿물이 흘러다녔어.   아지랑이가 덩굴식물처럼 이글이글 대기 속으로 기어올랐지.

막대로 드럼통을 휘젓는 그는 색에 길들여진 가축 같았네. 그의 손끝에서 가축의 마지막 울음처럼 지문들이 사라져갔네. 드럼통에서 피어오르는 유독가스가 비누 같은 눈동자를 착취해갔지. 도살장으로 가축을 끌고 가듯,

그의 눈 속에서 색色을 끌고나갔지. 마스크를 벗으면 재災에 덮인 흑백 세상이 펼쳐졌네. 식물들이 연기처럼 자랐네. 드럼통 같은 그의 지하방이 있었네. 가축 같은 흑백텔레비전 한 대 놓여 있었네. 밤이 오면 그는 가축의 흑빵 같은 젖 아래로 기어들어가 잠들었지.

  불타는 재의 나날이 계속됐네. 그의 방에 파리가 들끓기 시작했지. 흑백 모자이크 같은 파리 떼 밑, 바짝 엎드린 가축이 색을 바닥에 질질질 흘려보내고 있었어. 그날 밤. 그는 흑백텔레비전을 끌고 외떨어진 숲으로 갔네. 흑백텔레비전은 피를 흘리는 짐승처럼 숲을 어지럽혔어.

  숲 속에서, 그는 흑백텔레비전을 불태웠네. 화르르 전원 켜진 브라운관 속은 흑백의 화장터 같았네. 가마 속 검은 재와 흰 뼈들이 흑백피아노를 연주했네. 그는 흑백브라운관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흑백의 불 속에서 그는 아름다운 왈츠를 췄네. 드럼통 속 소와 양가죽처럼. 불이 멈출 때까지 흑백이 될 때까지

총천연색의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탈색돼갔네.


조인호∙1981년 충남 논산 출생. 2006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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