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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시/막차에 몸을 싣다 외 1편/이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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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막차에 몸을 싣다 외 1편
늦은 밤 도심을 빠져 나올 적엔
상가의 불빛도 쇠잔하였다
늘어진 시간이 고속도로를 들어서자
촘촘한 간격을 바짝 잡아당긴다
들판 저 건너 인적기 없는 불 빛 하나
미약하지만 누군가의 부모가 있다
어둠 속 저 벌판이 대처에 본거인 까닭이다
아직 폐등되지 않은 가계의 흔적처럼
나를 스쳐 지난 것이
차창 밖, 깜북 벌판에 저 전등 불 빛뿐일까
일이 끝나면 어둠 속 저만큼
열 겹 허무의 벌판을 밀어내곤 하였다
벌판 속, 외딴 집에 켜져 있는 갓등아
너는 포구여야 하지 않느냐
새벽까지 기침하는 늙은 아비에게
천정 밑, 전구 속 섬조야
내대신 아비를 바라 봐야 하지 않느냐
겹겹의 안개를 밀어내지 않는 발항이 어디 있더냐.
바다 같은 벌판 속, 이름 없이 헤맨다 하여도
회한 저 아래
우회의 그물을 걷어 올리지 않는 새벽은 없다
낡은 목선에 허름한 선장이라고 하여도
멀지 않은 날에 해항海航에서 돌아오리니
갓등인 포구는 늦은 밤 막차로 내려오는
아들의 밤길을 밝혀주는 등대불인 것이다
과천 가는 길
붉은 신호를 내내 서 있지는 않았다
길도 잠깐 열릴 때가 있어 그 틈으로 스며든다
강이 가까워지자 물비린내 진동한다
갈림길마다 제대로 방향을 짚었던가
길을 꺾어 돌자 도곡동 타워 팰리스다, 높다
그 밑을 들개처럼 달린다
페달위에서 관절들이 삐걱거린다
19일과 27일 같은 뭇 날들 속에서,
이어지고 끊어지던 塵想들 속에서,
애기 똥 풀처럼 확연했어야 했어
그렇게 결정을 내렸어야 했어, 때때로
늦은 판단이 등짝을 후려쳐도
변두리 역전, 들판에 허름하게 서 있으면
마음 속 퍼렇게 날 세우던
칼날도 두루뭉실해진다
어디쯤에서 오는 걸까
어쩌다 스치는 사람하나
외따롭게 단보하는 저 두루미도 같다
부산하지 않은 이쯤의 물가에선
누구든 저를 되돌아본다, 길 위에 서면
앙금으로 자리를 잡는 것도 있다
마음가닥이다 가닥을 들여 다 보면
산다는 거 꼭 허무만은 아니다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어진 길처럼
너덜거리다 만난 희망이라는 대견함처럼
고물 자전거 과천 중앙 공원에 나를 부린다
‘제 7회 과천 화훼 콘테스트’ 열창의 무대
란도란, 프린세스드모나코, 덴파레...
뽐내는 주연들은 늘 중앙에서 화려하다
저만치 마가리트 산골소녀처럼 차분하다
가만히 피어낸 단아함에 맘이 먼저 가 닿는다
아무도 없다
마음 속 벌판 끝에서 본다
안개 분수대 넘어
되짚어야 딛고 가야 할 아스라한 길
이희수∙2007년 ≪시와정신≫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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