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초점/임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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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물들은 고속도로를 맴돈다.
편혜영의 「소풍」(<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은 안개 낀 톨게이트에서 시작된다. 오래된 연인은 W시를 가려고 한다. 오랫동안 벼르고 벼렸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준비가 온전치 못했음을 여자는 깨닫는다. 둔하게 껴입은 오리털 잠바도 신경 쓰이고 멀미약도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여자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다른 여자의 흔적을 알아챈다. 그래도 따지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자칫 남자의 흥을 깼다가는 여행 같은 건 때려치우고 모텔이나 가자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자는 ‘다른 여자’와 모텔로 향한 적이 있을지 모른다. W시로의 여행에 남자가 강박적인 의무감을 느끼는 까닭도 찜찜함을 털어버리려는 과잉반응일 수 있다. 여자 역시 휴게소에서 스쳐간 탱크로리 운전수의 유혹이 싫지 않았다. 충동이 이끄는 대로 그의 운전석에 올라탔다면 그녀의 소풍 장소는 W시에서 T시의 모텔로 수정되었을지 모른다.
모텔과 고속도로. 요금을 지불하고 ‘일정한 시간동안 빌려 쓰는 장소’라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어원 자체에도 둘은 연관 관계에 있다. ‘motor’와 ‘hotel’의 합성어인 ‘motel’은 본래 자동차 여행자가 숙박하기 편하도록 만들어 놓은 간이 호텔이었다. 운전자의 ‘주행’이 중단되는 장소가 아니라 좀 더 안락한 방식으로 ‘정차’해 있을 수 있는 장소다. 그래서 도로로부터 비껴나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꼬여있는 도로의 연장선이다. 벽과 벽, 층과 층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방 풍경은 비슷비슷하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행위도 비슷비슷하다. 그들의 몸뚱이가 원하는 심리적․육체적 목표점에 도달한 뒤엔, ‘정차’를 ‘주행’으로 전환하는 순서를 밟는다. 각자 제멋대로 드나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제멋대로일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고속도로 위에서 삶은 규격에 맞춰 생산된다. W시로 향해가는 남녀가 느끼는 불쾌함과 밑도 끝도 없는 체념의 정체도 거스를 수 없는 이 힘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는 톨게이트를 지난 지점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지도 위에 표시된 노란 선이 현실의 전부일 리 없는 것처럼 물리적인 시설물의 범위만으로 고속도로의 본질을 한정지을 수 없다. 여자는 달리는 차 안에서 자꾸만 무료한 일상을 떠올린다. ‘싫다’와 ‘불안하다’를 반복하는 여자의 속내는 사실상 여자의 일상이 지닌 리듬감에 일치한다.
주어와 서술어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라면 싫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공산당이 싫다고 반공 글짓기를 하는 아이도 싫었다. 푸른 하늘처럼 맑은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쓰는 아이가 싫었다. 장래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쓰는 아이도 싫었고, 장래희망이 없으니 아무거나 써달라고 조르는 아이도 싫었다.
―「소풍」, 16p(강조는 인용자)
아이들을 떠올리며 여자는 문득 불안해졌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비문으로 모든 글을 채우는 아이들이 불안했다. 모든 문장을 일인칭 주어로 시작하는 아이들이 불안했다. 버릇없게 구는 아이들을 무관심하게 지켜보는 자신이 불안했고, 아이답지 않은 표현과 졸렬한 표현을 오히려 칭찬하는 자신이 불안했다.
―「소풍」, 23p(강조는 인용자)
여자는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서 돈을 벌고 있다. 여자는 아이들에게 주어와 서술어만의 문장을 써오라고 지도한다. 주어와 서술어만의 문장은 여자가 갈망하는 삶의 형식에 대한 은유이다. 목적어에 속박당하지 않고 형용사와 부사로 꾸밀 필요 없는 심플한 구조를 닮고자 하지만, 여자의 일상이야말로 아이들의 ‘싫고, 불안한’ 문장을 꼭 닮아있다. 아이들은 흔하디흔한 유형의 어른으로 ‘생산’되고 있고 여자 자신도 특별할 게 없는 사회적 생산물 중 하나이다.
이들이 W시를 여행지로 선택한 까닭도 아이들의 상투적인 문장만큼 유형화된 선택이다. “여행지로는 W시 만한 데가 없대. 작년에 도시인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말이야, W시가 숨겨진 관광지 일위로 뽑혔어. 한번쯤은 이런 곳으로 여행을 가줘야 한단 말이야.”(12p) 이번 여행을 귀찮아하는 여자 역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W시에 다녀온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은 결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타자의 욕망이 주어와 서술어 사이를 매개한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 근원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달리 어떤 삶이 가능할까? 이들은 끝내 상투화된 삶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 밥벌이의 반복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뭔가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순진했다. 왜냐하면 상투화된 삶으로부터 예외상태를 허락받은 장소는 아직 고속도로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속도로는 그런 예외상태들을 격파해버리는 확장하는 힘이다. 이들의 여행이 그 힘을 실어 나르는 매개가 되고 있다.
줄거리에 여러 상념이 얽혀들지만 여정은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소비하고 배설하기. 이들은 도시를 벗어나기 전 대형 마트에서 먹을 것을 잔뜩 산다. 차에 올라선 꾸역꾸역 그것들을 하나씩 먹어치운다. 결국 위장이 가득 찬 상태에서 멀미를 느끼고 물건을 담았던 봉지에 속엣 것을 토해낸다. 그러고 나서도 또 뭔가를 입에 짚어 넣는다. 휴게소에 들러 배설을 하지만 또 소변이 마려워 도로 위에 쭈그려 앉아야 했다. 뜨거워진 몸을 차가운 삼겹살로 식히고, 한 손엔 운전대를 한 손엔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이들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한 쌍의 ‘동물’이다. 코제브가 전후의 미국형 소비사회를 비판하며 사용했던 ‘동물적’이라는 표현, 즉 결핍-만족의 회로 위에 닫힌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들은 ‘동물’이다.
고속도로는 톨게이트를 지난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W시로의 여행이 맞이하게 되는 파국도 ‘이미 벌어졌던 일’의 확인이었다. 밤의 고속도로에서 탱크로리의 곡예운전에 희롱 당하던 남녀는 결국 가드레일을 들이받는다. 정신을 잃고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그들은 W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앞에 멈춰서 있었다. 하지만 W시는 그들이 기대했던 장소가 아니었다. 「소풍」이 처음 시작했던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혔지만 그로인해 그들이 맴돌았던 자리의 마성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버려두고 견인차와 함께 떠나버린다. 여자는 W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앞에 남겨졌다. “이정표는 언젠가 도착할 도시의 이름을 알려줄 뿐 여기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34p) 하지만 여자는 당황하지 않는다. 담담히 갓길을 걸어 톨게이트로 향해간다. 오직 이 순간만은 그녀가 주어와 서술어만의 문장으로 서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소풍」은 바로 그 순간에 끝나버린다.
쓰이지 않은 뒷이야기에 우리는 상상력을 보탤 수 있다. 가령 여자는 애정 없는 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글쓰기 과외의 비루함으로부터도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문장을 맘껏 만드는 소설가가 된다는 식의 이야기. 그렇게 「소풍」의 마지막 장면이 남긴 찜찜함을 봉합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속도로는 세상이라는 회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속도로 위에 버려졌음을 보여줌으로써 소설은 이미 뒷이야기까지 보여준 셈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짐작한 바로 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싫다’와 ‘불안하다’를 반복하는 그 일상이 여자에게 다시 시작될 것이다. 소풍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2. 도시인의 꿈
이쯤 되면 W시가 어떤 단어의 약자일지 짐작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Want’(필요, 욕구, 결핍, 부족, 곤궁, 빈곤) 또는 ‘Wannabe’(열망하는 대상, 닮고자 하는 대상)와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W시는 ‘Want’도 ‘Wannabe’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도달 불가능한 지점이었다.
「사육장 쪽으로」(<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에 등장하는 부부에게 W시는 전원주택이었다. 이곳은 고속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부부는 이 집을 구입하는 데 무리한 융자를 끌어다 썼고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남자는 이렇게 된 상황이 억울하기만 하다.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40p)
「소풍」의 그들처럼 이 남자 역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가 마음에 그리는 전원주택의 풍경이란 그 자신의 자족적인 시선만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이 일엔 ‘그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회사 동료이면서 고속도로를 지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이다. 간밤에 도둑처럼 현관 앞까지 왔다가 압류 경고장을 끼어놓고 간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선의 관계망 안에 전원주택의 풍경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처럼 본질로 지향할 수 있을 뿐, 풍경의 또렷한 실체를 획득할 길은 없다. 이 남자가 거액을 들여 구입한 것은 집이라기보다는 꿈이었던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대목을 보면, 남자는 ‘전원주택’ 보다는 ‘도시인의 꿈’이라는 말에 결정적으로 마음이 동했음을 알 수 있다. 기쁨의 동인도 ‘전원주택’에서 실제로 생활하는 일로부터가 아니라, ‘도시인의 꿈’을 실현했다고 회사 동료들에게 뽐낼 수 있게 됐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스운 역설이 생겨난다. ‘도시인의 꿈’이란 도시로부터 벗어난 삶을 지향하는 것임에도, 전원주택의 매력은 도시적 삶의 본질 안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시의 일상이 결핍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욕망하는 일. 남자는 도시 안에서 도시인답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사를 결심한 것은 Y씨가 전원주택이야말로 진정한 도시인의 꿈이 아니겠느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시인이라면 선뜻 그렇다고 대꾸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나야말로 굴뚝이 달린 경사진 지붕의 새하얀 단층집이 꿈이었다고 가슴을 탕탕 내리치며 대꾸했다. Y씨가 낮은 목소리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원주택이라는 게 왜 죄다 그 모양이냐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파란 하늘을 가벼이 떠돌고 있는 흰 구름이 피어올랐다. 흰 자갈이 깔린 정원의 화단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을 심을 것이다. 집 뒤 텃밭에서 푸른 상추와 붉은 고추를 거둘 수도 있으리라. 이사를 결심한 그는 회사 동료들에게 전원주택이야말로 진정한 도시인의 꿈이 아니겠냐고 큰소리쳤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객쩍음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자신이 집이 산을 배경으로 한,
―「사육장 쪽으로」, 48p
실제 그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의 실상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직장까지 가려면 고속도로를 두 시간이나 달려야 할 만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는 신작로에는 가로등 하나 켜있지 않다. 가령 한 밤의 고속도로를 달릴 때 갓길 너머의 어두컴컴한 세계를 궁금해 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 남자가 바로 그 어둠 속에 집을 ‘가졌던’ 사람이다. 파산 뒤엔 그 어둠이 한층 더 깊게 느껴진다. 아내와 아이들은 압류 집행관이 들이닥칠까 두려워 하루 종일 숨도 못 쉬고 있었다. 아내는 집행관을 ‘그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시선에 이 집은 어떤 곳으로 보였을까? 굳이 파산 상태임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곳을 ‘도시인의 꿈’으로 인정하긴 힘들다. 오히려 이곳은 도로변의 모텔에 더 가깝다. 기묘한 방식으로 꼬여있는 도로의 연장선. 이곳의 일상 또한 고속도로의 질서에 순응해 있다. 똑같은 방으로 채워진 모텔처럼 마을의 집도 레고블록처럼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주민들의 생활도 획일화되어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남자는 이곳의 일상에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은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단층주택의 가장들이 도시로 출근하기 위해 일제히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 시각에 나가지 않으면 대개 아홉시로 정해진 직장의 출근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가장들이 탄 차가 순서대로 신작로 너머로 사라졌다. 그중에는 그의 차와 차종은 물론 색깔까지 똑같은 차가 서너 대 끼어 있었다. 다른 때라면 그 역시 고속도로로 향하는 행렬에 섞였을 터였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기 위해서 같은 시각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에게는 졸음이나 식욕, 성욕 따위도 시간을 지키며 찾아왔다.
―「사육장 쪽으로」, 38∼39pp
‘도시인의 꿈’과 이곳 사이에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소리’이다. 남자의 전원주택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화물차와 트레일러의 소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어딘지도 불분명한 개 사육장에서 수백 마리의 개떼가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댄다. 가까이에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외부의 소음보다는 마을 내부를 입막음하기 위한 시설로 보일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만 전원처럼 보일 뿐 ‘음경音景’은 도시에서보다 오염되어 있다. 그런데도 남자의 결심엔 흔들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줄곧 살아온 도시에서는 소음이 침묵보다 일상적”(45p)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도시 북쪽의 집도 “먼지가 들끓고 소음이 끊이질 않으며, 거리를 지나다니면 모르는 사람의 어깨에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인 도시다운 곳”(48p)이었다. 남자는 그런 일상을 비관했던 적이 없었다. 전원주택으로 이사 온 뒤로 도시의 일상에 한층 충실한 생활을 했다.
그는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이 남자는 평소 일하는 것에 비해 회사에서의 존재감이 희박하다. 출근이 늦어도 눈총을 주는 사람 하나 없을 지경이다. 그렇기에 전원주택으로의 이사는 ‘그들’을 향한 도발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 도발이었다. 마을로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집행관의 방문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극도로 ‘소리’에 민감해진다.
압류 경고장 앞에서 일제히 울음을 터트리는 가족과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가 겹쳐진다. 이 소설에선 단 한 번도 사육장의 정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원주택의 획일적인 외관과 개들이 갇혀있는 철창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마을 주민의 반복되는 일상과 개들의 사육이 겹쳐진다. 작가의 의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노골적이다. 전원주택이야말로 사육장이라는 얘기다.
남자의 아이는 도망친 개에게 물어 뜯긴다. 이번엔 이들 가족이 사육장에서 도망친 개가 될 차례다. 황급히 아이를 차에 싣고 가족은 병원을 찾는다. 사육장 쪽으로 가면 병원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간다. 가족들도 겁에 질린 개처럼 울어댄다. 그들은 도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를 지나게 된다. 톨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불빛 하나 없이 시커먼 어둠에 잠겨있다. 개 짖는 소리에 넋이 나간 남자는 계속해서 사육장을 찾는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병원만이 아니다. 그는 간절히 되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일상 속으로. 매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할 수 있었던 도시의 회로 속으로. 이 소설은 도시를 향해 바치는 한 남자의 연서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비참한 법이다.
3. 고속도로의 피부
결국 이 남자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풍」과 「사육장 쪽으로」 두 편 모두에서 화물차는 고속도로 위의 가장 수컷다운 무리의 일원이면서 결코 길을 잃는 법이 없는 존재처럼 등장한다. 남자는 그들에게 열등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운전자 대 운전자로서 갖는 감정이 아니다. 그는 화물차의 위압적인 덩치와 속도로부터 고속도로 그 자체의 용출을 경험한다.
이것은 정지된 풍경에 대한 정념이 아니다. 화물차가 쏜살같이 우리 곁을 지나쳤다고 하자. 그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움직임의 잔상 위로 디테일은 뭉개진다. 자세히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리도 그만한 속도를 내야한다.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운동성을 마주하는 법을 배울 기회다.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속도가 한 데 얽섞여 있는 힘의 덩어리를 떠올려보자. 운전자는 이 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주체로 군림하지 못한다. 가령 핸들과 페달을 조작하는 순간들이 산발적인 점찍기에 불과하다면, 자동차가 실제로 달려 나가는 과정은 선에 비유할 수 있다. 운전자의 의식은 그 선을 남김없이 지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선 전체를 자기 원인으로 귀납 지을 수도 없다. 운전자는 부분 부분의 선택을 할 수 있을지언정 다음 순간에 자동차와 도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자명하게 알지 못한다. 상식 수준이든 공학적 원리에 입각해서든 그가 알고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은 언제나 실재에 미달한다. 운전자는 미지의 가능성이 와동渦動하고 있는 상태로 뛰어 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고속도로에 대한 사유를 운전자라는 주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지엽적이다. 오히려 와동 그 자체에 대해 물어야 한다. 화물차와 화물차 운전수, 겁먹은 남자와 매혹된 여자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모두를 둘러싼 사태의 사태성에 주목해 보자.
이런 일이 벌어졌다.「소풍」에서 운전에 온통 집중하는 남자의 면모는 온갖 상념에 시달리는 여자와 대별된다. 자동차는 이 남자의 심리를 감싸고 담아주는 또 다른 ‘피부’이면서, 속도의 세계에 공유된 소용돌이치는 경계면이기도 하다.
「사육장 쪽으로」의 남자는 고속도로에서 규정속도를 어기지 못하는 소심한 운전자다. 그에게 규정속도는 벗어버릴 수 없는 그 자신의 ‘피부’나 마찬가지다. 융통성 없는 그의 움직임은 트레일러에게 장애물로 간주되기 쉬웠다. 남자 역시 자기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트레일러를 뒤쫓아 갈 순 있어도 앞질러 가진 못한다. 이런 일이 매일 아침마다 반복된다. 사육장의 개처럼 그는 도로 위에서 훈육된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규정속도를 지키는 소심한 운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고속도로가 무서웠다. 출근할 무렵이면 유독 트레일러나 총 중량을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화물차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을 냈다. 화공약품이나 기계 따위를 잔뜩 실은 트레일러가 뒤따를 때면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규정속도로 낮추자 뒤에서 다시 클랙슨이 울렸다. 사이드미러를 보고서야 유람선만큼이나 커다란 화물차가 바짝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물차는 곧 차선을 바꾸어 그를 앞질러갔다. 그는 화물차의 꽁무니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육장 쪽으로」, 47p
흥미롭게도 「소풍」과 「사육장 쪽으로」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일체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차에 실려 다닌다. 「소풍」의 여자는 심한 멀미에 시달린다. 그녀의 몸은 자동차와 끝까지 불화를 겪는다. 그렇지만 여자는 남자와 함께 꾸역꾸역 W시를 향해간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여행의 불길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돌이켜야 할지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한다.
여자는 휴게소에서 탱크로리 운전자를 만난다. 고속도로 휴게소. 온갖 종류의 차가 멈춰서는 ‘탈의실’이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알몸뚱이를 드러낸 듯하다. 누구라도 이곳에서 그들의 동선動線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맞힐 수 있을 것이다. 식사와 배설. 하지만 이곳에서조차 여자의 남편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운전석에 앉아 잠을 잔다. 반면에 이십오 톤 탱크로리라는 육중한 ‘피부’를 벗은 운전자는 의외의 모습을 드러낸다. 몸에서 기름 냄새를 풍기긴 했지만 귀여운 외모의 남자였다. 그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오자 여자도 금세 호감을 느낀다.
그런 대형차를 몰면 기분이 어때요? 밤에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딱 두 가지만 조심하면 돼요. 탱크로리랑 여자. 사내가 여자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뭐가 우스운지 알 수 없지만 계속 웃음이 났다. 타보고 싶으면 나랑 같이 T시로 내려가든가. 대형차를 타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사내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여자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전부 퍼먹으면서 씨익 웃었다. 그런 차를 타면 멀미 해요? 더하지. 세상이 빙빙 돌지. 여자가 입속에 든 아이스크림이 다 보일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소풍」, 20p
탱크로리 운전자는 여자에게 다음 휴게소에서 만나자며 유혹한다. 여자도 남자의 탱크로리를 타는 일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다음 휴게소에서의 만남만큼은 설렌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유혹이 여자를 여행에 다시 집중하게 만든다. 그녀가 실제로 탱크로리 운전수를 따라나서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수 있다. 고작해야 휴게소에서 다시 만나 은근한 눈웃음을 주고받는 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권태로운 연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주위를 맴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자의 ‘소풍’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매일같이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탱크로리 운전자에게도 그런 환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고속도로의 원심력 안에 붙들려 있다.
도로에서 다시 만난 탱크로리는 무지막지한 위협을 가한다. 휴게소에서 만난 그 사내의 짓인지는 알 수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위험물 이라는 붉은 글자가 박힌 탱크로리의 ‘피부’ 뿐이다. 탱크로리는 악랄하게 그들을 따라붙으며 주행을 방해한다. 남자는 이 상황을 고속도로 마초의 짓궂은 장난쯤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도로 위에서 뭔가를 치어 죽였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목격자가 없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탱크로리가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남자는 공포에 질린다. 이 순간 탱크로리는 고속도로의 질서를 현현하는 대타자로 돌변한다. 대타자는 윤리적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 남자는 대타자에게 쫓기는 자신에게 쫓기게 된다. 남자는 결국 가드레일을 들이받는다. 앞서 검토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사육장 쪽으로」에서 길을 잃은 남자는 무작정 트럭을 쫓아간다. 그는 도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입구까지 이르게 된다. 매일 아침 남자를 훈육했던 화물차가 그에게 길을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톨게이트 너머로는 온통 어둠만이 보일 뿐이다. 길을 안내받을 트럭도 이젠 사라져 버렸다. 남자의 차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이 어둠은 고요하지 않다. 이 어둠이야말로 온갖 힘들로 휘몰아치고 있는 고속도로의 ‘피부’이다. 작렬하는 속도와 시선, 자본의 욕망이 얽섞인다. 따라서 이 어둠이 남자를 삼켰다고 말한다면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이 어둠이다.
4. 왕복 10시간 또는 거대한 환영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그는 십여 년 동안 일군 가게를 잃었다. 그 가게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아내마저 잃었다.
「시체들」(<아오이가든>, 문학과 지성사, 2005)에 등장하는 이 남자는 U시를 찾아가야 한다. 만만한 일정이 아니다. “U시까지는 휴게소에 들러 우동 한 그릇 말아 먹을 시간을 빼고 꼬박 다섯 시간이 걸린다.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새벽 두 시경에야 관할 경찰서에 도착할 터였다.”(217p)
남자의 아내는 계곡에서 실종됐다. 계곡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여자를 본 목격자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를 본 것이 아니라 어떤 여자를 본 것이었다.”(219p) 얼마 후 경찰은 남자의 아내로 추정되는 ‘시체의 일부’를 발견했고, 남자는 ‘그것’이 아내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 오른쪽 다리, 왼쪽 팔과 손, 그리고 두상이 차례로 발견된다. 이때마다 남자는 U시를 찾아간다.
왕복에 총 10시간이나 걸리지만 정작 U시에서의 용무는 몇 십 분 만에 끝나버린다. 매번 남자는 ‘그것’이 아내라고 확인하지 못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아내는 ‘실종자’에서 ‘사망자’로 뒤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 남자의 말과 행동은 어딘가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아내가 실종되었을 때 경찰은 남자를 피의자로 의심했다. 그가 아내를 계곡으로 떠밀었을 수도 있다. 남자 자신조차 스스로를 의심해보곤 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실종자와 사망자, 피의자와 피해자를 가늠하는 기준에 그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의 ‘말’은 기록될 것이며 법적․행정적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가 겪은 경제적 몰락에 비하면 훨씬 더 더디고 까다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남자는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10시간 동안 아내에 대한 기억에 매달린다. 특히 아내의 세세한 생김새를 생각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리에 있던 쌀알만한 섬유종에서 왼쪽 손목에 난 흉터까지 샅샅이 떠올려보지만, 디테일에 매달릴수록 기억은 점점 더 헝클어져버린다. 그의 기억 속에서 아내의 얼굴은 섬유종과 손목 흉터로 변화를 거듭한다.
그런데 「시체들」의 서술은 이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3인칭 시점이지만 남자의 독백이라 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이 소설의 불쾌함은 남자가 어물쩍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부분에 관대하게 협조하는 서술자의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아무래도 설명이 안 되는 점은, 왜 하필 차로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U시로 여행을 갔는가에 대해서다. 빈털터리 부부가 머리를 식히러 가기엔 지나치게 멀고 생뚱맞은 여행지였다. “아내는 반드시 U시의 계곡이어야 한다고 했다. U시에는 깊은 계곡이 있고, 그 깊은 계곡에는 계곡보다 더 비밀스러운 물이 칼처럼 차갑게 흐르고 있는데, 그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지만, 그런 곳일수록 실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다고 했다.”(226p) 이게 남자가 밝힌 U시를 찾은 이유의 전부다. 깊고 깊은 비밀스러운 곳을 강조하는 이런 식의 설명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아내가 평소 자신이 실종될 곳을 생각해두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정도다.
하지만 작가의 관심은 사건의 진실에 있지 않았다. 이 소설의 결말은 훨씬 뜻밖이다. 아내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인 두상이 발견되었을 때, 남자는 경찰서로 찾아가지 않는다. 그는 아내를 사망자로 결론짓는 일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 일을 언제까지라도 연기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 남자는 언제까지 ‘실종자’와 동거할 수 있을까? 이것이 작가가 진짜로 궁금해 하는 질문이다.
실종자는 유령이다. 아내는 실종자이기 때문에 언젠가 되돌아올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언제까지라도 되돌아올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다. 실종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10시간 동안 남편은 그 어느 시절보다 정신적으로 아내를 가까이 둘 수 있었다. 고속도로는 영사기 속을 질주하는 필름처럼 환영을 만들어낸다.
거기 있는 거, 당신이야?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아내는 물고기에게 뜯겨 너덜너덜해지고 시커멓게 죽은 왼손으로 생선을 다듬었다. 한쪽 다리로 선 듯 몸이 기우뚱거렸는데, U시의 경찰서에서 본 그 썩어가는 오른쪽 다리에 의지하고 있어서였다.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왼손으로 생선의 몸뚱이를 눌러 잡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눈알을 도려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눈알에 달린 혈관이 길게 달려 나왔다. 손가락 끝은 검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조리도 하지 않은 생선을, 비브리오 균이나 기생충의 유충이 묻어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을 꿀꺽 소리 내어 삼키는 아내를 하릴없이 쳐다보았다. 아내는 생선 눈알을 입에 넣은 채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시체들」, 237∼238pp
이 환영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기제에는 법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님’은 법에 의거한 정상적 행정 절차에 맞춰 등록할 수 없는 ‘죽음들’의 대기 상태다. 형사가 취급하는 ‘시체들’이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형사는 ‘시체들’을 온전히 죽은 상태로 만드는 일에 복무한다. 남자도 이 절차에 적극 협조한다. 그에게 고속도로는 죽음을 등록하는 관공서로 향하는 긴 줄이기도 했다. 남자가 ‘그것’을 ‘아내’라고 확인하지 못할 때마다, 형사와 남자는 까다롭고도 거대한 환영 앞에 난감해한다. 그 환영의 이름은 국가다.
경제적 파산과 붕괴된 가정. 이 남자에게 더 이상의 최악을 면할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U시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남자는 아내가 실종됐던 그 시간의 언저리를 계속 맴도는 것처럼 느낀다.
남자는 철거 직전의 가게에서 챙겨야 할 물건을 찾던 중, 전기가 끓긴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썩어 문드러진 생선을 발견한다. 그제야 그는 아내가 사라진 뒤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생선이 썩어가는 세상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남자는 아내를 실종자에서 사망자로 등록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경찰서 대신 계곡 낚시터를 찾는다. 그리고 넋 나간 사람마냥 물에 빠진다. 몽환적인 서술로 처리되는 대목이지만 실상은 계획적인 자살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가 확인하지 않는다면 아내는 실종자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도 물속에서 물고기 떼에 뜯기고 돌부리에 찢겨 나간다. 그의 시체를 건져 올린 낚시꾼들은 형사에게 알리는 대신 땅 속에 묻어버리는 편을 택한다. 대단한 호의였다. 이것으로 그의 죽음은 등록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믿는 환영 속에서 아내와 함께 실종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 환영 속에 속해있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멀리 우회하지 않아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5. 습지 대 고속도로
그렇다면 세상은 자본과 국가의 질서에 남김없이 휩싸일 수밖에 없는 걸까? 고속도로의 확장을 거부할 수 있는 장소는 아직 남아있기나 한 걸까?「밤의 공사」(<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에서 이런 생각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소설의 무대인 D시는 인근의 U시, P시, 항구 D시를 잇는 고속도로에 인접해 있다. 이 도시엔 고분이 유난히 많아서 문화재관리법의 까다로운 적용을 받고 있다. 담장 하나를 고치는 데도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다 보니 도시 전체가 낙후되어 있다. 이 도시의 사람들 대부분은 고분과 관련된 일로 생계를 해결한다. 이런 생활이 싫어서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인심마저 박한 곳이라 이웃의 훼방과 질투가 병적인 수준이다. 낮에는 도시 전체가 고분인 듯 괴괴한 정적만이 감돈다. 하지만 밤이면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레일러의 소음에 지축이 흔들린다. 주인공 남자의 집은 이런 D시의 문제점을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장소다. 그의 집은 허술한 담장을 경계로 습지를 면하고 있다. 이 습지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날 괴물이다.
습지 표면에는 순채나 검정말 따위가 가득 덮여 있었다. 그 때문에 습지는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잔디가 깔린, 잘 가꾼 정원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 더 내려오면 이제 막 아스팔트 공사를 해놓은 도로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순채나 검정말의 태반은 이미 까맣게 죽어 뿌리도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표면이 일렁이지 않았다. 습지에 가득 찬 것은 점액질의 물컹거리는 덩어리였다.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것이었다. 가끔 표면이 일렁일 때도 있었다. 아내가 집 안에서 잡은 들쥐의 꼬리를 휘휘 감아 던질 때나 습지에 닿아 있는 마을 하수관으로 오폐수가 쏟아져 나올 때였다. 습지는 그 모두를 잘 받아 넣었다는 신호로 잠깐 쿨렁거렸다.
―「밤의 공사」, 96p(강조는 인용자)
남자의 집은 습지의 영향력 아래 있다. 가까이에 고속도로가 있지만 소음만 요란할 뿐 이곳에 기운을 뻗지 못한다. 점액질의 물컹한 덩어리를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까닭도 고속도로의 확장에 맞서는 습지의 힘 때문이다.
도시의 온갖 오수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온다. 습지는 도시적 삶이 혐오하는 더럽고 시끄러운 것들을 죄다 품고 있다. 도시적 삶의 배설물이 증가할수록 습지는 더 불쾌하고 강해질 것이다. 남자의 집도 연일 들쥐와 해충으로 들끓는다. 하루빨리 담장을 고쳐 습지로부터 집을 보호하지 않으면 도시인답게 살기는커녕 문명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밤의 공사는 파국을 불러들인다. 가까스로 담장을 해체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아래에 매설되어 있던 하수관이 터지면서 습지는 집 전체로 번지기 시작한다. 아내는 습지에 공사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익사했고, 시신을 수습하려던 남편도 물컹거리는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결말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습지와 집이 공존하고 있던 때의 아슬아슬한 균형이다. 아내와 아이는 습지생물로 변화해 가던 중이었다. 졸도할 만큼 질색하는 아버지와 달리 아이는 방에서 들쥐를 기를 정도로 이곳 생활에 자연스럽다. 아내는 외모부터 습지생물을 닮아간다.
아내는 사십오 킬로그램이나 살이 쪘다. 갑자기 찐 살이 관절과 내장을 망가뜨렸다. 팔과 다리가 시렸고 관절염과 근육통에 시달렸다. 늘어난 위장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먹어야 했다. 아내는 물컹한 몸의 연체동물, 그 중에서도 미끈거리는 점액질의 달팽이를 연상시켰다. 쉴새없이 점액을 분비하며 근육발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꿈틀거려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달팽이.
―「밤의 공사」, 105p
이런 아내와 아이가 엉겨 붙어 싸우는 모습은 거대한 육식동물의 육탄전을 보는 듯하다. 이 꼴에 질력이 난 남자는 아예 집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의 직업은 고분 감시원이다. 이 일 외엔 마땅히 생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 방법을 궁구해야 했다. 그런데 애당초 D시는 죽은 자들을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 갑작스럽게 마을이 조성되고 인구가 늘어 시로 승격됐을 때부터 파국은 예고된 것이었다. 습지를 괴물로 키운 것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무분별한 공사를 막는 문화재 관리법이 성장 속도를 늦추고 있던 셈이었다.
그렇기에 밤의 고속도로가 쏟아내는 속도의 소음 속에서 담장을 부수는 남자의 모습은 묵시록을 연상케 한다. 그는 습지를 향한 고속도로의 진격을 대행했다. 그리하여 고속도로와 도시가 궁극에 맞이할 파국에 먼저 닿을 수 있었다.
「사육장 쪽으로」의 그 남자는 이런 결말을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길이 끝날 거였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달려가면 어딘가에 닿을 거였다. 그는 그들이 닿는 곳이 사육장 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61p)
임태훈∙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비디오 파놉티콘의 죄수-백민석론」)을 수상했고, 1999년 삼성문학상 희곡부문(「애벌레」)에 당선됐다. 2000년 올해의 연극 BEST 5 작품상(「애벌레」)을 받았다. <판타스틱>에 「팽형자」(2008년 2월)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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