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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서평/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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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927회 작성일 09-02-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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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광수, <발랄한 라라>(평단)

■김곰치, <빛>(산지니)


나로부터 내가 아닌 것으로

전성욱|문학평론가

1. 금기, 그 치명적 유혹에 대한 위반

금기에 대한 위반은 문명을 침식한다. 그래서 원시적 야만의 열정은 언제나 금기를 통해 다스려져야만 했다. 하지만 무의식의 저 가물가물한 어둠 아래로 내리눌린 위반의 욕망은 어느 때든 금기의 중력에 반역을 시도하며 문명의 찬란한 대낮으로 솟아오르려 한다.

성서의 「창세기」는 인류의 역사가 금기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금기는 치명적인 매혹 그 자체다.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것을 금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장악하려는 권력의 음모와 결탁해 있다. 인간 내면의 발랄한 활력은 질서와 규범이라는 작위적 형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문명화된 권력은 혼돈 그 자체인 생명의 에너지를 규율하기 위해 금기를 발명했다. 이로써 금기에 대한 위반은 죄로서 성립되고 죄는 처벌됨으로써 위반의 욕망을 위협한다.

우리들의 자유로운 생명력, 그 활력으로서의 에너지를 특정한 질서로 변형하여 왜곡시키는 문명의 규율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금기의 체계들을 반역적으로 다시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신성모독으로서의 문학 그것은 참된 복음이다.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문학의 반역적 힘은 우리 내면의 원시적 열정을 일깨운다. 그러나 타자에의 사랑과 배려라는 주체의 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반역은 무모한 반항이기 십상이다. ‘나’가 ‘나 아닌 것’과 맺는 관계의 구축 속에서 문명적 규율에 대한 반역의 의미도 여러 차원으로 갈라질 수 있다. 마광수의 소설집 <발랄한 라라>(평단, 2008)와 김곰치의 장편 <빛>(산지니, 2008)을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유물론적 탐미주의와 귀족적 유아주의:마광수의 <발랄한 라라>

마광수는 탐미주의자다. 아름다움은 마광수 문학의 전부다. 마광수에게 아름다움은 오로지 ‘사랑’ 그 자체이다. 그에게 사랑은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다. 플라토닉 러브, 낭만적 사랑을 냉소하는 그에게 사랑은 오로지 몸과 몸의 부대낌일 뿐. 다시 말해 사랑은 섹스다. “섹스는 역시 ‘현실’이지 ‘이념’은 아니다.”(「발랄한 라라」) 사랑의 아름다움에 있어 마광수는 철저한 유물론자다.


나는 마광수 교수로 인해, 사랑이란 결국 내 몸에 ‘정신적 사랑’이라는 환상이 살아남지 못하도록 서로 변태적으로 핥고 빨고 비비고 쑤셔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사랑이란 육체를 오로지 동물적 쾌락에 맡겨, 그 알량한 ‘이성理性’과 ‘도덕’을 죽여버리는 거라는 걸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다.

―「마광수馬狂獸 교수와의 사랑」, 258-259쪽


마광수의 유물론적 미학은 이성과 도덕을 거부하고 에로틱한 육체의 쾌락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적 유물론과는 구분된다. 활달하고 육감적인 그의 유물론은 당연하게도 반신학적이다. 난삽한 성적 판타지 속에서 기독교적 엄숙주의는 신랄하게 조롱받는다. 불타오르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젊은 두 사제(신부)가 죄의식과 두려움을 이기고 천당에 갔다는 「천당 가는 길」은 기독교의 금욕주의를 유쾌하게 뒤틀어버린다. 정신적 해탈을 통해 신선의 경지, 초인적 삶을 누리고자 금욕수행을 하는 두 수행자의 이야기, 「신선이 되기까지」 역시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승화이론으로 금욕을 문명의 존재기반으로 설명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반대하여 욕망의 긍정이야말로 인간의 존재기반임을 부르짖었던 빌헬름 라이히. 「천당 가는 길」과 「신선이 되기까지」는 인간해방이 욕망의 해방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라이히의 발상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마광수의 소설 안에서는 하느님도 ‘야한 외모 중심주의자’이고, 아담과 이브마저 ‘인공미’와 ‘섹시미’의 극치인 에덴동산에서 식스티 나인 자세로 서로에게 펠라티오(fellatio)와 쿤닐링구스(cunnilingus)를 해 주고 있다.(「‘에덴동산’ 여행」) 그리고 소설 속의 마광수 교수는 “외부에서 웬 약장수 같은 놈을 초청해서 예수․하나님 떠들어대던” 대학생 연합채플을 대학생 연합섹스 행사로 바꿔버리기까지 한다.(「자궁 속으로 사라지다」) 이런 이단적 행위, 신성모독은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자연법칙을 깨는 것이고,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는 것”이다.(「발랄한 라라」) 마광수의 소설은 기독교적 도덕주의와 우리 사회의 보수적 통념과 적대한다. 이런 적대를 통해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명백하게도 개인의 자유다.

마광수의 개인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에게 개인은 귀족적 개인이다. 주권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긍정하는 민주주의와 달리 귀족적 개인주의는 타자로서의 시민에 대한 평등 관념을 거부한다. 그래서 마광수의 귀족적 유미주의는 극단적 유아주의와 다르지 않다.


상류사회, 하류사회. 그리고 민주주의. 그렇지, 지금은 노예 따위는 없다. 만민은 어디까지나 평등하다. 그런데 나는 왜 아까는 그렇게 귀족과 노예를 비교하면서 야릇한 쾌감을 맛보았으면서, 지금은 왜 꼴사납게시리 만민평등萬民平等을 부르짖고 있는 것일까.

―「손톱」, 160쪽


하지만 마광수의 귀족적 개인주의에서 지배와 복종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오직 육체적 쾌락만이 문제일 뿐. 복종의 굴욕감이 쾌감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긍정해 마땅한 것이 된다. 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SM(새도매조키즘)이다. SM은 이 소설집의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손톱」, 「Foot Fetish」, 「SM클럽」은 SM을 주된 제재로 취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가학과 피학, 지배와 복종의 변태적 성행위에서 추구되는 것은 오로지 쾌락일 뿐 그 권력관계의 정치성이 아니다. 모든 진리의 척도는 ‘나’이며 쾌락이 아닌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이 구도 속에서는 페미니즘도 민주주의도 문제가 아니다. 타자란 나의 성적 쾌락을 위해서만 의미 있는 존재이고 또 사랑스런 존재인 것이다.


도대체 ‘나’와 ‘남’의 구별은 무엇인가? 육체를 경계로 해서 ‘나’와 ‘남’이 구별된다면, ‘나’의 확장 역시 육체의 경계를 없앰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나’와 ‘남’을 다분히 추상적인 관념에 의해 ‘우리’로 묶는다는 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나’를 확장해가는 방법, 그것은 ‘남’을 ‘나’ 속에 포함시켜나가는 것이고, 그것은 ‘나’의 물리적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의 시대」, 137-138쪽


‘남’을 ‘나’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나’의 물리적 경계를 없애는 자타불이의 유아론은 그 솔직함만큼이나 뻔뻔스럽고, 그 뻔뻔스러움만큼이나 당돌하다. ‘나’의 쾌락만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이 대담한 탐미주의는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라는 관념적 허사를 남발하지 않는다. 여기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비롯한 여타의 목적문학론들이 남발했던 경솔한 해방의 약속들에 대한 혐오의식이 담겨있다. 스스로 자기를 돌보지 못하면서도, 과장된 타자애에 빠져 해방의 수사를 남용했던 지난 시절의 문학이 저지른 과오는, 사실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위장한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발랄한 라라>는 마광수의 자기애에서 발원하는 성적 판타지의 난장이다. 지나치게 긴 손톱과 머리카락, 걷기조차 힘들 정도의 높은 하이힐, 혀와 유두, 클리토리스와 음순에 치장된 피어싱, 진한 화장과 화려한 펄마스카라. 거의 모든 마광수의 소설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이다.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에서부터 이 소설집의 「심각해씨의 비극」과 「자궁 속으로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사라(sarah)’는 바로 이러한 여성의 전형으로 마광수의 성적 판타지가 완벽하게 구현된 이상적 여성이다. 이런 성적 취향과 기호는 철저하게 마광수 개인의 성적 판타지에서 유래한다.

마광수의 나르시시즘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비판에 대한 저항의 강렬함에서도 드러난다. 마광수는 1992년 장편 <즐거운 사라>로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작가에게 그의 작품에 대한 법적인 처벌은 심한 정신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슬픈 사라>를 쓴 죄」, 「심각해씨의 비극」, 「자궁 속으로 사라지다」에서 자기 문학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대한 분노가 격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심각해씨의 비극」에서는 허위적인 도덕주의와 보수적 성관념에 물든 작가 ‘심각해’를 구속시키면서, 오히려 당대의 사회적 통념이 마광수 자신의 자유주의적 성애관과 문학관인 것처럼 설정해 놓았다. 이런 아이러니컬한 상황 설정을 통해 권력을 가진 검사의 입장에서 필화사건 당시 작가를 구속했던 법적 논리와 보수적인 사회적 통념에 통렬한 반박을 가하고 있다. 작중인물을 작가의 말을 전달하는 교조적 수단으로 활용할 정도로 사회에 대한 분노의 강도는 심각하다. 다음과 같은 검사의 논고는 1992년 마광수를 기소했던 검사에게 내리는 분노의 격정적 표출이 아닐 수 없다.


본 검사는 본능의 자유로운 표현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섹스생활에 금욕적 절제와 규율을 가하여야 한다는 피고인의 견해는, 그가 아무리 그의 생각을 이성에 입각한 사고의 표현이라고 강변한다할지라도, 그 생각의 배후에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우리를 괴롭혀왔던 전제와 파쇼적 사고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심각해씨의 비극」, 73쪽


「자궁 속으로 사라지다」에서는 사라가 나타나 “지난 긴 세월 동안 선생님께서 자신에 비해 뒤쳐진 세상 때문에 겪으셨을 고난을 되갚는 걸 도와드리기 위해” 자신이 태어났다고 고백한다. 사라는 마광수가 듣고 싶은 말들만 골라서 해주는데, “허위와 권위에 물든 세상 속에서 주인님이야말로 유일한 어린왕자”라거나 “검열 때문에 망설였던 모든 이야기들을 맘껏 풀어놓으시면 된”다고 일러준다. 이 작품은 소설집에서 가장 긴 분량의 단편인데 그만큼 쏟아낼 내면의 말들이 많았던 것일까. 이 소설에서는 지금까지 마교수를 배척했던 동료교수들이 잘못을 깨닫고 눈물의 사죄를 해 오고, 연세대에서 필수과목으로 수강을 해야 했던 채플을 폐지하고 마광수 교수의 강의를 졸업요건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작가의 욕망을 마음껏 배설해 놓았다. 작중인물에게 현실 속 작가의 감정을 이입시켜 인형의 입을 놀리듯 자기의 말들을 무리하게 배설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하지 않은 작가의 과잉욕망이 빚은 결과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의 파탄은 그의 나르시시즘에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마광수는 유물론적 탐미주의자로서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 찬 “이 더러운 세상을 야하디야하게 정화시”키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적 유아주의라는 덫에 걸려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세상에 대한 정화의 열정은 타자에 대한 사랑과 연대의 욕망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인정투쟁의 욕망일 뿐이다. “마음이 답답할 때는 그저 마스터베이션과 함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 제일이었다”(「어느 여대생의 자위행위」)는 그의 진솔한 고백에서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타자에 대한 인정 없는 자기만족의 귀족적 취향만이 느껴질 뿐이다. 추녀에 대한 경멸(「못생긴 여자의 슬픔」)과 변태적 성행위를 통한 권태의 극복(「발랄한 라라」), 이것은 타자를 안중에 두지 않는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보수적인 세계로부터 탄압받았다는 피해의식. 그 피해망상의 정도가 심할수록 세계에 대한 증오와 타자에 대한 역탄압은 심각해진다. <발랄한 라라>는 그 피해자의식(victimhood)에 사로잡혀, 타자를 자기의 쾌락 안에서 마음껏 대상화해 버리는 무서운 유아주의, 파시즘적 주체의 탄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3. 고독과 구원, 절대적 타자로의 귀환:김곰치의 <빛>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따라서 절대적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다. 연애와 종교는 바로 그 같은 인간의 욕망을 달래는 기발한 장치로 고안된 것이다. 고독한 주체에게 타자는 일종의 구원이다. 외로운 인간에게 성과 성, 연인과 신은 구원으로서의 타자가 아닐 수 없다. 김곰치의 <빛>은 절대고독의 주체가 구원자로서의 타자와 맺는 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는 소설이다. 고독한 주체 조경태에게 정연경과 예수는 구원의 타자들인 것이다.

37살의 노총각 조경태에게 연애의 기회가 찾아온다. 어느 독서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정연경. 조경태가 “그녀에게 반한 것은 ‘예쁨’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 그러니까 경태의 “‘실수’를 처리하는 그녀의 마음씀씀이”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실수’한 조경태를 따뜻한 말로 배려해준 정연경의 마음. 그 마음에 끌렸던 조경태는 몇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지독한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빛’을 느낀다.


빛을 발하는 존재는,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둘러싼 다른 모든 자기들을 위한다. 그녀는 빛났고, 빛의 덕은 내가 본다. 빛이 내 안의 사랑을 일깨우고, 나는 행복감에 싸이게 되니까.

―<빛> 171쪽


‘빛’은 구원이다. 존재의 근원적 고독으로부터의 구원. 하지만 이 빛은 둘 “사이의 흉물스런 정신적 장애물” 때문에 흐릿하게 바래진다. 그 장애물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다. 연경은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니 죄 때문에 안 죽었나”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성령체험의 사연을 말하는데 경태는 여기서 “불같은 질투심과 선명한 배신감”을 느낀다. 경태에게 예수는 연경과의 연애를 방해하는 연적인 셈이다. 연애가 종교에, 다시 말해 경태가 예수에게 발목을 잡힌 형국. “정연경의 고백에는 바울로 냄새가 좀 더 썩어서 날 뿐이었”기에 경태는 사랑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차지하기 위해 바울로를 공격의 목표로 삼는다.


나는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기독교 사고방식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 단 한 놈만 죽도록 패자. 그놈은? 당근 바울로!

―<빛> 213쪽


경태의 논리에 따르면 죄 중에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살인죄와 강간죄다. 이 중에서도 더 중한 죄가 살인죄인데 바울로는 “애초에 그 ‘예수쟁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탄압의 선봉에 섰던 사람”, 한 마디로 살인자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바울로가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만든 것이 그가 만든 교리라는 것. 그러니까 바울로의 교리는 결국 자기 죄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다는 말씀.


자기 죄를 용서받겠다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없이 슬픈 인간 존재를 성령으로 태어났다느니 물 위를 걸었다느니 유치찬란한 이야기로 치장했고, 즉 ‘사람 예수’를 사실상 섬뜩한 반자연적인 괴물로 만들어버린 놈이 바울로, 그리고 바울로 후예들입니다. 바울로 이빨이 얼마나 셌던지 예수 직제자들 몇도 휩쓸려버렸어요. 바울로적인 인간의 비겁한 욕망은 신생의 종교에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존경받아야 할 사도가 아니라 바울로는 딱하고 짜증나는 비극의 3류 주연배우에 불과합니다. 그의 종교, 그리고 죄와 구원을 오가는 그 지긋지긋한 조울증 놀음은 이제 종막을 고해야 합니다.

―<빛> 226쪽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온다”는 “단순극치의 구원법”이 먹혀드는 것은 바울로만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들의 근원적인 ‘거지근성’이 동조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이 조경태의 판단이다. 바울로에 대한 경태의 신랄한 비판은 자기 고독으로부터의 구원자 연경을 사수해야 한다는 실존적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단지 경태 개인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바울로는 세상의 수많은 정연경들을 미혹에 빠뜨려 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연경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바울로적 예수의 모습에 심한 질투를 느낀 조경태는 핸드폰에서 연경의 이름을 삭제해버린다. 하지만 이건 조경태의 반항적 몸짓에 불과하다. 마음으로는 연경의 ‘빛’을 잊지 못하고 몇 통의 메일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더 나빠졌고 바울로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담은 마지막 편지는 연경에게 읽혀지지 않는다. 조경태의 바울로 비판은 결국 정연경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그 후 다섯 달 만에 연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다시 몇 번의 만남과 대화들을 통해 경태는 예전의 그 ‘빛’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바울로가 벌려놓은 둘 사이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경태가 볼 때 연경의 “십자가는 공포와 협박의 십자가”지만 그의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 최악의 독종한테도 변함없이 사랑의 약을 보내는 하느님이다. 빛과 공기의 본성이 공평무사한 사랑으로 그러하듯이.” 이처럼 경태와 연경의 하느님은 서로 다르다. 나와 타자의 거리, 나와 타자의 다름, 경태는 아직 이 문제를 존재론적 사유로 이끌어 갈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태는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말’로 연경의 생각, 아니 믿음을 교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조경태는 정연경에게 그녀의 성령체험이 실은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어떠한 신비한 영적 체험도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조경태는 분명 유물론자다. 낭만적이고 플라토닉한 사랑의 관념성을 비판했던 마광수처럼 조경태 역시 예수에 대한 관념적 사랑을 믿지 않는 유물론자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정연경의 예수사랑과 예수에 대한 조경태의 유물론적 사랑은 심각하게 대립하고 결국 그것은 결별의 이유가 된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결별의 이유는 영화관에서부터 시작된 이른바 ‘팝콘사건’이다.


“알아요? 알기나 해요? 사람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고 언제나 일방적이에요. 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예, 도대체 왜 그래요?”

―<빛> 284쪽


경태는 이런 연경의 태도를 대하고 “아, 이 여자는 나랑 안 맞구나, 내가 이 여자를 진심으로는 조금도 안 좋아 하는구나”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해 버린다. 연경은 단지 팝콘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것은 아닐 것이다. 정연경은 아마 경태의 자기중심적 태도가 싫었을 것이다. 배려가 없다는 것. 일방적이라는 것. “난…… 여자에 대한 배려는 안 해요. 사람에 대한 배려는 합니다.”라는 경태의 말은, 역시 자기중심적이며 스스로 이야기했던 차별지의 모순에 빠져있다.


사람의 말은 분별지의 은혜를 입은 결과이고, 분별지는 인류의 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며든 것이다. 분별지가 없으면, 인간은 인식의 진척을 단 한 걸음도 꾀할 수 없다. 석가모니의 후예들은 분별지를 욕하지만, 절대 타매해서는 안 된다. 아니 차별지는 욕해야 하고, 분별지는 애용해야 한다. ‘비분별지, 차별지’가 나쁘고 ‘무차별지, 분별지’는 좋은 것이다.

―<빛> 175-176쪽


인간과 여자는 분별의 대상이 아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분별지가 아니라면 조경태는 스스로 부정했던 ‘차별지’로 인간과 여자를 가름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주체로서의 조경태는 타자 역시 고독한 주체일 수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경태에게 정연경과의 두 번의 결별은 모두 연경의 그 ‘괴물스러운 표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태는 그 표정을 볼 줄만 알았지 그 표정을 읽을 줄은 모른다. 다음의 말도 극히 자기중심적이다.


나는 나의 정신, 세계관, 나의 말이 목숨 같고, 여자는 태가 목숨 같고 ‘오직 예수’가 목숨 같고, 그러니 서로에게 각각 다른 그 목숨 같은 것들을 중히 받아줄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빛> 293-294쪽


태를 증오하는 것은 동생의 자살과 관련이 있고, 예수에 대한 맹목을 미워하는 것은 바울로에 대한 적의 때문이다. 태와 예수를 버리고 자기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경태의 마음은 어린 아이의 그것을 닮았다. 아이들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아니겠는가. 마치, 왜 나만 사랑해 주질 않느냐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안나 카레니나를 용서하고 ‘질투와 분노’에서 자유로워지는 카레닌의 모습을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기억하면서, 또 마리아가 사생아를 낳았음에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던 요셉의 태도에 탄복하면서, 정작 경태 자신은 연경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태는 카레닌이나 요셉의 마음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고 진정으로 타자를 배려할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경태는 아마도 정연경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맛있는 물김치를 담가주고 예수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어머니. 자신의 실수에 대해 ‘걱정’이라는 단어 대신 ‘염려’말라는 단어로 문자를 보내왔던 연경의 그 따뜻한 ‘마음씀씀이’가 경태에게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연경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경태는, “이년은 우리 어머니를 봐도 지옥불에 떨어질 종자라고 속으로 불쌍하게 생각하겠구나, 어머니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인생을 산 주제에.”라고 모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힌 경태는 “니가 여자냐, 여인이냐, 여성이냐, 사람이냐, 인간이냐” 따져 묻지만 정연경은 다만 어머니가 아닐 뿐이다.

형이상학적 향수, 그 기원으로서의 어머니는 위험하다. 이상화된 관념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판타지는 현실의 여성들을 모성의 신화적 이미지로 환원한다. 관념이 현실에 가하는 테러, 그것은 맹목적인 폭력일 수 있기에 위험하다. 정연경에 대한 경태의 요구에는 이런 위험이 내재해 있다. 이런 위험 역시 타자에의 배려를 생각할 수 없는 경태의 자기중심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경태는 연경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므로 다른 대화 상대를 찾는다. 이 지점은 일종의 터닝 포인트다. 연경이 아닌 다른 타자에게 말 걸기.


대화할 사람을 나는 구했다. 할 말이 산 같다. 나 혼자서는 못해!

―<빛> 297쪽


실연. 연경과 이별하고 다시 절대 고독의 상황으로 내던져진 경태가 찾은 대화의 상대는 톨스토이, 정영태 시인, 산돌 화백이다. 이들과의 만남은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은 영웅설화의 조력자들이다. 자기중심적이었던 조경태는 이들과의 환상 속 만남을 통해 절대 고독을 자각하고 드디어 진정한 타자와 조우한다.(앞의 터닝 포인트는 지금 펼쳐질 반전을 예비한 것이다.)

나는 막막했다. 외로웠다. 이 막대한 우주에 지금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오직 이 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깨달았다. 이 우주에 ‘나’라고 하는 내가 지금 이 나, 오직 이 하나뿐이라는 절대적이고 황홀한 외로움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지금 내가 그러고 있듯이! 산돌 형, 톨스토이 선생님, 정영태 시인도 이 행복한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 체온이 따뜻하게 있는 사람, 아, 지혜롭고 자애로운 여성, 생각과 말과 나이가 나랑 비슷한 여성, 그런 이가 옆에 있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안기고 싶다. 그러나 그런 여성은, 지금 내 옆에, 절대적으로 없다. 이 절대적인 행복한 외로움!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의 칠판에 똑똑하게 쓰여지는 두 줄 문장을 보았다. 기적과 같은 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두 줄을 읽는다.


지금 내 마음을 이해할 이는 그대뿐이오.

오, 나의 예수여.

―<빛> 321쪽


여기 인용한 대목은 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이고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기본위에서 타자에의 배려로. 실연의 시련은 조경태에게 연적을 받아들이는 위대한 순간을 가져오게 했다. 절대적 고독으로부터의 구원자는 성에서 성으로, 연인에서 신성으로 이동했다. 경태의 예수는 정연경의 예수와 다르다. 그의 예수는 형이상학적 예수가 아니라 ‘똥누는 예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하느님’이다.

(전략) 예수 역시도 한 고귀한 생명체로서 물질 교류의 아름다운 일익을 맡아 똥 누는 일을 매일매일 성실하게 행할 뿐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느님을 즐겁게 순종하는 일을 누구든 거역할 리 없고, 어떤 생명체든 거역하다간 죽음을 일찍 부를 뿐이다.

―<빛> 326쪽


<빛>은 한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고 이별하는 연애소설로 끝나지 않는다. <빛>은 그 실연에 이르는 연애의 힘겨운 과정을 통해 한 인간이 절대적 타자로서의 ‘똥 누는 예수’에 이르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조경태가 도달한 궁극적 구원의 지점, 절대적 타자로서의 ‘똥 누는 예수’는 다행스럽게도 형이상학적 본질주의로부터 비켜 선 존재다.(경태가 힘겹게 도달한 지점을 형이상학적 유일자의 자리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똥 누는 예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하느님이 자연의 이법이라는 형이상학으로 이해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똥 누는 개 마롱의 존재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똥 누는 예수’가 신성의 관념으로 덧칠되었던 기독교적 예수가 아니라 저속한 것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주체와 교섭하는 타자 그 자체일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

‘물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마음’은 ‘물’과 ‘심’의 열린 교섭이다. 이는 단조로운 유물론이 아니다. 마음에 기억으로 아로새겨진 물, 그리움으로서의 물! 영원과 불멸을 거부하고 한계적 개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자리에서 조경태의 편지는 끝난다. 편지는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한다. 타자에 대한 탐구의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이 편지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똥 누는 개 마롱馬聾에서 시작된 이 편지는 똥 누는 예수와의 만남으로 끝난다. 신성함과 저속함, 주체와 타자, 이런 가름들은 차별과 분별도 아니고 회통과 조화도 아닌 그 모든 것의 뒤섞임 그 자체여야 하지 않을까. 이제 경태는 세상의 많은 정연경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4. ‘나’로부터 ‘나 아닌 것’으로

문학은 나로부터 출발해 나 아닌 것과 교섭함으로써 나와 나 아닌 것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 탐구로 나아간다. 주체의 내면을 저 깊숙한 심연의 아래를 응시하듯 파고드는 것은 문학의 오래된 전통이다. 동시에 타자에 대한 사랑과 증오, 연민과 분노는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인식과 해석을 담아내는 문학의 정서적 반응이다. 주체와 타자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지만, 때로는 증오와 분노로 한 없이 멀어지기도 한다. 주체와 타자의 거리는 이렇듯 종잡을 수 없는 일종의 암연闇然이다.

마광수의 <발랄한 라라>는 ‘나’에 대한 한없는 에로스, 즉 타자에의 배려라고는 없는 자기애, 그 난폭한 화려함을 펼쳐 보인다. 그 귀족적 유아주의는 세계에 대한 섬세한 인식의 활력이 잠재된 유물론적 탐미주의의 가능성마저도 봉쇄해버린다. 반면, <빛>의 조경태는 연애를 하면서 드러났던 지독한 자기중심주의를 깨닫고 인성과 물성과 신성이 한데 어우러진 ‘똥누는 예수’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유아주의의 파탄을 초극한다. 두 작품의 이런 차이는 결국 타자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에게 타자는 자기애의 충족을 위한 객관적 대상이거나, 아니면 신성으로 가장한 폭압적 이데올로기다. 마광수의 소설은 앞의 타자를 긍정하고 뒤의 타자는 부정하는 방식으로 ‘나’를 대타화한다. 하지만 김곰치의 소설은 연애라는 통과제의, 다시 말해 자기애를 극복하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 타자를 끌어안고 타자와 한데 뒤섞이는, 관계로서의 ‘공평무사公平無私’에 이르렀다. <빛>의 서사는 ‘나’에서 출발해 ‘나 아닌 것’으로 향해 나아가는 도약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나와 나 아닌 것, 나와 너의 교섭과 통섭. 문학이 오랫동안 인간에게 가치 있는 무엇인가로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나로부터 내가 아닌 것으로!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전성욱∙2007년 ≪오늘의문예비평≫을 통해 비평적 글쓰기 시작. 공저로 <2000년대 한국문학의 징후들>과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가 있음. 현재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이며 동아대, 경성대, 한국해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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