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서평/박정호
페이지 정보

본문
|서평|
■김영승, <화창>(세계사 2008. 6)
■서동인, <가방을 찾습니다>(리토피아 2008.11)
되돌아보기―반성과 추억
박정호|문학평론가
“지금은 견자見者의 시대지 가객의 시대가 아냐.”
돌아가신 시인의 발언이니 그때의 지금은 이미 명백히 과거가 되었고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見者의 시대에 살고 있고, 랭보가 일찍이 그랬듯이 시인들은 현자(voyant)로 주목할 만한 그 어떤 것들을 우리들에게 새롭게 제시해주고 있다. 앞의 인용구는 대산초대석(대산문화6호, 2002)에서 오규원 시인이 박형준 시인과의 대담에서 들려준 이야기인데 그 ‘지금’은 오늘날까지 그 시효가 유용하다. 근래의 시들이 가락보다는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고 운율이 부활되지 못한 상황에서 정교한 구조에 의한 시법이 시를 구현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담고 있는데 이는 이미지의 시대에 시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천착한 결과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시는 보편적 공동체가 매개하는 정형화된 공동의 가락을 버리고 개성에 기초한 내면의 울림에 주목하여 저 마다의 다른 감성과 언어로 각기 다른 구성과 조직화로 시의 길을 모색하였고, 시적 주체의 시선의 향방과 처리가 무엇보다도 시작의 핵심적 과제로 등장하였으며, 시민들은 시인들의 시선을 통하여 세계와 새롭게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시인이란 見者이고, 見者들의 시선은 단순히 시점視點과 물체의 각 점을 잇는 직선이 아니라 내적 사유의 중심점과 외계의 구체적 사물을 연결하는 자장이다. 일찍이 라캉이 홀바인의 「프랑스 대사들」을 분석하면서 보여주었듯이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밀레의 「이삭줍기」에서는 이삭을 줍는 세 사람 저편의 지평선과 노을 너머로 펼쳐지는 끝없는 무한의 깊이를 보듯이 우리는 목전에 없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이렇듯이 시선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며 눈앞에 펼쳐진 것들만을 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생각의 끈을 따라 미답지를 경험해 볼 수도 있고, 또 그들의 눈길을 끌고 간 마음의 울림을 따라 아직 여기까지 전해지는 파동을 경험해볼 수 있다.
여기 두 시인이 있다.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신작 <화창>(세계사)을 들고 나온 김영승 시인이며 다른 하나는 처녀 시집 <가방을 찾습니다>(리토피아)를 선보이는 서동인 시인이다. 이들은 모두 되돌아보고 있지만 한 시인은 반성의 시선이고 한 시인은 향수어린 추억의 눈길이다. 전자는 사물을 보면서도 어느새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다. 반성 연작시를 썼고 일찍이 정끝별에 의하여 반성의 시인으로 불린 바 있는 김영승 시인이다. 그녀는 조선일보의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73회)에서 그를 ‘반성半醒, ‘반성半聲, 반성反性, 반성半聖의 시인으로 정의하고 이 모든 반성의 삶을 돌이켜 살피며 반성(反省하는 기록자, 반성하는 반항인, 반성하는 백수白手, 반성하는 주정꾼, 반성하는 폐인, 반성하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시적 대상을 향하면서도 대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 잠재된 시적 자아를 응시하기 때문에 시적 대상은 배면으로 물러나고 시적 자아가 전면으로 부상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유독 일인칭 대명사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살구는 성실하다」처럼 사물은 인격화되고 그 인격의 속성은 '剛毅木納' 으로 집중되는데 시인의 시선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시적 주체와 시적 대상이 맺고 있는 관계로 매듭짓고 있다. 시적 주체와 시적 대상의 행복한 동일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나는 또 하염없이 살구가 없는 길을/돌아서 돌아왔다”에서처럼 시적 대상은 시적 주체의 반사면으로 작용하여 주체의 거울이 되고 시적 대상 속에 시적 주체를 투영시켜 본성의 관계로 마무리 짓는다. 그는 영춘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나이를 묻는다. 「미친 개나리」에서 그는 “남녁 어딘가엔 개나리가 피었다는데//내 나이가 47인지 48인지 몰라/물어보았다” 에서처럼 그는 이른 봄 개나리보다 먼저 피는 개나리 비슷한 꽃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감지할 때 그의 관심은 어느새 자신의 나이로 돌아와 있다. 또 일인칭 주어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이름을 시속에 등장시킬 정도로 이 시인의 시선은 대상을 투시하여 시인 자신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한다.
뿐만 아니라 시적 주체인 일인칭 화자는 “나는 그 植物께 미안했다”라는 앞의 시의 결구처럼 모든 사물을 삶의 어떤 잣대나 기준과 결부시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사물들도 「살구는 성실하다」, 「미친 개나리」, 「그리운 내8번」, 「부도덕한 집」, 「슬픈 국」처럼 의인화되어 있거나 사유행위와 결부되어 시적 객체도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행위와 조응하고 있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 대상으로 삼지만 언제나 그것은 어떤 정신적 상태에서 투시되거나 시적 주체인 일인칭 화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고찰된다. 그것은 이경훈이 이 시집의 표지에서 밝혀 놓았듯이 ‘존재의 진실을 파헤치는 시적 상상력’이 ‘사물들이 갖고 있는 형상의 동일성’을 넘어서서 ‘존재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시적 태도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시인의 시선이 겨냥하는 존재의 속성은 시인 자신의 삶과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시적 주체는 ‘후회’, ‘반성’, ‘정신’, ‘自矜’ ‘한’ 등과 같은 인격적 주체의 사유 행위나 정서적 반응을 통하여 시적 객체와 만난다. 「구두」에서 보면 그는 구두를 ‘어떤 核’으로 보고 정신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매재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미 내 가죽”에서처럼 인격의 일부가 되어 관심을 ‘恨’으로 집중시킨다. 시인의 관심이 집중된 초점에 독자들의 관심이 모아질 수 있도록 시인은 행을 나누고 적절한 휴지로 독자들의 시선이 보다 오래 머물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단순히 ‘구두’가 ‘한’으로 치환되거나 계사적 용법으로 연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결구를 독립된 행으로 주어와 한참 동떨어진 자리에 ‘恨이다’라고 낯설게 서술함으로 본래 사물로서의 시적 대상은 사라지고 시적 자아에 의하여 변용된 정신적 실체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 속성에 대한 성찰은 바라보는 대상에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며 내재된 또 다른 무엇을 지시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시인의 시선과 실제 초점 사이의 차이가 노출될 때도 있다. 「손가락 무늬」를 보면 첫연은 “作品으로 보지 않고/그저 ‘標識’로” 보아달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의 시적 대상은 이처럼 표지가 되는 것이며 대상 너머의 또 다른 무엇을 보도록 시선이 향하는 것이다.
사진은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영정이고
權威를 획득하게 된다
그것이 동영상이라 할지라도
포르노도
그 속에서 카타콤이며
영혼이다
중략
인간은 사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이다
그 肖像權은
神에게 있다
한 200년이 흐른 후
본인이 보는 본인의 사진은
神이다
―「사진」
이미지의 시대에 시선은 이미 권력이 되었고 사진은 그 자체로 권위의 실체가 된다. 사진은 이미 사진작가에 의하여 프레임 내에 관객의 시선이 고정되도록 설계된 것이며 프레임내의 이미지에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진작가의 시선일 뿐이며 시인은 액자는 물론이고 사진에 나오는 대상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사진 너머의 사진이 갖고 있는 사진이라는 장치의 속성이다. 사진은 동영상이든 포르노든 무엇이 담기든 무슨 형태로든 그것은 카타콤이며 영혼이다. 이렇게 절대화된 사진의 이미지는 인간마저도 다시 인간으로 대상화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되며 세월이 흐른 뒤에는 본인이 보는 본인도 신의 경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시선은 권력을 넘어 종교적 경지에 이른다. 우리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프레임내의 이미지의 속성은 관객의 시선을 그 내부로 고정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인은 재빨리 이 같은 속성을 파악하고 이를 경계하여 시적 대상 너머의 대상의 속성에 주목하게 한다.
서동인의 시 역시 그 시선이 뒤를 돌아보고 있다. 여기에서 뒤돌아본다는 것은 공간적 개념이기보다 시간적 개념이고 이미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는 것이다. 시인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고 지나온 연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김영승의 시가 대상을 투시하여 시적 주체에 대한 반성으로 향하는데 비하여 서동인 시인의 시선은 대상 자체를 응시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그 풍경 속에 잠겨간다.
김영승이 시적 대상의 속성을 이지적인 시선으로 응시하면서 시선의 처리과정에서 그 초점을 삶과 사색의 문제로 전환시키는데 반하여 서동인은 사물 또는 시적 대상의 속내를 알아채고 이해하고 거기에 다가가 그와 같은 편에 서는 것이다. 시인은 그래서 시적 대상의 안이나 속내 즉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잦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에서는 ‘안’이나 ‘속’이 자주 눈에 띄고 속내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동정어린 시선이 자주 드러난다.
달빛은 항상 제 속을 감춘다
―「달의 고백」에서
제 안의 즙을 배설하다가 금수산 절간처럼 벼랑 끝에 매달린다
―「가을 정방사」에서
셔터를 누를 때마다 반짝이는 물이랑
가라앉아 버린 물 속의 빈집을 추억하는
거짓말처럼 살아온 날들이 되감아진다
저물지 못하는 햇살 머뭇거리는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유리창 너머
병든 어미새 남겨두고 또 다른 도래지 찾아
하나 둘 깃을 치는 철새들의 속내까지
현상할 수 있을까, 물 속 인화지 서럽게 출렁이는
남쪽 나라 바닷가 사진관
―「바닷가 사진관」에서
이렇듯이 시인은 자신이 선택한 시적 대상을 묘사하며 묘사를 통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시적 대상이나 풍경으로 안내하지만 기실 그의 시선은 대상의 내면이나 풍경이 주는 정서에 주목한다. 「바닷가 사진관」에서처럼 그는 사진처럼 충실하게 풍경을 그려내지만 그의 시선은 풍경 자체가 아니라 물속의 빈 집, 풍경의 안쪽에 눅눅하게 젖어 있는 인격화된 사물들의 내면을 겨냥하는 것이다. 철새들의 속내와 같은 사물들의 마음을 읽어내고자 하며 때로는 사물이나 풍경 속에 들어가 마음을 함께 하고 동정이나 공감을 넘어 시적 대상과 일체화되거나 시적 주체가 다시 대상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바닷가 사진관」은 반짝이는 물이랑, 빈집, 저녁 햇살,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철새들 등 세부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묘사된 풍경사진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사진에 표현되는 풍경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풍경 내면의 정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물속의 빈 집 추억하’며 필름을 되감는 회상과정을 거쳐 마침내 ‘철새들의 속내’까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풍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대상들은 이 같은 풍경 내면에 잠재된 정서를 겨냥하는 것이며, ‘남쪽나라 바닷가 사진관’은 사실 ‘서럽게 출렁이는’ 풍경의 내면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풍경을 향하며 그것을 대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내재된 정서의 확산을 꾀하는데, 때때로 공감의 확산에 의하여 시적 주체가 오히려 시적 대상 속에 함몰되거나 몰입하여 일체화되기도 한다. 이 때 시인의 시선은 시적 대상과 그 내면을 향하는 것을 넘어 초점이 되는 시선의 소실점 속으로 잠적하기도 한다. 「시집을 운구하다」에서 보면 시적 주체가 시인을 대상화하면서 또한 일체화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나오는 시인은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이내 “시집 속으로 들어가 표지를 덮는다.”에서와 같이 시적 주체가 시적 대상 속에 잠입하여 시선이 끝나는 곳에서 시적 주체의 잠적이 이루어진다. 시인의 시선은 일차적으로 액자화 된 풍경을 지향하지만 관객의 시선이 풍경에 이르렀을 때 안내자인 시적 주체는 오히려 액자 내면에서 안내된 풍경 속에 잠입하여 또 다른 내면으로 안내하고 있다.
찻잔에 출렁이는 수평선을 마셔 보았나요?
남면 파도리 외딴 다방에 앉아
뭍에서 훔쳐온 섬을 방생하는 시인 하나,
미끼도 없이 입질하는 시 한 줄 낚아 올립니다
질겅질겅 아카시아 껌을 씹으며 마을회관으로
배달 나간 아가씨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녹차보다 진한 쪽빛 바다를 털어 마시고
후 뿜어낸 담배 연기 가물거리는
수평선을 끓여 파는 섬마을 다방
털 빠진 갈매기로 늙어버린 마담은
총각 시인의 옷자락에 번들번들 부리를 닦습니다
훅, 갈매기도 비린내 흘립니다
출항을 서두르는 뱃고동이 두근두근 울립니다
유리창 너머 시샘난 구름이 눈을 흘깁니다
―「수평선 다방」 전문
이 시의 시적 주체는 시적 객체가 되는 수평선 다방을 바라보며 ‘합니다’체를 써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찰한 풍경을 공손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는 것 같지만 기실 시적 주체는 이미 풍경 속으로 들어가 시적 대상이 되어 다시 풍경의 초점이 된다. 유행가풍의 향수어린 섬마을 다방의 풍경처럼 펼쳐지는 이 시는 시인이 한적한 다방에 들러 늙은 마담과 나눈 가벼운 수작이 설렘으로 처리되고 구름의 시샘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시인의 시선은 시제에 해당하는 섬마을 바닷가 다방을 향하지만 다방에 이르러서는 시인의 또 다른 내면에 주목하게 한다. 다방 안팎을 넘나들며 배달 나간 아가씨와 늙어버린 마담을 등장시켜 배달과 수작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서사적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하지만 인물, 사건 및 배경은 모두 ‘두근두근 울리는 뱃고등 소리’로 함축되어 있는 설렘이라는 정서적 반응에 집중시키고 또 이를 위하여 시샘이라는 보조 조명까지 이용하고 있다. 시적 주체의 시선을 따라 다방에 이르면 새로운 풍경 속에서 시적 주체가 다시 대상화되고 있으며 서사적 가능성보다는 대상화된 주체의 내면 풍경이 새로운 초점이 되는 시선의 중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서동인의 되돌아보기는 늘 카메라 렌즈처럼 풍경 사진을 제시하지만 풍경 내면의 정서에 집중되어 있다. 김영승이 응시하는 시선이 시적 대상을 반사체로 삼거나 투시대상으로 삼아 시적 주체의 자의식을 향해 있는데 반하여 서동인은 대상에 대한 구체적 세부 이미지로 가득한 풍경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승은 시선처리를 정신적 행위나 철학적 지표를 통하여 시적 주체의 반성으로 초점을 모으는데 반하여 서동인은 대상에 대한 이해와 동정어린 시선으로 시적 대상이 되는 풍경을 재현하면서 시적 대상의 속내를 표현하고자 한다. 두 시인의 시선은 모두 지나간 연대를 추억하거나 돌이켜 보면서 반성과 회고의 시점에서 각기 자아와 풍경의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분석적 사유에 의한 이지적 접근과 감성적 통합을 꾀하는 형상화된 이미지에 의한 접근에 의하여 두 시집은 각기 전혀 다른 시적 묘미를 획득하고 있다.
여전히 見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두 見者의 시선을 따라 새로운 비전을 경험해볼 차례이다. 일찍이 들뢰즈는 見者란 문명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지각작용으로는 가닿을 수 없었던 ‘삶’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발견과정을 통하여 비전을 체험하는 중인 자이다. 이제 우리가 두 명의 見者가 <화창>(세계사)과 <가방을 찾습니다>(리토피아)에서 경험한 비전을 그들의 시선을 이정표로 삼아 체험해볼 일이다.
박정호∙1998년 ≪믿음의문학≫으로 등단.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 이전글32호(2008년 겨울호)/계간평/오윤호 09.02.26
- 다음글32호(2008년 겨울호)/서평/전성욱 09.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