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계간평/오윤호
페이지 정보

본문
계간평/소설
붉은 눈동자, 역사소설을 읽다
오윤호|문학평론가
∙이지민, <모던보이―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문학동네≫, 2008)
∙김선우,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
역사소설과는 다른 역사소설들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30년대’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새로운 시대감각으로 포장된 1930년대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세계 제패를 노리는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무주공산인 만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카오스 상태였던 중국이 요란스럽게 충돌했다. 전쟁과 항일투쟁이 숨가쁘게 펼쳐지면서도 도시의 환락가는 새로운 근대문화에 취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 제국의 관리, 독립투사, 공산당원, 친일파 갑부, 신여성과 기생 등 다양한 인종과 계급과 이데올로기가 뒤섞인다. 온갖 이데올로기가 난무했기 때문에 자칫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그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은 식민지 근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체험과 기억이 되어 우리 대중문화 속에 부유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대중문화 속에 재현된 이 시기는 피식민지인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동아시아의 근대 문화에 대한 묘한 흥분으로 대체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저항의 피로 얼룩진 곳을 낭만적 공간으로 희화화하기도 한다. 현재와 직간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는 70-80년대보다는 여러모로 다루기가 편한 것도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 두 개의 사건과 인물만 조합하더라도 그럴듯한 이야기가 쉽게 나올 법하다. 이지민의 개정판 <모던보이,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개정판, 문학동네, 2008년 10월)는 2000년대에 나온 소설이지만 동명의 영화 <모던보이>의 개봉과 함께 재출간되었다. 일제 총독부의 서기인 이해명과 모던걸 조난실의 연애 이야기가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긴박하게 펼쳐진다. 시인인 김선우가 쓴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년 7월)는 식민지 시대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조명한 소설로 예술과 여성, 그리고 식민지인의 삶을 이중의 이야기선으로 그리고 있다. <네가 누군지 얼마나 외롭든>에 이어 혁명과 사랑의 불협화음 속 뒤섞임을 다룬 두 번째 소설인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년 10월)는 1930년대 만주에서 발생한 민생단 사건을 사랑의 열병을 앓는 반도의 지식인을 통해 조명해내고 있다.
이들 소설들은 ‘식민지’, ‘민족주의’, ‘독립’과 같은 역사적 강박을 전제하지 않는다. 각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발랄한 감각과 개성화된 역사의식은 ‘신여성’이나 ‘모던보이’, 혹은 ‘혁명가’라는 시대의 무게를 담은 호칭들도 자칫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식민지 삶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눈부신 열정과 이데올로기가 탈색된 시대적 감각이 ‘역사 재현의 한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예술을 위해 식민지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으며, 연애를 위해서는 민족적 감정이란 한낱 바람둥이의 능글맞은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딱히 이들 소설에 김훈 소설류에 붙여주었던 ‘역사소설’이라는 수식을 붙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1930년대가 기묘하고 퍽 슬프다는 생각도 든다.
모던보이의 유쾌한 꿈:이지민의 <모던보이―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모던보이>를 ‘1930년대 남성판 칙릿소설’이라고 불러도 좋다. 조선총독부 서기인 이해명은 ‘모던보이’로 불리며, 순결한 영혼을 위한 사랑(조난실)과 충동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사랑(친구인 신스케의 불륜 상대인 유키코와의 하룻밤 연애) 모두를 즐긴다. 경성의 밤문화에 통달해 달콤한 문화적 취향 속에 감각적인 연애를 꿈꾸면서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적극적으로 향유한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에서는 식민지에서의 민족적 저항이나 제국 문화의 왜곡성과 같은 역사적 진정성 문제는 가벼운 유희나 낭만적 고뇌로 대체되었다.
미스코시 백화점 이층 갤러리에 모인 여성들은 당대 최고의 미모와 패션 감각을 갖추었으며, 아치형 네온사인이 빛나는 쇼윈도는 경성의 연인들이 즐기는 연애의 절정을 수놓는다. 경성을 횡단하는 전차와 택시는 세련된 근대 문화의 한 단상을 보여주며, 은밀한 제국의 성감대와 같은 문화구락부에는 경성의 멋쟁이, 아편쟁이,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든다. 경성의 거리와 밤문화를 이끌어가는 모던보이, 모던걸에게는 ‘불륜’과 ‘연애’, ‘사기’, ‘독립운동’이란 말들은 뒤끝만 다를 뿐 흥분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달콤한 수사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제국이 꿈꾸는 강렬한 패권주의와 폭력적 통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는 경성은 제국의 근대 문화에 제대로 취해 있다.
그리고 그 감각적 취기의 절정에 이해명의 ‘연애’가 있다. 이해명은 바람둥이고 사기꾼인 조난실에게 ‘순정’을 바치는 인물이다. 현실을 낭만적으로 살기엔 어리숙하게 똑똑하며, 연애를 하기엔 ‘쿨’하지 못하고 옛여자에게 질질 매달린다. ‘여자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말조차도 이해명에게는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결코 모던하지 않은 이 인물을 모던보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모던보이>가 노리고 있는 1930년대 경성 판타지가 놓여 있다. 실제로 존재했던 1930년대 경성의 풍경과 문화가 아니라, 2000년대에 상상하게 되는 1930년대의 경성 말이다.
이해명은 자신이 10년 간 재수가 없어 자신이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면 일본이 망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은밀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나 민족적 정체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무거움은 그의 어리숙하면서도 장난스러운 현실 감각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속이고 사기친 ‘영혼의 구원자’ 조난실을 찾기 위해서 경성의 밤문화를 헤집고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조난실의 가짜 남편 노릇을 했다는 자부심에 ‘죽어도 좋을 혁명의 옷’을 입고 우쭐거린다. 우수꽝스러운 혁명의 결의는 결국에는 모호한 개인적인 성찰로 막을 내린다. 그는 ‘전기의 영혼’(전차)을 타고 근대의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90년대 이후 인문학자들은 근대의 연예가 단순히 개인의 성적 취향과 이성에 대한 자의식과 관련되기보다는, 다양한 근대 문화의 맥락과 이데올로기적 담론화 과정의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는 새로운 근대문화의 수용과 제국과 식민지의 권력적 관계가 남녀 간의 연애의 문제에 환유적으로 내면화되었다라고 말한다. 이에 1930년대 연애란 식민지 근대의 문화적 취향이며, 식민지인의 정체성을 반영한 담론화된 실체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사건과 인물의 서사적 관계가 재구성된다. 이야기란 보는 자에게만 보인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연애지상주의와 불륜 현상을 놓고 볼 때에, 후기 산업 사회의 극단화된 사회 현실을 경험하는 우리 시대야말로 자본주의의 폐해가 내면화된 ‘연애의 시대’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은가? 아무튼 칙릿류의 소설인 <모던보이>을 내면화된 식민성의 현대적 변용으로 봐야할지, 판타지적 요소로 현현된 1930년대 경성 이야기로 봐야할지는 미묘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식민지 예인의 “나비의 꿈”:김선우의 <나는 춤이다>
시인이면서 이제 소설가가 된 김선우의 <나는 춤이다>는 식민지 시대의 무용가인 최승희의 일대기를 재현한 허구적 전기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인간의 조건’을 비극적으로 경험한 한 예술가의 생애를 들여다보며, 작가는 예술가로서 여성이 경험하는 ‘자유를 위한 최고의 춤’에 동일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곳곳에서 시적 정취로 풀려져 나오는 피를 토하듯 간절한 언어를 박아놓은 작가의 ‘뜨거운 심장’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한 명의 예술가가 다른 장르의 예술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식민지 삶 속에서 ‘세계 최고의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최승희의 욕망과 그 실현만을 다루진 않았다. 철저하게 근대 예술계에서 빗겨나 식민지인의 고단한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하면서도, ‘춤’에 대한 예술혼을 놓지 않았던 기생 출신인 예월의 삶이 최승희의 이야기선을 따라 평행하게 전개된다. 최승희가 일본 최고 무용가인 이시이 무용단에 들어가서 무용수가 되었을 때 예월은 일본인 남편을 따라 사할린에 살고 있었다. 최승희가 훌륭한 무용수가 되어 조선에서 처음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운영할 때, 예월은 태화관이라는 기생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최승희가 세계 최고의 무용수가 되어 북경에서 공연을 할 때, 예월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조선춤’을 추었던 예월과 ‘보살춤’을 추었던 최승희는 씨줄과 날줄, 꽃과 나비처럼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며 ‘조선춤’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두 예능인의 삶이 대척점에 놓여 있지만, 춤에 대한 열정과 가슴 속에 타오르는 희열은 똑같다. 그리고 그것은 ‘나비’라는 상징물에 잘 나타나 있다.
창 아래 나란히 놓인 다섯 개의 둥근 등에 기타로가 천천히 불을 붙였다. 세상에 온 첫 번째 바람을 밟듯이 나비가 가만히 눈을 떴다. 빈방 한가운데로 나비가 떠올랐다. 빛의 나비와 검은 나비 그림자. 그러니까,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이 얻어지는 거야. 고치에서 춤을 꺼내듯, 이 순간의 몸과 다음 순간의 몸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야.
따뜻한 붉은 핏물이 스민 검은 나비가 텅 빈 벽을 날았다. 기타로가 가만히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처럼, 잡히지 않았다.(p.285)
민이 선물한 ‘나비 그림의 등’은 최승희와 예월의 삶을 연결해 준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조화 속에서 최승희라는 ‘빛’의 나비와 예월이라는 ‘그림자’의 나비가 조우한다. 나비란 고치를 벗고 세계 속으로 화려하게 비상하려는 욕망을 대변한다. 그러면서도 그 가볍고 유연한 움직임은 하나의 춤이 되어 키타로의 눈을 사로잡는다. 춤이 언어가 되었을 때, 그것은 몸짓의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며, 요란한 비유의 번질거림도 아닐 것이다. ‘나비의 꿈’처럼 잡거나 소유할 순 없지만, ‘빛’과 ‘움직임’ 속에 도사린 욕망과 타협해 나가는 간절한 시선이야말로 춤이 언어가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작가는 최승희의 화려한 경력에서 오는 외경심보다는 예술에 대한, 춤에 대한 최승희의 간절한 꿈을 더 조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대상에 몰입하여 몰아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느끼게 되는 희열이 춤에서만큼 극명하게 느껴지는 예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소설 속에서 춤은 민족혼의 승화와 결부된다. 춤을 일반 민중과 세계인과 소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의 예술혼을 공간적 희열로 변용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최승희는 ‘알을 깨는’, 지독한 구도를 위한 보살춤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힘이 센 정치를 예술이 이길 수 없지만, 최승희는 그러한 정치적 현실에 당당히 맞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가 내포한 정치적 억압과 민족주의적 시각의 역사 감각은 소설을 읽는 동안 그 빛을 잃는다. 그러나 <나는 춤이다>에서 예술적 자유로움과 민족주의적 감정을 대차대조하는 반복적인 시도는 소설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을 남긴다.
혁명가 아담의 지상에서의 꿈: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혁명과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한 쪽은 너무나 이성적인 논리 속에서 행해지는 사회 저항이며, 다른 한 쪽은 지독하게 개인적인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어 둘의 상관성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70-80년대 학생운동 혹은 노동운동의 연장선에서 쓰여진 후일담 소설들(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김영현의 <폭설> 등)을 생각한다면 그리 낯선 소재도 아니다. 대상에 대한 강렬한 몰입과 집착이 만들어 내는 허무의식이라면 실패한 혁명과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은 서로 비슷한 면이 있긴 하다. 이러한 소설적 재현에서 생각할 것은 지나간 과거든 모호한 현실이든 역사 앞에 얼마나 정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도 혁명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동안 ‘발로 글을 쓰는 작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김연수는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민생단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하여 소설화한다. 1930년대 초반 동만주의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발생한 ‘민생단 사건’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어섰지만 미묘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동지의 손에 500여명의 사람이 죽게 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서 복잡한 정치적 논리를 풀어내기란 쉽지 않으며 그 소설적 재현 역시도 곤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작가가 빠진 딜레마란 제국에 저항하여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사랑이었음을 확인한다.
주인공 김해연은 철도 부설 사업을 하는 회사인 만철의 조선인 기수이다. 식민지인이지만 제국의 일꾼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그는 공산당원으로 이중생활을 하던 이정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그녀와의 사랑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사업이었다는 점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그는 사랑의 번민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항일 무장 세력에 가담하게 되고, 민생단 사건을 경험한다. 그러면서도 이정희를 죽게 한 자들을 찾아내어 그녀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다.
그의 이러한 집착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사랑’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혼돈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과 목소리를 경험한 자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가 받은 이정희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는 사랑이란 아득한 기억의 끝없는 환영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지금까지 내게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 우주는 신생 우주이고, 그토록 고요한 우주라고. 지금까지 나는 눈도, 귀도 입도 없었던 존재라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맛보지 않았어요.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앳된 사람이에요. 갓 태어난 인간이에요. 이제 막 돋아난 새싹이에요. 그처럼 이 세상도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에요. 한태 나를 사로잡았던 그 소망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네요. 옷에는 얼룩만이 남아 지나간 시절들에 대해서 말해주네요. 이렇게 해서 나는 평안을 얻게 되는 건가요?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그 어떤 것에도 지지 않는 그런 평안인가요. 이제.(p.324)
인간의 피와 살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라는 존재는 이제 우주적인 시선 속에 남겨졌다. 죽음을 결심한 그녀는 태초의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의 인간이 꿈꾸었던 많은 욕망들과 소망들을 잊는다. 그 욕망과 소망이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일 수도, 김해명과의 사랑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은 것이다. 소설의 소재이자 중심 내용인 ‘민생단 사건’의 비극적 역사보다도 한 여자가 겪었을 생의 고뇌가 더 처절하게 다가온다. 식민지 아담이 꿈꿀 수 있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갈망은 무모하지만 지극히 낭만적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을 김연수 소설의 힘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혁명과 사랑의 연대기 2부작(<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에서 작가 김연수가 빠져 있는 어려움이란 바로 혁명도 사랑도 모두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기 위한 역사 탐험이나 소설 형식의 일탈적 변조가 여전히 작가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을뿐더러, 아담이 꿈꿀 수 있는 순수한 땅 유일하게 소설로만 재현되는 그 세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화된 역사의 시대, 그리고 사랑의 논리
이 세 권의 소설을 읽으며, 역사라는 것이 꿈꾸는 자의 소유인 것인지,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소유인지 되묻고 싶다.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들은 체제 전복적인 혁명의 상상력을 체화하면서 살아왔다. 성공한 역사의 연대기를 쓸 수도 있고, 실패한 혁명의 피의 연대기를 쓸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시대의 역사는 낡고 무거운 오래된 외투와 같다. 그래, 너무 오랫동안 강박적으로 의식해서 그런 것일까? 우리 스스로가 역사 속 혁명이라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 질려버렸거나 무감각해져 버린 것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소설들 속에서도 문자화된 역사가 만들어내는 피곤함과 진부함이 인물서술자의 내적독백에 가득 묻어난다. 그들이 외치는 사랑도 한없이 익숙하고 뻔한 내용이지만, 진부하다거나 상투적이다라는 말을 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말초적인 감각 위에서 수작을 걸어오는 것을 뿌리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열정에 들뜬 붉은 눈동자의 사랑도 삶의 진정성을 잃어버리면 이데올로기에 찌든 역사만큼이나 추악할뿐더러 금세 잊혀지기 쉽다는 것을 말이다.
오윤호∙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저서 <현대 소설의 서사 기법>, <깨어진 역사 비평적 진실>. 평론 「그림자 사나이의 틈에 대한 악몽」 외. 서강대, 서울예대 강사.
- 이전글32호(2008년 겨울호)/계간평/장성규 09.02.26
- 다음글32호(2008년 겨울호)/서평/박정호 09.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