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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계간평/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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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시적 리얼리티의 모색과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
장성규|문학평론가
∙맹문재,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학산문학≫ 2008년 가을호)
∙신은영, 「마음의 지도」(≪시인세계≫ 2008 가을호)
∙박형준, 「강물이 언어로 속삭인다」(≪한국문학≫ 2008 가을호)
∙고재종, 「개기월식」(≪시안≫ 2008 가을호)
∙장석원, 「더 많은 계획」(≪문학과사회≫ 2008 가을호)
∙김민정,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문학동네≫ 2008 가을호)
∙장이지, 「납량특선-한양호일․5」(≪리토피아≫ 2008 가을호)
1. 시와 리얼리티의 아포리아
시적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성립 가능한가? 이 문제는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아포리아이다. 시 장르 자체가 지니는 ‘서정’성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보다 시적 주체와 대상 간의 합일의 형상화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시적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이미 형용모순이다. 시 장르가 주체와 대상간의 합일을 서정의 형식으로 형상화하는데 반해,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주체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층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시적 리얼리티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가 반복되어온 것은 이와 같은 시 장르와 리얼리티간의 모순적 성격에 기인한다.
그러나 리얼리티라는 개념을 변화시켜 인식한다면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의 가능성이 생성된다. 일반적으로 리얼리티는 주체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로 이해된다. 그러나 지금,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도 이와 같은 리얼리티 개념이 유효한 것일까? 오히려 변화된 리얼리티는 주체 외부가 아닌, 바로 주체의 인식과정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가 ‘현실’이라고 사유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들 자체가 이미 리얼리티라는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고전적인 미메시스 개념에 기반한 리얼리티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다양한 메커니즘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리얼리티’들이다. 이 리얼리티는 바로 우리 일상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들에 의해 우리에게 구체적인 ‘실감’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체계는 가상의 표상들을 현실의 층위로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시적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재구성될 수 있다. 시 장르가 지니는 주체와 대상의 합일이라는 속성은 곧 주체가 리얼리티를 리얼리티로 인식하는 과정의 형상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시적 주체는 대상에 대한 성찰적 인식을 통해 리얼리티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을 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아가 유통되는 리얼리티의 균열과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서정에 일정한 굴절을 징후적으로 현현하게 할 수도 있다.
지난 가을에 발표된 시들은 주제나 형식 면에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글은 위에서 언급한 시적 리얼리티를 인식하고 이에 기반하여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시적 리얼리티의 구체적인 발현 양상과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발밑’의 리얼리티와 ‘낮은 목소리’의 복원
1.
오늘도 무사했구나,/현관문 앞에 서서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발을 내려다본다//자정 넘도록 집 안에 들지 못한 채 길 위를 걷고 있는 발,/비 맞은 강아지처럼 측은하고/피곤한 얼굴이다//나는 그 모습이 밥 먹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정치 뉴스를 듣는데 지쳐서라는 것도/공사장의 소음에 시달려서라는 것도/개미들을 짓밟아서라는 것도/빼앗는 법을 찾기 위해 책을 곡괭이질처럼 파내어서라는 것도 잘 안다//뿐만 아니라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2.
종종거리며 다녀서만이 아니라/가야할 곳을 가지 못해 나의 발은 피곤한 것이다//오늘 1000일 넘게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에 가지 못했다/무척 가보고싶었지만/논문 마감일에 쫓기느라 포기하고 말았다//사실 그곳에 가는 길도 만만하지 않다/버스 노선이며 골목길도 찾아야 하지만/할 일도 고민해야 된다/생업을 잃을 위험도 당연히 감수해야 된다//가야할 곳을 가지 못한 부끄러움에/나의 발은 하루 종일 바빴다//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
―맹문재,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 ≪학산문학≫, 2008 가을호)
맹문재의 시는 정직하다. 그는 자신의 소시민적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발이 피곤한 이유가 “가야할 곳을 가지 못한 부끄러움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가야할 곳이란 어디인가? 그곳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000일 넘게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것은 “생업을 잃을 위험도 당연히 감수해야”하는 일이다. 따라서 시가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맹문재의 시는 정직하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소시민적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시적 윤리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가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는 자신의 소시민적 위치에 대한 성찰만이 존재할 뿐, “기륭전자”로 표상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리얼리티와의 교감이 부재하다. 그가 “기륭전자”를 가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시적 리얼리티의 중심을 시적 주체의 층위로 한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시적 주체가 “기륭전자”를 리얼리티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낮은 목소리’를 통한 새로운 리얼리티의 생성과정이 개입될 때, 비로소 그는 “피곤한 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찾는 마음의 지도가/어쩌면 발바닥에 있을지도 모른다/늘 밑바닥과 마주하며 넓어지는 발/한 번도 얼굴과 정면으로 서 본 적 없는 발바닥에/마음이 훤히 보이는 표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굳은살 떼어내 지문이라도 사라지면/스스로 길을 헤매고 자꾸만 안쪽으로 혹은 바깥쪽으로/발바닥 부르트도록 걸을지도 모른다/움푹 파였지만 무엇도 고여 있지 않고/항상 비어 있는 자리/서걱이는 바람의 길목 앞에서/아치형의 발바닥이 지탱하는 삶의 무게가 아름답다/양팔저울의 저쪽에는 달이 기울고/발바닥도 없이 뒹구는 별들이 끄떡끄떡 다가오는 날에/둥근 봉분을 두 발 밑에 아스라이 밟고 사는 사람들/산언덕의 봉분을 차례로 밟으며 올라선 밤하늘에서/둥둥 떠다니는 별빛을 베고 누워/만날 수 없는 발밑을 생각하고/흐린 날이거나 개인 날이거나/좀처럼 얼굴 들지 않는 발바닥처럼/쏟아지는 별빛도 새벽녘의 안개도 모른 척하고/고개 숙인 채 나도 이 시절을 지나볼거나/웅덩이에 물보라가 일듯이/하늘이 흐려지며 웅왕거릴 때/내가 가야 할 길이 멀리 있지 않음을 생각하고/비로소 고개를 들어/하늘의 발바닥이 길을 보여주는구나/네 마음의 길은 또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다시금 상상해보며/안아볼 수도 없는 거대한 지도를 향해/두 팔을 벌리고/얼마나 많은 길들이 아득한 내 마음 지탱하고 있을까/다시 한 번 떠날 길을 내다보는 것이다
―신은영, 「마음의 지도」, ≪시인세계≫, 2008 가을호
위의 시로 이제 막 등단한 신은영의 시는 시적 언어의 미학적 완성도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내가 가야 할 길이 멀리 있지 않음을 생각하고”라는 구절이나 “네 마음의 길은 또 얼마나 구불구불한지”등의 구절 등, 다소 상투적인 언어 사용 때문에 시의 긴장도가 떨어진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그녀의 시적 리얼리티가 바로 “아치형의 발바닥이 지탱하는 삶의 무게”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적 리얼리티는 ‘발’에서 시작된다. 그 발은 “늘 밑바닥과 마주하며 넓어지는 발”이며 “한 번도 얼굴과 정면으로 서 본 적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발은 시적 층위가 아닌 일상의 층위에서는 “만날 수 없는 발밑”일 수밖에 없다. 이 ‘발밑’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은영의 작품은 주목된다.
그러나 그녀는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녀는 ‘발밑’의 리얼리티를 결국 “아득한 내 마음”의 영역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맹문재와 유사하게 그녀 역시 자신이 인식한 리얼리티를 시적 주체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결국 고전적인 서정적 주체의 한계를 반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정적 주체가 ‘낮은 목소리’와의 교감을 통한 새로운 리얼리티의 생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결국 그 서정적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한계를 고스란히 반복할 따름이다. 따라서 신은영이 찾는 ‘마음의 지도’란, 기실 “만날 수 없는 발밑”이 시적 주체의 자폐적인 영역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새벽 다섯 시면/강물이 산길을 흘러내려온다/먼 길을 시골길도 아니고 도시의 새벽길을 밟아/닫혀진 내 집 창문을 흔드는 강물소리/전세를 얻고 이 집에서 이태를 넘게 살면서도/처음에는 강물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았다/언제부턴가 새벽 다섯 시만 되면/나는 강물소리를 기다렸다/어떤 날은 책을 읽다가 밤을 하얗게 새워버리고/새벽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곤 하였다/숲에 번지는 불을 몰고서 멀리서부터 흘려 내려오며/산들바람처럼 새벽숲을 흔든다/전나무가 호랑가시나무와 너도밤나무가/각각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각각의 음색을 낸다/강물소리는 산길을 내려와 동네로 접어든다/삐뚤빼뚤한 변두리 골목길을 올라오면서/엄마를 깨우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섞이고/숨을 헉헉대면서 높은 골목길의 쓰레기를 치우는/청소부의 고단한 어깨를 스친다//내가 사는 집까지 도착한 강물소리는/밤늦게까지 책을 읽는 백면서생에게/눈으로 볼 수도 없고 낮동안의 소음으로는/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자연과 삶의 속내를 들려준다/새벽 다섯 시면 댕댕댕 산중턱의 절에서 흘러내려온다/비온 뒤 거리의 보도블럭에서/풀들이 솟아나오듯/도시의 시멘트에 가두어놓은 저 시퍼런 범종 소리/새벽 창에 강물이 언어로 속삭인다
―박형준, 「강물이 언어로 속삭인다」, ≪한국문학≫, 2008 가을호
박형준의 시는 서정의 힘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서정은 단지 시적 주체와 대상간의 기계적 합일이 아니라, 시적 주체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리얼리티’의 형상화로 나아가는 미학적 원리이다. 그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낮동안의 소음으로는/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소리를 듣는다. 시적 리얼리티의 생성은 공식적이고 지배적인 목소리가 아닌, 바로 “새벽 창에 강물이 언어로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의 복원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박형준은 이 ‘낮은 목소리’를 단순히 ‘낮은 목소리’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는 이 낮은 목소리가 “각각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각각의 음색을 낸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낮은 목소리’는 바로 그 ‘낮음’으로 인하여 각각의 목소리의 특징이 지워지기 쉽다. 그러나 기실 낮은 목소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아우성치고 있는가? 박형준이 듣는 ‘낮은 목소리’인 “숨을 헉헉대면서 높은 골목길의 쓰레기를 치우는/청소부의 고단한 어깨를 스”치는 소리가 무게감을 지니는 것은 그 소리가 “삐뚤빼뚤한 변두리 골몰길”의 다른 낮은 목소리와 “섞이”면서도 “각각의 음색”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맹문재와 신은영, 그리고 박형준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밑’의 리얼리티를 인식하고 이로부터 ‘낮은 목소리’를 복원시키고자 한다. 맹문재는 “기륭전자”로 표상되는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를 쉽게 전개할 수 없는 자신의 소시민적 위치에 대한 정직한 성찰을 보여준다. 신은영은 얼굴이 아닌 ‘발밑’의 리얼리티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지도’를 그려나가고자 한다. 박형준은 낮은 목소리들 사이의 독특한 차이와 그 섞임을 인식함으로서 시적 언어와 서정성의 힘을 확인시켜준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적 성취는 보다 적극적인 시적 주체와는 ‘다른’ 낮은 목소리들과의 교감을 필요로 한다. 그럴 때에만 시적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찰과 모색을 통한 시적 주체의 갱신
그녀는 내가 온통 전율하며 휘황하게 빛나기를 바라겠지만/그녀는 내가 왜 숭고한 상태에 들리지 않는지 의아해하겠지만/시골의 할머니들 홀려 강매나 다름없는 가짜 보약 팔아놓고/그 외상 미처 못 갚으면 독촉장 수없이 보내고/붉은 도장 팡팡 찍어 재산압류계고장 계속 보내고/오밤중이건 새벽녘이건 협박 전화질해대고/자식들의 전화번호까지 알아내 자식들 직장상사에게까지 전화질해대니/결국 자식 앞길 막았다고 할머니 홀로 농약을 마시게 하는/그 전직 경찰관이라는 해결사의 쇠갈고리 따위에 찍한 것 같은 삶에서/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둥근 달,/그녀의 환한 구멍 속으로 이 세상을 속히 빠져나가는 것이려니/하지만 그녀의 환한 구멍마저 차단해버리는 이 암전의 시간,/나는 어떤 탈출구도 알지 못한다고 한 시인을 되뇌는 것이라니
―고재종, 「개기월식」, ≪시안≫, 2008 가을호
고재종의 시는 시적 주체의 성찰의 ‘힘’을 잘 보여준다. 고전적인 서정이 시적 주체가 “온통 전율하며 휘황하게 빛나”는 순간의 시화에서 비롯된다면, 그의 서정은 “그녀의 환한 구멍마저 차단해버리는 이 암전의 시간”의 시화에서 발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지속되어온 시적 주체에 의한 대상의 동일화라는 ‘서정’의 규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의 서정은 시적 주체로 환원될 수 없는 대상의 리얼리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고재종의 시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고전적인 서정에서 중시하는 “숭고한 상태”, 나아가 “그녀의 환한 구멍 속으로 이 세상을 속히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시적 주체와 대상의 합일의 영역에 오늘날의 서정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자본주의의 “쇠갈고리 따위에 찍한 것 같은 삶”에서 고전적인 서정이란 현실의 리얼리티와는 동떨어진 관념의 층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서정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고전적인 시적 주체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시적 주체의 위치를 모색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 지점이야말로 시적 주체와 리얼리티간의 충돌을 통한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 아닐까? 그러나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을 섣불리 ‘선언’하는 것 역시 시적 리얼리티에 대한 손쉬운 동일화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고재종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고전적 서정의 위기와 새로운 서정의 탐색 가운데에서 시적 주체의 위치에 대해 “나는 어떤 탈출구도 알지 못한다”고 발화하는 순간, 그 발화가 무게를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탈출구에 대해 몇몇 새로운 수사나 기법을 섣불리 대안으로 제시하는 현재 우리 문학의 시적 경향을 고려할 때, 고재종의 “암전의 시간”이라는 고백의 진정성은 더욱 빛난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나는 상승 하강 운동을 반복하는 중이다/엘리베이터는 로켓이 될 수 없다 자체 추진력이 없다//문제는 정치경제학/깃발을 내릴 수 없다/강의실은 대강당 주제는 페레스트로이카//내가 학생의 담배 한 개비를 착취해도 될까/즐겁게 가져가세요 내 마음의 불도 드릴 수 있습니다/복도에 둘러서서 (집단적으로) 담배를 피우며/주제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냐 발전은 향한 변화이냐//붉은 별과 낫은 인류의 고귀한 이상입니다/노동자 농민이 (집단적으로) 권력을 수립한, 유일한!/그 정권은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숭고한 정치적 완결/바로 그것입니다 나의 좌절은, 나의 고민은/그때도 지금도 자본과 노동과 착취와 잉여가치입니다//유럽의 마르크스경제학 지도교수는 휴가 때 알프스로/스키를 타러 떠났고 노동자들에게는 꿈같은 일/나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그것이 삶의 한 방법이고 행복이라면……//브레이크 타임에는 커피 한 잔/100원짜리 자동판매기 커피에 투입된 인간의 숭고한 노동/아름다운 연기가 시선을 가리고 현실을 덮쳐오고/문제는 마르크스도 사회주의도 아닙니다/문제는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한 더 많은 계획/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철저한 비판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과학/우리 인생의, 우리 국가의 과학 그리고 철학//6층 대강당 앞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청바지와 목폴라 셔츠를 입은 마르크시스트가 내린다/노동 없이 수직 상승한 학자에게 목례를 한다/소비에트는 해체되었다 엘리베이터는 반복 기계일 뿐이다/밑바닥이 보인다 메탈 하트 메탈 하트/강력한 동력 장치가 필요하다//어떤 약은 우리의 건강에 좋다/교탁에 턱을 괴고 한 다리는 교단에 올리고/씩 웃던 마르크시스트를 다시 본다면 반가울 것이다/우리는 (집단적으로) 빠르게 달아났다/관 같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린다/도그마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장석원, 「더 많은 계획」, ≪문학과 사회≫, 2008 가을
장석원의 시는 급진적이다. 위의 시를 미메시스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제도에 포섭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적 주체가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맑스주의마저도 체제내화 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과 이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의 핵심은 ‘엘리베이터’와 ‘로켓’간의 차이에 대한 시적 주체의 인식이다. “엘리베이터는 로켓이 될 수 없다 자체 추진력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엘리베이터’가 시적 주체는 물론 우리 모두의 삶을 장악한 채 결국 “상승 하강 운동을 반복”시킨다는 것이다. 이 반복은 ‘엘리베이터’ 자체가 “반복 기계”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이 반복을 극복하는 것은 ‘엘리베이터’로 표상되는 “철저한 비판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과학”과 같은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이는 순간적인 ‘상승’이나 ‘하강’의 층위에서만 유효할 뿐, ‘엘리베이터’ 자체를 넘어서는 운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석원은 어떠한 방식으로 ‘엘리베이터’의 지배를 극복하고자 하는가? 그는 엘리베이터의 대척점에 있는, 즉 “자체 추진력”을 지니고 있는 ‘로켓’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엘리베이터는 외부의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한 더 많은 계획”에 기반한 “강력한 동력 장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반복 운동을 지속한다. 반면 ‘로켓’은 외부의 기획된 힘이 아닌, 바로 로켓이 운동하는 궤도의 중력을 이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운동을 진행할 수 있다. 즉, 강력한 자본의 중력 자체를 역으로 이용함으로써 “반복 운동”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장석원의 기획이다.
자본의 중력은 매우 강력하다. 그 중력은 맑시스트를 “노동 없이 수직 상승한 학자”로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그렇다면 이 중력보다 더 강력한 다른 중력을 기획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오히려 그 중력을 역이용하여 자본의 외부를 모색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이 점에서 장석원의 자본 내부에서 외부를 모색하는 “자체 추진력”의 기획은 주목된다.
기실 고전적의 시적 주체의 위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무엇보다 시적 리얼리티를 시적 주체의 영역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장석원은 맑스주의 미학마저도 시적 리얼리티를 선험적인 시적 주체로 환원시켰던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 그는 ‘더 많은 계획’으로 표상되는 미학적 기획이 결국에는 ‘자본’의 강력한 ‘중력’에 포섭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이 지점에서는 그는 새로운 시적 주체와 리얼리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것은 “자체 추진력”을 통해 ‘자본’의 메커니즘을 역이용하는 전략인 바, 장석원은 이를 통해 게릴라적인 시적 리얼리티의 급진성의 발현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고재종과 장석원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전적인 시적 주체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시적 주체의 위치에 대한 모색을 보여준다. 고재종은 시적 주체와 대상과의 합일이라는 ‘신기루’대신, 구체적인 후기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발현되는 시적 리얼리티에 주목한다. 그는 이 시적 리얼리티와의 충돌 속에서 생성되는 시적 주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 시적 주체는 섣부른 새로움 대신 “암전의 시간”을 응시함으로써 그 무게감을 획득한다. 한 편 장석원은 고전적인 시적 주체가 ‘자본’의 메커니즘에 포섭되었음을 지적한다. 더불어 이 메커니즘으로부터의 ‘탈주’가 또 다른 시적 주체의 ‘건설’로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의 메커니즘의 모순과 균열을 비집고 생성될 때 비로소 그 급진성을 담지할 수 있음을 인식한다. 이들의 시는 고전적인 시적 주체의 한계에 대한 발본적인 성찰과 새로운 시적 주체의 가능성에 대한 급진적인 모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4.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현과 인식
머리털 나 처음으로 돈 내고 다리 벌린 날, 소중한당신산부인과에는 다행히 여의사만 둘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자궁경부암 진단용 초음파 화면 가득 잘 익은 토마토의 속살이 비릿한 붉음으로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깨끗하네요, 그런데 자궁 모양이 좀 특이해요, 뾰족하다고나 할까. 거웃 나 처음으로 내 아기집을 구경한 날, 어쩌다 뾰족한 자궁이 된 나는 콘헤드(conehead)의 아이 하나 고깔 쓴 제 머리 꼭지로 내 배를 콕콕 찌르는 상상만으로도 아 따가워 가시를 영 빼버릴 참이었는데 제모 어떠세요? 내 아랫도리를 헤집다 말고 얼굴을 쳐든 여의사아가 코끝까지 밀려내려온 안경테를 걷어올리며 묻는 것이었다. 레이저 기계 새로 들여 행사중이에요, 겨드랑이 털과 패키지로 하세요, 휴가철인데 비키니라인 신경쓰셔야지요. 머리털 나 처음으로 거창까지 상가에 조문가는 날, 안성휴게서 화장실에 쪼그려 오줌이나 누는데 문짝에 덕지덕지 이 많은 스티커는 누가 다 붙여놓은 것일까. 여성 희소식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02-969-6688 여성 무모증 빈모증 수술하지 않고 완전 해결!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거다.
―김민정,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문학동네≫, 2008 가을호
김민정의 시는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그녀는 기존의 고전적 서정이 간과해 온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리얼리티에 대한 예리한 포착으로부터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김민정은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젠더적 층위에서 발현되는 리얼리티를 인식한다. 그 리얼리티는 “겨드랑이 털과 패키지”로 이루어지는 ‘제모’와 동시에 진행되는 “여성 무모증 빈모증 수술하지 않고 완전 해결”이라는 모순된 현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상반된 현실은 기실 하나의 리얼리티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휴가철인데 비키니라인 신경 쓰셔야”하는 젠더에 대한 남성적 응시로부터 발현된다. 남성의 ‘응시’라는 젠더적 ‘권력’앞에서 여성은 제모나 역으로 무모증을 ‘치료’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김민정이 주목되는 것은 그녀가 이와 같은 성적 권력관계로부터 비롯된 ‘응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정화된 여성성 자체가 이미 일정한 남녀 간의 구별 짓기 전략에 의해 포섭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한다. 따라서 그녀가 여성성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아 따가워 가시를 영 빼버릴 참”이라고 발화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때 가시가 여성성의 은유인 “아기집”임을 고려한다면, 김민정은 스테레오 타입화 된 여성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민정이 남녀 간의 성적 권력관계를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의 층위로 전이시킨다는 점이다. 그녀는 제모, 혹은 무모증의 치료라는 현실에 대해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거다.”라고 발화한다. 맑스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 비판은 18세기 영국자본주의의 남성 공업 노동을 노동의 일반화된 형태로 파악하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21세기 후기자본주의 시대, 이와 같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적어도 젠더의 층위에서의 모순을 해명하는 것에는 무력하다. 젠더의 영역에서 발현되는 정치경제학적 모순이라는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인다는 점에서 김민정은 이미 충분히 급진적이다. 이 급진성이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와 시적 주체의 모색으로 이어질 때, 우리 시의 ‘새로운 상상력’은 비로소 그 실체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공중변소의 문이 활짝 열리고 도끼가 허공을 가른다. 수음을 하던 청소년의 머리가 ‘화들짝’ 떨어진다(라는 건 물론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지만). 어느 말 달동네 쓰레기장에 머리가 굴러다닌다. 시간이 없어 연애를 못한다는 옥탑방 미스 윤이 머리를 어항에 넣고 기른다(라는 건 어느 만화에서 본 건지 아리송하다). 달동네의 달빛은 청승맞게 푸르고.//어느 날 달동네 꼭대기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내와 함께 내려오는 내 도플갱어를 본다. 아내도 내 편이 아니고, 아들도 나를 못 알아보고. 내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지. 밤새 공터 쓰레기장에 털썩 앉아 웬 머리와 더불어 존재의 비애에 대해 토론한다. 새벽은 달동네 사람들을 지운다. 겁 없는 똥개들만 짖고, 어느 날은 가끔이지만 머리를 지운다.// 명예 퇴직한 교감 선생님(이라지만 정말은 전직 제비 선생님)이 어디서 부잣집 퍼그의 머리를 달고 나와 골목을 쓸고 계신다. 비는 어디다 두고 도깨비를 들고 나와 쓴다. 일상은 언제나 서늘하고 머리는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동네 목욕탕 앞. ‘카운터에 맡기지 않은 물품의 분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에구 내 머리는 조인성 머리였는데, 물어내세요. 으앙.
―장이지, 「납량특선-한양호일․5」, ≪리토피아≫, 2008 가을호
장이지의 시는 환타지라는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현실’로 인식하는 것들이 실상은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며, “어느 만화에서 본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기실 우리가 현실로 믿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된 가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장이지의 위와 같은 인식은 환타지의 형식으로 현현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정확히 폭로한다.
시적 리얼리티의 개념을 재구성하는데 있어 우선 진행되어야 할 작업은 리얼리티가 단단한 객관 현실이 아닌, 표상을 통해 유통되어지는 신념체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이지의 환타지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시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장이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얼핏 온화해 보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장악당한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서늘하고 머리는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점을 간파한다. 게다가 이 메커니즘은 “물품의 분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지배 이데올로기 너머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우리의 ‘머리’는 현실을 생산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할 때, 곧 “분실”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는 일상을 구성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그 허구의 틈새로 현현하는 다른 리얼리티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리얼리티가 시적 주체와 현실간의 긴장을 통한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의 층위로 이어질 때,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김민정과 장이지는 기존의 고전적 리얼리티의 인식론적 틀로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탐색을 보여준다. 김민정은 고정화된 정치경제학적 틀 너머 젠더의 정치경제학적 리얼리티를, 장이지는 환타지의 형식으로 발현되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탐색한다. 이들의 작업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시적 탐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5. 시적 리얼리티의 모색과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
여전히 시가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고전적인 서정성을 지금-여기의 문제의식 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시적 주체와 리얼리티는 더 이상 서정의 미적 기반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전적인 시적 주체와 리얼리티를 새로운 컨텍스트의 변화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것이 현재의 서정을 고민하는 이들의 우선적인 몫일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고전적인 시적 주체와 리얼리티 개념은 어떻게 변모 가능한가? 시적 리얼리티의 발현 양상을 어떻게 포착하고 의미화 할 것인가? 나아가 우리시대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은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가? 이러한 아포리아에 대해 선험적인 답을 내리기 전에, 현재 우리 시가 이룬 미학적 성취로부터 이에 대한 답의 일단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었다.
물론 이 부족한 글에서 이와 같은 작업을 온전히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맹문재, 신은영, 박형준이 보여주는 ‘발밑’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과 ‘낮은 목소리’의 복원, 고재종, 장석원이 보여주는 시적 주체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시적 주체에 대한 모색, 김민정, 장이지가 보여주는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과 시적 리얼리티의 재구성 등의 성과는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몇몇 수사와 기법을 근거로 한 ‘새로운 상상력’이 난무하는 것이 우리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빈곤한 ‘새로움’속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진지한 성과로부터 진정한 ‘새로운 서정’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성규∙1978년 서울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한국현대작가와 불교>(공저). 가톨릭대 세종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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