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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신작소설/더미의 변명/나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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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의 변명
나여경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제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벽을 친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눈물나게 아깝다. 군인 담요 위에 여기저기 널린 만 원권 지폐가 눈에 삼삼하다. 범털 하면 손 크기로 유명한데 어제 그 판만 뒤집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범털 형님한테 적어도 두 장은 받아 챙길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다리가 쑤신다. 순전히 내 실수다. 문방의 임무가 뭔가? 안심하고 게임을 즐길 수 있게 안보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평상시의 나답지 않았다. 나는 이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일에 뛰어든 지 삼일 만에 범털 형님이, 니 체질이다 체질, 했을 때 나는 이미 결심했다. 내 목숨을 걸어보자고. 그랬던 내가 어제와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런 일이 자주 생기다 보면 문방으로써의 수명이 짧아진다. 무엇보다 범털 형님의 기대에 어긋난 것이 못내 아쉽다. 어렵게 범털 형님의 신임을 얻었는데 그런 불상사가 생기다니. 처음부터 범털 형님이 나를 신임했던 건 아니다. 크고 작은 일에 몸을 사리지 않는 나를 눈여겨보던 형님이 결정적으로 신임하게 된 건 어느 날 게임도중 벌어진 싸움에서 날아오던 칼을 내 몸으로 막고 나서부터였다. 그때 입은 상처가 지금도 허벅지에 남아 있다.
삼 개월 정도 지나면 창고를 옮겨야 하는데 벌써 사 개월째 한자리에 있었으니 그런 일이 터질 법도 하다. 포커를 하는 놈들은 도박장을 고상하게 하우스라고 한다지만 우리는 창고라고 부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실수는 그 젖냄새, 백조 때문이었다. 그 젖냄새가 내 인생에 있어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젖냄새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그녀가 우리 창고의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건 삼 개월쯤 되었다. 게임을 즐기다 목이 마르거나 출출하면 그녀를 호출한다. 그녀는 창고 옆의 두 평짜리 공간에서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매점을 운영한다. 수입이 괜찮아서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자리인데 범털 형님이 추천했다고 들었다.
살결이 그야말로 백옥 같았다. 희고 목이 긴 그녀를 처음 본 보살들이 백조라고 부르게 되면서 그녀는 자연히 백조가 되었다. 처음에 나는 창고에 온 손님을 보살이라 부르는 걸 들으며 웃었지만 생각해 보면 일리 있는 말이다. 절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곳에 시주하러 오는 것 아닌가. 그녀를 만지면 차고 매끄러운 감촉의 대리석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이 세계가 그렇듯 그녀 역시 나이나 이름 따윈 모른다. 그저 처음 본 느낌을 그대로 붙이면 그게 보살의 이름으로 통한다. 그녀도 그랬다. 처음 본 느낌, 백조. 굵게 퍼머한 머리는 항상 촉촉이 젖어 있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붉은 입술은 내 거기에 피를 몰리게 했다. 나뿐 아니라 그녀를 본 사내들은 모두가 다 그랬다.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가끔 주방 유리창으로 보이는 그녀가 항상 책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내용의 책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모습의 그녀가 좋았다. 어쩌다 이런 도박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레스토랑으로 있기에는 아까운 여자다. 새벽에는 대형 쇼핑몰에서 숙녀복을 판다고 했다. 한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이곳에 들어온 그녀도 나처럼 돈을 무지하게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보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곳의 룰이긴 하지만.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나는 수상한 그림자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담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가녀린 실루엣이 나타났다. 숨을 죽이고 실루엣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였다. 나를 보자 그녀가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 위로 삼각형의 입술을 만들어 웃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웃는 흰 얼굴에 달빛으로 물든 나뭇잎 그림자가 문신처럼 어룽졌다. 내게 다가온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또다시 그녀에게서 비릿한 젖냄새가 났다. 환장할 그 젖냄새. 익스프레스라고 적힌 트럭 뒤로 내 손을 이끈 그녀가 옆이 트인 치마 사이로 다리를 들어 내 사타구니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내 바지 지퍼 위로 손을 얹었다. 나는 애써 몸을 뺐지만 손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의 대리석 같은 살결은 따뜻했다. 손바닥에 와 닿는 그녀의 팔딱이는 심장소리를 느끼자 노곤한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내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곰이 뜬 건 그때였다. 멀리서 헤드라이트 빛이 보였다. 곰이다,라고 외치는 함성과 급히 뛰는 구둣발 소리, 냄새를 맡은 우리 애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나는 집 뒤로 달렸다. 예상대로 비상문이 열리고 범털 형님이 호위를 받으며 뛰어나왔다. 우선 범털 형님을 차에 태워 보낸 후 다른 보살들을 위해 비상문을 열었다. 이미 마당으로 진입한 두 명의 곰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자 순간 멈칫하던 한 명의 곰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급히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발을 올려 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짧은 신음과 함께 중심을 잃은 곰을 발로 차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뛰려는 내 등으로 불구덩이 쏟아진 듯 통증이 느껴졌다. 곰이 내 등을 향해 내려친 각목이 반 토막 나며 멀리 튀어 달아났다. 몸을 낮췄다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곰의 복부를 구둣발로 찍었으나 헛발질이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내게 곰이 다가왔다. 급한 대로 돌을 주워 던졌다. 이마를 움켜진 곰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보였다. 내가 몸을 급히 일으켜 비상구 쪽으로 뛴 것과 대문 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다른 곰들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이곳에서 나는 일명 ‘문빵’으로 불린다. 창고로 불리는 도박장을 물색하고 게임 도중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아내는 것이 내 일이다. 때로는 목숨이 위태롭고 몸을 다치는 일이 많지만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다른 일보다 수입이 많기 때문이다. 인격적으로 존경하지는 않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주지 않는 일을 내게 맡긴 범털 형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범털 형님만큼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특히 교묘하게 경찰의 단속망을 피하는 데에는 신출귀몰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범털로 통하는 형님의 본명이나 다른 인적사항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경찰들도 형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일년에 몇 번씩 범털이란 인물이 경찰에 잡히고는 있지만 형님과는 무관한 일로 마무리된다. 그야말로 곰처럼 미련한 치들이다. 어쨌든 이왕 일을 할 바에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 밑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다.
모두들 날더러 다혈질이라고 하는데 나의 다혈질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씨도둑은 못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 요즘은 야구나 농구가 스포츠의 전부인 양 떠들어대지만 내가 어렸을 땐 레슬링이야말로 최고의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아버지는 레슬링의 박치기왕 김일을 좋아했다. 김일의 레슬링 경기가 중계되는 날이면 아버지는 만사를 제쳐놓고 보아야 했다. 그날은 김일이 일본선수와 싸우던 날이었다. 초반에 김일의 박치기 세례를 받은 일본 선수가 비틀거리자 아버지는 그렇지 그거야, 하며 곁에 있던 주전자를 연신 박치기로 들이받았다. 그러다 일본선수 헤드락에 걸려든 김일 선수가 빠져나오지 못하자 흥분한 아버지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보다 아버지가 박치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더 듣기 싫고 창피했다.
먼지 낀 유리창에 뿌옇게 새벽이 번져 온다. 다리가 욱신거린다. 곰들이 들이쳤을 때 도망치다 삐꺽한 다리의 통증이 여전하다. 허리와 다리에 붙인 파스를 한 번 더 눌러 붙이고 벽을 의지하여 일어났다. 벽거울에 잔뜩 찌푸린 얼굴의 내가 들어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향해 눈가에 대일 밴드를 붙인 거울 속의 사내가 하루의 안녕을 빈다. 나는 애써 표정을 바꾸며 못에 걸린 점퍼를 내려 입는다.
새벽시장이 이렇게 활기를 띠고 있는 걸 한창 깊은 잠에 빠진 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나도 한때는 이곳에서 일했다. 지게꾼이었다. 지금은 새로 지은 대형 쇼핑몰에 모두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공장에서 마무리까지 마친 옷이 건물 입구에 부려지면 그걸 지고 사․오층까지 계단을 타고 올라가 각 상점에 배달을 하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하는 막노동이라 수입이 괜찮았다. 이렇게 새벽시장을 뒤지고 다니는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다. 창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녀를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계단에 커다란 옷이 든 검정 봉투가 곳곳에 쌓여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들은 커다란 옷 보따리를 들고 다니기 힘든 탓인지 발로 밀고 다닌다.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커다란 검정비닐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다. 상점의 종업원 얼굴을 보며 걷느라 발밑을 보지 못한 탓이다.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찾던 내 눈에, 코너에서 손님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고개를 돌리던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손짓한다. 대일 밴드를 붙인 얼굴과 절뚝거리는 내 다리를 본 그녀가 말한다.
“꼭 더미 같군.”
순간 나는 ‘덤’ 같군이라고 듣는다. 나는 뭐, 덤? 하고 되묻지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나 만나러 왔어? 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바지하나 사러 왔는데 안 보이네, 딴청을 부린다. 그녀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엉덩이를 내밀며 수그리고 있는 상체 없는 마네킹이 보인다. 얼굴과 가슴 없는 마네킹의 허리를 만지는 커다란 내 손을 그녀가 바라본다. 커다랗고 흠집 많은 손이 남 앞에서 부끄럽긴 처음이다. 나는 손을 바지주머니 속으로 감춘다. 내 손이 태어날 때부터 컸는지는 모르겠다. 이 손으로 안 해본 일이 별로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나를 외할머니 댁에 맡기고 먹고 자는 조건으로 부잣집에 식모를 살러 갔다. 어머니는 돈을 많이 벌면 오겠다고 어린 내게 말했다. 외사촌들이 외숙모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매를 맞고 욕을 먹었지만 어머니가 곁에 없는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장대로 지붕의 기왓장을 건드려 떨어뜨려도 외숙모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그들 속에 섞일 수 없었던 나는 빨리 자라고 싶었다. 그리고 내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백조, 그녀를 만나는 순간 이 여자라면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린다. 범털 형님이다.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니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내일은 원정을 간단다. 대부분의 창고, 즉 게임을 할 수 있는 장소는 문방이 제공한다. 집은 백 프로 월세다. 보증금을 주지 않고 얻기 때문에 대부분 허술하다. 더욱이 단독주택이니 노후한 시설이다. 어제와 같은 일이 터지면 그 집은 그 걸로 끝이다. 창고를 제공한 사람이 문방 일을 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자기 집에 온 손님, 아니 보살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놀다 갈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내 창고가 그렇게 됐으니 다른 창고를 구할 때까지는 원정을 간다. 내일은 문방으로서가 아니라 형님 돈가방만 들고 다니면 된다. 현찰이 가득 찬 가방 두 개를 지키는 일이 내 임무다.
머리 위로 정오의 작열하는 태양 빛이 뜨겁다. 그녀가 일을 마칠 시간이다. 발목을 덮는 눈부신 흰색 치마 위에 시폰 소재의 볼레로를 입은 그녀가 내게 걸어온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볼레로 밑으로 그녀의 허리선이 언뜻언뜻 보인다. 길 가던 이들이 내 옆에서 걷는 그녀를 흘깃거린다. 기분이 좋다. 그녀에게서 또 그 냄새가 난다. 젖냄새…… 하여간 난 이 젖냄새에 왜 그런지 사족을 못 쓴다. 언제부턴가 여자를 안을 때마다 냄새부터 맡는다. 향수를 진하게 뿌린 여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냄새가 없어서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다. 처음으로 친구 누나에게 동정을 묻은 후 여자에게서 젖냄새가 난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며 느끼던 온몸의 신경을 당기고 조이는 쾌감보다 오래 남은 건 그 냄새였다. 하지만 여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백조를 처음 보던 날 그녀에게서 젖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의 백조는 특별하다.
그녀의 지하방에는 가방들이 많다. 벽에 걸린 여러 종류의 핸드백말고도 두 짝짜리 장롱 위에 크고 작은 가방들이 누워 있거나 세워져 있다. 거울이 붙은 화장대 위에 늘어놓고 치장하는 여자들과는 달리 화장품 가방 안에 로션과 루즈 등이 들어 있다. 화장품 가방의 열린 뚜껑에 붙은 거울 속으로 벽에 걸린 가방이 보인다.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그녀를 닮은 방을 연상했던 나는 서성거린다. 금방 떠나야 할 역처럼 자리를 잡고 앉기가 부담스럽다. 그녀는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란 생각이 든다.
그녀가 검정 봉투를 들고 들어온다. 봉투 안에는 커다란 초와 카스 캔맥주 네 개가 들어 있다. 초에 불을 붙인 그녀가 전등을 껐다. 그때까지 방안에 전등이 켜진 걸 몰랐던 나는 멈칫한다. 그녀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녀와 내가 길게 뻗은 발아래 빈 캔 두 개가 우리를 마주보며 나란히 서 있다.
“너에게서 젖냄새가 나.”
“젖냄새?”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깔깔 소리 내어 웃는다. 그녀의 입김에 촛농을 밟고 서 있던 촛불이 휘청 허리를 꺾고 뒤로 넘어졌다 일어난다. 마치 그녀를 따라 웃는 듯하다.
“혹시 어렸을 때 어머니와 많이 떨어져 지냈어?”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던 나는 사래가 걸린 듯 다 삼키지 못하고 쿨룩거리고 만다. 그녀가 화장지 두 장을 뽑아 내 입가를 닦아주며 조용히 말한다.
“내게서 젖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아마, 네 기억 속에서 나는 걸 거야.”
“기억 속?”
나는 몸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본다.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머리를 올린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그걸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대.”
“프루스트 현상?”
나는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그녀를 따라 말해 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작가 이름이 프루스트야.”
나는 그녀가 프루스트라고 발음할 때 동그랗게 오므려지는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책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과자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는데 작가 이름을 따서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 내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대.”
역시 나의 백조는 뭔가 특별하다. 그녀의 말처럼 나도 기억 속 젖냄새를 떠올리며 젖을 빨던 어린 시절과 어머니를 그리는 것일까? 그녀가 내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그녀의 젖을 빤다. 내 발에 치여 서 있던 빈 캔이 넘어진다.
초등학교 육학년이 되고 얼마 후 어머니와 나는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서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간직할 추억의 시간들을 놓쳐버린 대가였다. 어머니는 고사리, 취나물, 호박오가리 따위를 경동시장에서 받아다 시장좌판에 늘어놓고 팔았다. 아침부터 데치고 삶은 나물을 손질하여 저녁 늦게까지 장사하는 어머니와 마주앉아 식사를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항상 내가 먼저 자리에 누워 잠이 든 척, 눈만 감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며 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낮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다가 잠든 어머니 품에 살짝 안겨 보았다. 마른나물 냄새와 섞인 비릿한 젖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금세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몸을 뒤척이면 얼른 몸을 빼고 돌아누워 잠든 척했다. 결국 어머니와 나는 같이 산지 육 개월 만에 속내를 드러낸 깊은 정 한번 나누어 보지 못하고 영원히 헤어지고 말았다.
그날은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나는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배가 고파서이기도 했지만 마음이 들떴기 때문이었다. 고추잠자리가 학교 화단에 떼지어 나타나면 어김없이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친구들은 소풍 가는 날을 가장 좋아했지만 나는 운동회 날을 제일 기다렸다. 시험성적이 좋지 않고 수업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가지 않아 선생님께 매를 맞은 적이 많았지만 운동회 날 만큼은 선생님과 친구들 뿐 아니라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초등학교 육 년 동안 나는 줄곧 달리기 선수로 뽑혔다. 항상 마지막 주자였던 나는 아무리 차이가 많이 나는 거리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가을바람의 장단에 맞추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을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릴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대로 길이 이어진다면 끝간데 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들어온 어머니가 학교에 갈 시간이 지나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혼자 해결했던 나는 배가 몹시 고팠지만 곤히 잠든 어머니를 깨우지 못하고 그대로 등교를 했다.
학교는 햇볕이 들지 않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운동장 여기저기 모인 학부모들로 복잡했다. 국민의례로 시작된 운동회는 국민체조, 일학년의 꼭두각시, 삼학년의 탈춤, 오학년 여학생의 부채춤, 사학년의 오자미 박 터뜨리기를 끝으로 1부가 끝났다. 1부가 끝나자 학생들이 제각기 부모를 찾아 흩어졌다. 어머니를 만나 김밥을 맛있게 먹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나는 학교 뒷동산으로 향했다. 잔디에 누워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어서 점심시간이 끝나고 운동회 2부가 시작되길 빌고 있을 때 저만치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어머니가 허리에 전대를 두른 채 내 곁으로 오고 있었다. 어머니를 보자 반갑기도 하고 밉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곁에 가까이 온 어머니가 숨을 헉헉거리며 분홍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삶은 계란 몇 개와 칠성사이다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계란껍질을 벗겨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후 계란을 입에 넣었다. 급하게 반을 베어 입에 넣었지만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세 개째 계란을 입에 넣고 우걱거리며 먹는 내 등을 어머니가 체하겠다며 두들긴 후 사이다를 건네주었다. 사이다를 절반쯤 마신 내 눈에 한 개 남은 계란이 보였다. 어머니가 껍데기를 벗기기 위해 계란을 들자 식사를 거르고 장수를 하다 내게 뛰어왔을 어머니 생각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배불러요.
사학년에서 육학년까지 각반 대표로 뽑힌 선수들이 정렬을 하고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열심히 운동장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달리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청군인 우리 팀이 세 번째 주자까지 앞서다 네 번째 선수가 바통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뒤쳐지고 있었다. 내 앞의 선수가 달려 나갈 때까지 내 눈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운동장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끝내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리 청팀은 운동장 반 바퀴 정도의 차이로 뒤쳐져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주자인 내 차례가 되었다. 바통을 넘겨받은 나는 날개를 단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초반부터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나를 보자 학부모와 학생들 모두 운동장 트랙 주위로 몰려들며 ‘와아’ 함성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디선가 나를 보며 어머니가 활짝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달리던 선수의 뒤를 바짝 따르는 순간 사람들이 운동장이 흔들리도록 박수를 쳤다. 함성과 박수소리는 내가 상대편 선수를 앞지르기 시작하자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커졌다. 드디어 테이프를 끊고 결승점에 도착하자 우리 팀이 이겼음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탕, 총소리를 듣는 순간 웬일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두 나를 향해 박수와 함성을 드높이고 있는데 고개 숙인 내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날 어머니는 시장으로 급히 가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뒤 어머니 생각을 할 때면 미처 먹지 못한 채 짓뭉개져 어머니의 손안에 있던 계란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새벽 장사를 하는 장군네 문방은 구레나룻이다. 구레나룻이 귀 앞에서 얼굴 옆을 거의 덮고 있다. 만화에 나오는 장군 같은 모습이다. 봉을 가운데 두고 보살들이 양옆으로 길게 나누어 앉아 있다. 게임판인 봉은 군인담요 세 네 장을 길게 연결시켜 만든다.
진홍빛이 도발적이다. 한몸이 된 마흔여덟 장의 화투는 딜러인 밀대의 왼손 안에 입속의 혀처럼 감겨 있다. 오른손 검지가 화투 위를 지그시 누르는 사이 엄지와 허리를 꺾은 중지가 화투의 절반을 살점 베듯 떼어낸다. 착착 착착, 착착 착착, 양손이 합쳐지며 섞이는 화투 음은 정확하게 네 박자다. 허공으로 퍼져 나가는 화투 음이 느리게 유영하는 담배 연기와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져 차곡차곡 쌓이는 듯하다. 밀대와 마주보고 앉은 오늘의 전주(錢主)인 달봉이 감았던 눈을 뜬다. 경상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아도사키를 서울에 퍼뜨린 장본인이다. 손 크기로 말하자면 범털 형님 버금가는 사람이다. 밀대가 군인담요 서너 장을 연결시켜 만든 봉 위에 화투를 내린다. 범털 형님이 맨 위에서 한 장을 뽑아 기리를 마친다. 밀대가 다시 화투를 모아 그러쥔다. 기리를 마친 화투는 절대 뒤섞이거나 떨어뜨려선 안 된다. 감춰진 세 장이 먼저 앞방에 놓여진다. 얼굴마담격인 마지막 화투를 밀대가 손에 쥐고 있다. 벌겋게 충혈된 보살들의 눈에 핏줄 꽃이 더해진다. 여기저기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린다. 말없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넓은 홀 안에 가득하다. 안개에 휩싸인 혼돈의 세상 같다. 더 이상 분해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던 연기가 구석 벽을 의지해 기댄 채 보초를 서고 있다.
감춰진 세 장의 화투 위에 얼굴마담이 다부지게 내려앉는다. 장이다. 장, 동, 비는 제로다. 얼굴마담이 제로일 경우 숨겨진 새끼마담은 사건 칠 큰 수일 경우가 많다. 뒷방에 놓기 전에 허공으로 낮게 날린 화투가 줄을 지어 가볍게 내려앉는다. 이 네 장은 필요 없는 허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었다가 날려지는 네 장의 화투가 울긋불긋 분칠한 나비처럼 봉 위에 떨어진다. 다시 네 장을 털어내는 밀대의 손이 날렵하다. 세 장의 화투가 뒷방에 놓인다. 겹쳐진 화투는 한 장처럼 보인다. 마지막 오픈될 한 장이 밀대의 손안에 있다. 보살들 입이 마르는 순간이다. 난초 오 자다. 보살들이 앞방으로 몰린다. 예상 외로 달봉은 뒷방에 제법 많은 액수를 싣는다. 그래도 오돌오돌 실린 앞방에 비할 바는 아닌 액수다. 창고장인 범털 형님은 자연 보살들이 적게 몰린 쪽을 아도 쳐야 한다. 이럴 때 쓰린 속은 아무도 모른다. 제로인 얼굴마담 밑에 깔린 웃고 있는 새끼마담이 보이는 이런 때 말이다. ‘그래 됐다 들어봐라.’ 하고 범털 형님이 말하자 감춰진 화투가 오픈 된다. 얼굴마담을 제외한 칠, 이, 팔의 앞방 새끼마담들이 얼굴을 공개한다. 도합 십칠, 끝 수 칠이다. 꽤 높은 수다. 항상 상황이 나쁠 때의 예감은 적중한다. 뒷방은 일 두 장, 사피 한 장, 오픈된 난초 오, 도합 십일 끗수 일로 마무리된다. 수를 합해 높은 끗수가 먹는다. 뒷방에 실린 달봉의 돈과 합해 앞방에 배당될 액수를 범털 형님이 앞쪽으로 밀자 순식간에 계산이 끝난다. 게임 시작하고 일분도 안 되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속전속결, 보살들이 제일로 꼽는 아도사키의 매력이다.
새벽 두시에서 대여섯시까지 이어지는 새벽 장사는 거의 백오십 판 내지 많게는 이백 판이 계속된다. 게임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다시 밀대의 손에 의해 현란한 쇼가 펼쳐진다. 바닥에 깔린 화투가 푸득푸득 소리를 내며 뒤섞인다. 밀대의 엄지에 의해 한 장이 뒤집어진다. 이 열 끗, 님을 본다는 패다. 뒤집힌 한 장의 패를 제일 먼저 본 사람은 그 패에 의해 운세가 점쳐지곤 한다. 왠지 그 패를 내가 제일 먼저 보았을 것 같다. 범털 형님의 가방 한 개가 비워져 시커멓게 탔던 내 속이 그 패 한 장으로 조금 풀어진다.
'이거 구라치는 거 아니야?'
게임이 중반을 넘어서자 범털 형님이 말한다. 기계 조작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한마디 던져보는 것이다. 돈 잃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는 말이다. 가방 두 개째가 거의 바닥을 보이자 내 속이 까만 연기로 가득 차는 것 같다. 잃은 돈 건지고 그 몇 배를 채우려면 며칠 간 바쁠 것 같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창고를 물색해야 할 것 같다. 초췌한 모습의 보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일순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온다.
웅웅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어제의 원정으로 몸이 피곤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늦은 저녁식사를 하려던 내 눈에 텔레비전 화면이 들어온다.
‘더미의 생.’
표제가 화면 가득 떴다. 쇼윈도의 마네킹, 사격장의 표적판, 영화에서 쓰이는 트릭용의 사람 모형 더미. 화면은 먼저 더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신차 충격 시험에 쓰이는 더미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앉는다. 반질반질한 외관의 차가 나타난다. 그 속에 사람 모형을 한 더미가 앉아 있다. 합성고무로 만든 피부가 마치 사람 같다. 신차가 출고되면 백오십 차례의 충격 실험을 합니다. 그때 사람 대신 인형, 즉 더미가 사용됩니다. 내레이터의 해설이 화면에 맞춰 흘러나온다. 운전자의 안전을 지키는 첨병, 충격에 약한 얼굴과 무릎에 파란색 칠이 되어 있다. 저속 충돌 시험이 시작되자 신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카메라는 점점 더미에게 다가가고 전면에 서 있는 높은 벽을 향해 차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 같다. 카메라가 점점 더미를 클로즈업시킨다. 더미가 벽에 부딪치는 순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앞뒤로 몇 번 반동을 거듭한 뒤 멈춘 더미는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화면이 빠르게 바뀌며 고속 주행 시험을 시작한다.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내뱉은 담배 연기가 텔레비전 수상기 위로 퍼지며 더미를 실은 신차를 따라간다. 빠른 차의 속력으로 화면에 비친 더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가속도가 붙어 달리던 차가 벽에 부딪친 건 잠깐 사이다. 화면은 쿠킹호일 말린 듯 찌그러진 차 앞면을 지나 안전띠도 하지 않은 채 만신창이가 된 더미에게서 멈춘다.
재생 불가능으로 판정된 더미, 이것으로 더미의 생이 마감됐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더미를 비추는 화면 위로 내레이터의 마지막 해설이 깔린다. 나는 언젠가 새벽시장에서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비로소 무엇인지를 알아차린다. 범털 형님을 대피시키고 온몸에 부상을 입은 나를 보며 그녀가 했던 말은 ‘더미 같군’이었다.
드디어 내일은 게임이 있는 날이다. 내일 게임은 다른 날과 다르다. 범털 형님이 잃은 돈을 찾기 위해 이른바 구라를 친다. 기계작업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기도박이다. 아도사키 도박만으로도 법망에 걸리면 쉽게 풀려나기 힘들지만 사기도박은 더욱 큰 죄가 된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둘러봐야 한다. 나는 점퍼를 걸치고 창고로 향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도박판의 창고는 도피가 쉬운 단독주택을 택한다. 아파트나 빌라는 곰들이 덮치기 쉽기 때문이다. 간혹 돈 잃고 속 좋은 놈 없다고, 앙심을 품어 신고하는 놈들이 있다. 아파트나 빌라는 무슨 동․호수만 대면 바로 곰들 독 안에 든 쥐다. 이번 창고는 내가 봐도 잘 골랐다. 누가 이곳을 도박장이라고 보겠는가? 이번 일만 잘되면 그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작정이다. 문뜩 올려다본 밤하늘에 달을 에워싸고 별들이 무리 지어 있다. 만약 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다면 별자리 이름을 가르쳐 주며 별점을 쳐줄지도 모른다. 둥근 달이 나를 계속 따라온다.
창고 앞에 범털 형님 차가 서 있다. 달빛을 받은 검정세단이 반질거린다. 형님도 아마 내일이 걱정되어서 둘러보러 나온 모양이다. 뒷거울이 뿌옇다. 점퍼 속에 입은 하얀 티셔츠로 뒷거울을 닦는다. 금세 거울이 맑아진다. 맑아진 거울 등을 손가락으로 퉁기자 ‘땡’ 하는 소리가 난다. 마치 거울이 ‘땡큐’라고 말하는 듯하다.
현관에 반짝이를 단 여자 슬리퍼와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다. 범털 형님이 여자를 데리고 온 모양이다. 현관을 올라서자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와 뒤섞인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신음소리를 듣자 아랫도리가 딱딱하게 일어난다. 안방 쪽이다. 숨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놓자 거실 바닥에 누운 내 그림자가 좌우로 흔들린다. 안방 문이 검지 굵기만큼 열려져 있다. 손가락으로 열려진 문을 살짝 밀며 넓어진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본다. 검은 막이 쳐진 듯하다. 신음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내 눈에 서서히 방안의 형체가 드러난다. 달빛이 스며들고 있는 창문이 보인다. 창문에 비치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달이 그려놓은 수묵화 같다. 수묵화 밑으로 희뿌윰한 살결을 드러낸 남녀가 보인다. 여자는 벽에 기대어 서 있고 범털 형님이 벽 쪽으로 마주서서 연신 몸을 들썩이고 있다. 여자가 형님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뻗치며 신음소리를 더한다. 형님의 어깨 위로 여자의 감긴 눈이 보인다. 형님이 안아 올리려는 순간, 여자가 눈을 뜬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백조다. 심장이 살갗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방망이질 친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두 눈이 더욱 커지며 겨드랑이 사이로 맞잡은 손을 힘없이 내린다. 몸을 돌리자 구둣발에 눌린 나무 복도에서 찌그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대문 밖으로 나온 나는 담배를 찾기 위해 몸을 더듬거린다. 손이 떨려 라이터가 잘 켜지지 않는다. 파팍거리며 짧은 섬광만 튈 뿐 불길이 일지 않는다. 멀리 라이터를 던져버린다. 시팔, 담배를 물고 있던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떨어진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겨 동강낸다. 나의 백조를…… 그럴 순 없다. 갖가지 생각이 영사기 필름 돌듯 스쳐간다. 머리를 감싸쥐고 올려다본 나무에 달이 걸려 있다. 잎사귀에 가려 한쪽이 움푹 파였다. 나뭇잎에 살점을 베어 물린 달이 고통스런 신음을 뱉어내는 듯 일그러져 보인다. 나는 터지는 한숨을 주먹으로 막으며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아침부터 분주하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에 사전에 모의게임을 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몸에 신호를 받기 위한 장치를 두른 범털 형님 옆에 바짓단 바로 밑으로 렌즈를 숨긴 보살 하나가 앉는다. 물론 우리 식구 중 하나다. 사면에 약물 처리를 한 모화투를 비추기 위해서는 화투를 나누는 밀대 바로 앞에 앉아야 한다. 렌즈에서 보내온 화면을 받아 몸의 수신 장치로 보내는 기계를 정비하고 있는 바로 옆방도 사전 점검에 바쁘다. 이방은 막상 본게임이 진행되면 빈방으로 가장 하기 위해 밖에서 자물쇠를 채운다. 렌즈로 모화투의 옆면을 찍으면 숫자를 재빨리 읽어 범털 형님의 몸에 숨긴 기계에 신호를 보낸다. 앞방은 진동 한 번, 뒷방은 두 번. 몇 번의 게임을 진행시키던 범털 형님이 됐다, 한마디 던지자 모두들 휴, 한숨소리를 낸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보살들까지 오늘의 게임 인원이 다른 날보다 상당하다. 게임이 몇 판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대문 밖으로 나온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멀리 낯선 차 한 대가 눈에 뛴다. 그 차는 보살들이 창고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게임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그들의 차는 더 늘어날 것이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나는 주방 쪽을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주방에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때까지 숙인 그녀의 고개가 들리질 않는다. 커피 한잔만 달라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든다. 잠깐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눈길을 거둔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그녀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진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조금 있으면 곰들이 뜰 거야.”
불쑥 내뱉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
의외로 담담한 얼굴의 그녀 눈길이 내가 입은 양복에 머물러 있다.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번지는 듯도 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침에 범털 형님에게서 받아 입은 양복을 한번 쳐다본 후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는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서성거리며 중얼거린다.
“도대체, 왜…….”
그녀는 읽던 책의 모서리를 손으로 구기며 한마디 성의 없이 던진다.
“너 때문이야.”
내 말에 그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힘없이 말한다.
“나 때문?”
책으로 눈길을 돌리던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짧게 피식 웃는다.
“넌 나만의 백조여야 해.”
“백조?”
내 말에 그녀가 소리 내어 한참을 웃더니 말한다.
“내가 네 마누라라도 된다는 거야?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 사람은 감옥에 안 가. 안 간다구.”
그녀가 범털 형님을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매섭게 쏘아보는 눈을 피하자 그녀가 세차게 내 몸을 치며 지나간다. 그녀와 부딪힌 내 몸이 옆으로 밀리며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휘청한다. 주방문을 벗어나 급히 뛰는 그녀의 집시치마가 보인다.
뭔가 공기가 심상치 않다. 낡은 복도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거실로 뛰어가자 기계조작을 위해 잠갔던 방문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담배 연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방안, 여기저기 던져진 화투들과 거실에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슬리퍼가 급박한 상황을 말해 주는 듯하다. 비상구 쪽으로 급히 뛴다. 여러 개의 비상구가 모두 열린 상태다. 앞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난다. 곰들인 듯 보이는 두 명의 사내가 범털 형님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백구두를 양쪽에서 맞잡고 내게 걸어온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도망가려 하지만 못 박힌 듯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곰들과 함께 내게 가까이 다가온 백구두가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말한다.
“형님, 죄송합니다. 지켜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죽고만 싶습니다, 형님.”
‘형님이라니, 이 작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갑자기 머릿속이 먹물로 채워지는 듯하다. 아침에 느닷없이 나를 찾아와 오늘 입으라고 양복을 건넨 범털 형님, 신고했다는 내 말에도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던 백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내가 급히 몸을 돌려 다른 비상구 쪽으로 뜀과 동시에 꽝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합세를 한 곰들이 들이닥치는 모양이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여러 개의 화살이 박히듯 내 눈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앞을 분간할 수 없다. 손을 들어 빛을 가리자 자동차가 그대로 내게 달려든다. 나는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붙인다. 턱하고 숨이 막히며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뒤돌아서서 반대편으로 달린다. 네거리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차문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차에서 내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내 발자국 소리를 덮는다. 길게 이어진 골목 끝으로 막다른 길이 보인다. 검은 혀를 내밀고 있는 어둠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차츰 공기가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내 몸이 땅으로 자꾸 꺼지려 한다. 누군가의 검은 손이 내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무릎이 꺾이며 쿵, 땅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시멘트 바닥 위에 몸을 웅크린 그림자가 나를 보며 떨고 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변명하듯 그림자에게 중얼거린다.
“난 더미가 아니야, 아니라구.”
나와 마주 앉은 그림자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 뿐 말이 없다. 모두 다 잠든 새벽, 말이 되지 못한 웅얼거림은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구둣발자국 소리에 묻혀 밤공기를 타고 흩어진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녀의 젖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나여경
1966년 서울 출생
200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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