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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현실·발언/변하는 세상, 변하지 못하는 소설가/이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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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99회 작성일 09-12-2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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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발언_내가 보는 현실
변하는 세상, 변하지 못하는 소설가
이경자|소설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내 소설가 나이를 따져보니 어언 마흔 살을 눈앞에 뒀다. 사람의 마흔 살은 재물에도 욕정에도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나이다. 그런데 ‘소설가 나’는 이 나이에 이르러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리다 못해 슬프고 불안하다. 이렇게 슬픔과 불안에 흔들리게 되는 원인은 나에게 있다. 오로지 나의 ‘팔리지 않는 상품으로서의 소설’ 때문이다.  
소설이 무엇이고 또 상품으로서의 소설이 무언가를 따져보기 전에 나를 뜯어보는 게 순서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자란 소설가인가, 그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가가 되려고 하던 시절, 더군다나 자라던 강원도의 작은 군청소재지에선 ‘상품’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농촌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거의 물물교환 수준으로 시장에 나와 있었다. 단순소박한 정서가 시장에 감돌던 시절이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차이는 없었다. 집에 특별한 ‘상품’이 생기면 그저 자랑 반 인정 반으로 이웃과 나눠먹는 게 풍습이었다. 그러니 요즘의 상품에 대한 생각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게다가 우리 집의 가부장인 아버지는 ‘돈’ 자체를 시시하게 생각했다. 시시한 정도를 넘어 천하게 여겼다. 성향이 낭만적이고 가부장제에선 실패한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늘 심각하게 한 마디 한다는 것이 ‘돈은 치사한 거야’였다. 아주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런 사이 내 맘에는 돈이란 ‘치사恥事’한 것이로구나, 하는 믿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왠지 돈을 치사하게 여기는 아버지가 근사해 보였으니까. 
그맘때의 내겐 희망이 있었는데 소설가가 되는 꿈이었다. 소설을 써서 유명해 진다거나 돈을 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토스토에프스키 같은 소설가가 되어 그가 쓴 소설처럼 훌륭하게 읽혀지길 바랐다. 물론 그 소망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거나 시공을 초월한 명작을 남긴 소설가가 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소설에 매료되었을 뿐이었다. 그런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게다가 그맘땐 소설가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하는 편이었다. 소설은 쓰고 읽히는 것이지 시장에서 팔려나가 그렇게 번 돈으로 소설가가 부자가 된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부자는 꿈도 꾸지 않았고 굶어죽지 않는 가난, 청빈한 생활, 정도를 아주 낭만적으로 상상하곤 했다. 돈은 많을수록 사람을 치사하게 만들 테니까. 소설가는 가난에 덧붙여 불행해야 소설을 잘 쓴다는 편견도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소설가가 되었다. 쓰고 싶은 글들이 있어서 썼다. 밤을 지새우고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행복했다. 가난하더라도 먹고 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그만 무슨 불행인지 나는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내가 상상도 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절반의 실패」가 요새 말로 ‘떠서’ 유명해지고, 돈도 좀 만지게 되었다. 그런데 돈이 치사한 것이라서 마구 써버렸다. 마치 원수 만난 것처럼 돈을 학대했다. 가난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낭만적인 아버지와 산업화 이전의 농경적 풍토로부터 각인된 ‘비자본주의적’ 영향을 씻어내지 못했다. 씻어내기엔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면 씻길까? 아니다. 씻겨지지 않을 것 같다. 
하여튼 그 사이 절약은 소비로, 근검은 편리로 가치가 바뀌었고 ‘돈’이 삶을 규정하는 ‘신’이 되었다. 그 ‘돈신’은 삶의 질을 결정했다. 누구도 돈을 치사하게 여길 수 없고 청빈한 삶을 우러러 보려하지 않았다. 치사니 청빈이니 하는 생각은 시대의 무능력자나 낙오자들이 하는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가 지망생들에게조차 토스토에프스키는 ‘언젠가 있던 작가’가 되어 버렸고 그의 소설들은 읽기에 너무 힘겨운 소설들이 되었다.  
언젠가 문화센터에 나가 ‘소설 쓰기’를 가르쳤는데 학생들 대다수가 소설가 지망생이기보다 ‘등단 지망생’인데 놀랐다. 물론 소설가가 되자면 등단을 해야 하지만 내가 소설을 공부할 땐 좋은 소설을 쓰는 게 목표였지 등단하는 요령이나 심사위원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 소설을 쓰고 심사위원을 직접 찾아가 소설을 배우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 시절 우리에겐 여전히 토스토에프스키가 소설가의 지향점이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소설가가 되겠다니 이것도 ‘돈신’의 위력으로 생긴 풍조였다. 
두세 해 전이었다. 서울 시내의 대형 서점에 나갔다가 낯선 풍경을 보았다. 대형 출판사들이 서점의 진열대를 사버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백화점처럼 물건이 잘 팔릴만한 자리를 어떤 출판사가 사버리면 그곳엔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만 진열된다. 독자가 미리 작가와 책의 제목을 알아서 사려고 하지 않으면 당연히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된 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제 소설가는 소설만 잘 써선 안 되고 그런 진열대를 차지할 수 있는 판매 능력을 가진 출판사에서 책을 내야 하는 것이다. 소설가의 능력이란 무엇보다 소설을 잘 써야겠지만 그 외에도 능력 있는 출판사를 만나고 자신의 소설이 좋다고 부추겨 주는 평론가를 붙잡는 것까지다. 그런 것이 합쳐져서 소설가의 ‘상표’와 소설의 ‘상품’ 가치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최종적인 생명력은 소설 자체에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소설이 평가 받기까지는 위에 든 조건들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대개 그렇다. 
다음은 독자다. 소설의 운명은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결정된다. 어떤 소설을 어떤 독자가 읽느냐가 그 소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소설 독자는 나이가 많지 않다. 대학입시가 마음을 짓누르지 않게 되는 스무 살 이후에서 돋보기를 끼지 않아도 될 나이인 쉰 살까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흔을 넘어도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니 2, 3십대가 소설독자의 주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독자란 누군가를 살펴 볼 때다. 친척 중에 소설을 좋아하는 젊은 여성이 있다. 서른 살인 그 애는 나만 보면 ‘언니 소설은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 생각하는 건 싫어’라고 말한다. 사람이 다른 생물과 다른 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생각하기 싫단다. 소설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린 인생 이야기이다. 당연히 등장인물들의 삶에 깊이 들어가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몰입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게 소설 읽기의 재미이고 매력이며 중독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생각하기 싫단다. 고기는 씹는 맛이고 이빨은 씹기를 해야 튼튼해진다는데 이빨이 씹기 싫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생각하기 싫은 독자들이 많기 때문에 소설을 구매력이 높은 상품으로 만들려면 독자의 요구에 맞춰서 써야한다. 그런데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인 내가 그런 욕구에 수긍이 가든지, 아니면 그런 소설을 쓰는 것에 재미를 느껴야 할 텐데 나는 아직 ‘돈은 치사’하고 ‘소설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소설가이다. 소설이 상품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그런 시대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반발감이 내면에 짙게 깔려있다.
최근에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데 편집부의 신입사원이 내 소설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문장들은 모두 한결같이 ‘생각하게’하는 대목들이었다. 내가 싫어하면 ‘책을 팔아야 하니까’ 고려해 달라고 주문했다.  
독자가 생각하지 않고서 재미는 마음껏 느끼게 하는 소설……. 고백하건데 나는 아직 그게 어떤 소설인지 잘 모른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쓸 수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것을 아는 것 자체를 창피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토스토에프스키의 ‘인간성을 탐구’한 소설들에 내 작가적 지향점을 둔 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소설을 쓰고 나면 자괴감 때문에 폐인이 되어버릴 것 같은, 너무도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상품은 팔리는 게 목표이고 그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한 상품엔 돈의 가치만 있지 인간은 없기 쉽다. 인간성이니 사회 공동선이니 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상극이기 때문이다. 상품은 탐욕과 소외와 일탈과 탕진과 폭력 같은 것들과 한 꾸러미에 속한다. 그런데 돈을 벌지 않으려거나 팔리지 않는 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하지만 마침내 소설가와 소설도 상표와 상품이 되어버렸다. 소설가를 둘러싼 상품 제조 그물망은 상표와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쓴다. 상품은 광고로 구매자에게 정보를 주고 구매 욕구도 자극해서 구매에 이르도록 유인한다. 이윽고 소설가라는 상표와 소설이란 상품은 ‘광고하기 나름’의 처지가 되었다.  
광고는 광고가 되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만들어진다. 소설가의 얼굴, 몸매, 표정, 차림새, 출신학교와 출신 지역과 출판사의 위상은 물론 소설제목과 표지 디자인 모두가 상품의 가치를 만드는데 얽혀있다. 소설가와 소설을 알리는 문화정보 매체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이용된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천하게 여겨지던 영상매체인 라디오와 TV의 위력은 마치 죽은 시체도 일어나게 할 지경이다. 
현재 우리 문단은 ‘돈’이 정서에 깊이 스며든 세대의 소설가도 있고 나처럼 돈을 깔보던 세대의 소설가도 있다. 그런데 나와 동시대에 비슷한 정서를 가진 독자층은 급격히 줄고 돈과 친숙한 독자들은 급격히 는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까? 어떤 소설을 써야할까? 이것이 나의 고민이고 숙제며 슬픔이고 불안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내 직성과 천성과 내 문학적 가치관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걸 고백하며 이 글을 맺는다. 

이경자∙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작품으로 「절반의 실패」와 「사랑과 상처」 「그 매듭은 누가 풀까」, 「천 개의 아침」, 「귀비의 남자」, 「빨래터」가 있고, 산문집으로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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