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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현실·발언/픽션 브리프 fiction brief /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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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73회 작성일 09-12-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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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브리프 fiction brief
김유석|시인



어제는 한 개의 태양이 떴다. 하나뿐인 모든 것들,
하나의 태양이 세상을 썩혔다.
몇몇 패거리들끼리 둘러앉아 한 마리 생선을 정신없이 뜯어먹는,
오늘의 태양들은 전갈 문신이 있다.


#. 아악, 몽夢!
한때 잠시 몸담았던 강호를 떠나 물과 풀과 바람에 길들여진지 오랬다. 농사를 생업으로 가진 촌부村夫인 나는 씨를 뿌리고 거두면서 빈 시간들을 발에 흙이 묻는 곳으로만 쏘다녔다. 낚싯대를 매고 멀지 않은 물가를 두루 섭렵하며 가둔 물에 사는 물고기보다 흐르는 물에 사는 물고기들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알았다. 날아가다 죽는 새들을 보았고 주인 없는 새끼를 낳는 들개를 보리밭 두렁에서 만났다. 뵈다는 이유로 들깨모종을 뽑아 던지기도 하였으며 익었다고 함부로 꼬투리를 터트리는 콩알과 웬만한 도리깨질쯤은 끄덕도 하지 않는 콩들을 들밭에 나란히 심었다. 여름날, 소나기가 두드리던 뜨거운 양철지붕과 그 소리를 삼키며 울던 빈 곳간의 울림을 내 몸 속에서 들었고 한 마리의 울음을 시작으로 온 들판 어우러지는 청개구리 소리,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제히 멎곤 하는 절대 적막 속에서 느리게 살았다.
그러는 동안 무궁화 꽃은 피고, 또 졌다. 그러는 사이 바람벽 저쪽의 무림은 새로운 문파가 생기고 몇 명의 지존이 바뀌었다. 그래서였을까.
‘전원일기’식 생이 있던 이곳에도 못 보던 초식들이 눈에 띠게 늘었다. 삼월이 다가도록 겨울철새들은 들판 위를 방황했으며 이상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입이 아주 큰 떠돌이 개구리들이 들이닥쳐 토종 뱀들까지 마구 잡아먹었다. 발바닥에 풀씨가 돋던 길들은 더 이상 이슬을 털지 않았고 서툴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부터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다시 강호에 출몰하기 시작한 나는 족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전에 당랑권을 쓰던 이들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했다.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림자 초식을 전개하는 그들 앞에 들판에서 익힌 나의 내공은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상대를 써 또 다른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세치 혀가 그토록 무서운 비급인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명분을 계율로 쓰던 문파들은 몰락하고 실리라면 등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기도 하는 세력들이 득시글거리는 강호는 이미 실체 없는 혈겁에 빠져들어 있었다.

#. 우화寓話
‘개미와 베짱이’ 얘기는 다들 아시겠지? 뜨거운 여름날 땀 흘려 일하는 개미와 그늘 아래 노래하며 노는 베짱이 얘기, 추운 겨울이 오자 먹을 것이 떨어진 베짱이가 개미네 집으로 구걸을 가는 그 줄거리 말야. 그건 물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시시콜콜한 썰일 뿐이고
현대판 ‘베짱이와 개미‘가 나왔지. 전편을 패러디 한 것인데 정말 재밌어, 한 번 들어볼래?
먹고 살자 악착대는 개미들과 허구헌 날 기타를 메고 노래나 부르는 베짱이의 설정은 여기서도 다름없지. 개미들 눈엔 싹수가 누런 베짱이였고 베짱이는 베짱이대로 일한만큼 얻지도 못하는 개미들이 한심스러웠던 거야. 둘은 인생 내기를 걸었다네. 개미들이 뜨겁게 뼈를 깎는 동안 베짱인 서늘한 목청을 깎았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여기서 전편의 결론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여전히 숙맥이야. 결과는 정반대였지. 가수랍시고 음반까지 냈지만 개미들의 코웃음대로 베짱인 별 볼일 없는 삼류 딴따라가 되고 말았어. 그런데 웬걸, 어느 TV 연속극에 우연히 그의 노래가 흐른 뒤로 베짱이의 팔자는 하루아침에 개벽을 하게 돼. 인기 짱 이었지. 인기 뒤에 당연히 따르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개미들 창고를 다 합해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베짱인 부자가 되었다네. 목청 하나로 죽어라 일만한 자기네들보다 편하게 살게 된 베짱이가 개미의 입장에선 왜 배가 아프지 않았겠나. 그럴수록 개미들은 더 열심이었지. 너무 졸라맨 나머지 허리가 그 꼴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아무리 기를 써도 이미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안 개미들은 어찌하면 베짱이만큼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끙끙 앓던 중 주식에 투자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그만 홀리게 되지. 있는 것 없는 것 몽땅 다 긁어 주식에 넣었는데 얼씨구, 기다렸다는 듯 쫄딱 나라가 망해버리질 않겠나. 보나마나 뻔  하지. 막차 타서 깡통 찬 거야. 그런 부류들을 시장에선 지금도 ‘개미’라 부른다지? 
개미인 당신은 공연히 억울할 거고 당신이 베짱이라면 무척 신날거야. 그러나 얘기의 중심은 개미도 베짱이도 아니야. 바로 이 세상이지. 누구든 제 인생이 있는 법, …… 그렇다할지라도 잘 났어 정말, 이 땅의 베짱이들   
#. 중우衆愚
레밍Lemming이란 작은 동물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들쥐의 사촌쯤 되는  족속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집단이동을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나그네쥐”라 불리기도 한다. 3,4년마다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강한 번식력을 가진 그들은 새로운 먹이를 찾아 무리지어 이동하는데 막다른 벼랑에 이르면 집단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유별난 생태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스스로 집단자살을 행함으로써 나머지 종족이 굶어죽지 않도록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우화 같은 아름다운 가설을 세간에 회자시켜온 대상이다. 종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모습에서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 떠 기리게 한 족속, 과연 그러할까.
레밍의 생태를 오랫동안 관찰해온 자의 해석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먹이를 찾아 우왕좌왕하던 레밍의 무리는 진로를 잘못 잡아 벼랑에 이르게 되고 서로 떠밀리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떼죽음을 당한다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든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는 강한 욕구가 본능인 것인데 그것을 버리면서까지 집단을 위하는 행위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설이 새로운 설득력을 얻으면서 레밍의 행동은 종족보존을 위한 자살이 아니라 방향착오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어쨌든, 
무의식중의 집단행동이 죽음을 부른 경우에 불과한 들쥐의 생태에서 “맹목적 쏠림현상”의 폐해에 대한 비판을 인간의 그것에 빌려 쓰곤 한다. 아마도 우리사회의 유별난 떼거리현상이 그 대상 가운데 하나일 듯싶은데 레밍에 관한 추적 중 우연찮게 어느 블로그에서 읽게 된 부끄러운 대목이 있다.

(생소한 이 쥐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1980년 4월 소위 ‘서울의 봄’ 무렵이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레밍과 같아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그에게 우르르 몰려든다”고 말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에게 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 현상을 빗댄 표현이었다. 감정이 상하기에 충분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언론은 레밍을 ‘들쥐’라고 번역했다. 때문에 위컴 발언은 ‘한국인을 들쥐라고 비하했다’고 확대 해석되었다. 전후사정을 잘 알지 못한 채 분노의 여론이 일제히 달아올랐음은 물론이다. 맹목적인 진짜 레밍들처럼…….) 

오래전 얘기 같지만은 않다. 무리를 지으면서부터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대다수 인종들의 공통된 현상이긴 하지만 유독 우리사회의 현상들에 민감함은 지나친 자기비하일 것인가. 패거리정치, 패거리경제, 패거리문화 등등을 맹목적 쏠림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집단 간 공명하고 우호적인 경쟁은 생산성을 확대해 나갈 수 있고 보다 나은 상생의 장을 창출해갈 수 있으니 말이다. 실재로 그런 모습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독선으로 치닫거나 기득권적 매너리즘에 빠질 때는 들쥐의 본성처럼 치명적인 맹목적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각설.
불행히도 세상물정에 과문한 나는 그 중 패거리문화를 경계하며 그 속에서 무리를 이루는 것들의 정체를 의심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을 자기보호적인 두려움이라 주관했다. 그 두려움은 외로움으로부터 오고 그 외로움의 대부분을 막연한 소외감이 차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무리를 이루는 것들은 광기가 있다 중얼거렸다. 

#. 뜨거운 감자 먹는 법
요즘 들어 귀에 자주 걸리는 소리 가운데 하나가 건욕이다.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씨팔’거리고 맥없이 공중에다 대고도 ‘씨팔씨팔’ 한다. 무기력한 스스로를 설득하려 하는 자기연민의 감정에 지나지 않거나 배타적 카타르시스이거나, 건욕들이 많아짐은 그 만큼 힘겨워진 세상살이 탓인가, 그런가? 당신에게 물어본다. 서슴없이 ‘씨팔’하면 당신은 리얼리스트고 머뭇머뭇 말을 더듬으면 에고이스트쯤일 테고, 말없이 허공을 올려다본다면 당신은 페시미스트일 가능성이 있다. 
다시 당신에게 묻는다. 이를테면, 한 알의 뜨거운 감자가 있다 하자.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다짜고짜 덥석 깨문다면 당신은 몹시 배고프거나 그것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일 것이다.
화들짝 놀라 그것을 뱉어버리겠지만 당신의 입천장은 이미 벗겨졌을 것이다. 씩씩거리며 당신은 그것의 뜨거움을 인식하고 머뭇거릴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필경 그것을 다 먹게 된다. 물이나 동치미와 함께 조금씩 떼어먹는 당신은 그것의 뜨거움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뜨거움의 맛을 아는 사람, 그러니까 뜨거운 것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방법을 권하는 당신은 모든 감자는 뜨겁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감자가 다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당신은 분명 뜨거움을 견디는 사람이다. 뜨거움을 뜨겁지 않다 말하는 사람이며 배고픔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스스로를 속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뜨거운 감자였는지 잊기도 하는 당신은 그것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오리 발바닥 요리‘란 것을 들어본 적 있는가. 사실인지 꾸며낸 얘긴지 정확하진 않지만 오래된 귀동냥은 대강 이렇다. 철판 위에 살아있는 오리를 올리고 불을 지핀다. 그런 다음 오리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철판을 달군다. 먹이와 울에 길들여지며 공중을 잃어버린 날개처럼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 오리의 모든 정기는 발바닥에 고이게 된다. 그것을 잘라 만드는 요리를 말함인데 중화요리의 진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다.  
감각은 본능이지만 의식적인 것이기도 하며 의식이 본능에 앞서는 경우도 많다. 뜨거운 감자를 먹는 또 다른 방법은 무의식이다. 이때 무의식이란 뜨거움을 의식하지 못함을 일컫는 게 아니라 감자 자체를 단지 먹이로만 인식하는 본능에 가까운 상태를 말함이다. 물론 별다른 맛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배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 내게 필요한 게으름
폭설, 사흘째 눈이었다. 모람모람 허공을 끌어내려 바닥 위에 또 다른 바닥을 쌓는 눈발, 모악母岳의 눈썹을 그리던 가벼운 것들이 납작납작 지붕들을 눌러가고 있다. 키높이 구두를 신은 듯 세상이 좀 더 널따라 보이는 아침이다. 눈을 뜰 때마다 벌써 누군가 살다 가버린 것 같은 하루하루가 조금 다른 느낌으로 온 오늘이다. 이런 날은 문간 젊은 느릅나무를 붙들고 공연히 까치라도 좀 울어주면 안되겠나.
내일이었던 오늘이 습관처럼 왔다. 종아리까지 눈이 쌓였을 뿐 밥 먹고 전화하고 툴툴거리고, 둘러보면 어제 그 자리에 여전히 꽂혀 있다. 담배를 문 채 무지개가 걸리고 지평선이 내리던 들판 저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무작정 달려보았을 꿈꾸는 자의 은밀한 공중터널 같은 저 곳으로부터 오늘이 왔다. 세상이 쫑난다는데 나무 하나 심겠다는 이들보다 로또라도 덜컥 당첨될 것 같은 막연한 예감에 들뜬 사람들의 심정으로 다시 내일이 올 것이다. 서둘진 말자 난감해하지도 말자 실은, 늙어버린 옛 애인 같거나 죽은 노인의 문설주에 걸려 있는 씨옥수수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  
내일을 기다리는 자는 빨리 늙는다. 


김유석∙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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