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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현실·발언/ ‘비평의 급진성’과 ‘비평의 정치성’을 다시 쟁취하는/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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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급진성’과 ‘비평의 정치성’을 다시 쟁취하는
고명철|문학평론가
차마 일어나서는 안 될, 있어서는 안 될, 비상식적인 일이 이 땅의 수도 복판에서 자행되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공권력이며, 무엇을 위한 공권력인가. 2009년 1월 20일 용산의 아침은 공권력의 추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낸 날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용산 재개발 지역의 한 건물 옥상 망루에 오른 시민들을 향해 대테러 진압을 위한 경찰 특공대와 철거 용역업체가 투입되는 과잉 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지는 비참한 참사가 일어났다. 이 용산 참사의 진상 여부를 밝히는 검찰의 수사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의구심을 갖는가 하면, 심지어 분노한다. 공권력의 과잉 진압보다 철거민의 과격한 농성이 이번 참사의 주된 책임이라는 쪽에 비중을 맞춘 수사가 전개되다가, 과잉 진압이라는 새로운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재수사를 하는 등 검찰의 수사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이번 용산 참사는 한국사회의 누적된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경제성장 제일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용산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진행 중인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각종 이권을 향한 이전투구 양상은 철거민의 생존권은 부차적 문제이며, 오직 재개발 사업을 통해 이러저러한 경제적 이권을 챙기기 위한 이해관계만이 판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의 생존권을 향한 주장과 노력들은 이번 참사에서도 드러나듯, 보상 비용을 더 많이 받기 위한 떼쓰기 정도로 폄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향한 절규와 노력에 사무친, 삶의 밑바닥을 치는 생의 욕망과 의지를 존중한다면, 보상 비용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한 일방적 떼쓰기라고 비상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일이다.
철거민들이 분노하면서 마지막 선택으로 가설 망루에 오르게 된 그 참 뜻을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했다면, 일방적 떼쓰기와 같은 인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합리적이면서도 정당한 보상을 원한 것이고, 인권이 유린되지 않은 철거를 원한 것이다. 절망을 딛고 또 다른 삶의 희망을 향해 떠나가고 싶다. 하지만, 재개발 사업의 이해관계는 그들의 이러한 정당한 요구와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찰과 행정의 공권력은 사회적 약자인 철거민의 분노와 절규를 무시한 채 재개발 사업의 또 다른 이해관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환기하건대, 모든 게 ‘경제성장 제일주의’로부터 비롯한다. 도심지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여 그 지역의 경제적 부를 창출함으로써 다른 지역보다 성장이 빠른 결실을 맺고자 하는 과욕 속에서 민주주의적 절차는 경제성장의 논리로 함몰되고 만다. 재개발의 이해관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재개발을 통한 성장은 선善이며,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악惡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공권력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악을 제거하는 게 정당한 것이라는 점을 자기합리화한다. 사회적 공권력은 사회적 선을 옹호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개발 업자의 사적 이득을 축적하는 것을 사회의 공동선共同善으로 자연스레 간주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선’과 ‘사적私的 선’에 대한 공권력의 인식이 뒤바뀌어 있다. 분명한 것은 사회적 공권력은 근대 시민 사회에서 ‘사회적 선’을 우선적으로 옹호해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그 누군가의 ‘사적 선’을 특별히 옹호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이번 용산 참사는 어떤가. 공권력이 ‘사적 선’을 우선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사회적 약자인 철거민들이 호소하는 ‘사회적 선’을 지키는 데 소홀하지 않았는가.
나는 문학비평을 하는 비평가로서 2009년 1월 20일에 일어난 용산 참사를 문학인들이 외면하지 말 것을 간절히 바란다. 그동안 한국문학이 거둔 성취 중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 중 하나는 한국의 민주화를 향한 도정 속에서 한국문학은 그 특유의 문학적 지성과 시대정신을 벼리는 미적 윤리 감각을 고양시켜왔다. 한국문학은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채 저 낮은 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상처를 함께 아파하고 견뎌오지 않았는가. 그 아픔과 견딤의 과정에서 한국문학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노래하고 이야기하였다. 때로는 생경한 구호를 외쳤고, 때로는 가슴저미는 사연을 들려줬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부호를 타전하였지만, 그 모든 각개 문학의 움직임들은 하나하나의 촛불이 모여 거대한 빛의 무리를 이루듯, 한국사회의 비민주적 어둠을 걷어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문학은 이러한 움직임들의 가치를 폄하하는가 하면, 과거의 추억만을 곱씹으면서 현실의 고통과 슬픔, 상처로부터 애써 태연한 척 한다. 그토록 영민했던 시대를 향한 감각은 둔탁해졌으며,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려는 미적 윤리는 낡고 오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여기에는 비평도 예외가 아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평의 위기’를 숙고했지만, 정작 비평가들은 ‘비평의 위기’에 대해 실감하지 못한다. 아니, 머리로는 알지만, 온몸으로는 실감하지 못한다. 왜, 비평의 위기라고 하는지, 비평 스스로 반성적 성찰을 치열히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그에 대한 실감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비평해야 할 대상이 넘쳐나는데, 게다가 비평이 필요로 하는 지면이 많은데, 왜, 비평의 위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제발 엄살 좀 떨지 말라고 하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말들만이 배회한다.
‘비평의 위기’라고 하는 데에는, 여러 분석이 따라야 마땅하다. 그 중 내가 환기하고 싶은 것은 현실과 맞대면하는 비평가의 태도에 있다. ‘지금, 이곳’의 비평은 현실과 상호침투적 시각을 갈고 다듬는 게 아닌, 서구의 이론을 누가 더 빨리 흡수하여 그것을 재빨리 써먹느냐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면, 나의 지나친 편견일까. 좀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지금, 이곳’의 비평은 현실을 염두에 두되, 비평적 글쓰기를 위해 마지못한 차원에서 현실을 슬쩍 언급해두는 것으로, 현실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 양 그 알리바이에 자족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바로 이것이 우리 비평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비평이든지 그 비평은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비평 본래의 속성이 글쓰기 자체가 지닌 권력과 무관할 수 없고, 비평 행위야말로 텍스트와 작가에 대한 비평가의 정치적 선택과 깊숙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기에, 현실과 절연된 비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비평의 이러한 속성을 관성화된 차원에서 만족하느냐, 아니면, 비평 스스로 갱신되기 위해 관성을 벗어나 현실과의 급진적 관계를 통해 비평과 부딪치는 현실을 넘어설 것이냐 하는 점이다. 비평의 급진성은 단순히 비평적 글쓰기의 새로운 전위 감각을 보여준다고 획득되는 게 결코 아니다. 비평이 만나는 현실, 그 현실의 숱한 관계 및 맥락과 쟁투해야 한다. 비평은 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때로는 텍스트의 바깥에서 텍스트의 안쪽을 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만큼 비평은 비평 본래의 문학적 지성과 미적 윤리 감각의 촉수를 세밀히 작동해야 한다. ‘비평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위기를 극복할 비책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비평은 작금의 현실을 냉철히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용산 참사는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외에도 비평은 한국사회와 상호침투적 시각을 통해 비평의 급진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사로잡한 정치철학의 부재와 사회적 윤리감각의 결여된 정권 출범, 그로 인한 고소영 강부자 내각을 향한 일반 시민들의 허탈과 분노, 점점 경색국면으로 치닫는 남북관계, 촛불집회에서 목도한 웹2.0세대의 민주화를 향한 또 다른 정치적 인식과 감각, 정부와 여당의 경제정책이 지닌 문제점들에 대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비판 담론들, 정부와 여당 주도의 언론방송법 개정 문제, 흑백 인종 갈등을 보란듯이 뛰어 넘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한 흑인 오바마의 변혁을 향한 열정,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 질서의 위기, 자연 생태계의 급격한 혼란과 파괴,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등 지구촌 안과 밖의 현실‘들’에 대한 비평적 대화와 숙고가 없는 한 한국문학 비평은 앞서 언급했듯이 비평 일반의 본래적 속성에 관성으로 작용할 따름이다.
여기서, 문학평론가 도정일의 ‘문학비평의 사회적 소임’은 한국문학 비평이 경청해야 할 귀중한 전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비평의 사회적 소임이란 무엇보다도 한 문화의 인간학적 혹은 인문문화적 가치를 보존, 계승, 발전시키는 기능과 역할을 말한다. 문학비평은 문학의 한 부문영역이면서 동시에 문학이라는 형태의 예술적 창조행위와 수용행위에 대한 비판적·반성적 사색이다. 그러나 문학의 생산과 수용, 그것의 유통과 향수의 제 과정은 정치경제적 국면들과 광역문화의 여러 기제(예컨대 교육, 언론, 출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문학비평은 적어도 문학예술의 창조와 수용에 관계되는 문화의 넓은 국면들까지도 비판과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비판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고 반성은 복고적 <퇴행>이 아니다. 문학비평이 수행하는 광의의 문화적 비판과 반성은 한 문화가 창조하고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가치들을 부단히 정의하고 확인하는 인문문화적 사색행위이다. 이 점에서 문학비평은 인문문화의 신경중추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은 그것이 수행하는 많은 작업들 중에서도 한 문화의 건강성 여부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병적 징후를 감지하며 그 진단의 결과를 사회에 보고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인문학의 한 갈래이자 사회문화적 제도로서의 문학비평이 수행해야 할 사회적 기능이다. 우리의 문학비평은 문화적 몰락의 여러 징후와 현실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발언권을 넓혀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평 자체의 사회적 소외를 방지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도정일, 「문화의 몰락과 비평의 위기」,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266-267쪽
사회가 어수선할수록 비평은, 비평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물음을 귀찮을 정도로 자주 던져야 한다. 무엇보다 “문학비평은 그것이 수행하는 많은 작업들 중에서도 한 문화의 건강성 여부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병적 징후를 감지하며 그 진단의 결과를 사회에 보고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는 문학비평의 사회적 소임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한국문학 비평이 가장 절실히 숙고해야 할 전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비평은 인문문화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수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색+행위’다. ‘경제성장 제일주의’가 갖는 반문화적 행태를 준열히 꾸짖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얼마나 한국사회의 인간다운 삶을 향한 움직임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도록 방치하는지 그 실상을 드러내야 하고, 성장위주의 온갖 화려한 미사 여구로 은폐돼 있는 맹목적 희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끌어내야 하고, 사회적 부정한 것들에 대한 침묵과 방기가 아닌 사회적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존재의 긴장감을 당당히 보여주는 데 비평은 그 도우미 역할을 기꺼이 맡아야 한다.
한국문학 비평이여, 이제 우리 더는 부끄럽지 말자. 비평의 인문문화적 가치를 알량하게 되새김질할 때가 아니다. 현실의 낮은 곳으로 내려와 비평의 급진성을 다시 쟁취하자. 비평의 정치성을 논의할 게 아니라 현실과의 부딪침 속에서 비평의 정치성을 끌어내자.
고명철∙1970년 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현재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저서로는 칼날 위에 서다, 순간, 시마에 들리다, 논쟁, 비평의 응전, 비평의 잉걸불, 쓰다의 정치학. 공저로는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탈식민주의를 넘어서 등 다수. 고석규비평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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