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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현실·발언/또 다른 대립의 경계/이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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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27회 작성일 09-12-2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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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대립의 경계
이재웅|소설가



1. 
우리는 신문 몇 장을 떠들러 보는 것만으로도 이명박 정부 이후 우리 사회에 어떤 갈등들이 야기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어떤 분야에서 어떤 갈등들이 발생되고, 또 심화되었으며, 진행 중인지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나의 통찰력이 그 분야의 전문가들도 나은 형편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역할은 그저 신문을 통해 세상을 읽는 구독자 수준에서 소박한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2.
우리가 신문을 펼쳐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명박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여당과 야당의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우리가 이미 익숙해진 바, 신문 진영 역시도 이렇게 나눠져 있다. 한쪽은 ‘조·중·동’이며 한쪽은 ‘경향’, ‘한겨레’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초래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부와 여당, 그리고 시민단체(운동)와 야당 모두에게 여론의 압박 형태로 작용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갈등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평가는 아주 그른 것만은 아니다. 또 갈등과 혼란의 양상이 전과 다르다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정밀한 분석을 요하며, 만약 우리가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보자면, 이러한 대립 양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도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우리의 매스미디어에서는, 혹은 우리들 자신들은 언제나 이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해왔다. 이러한 대립이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며, 민생을 더욱 더 어렵게 한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발언과 고민은 대개 이것에 국한되어 있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은 이 경계의 지점에 못 박혀 있었던 것이다. 

3.
우리의 시선을 조금만 확장해보면, 우리는 아마도 신문 위에서 또 하나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계의 한 쪽 지면에는 정치적(더 폭넓게는 이데올로기적 인식) 인식이나 논리가 개입되는 사안, 예를 들면 노조활동이나 재벌, 금융, 경제, 교육 정책, 그리고 이외에 사회의 몇 몇 양상들이 다뤄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한쪽 지면에는 이웃의 따뜻한 미담이나 강도나 강간 등의 범죄, 교통정보, 부동산 정보, 바둑, 영어 한마디, 주식정보, 연예인정보, 패션정보, 문화예술 홍보, 기업상품 홍보, 입시 정보 등이 다뤄지고 있다. 말하자면, 8면까지는 정치인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만, 9면을 넘기는 순간 세계는 고요해지고 우리의 일상과 생활에 관련된 기사들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이 세계는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신문 위에서는 명확하게 구분지어져 있으며, 또 실제로 그 독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섹션의 경계는 진보신문도 보수신문도 거의 동일형태를 띤다. 

4.
한 운명공동체의 역사는 통상적으로 정치사와 생활사로 나뉘어진다. 이것은 대단히 기계적이고 도식적이며, 엉성한 구분(정치사와 생활사라는 용어 자체가 정밀하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이지만, 이 개념이 아주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가 어떤 공동체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명분아래, 이 양 영역을 아무런 조심스러움 없이 하나의 논리나 가설에 두드려 맞춰 넣을 때, 그 공동체의 역사는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미명아래 생활사를 정치사에 종속시켜 버리거나 또는 생활사의 논리로 정치사를 왜곡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너무도 조악하고 유치하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역사를 이러한 정치사와 생활사로 구분해 놓고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광주가 민주화를 외치며 죽음의 피로 물드는 동안, 바로 그 옆 지역의 도시에서는 어떻게 평범한 일상이 진행되었으며, 광주의 시민들이 비극적 상황에 처할 때 그 옆 도시의 시민은 변기 위에 편안히 앉아 광주의 왜곡된 기사를 읽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왜 광주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민주화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후에도 왜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지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
민중사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정치사와 생활사를 통합해 낸 역사개념일 수 있다. 그리고 고려나 조선시대의 역사 기술에 비춰본다면 이것이 근대 이데올로기의 큰 선물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중사는 어떤 면에서는 일상적인 시기보다는 전쟁이나, 혁명, 혹은 변혁의 시기에서 정치사와 생활사의 영역이 붕괴될 때, 총체적인 역사 이해를 더욱 더 가능하게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정치사와 생활사의 경계는 또렷해지며, 그 독자성은 강해진다(적어도 그렇게 보여진다). 정치사적 맥락에서 생활사를 완전히 포괄할 수 없으며, 생활사의 입장에서 생활사와 정치사의 맥락이 완전히 일치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정치사는 의회 안으로 들어가 버리며, 생활은 국회의사당 밖에서 버스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이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6.
어떤 면에서, 한 공동체의 역사는 정치사와 생활사의 역학관계가 동등해지거나 혹은 한쪽이 한쪽에 종속되는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이전의 역사를 정치사와 생활사로 분류해 볼 때, 두 영역을 신문의 영역처럼 재단할 수 없다는 오류,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생활사는 90년대 초반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길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이것은 정치사가 생활사의 의제를 반영하거나, 당리당략의 정권싸움을 벌이거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입장의 차이를 보일 때, 생활사는 근본적으로 자본의 영향 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정치사가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만약에 생활사의 입장에서 정치사의 변화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정치사의 변화로 자본의 흐름이 변화하는 경우일 것이다(혹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다.) 따라서, 생활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사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경제정책, 즉 자본의 정책보다 민감한 것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어떠한 화두보다 경제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한국사회의 자본이 대형화되면서 경제문제는 중요시된 것이고 또 그 대형화가 생활사의 독자성을 성장시킨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생활사의 성장과 함께 경제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역사에 있어서 정치사의 영향력 감소와 생활사의 영역 확장은 단순히 경제면의 기사가 다양해지거나  많아지고, 경제전문지가 생겨나는 것 이상으로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잡지와 미디어의 증대, 패션 정보의 증대, 오락거리들, 연예 뉴스, 케이블 TV 등등. 이제 어떤 면에서 연예인들은 법이나 정책, 제도 등 몇 몇 영역을 제외하고는 정치인들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이다. 

8.
이러한 생활사의 확장 속에서 이명박 정부(혹은 그러한 형태의 정부)의 출현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정확하지 않고 또 너무도 도식적인 구분이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치사의 영역에서 탄생된 정부가 아니라 생활사의 영역에서, 그 확장 속에서 탄생된 정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선진화’, ‘일자리 창출’, ‘7%대 성장’, 무엇보다도 ‘실용주의’는 한나라당의 것도 아니었고(이것은 나중에 왜 잠시나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약간의 입장차이를 보였는지, 또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소위 보수층들이 이명박과 대립관계에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 차이는 향후에도 미세하게 존속할 수 있다),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의 것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모든 당의 캐츠프레이즈도 될 수 있었다. 

9.
어떤 면에서는 생활사의 확장 속에서(더 정확히는 그 무의식적인 인식논리와 무드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가능했듯이, 뉴라이트의 담론도 가능했다. 
뉴라이트의 일본근대화론의 요지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식민지화가 옳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전자는 정치사적 인식인 반면, 후자는 생활사적 인식인 것이다. 이 논리에 입각하면, ‘대한제국’이었다가 후에 ‘대한민국’이 된 공동체는 일제강점기로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경제가 피폐화되고, 주권이 상실되는 등 ‘퇴보’의 형태였지만, 행정, 제도, 법, 생산수단, 도시문명(근대식 길과 건물), 경제제도 등 근대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이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지면 관계상 길게 설명할 수 없고, 또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러한 역사적 인식은 양태는 다를지 몰라도 그 한계의 측면에서, 얼마만큼은 이명박 정부의 역사적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0.
정치사와 생활사의 측면에서 논의를 더 전개해가자면, 이명박 정부의 출현 그 자체는 이미 생활사가 정치사에 크게 개입할 정도로 성장했거나, 적어도 시대적 주도권을 쥐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국회에서는 정책정당의 형태가 (심지어는 민주노동당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전략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숨기려 드는 것이다. 그것이 드러날 때에는 ‘너는 보수꼴통이다’, ‘너는 좌파 빨갱이다.’하고 상대를 공격할 때 뿐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눈치는 살피지 않지만 생활사의 눈치는 살피는 것이다.
또한, 서로가 민생과 경제를 싸움의 명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민주주의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때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보다는 국민을 위해서이며 국민 대다수는 생활사의 영역에 서 있다는 것을 의식한 발언처럼 들린다. 
촛불집회와 같은 시민운동도 생활사의 눈치보기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만의 주관적인 입장일 수도 있으나, 어떤 면에서 촛불집회는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인식도 뒤섞인,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온 ― 개개의 주장과 목소리를 식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주장과 저항의 고함소리였다 ― 하나의 장이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그것은 정치적으로 때 묻지 않은 청소년들, 혹은 주부들이, 정치적으로 전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입시경쟁과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만으로 촛불을 들었다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또한 명확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처벌에 따른 또 하나의 저항의 목소리(혹은 전략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활사의 영향력 하에서 가장 적절한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1.
생활사의 증대가 분명 역사의 흐름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꿈꾸는 역사란 그렇게 가야할 것이다. 또한 성숙한 사회란 어떤 면에서는 생활사의 증대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의 영향력을 가장 크게 받는 생활사의 움직임이 자본에 종속되고 또 심화되어 버릴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했던 성숙한 사회와는 전혀 다른 행보로 이전될 수 있으며, 더 암울할 수도 있다.

12.
실제로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생활사는 앞서 언급한 자본의 대형화와 더불어 심화, 고도화 과정에서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하기에,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생활사는 급속히 속물화된 경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때문에, 한국의 생활사의 성장이 가속화되는 시기가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대두되는 시기였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때 이미 이명박 정부 형태의 정부의 출현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속물화는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민주적 가치들을 쉽게 훼손할 수 있다. 일례로, 앞서 언급했던 광주민주화 운동이나, 촛불집회, 더불어 햇볕정책 등이 여기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또한 정치적 대립을 역사적 맥락 없이 들여다봄으로써 단순한 권력투쟁정도로만 치부할 수 있으며(최근 사극들의 경향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정신적 투자없이, 양비론 정도가 득세할 우려가 없지 않다. 또한 정확한 원인 없이 파시즘과 전체주의 속에서의 공포의 기억만으로 근대의 산물이자 선물인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에 대한 혐오증이 팽배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오랜 학습과 박애정신, 고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합하고, 그 입장에서 정당을 선택해 정치에 나선 정치인이 다른 동료 정치인들과 거리 투쟁에 나섰을 때, ‘너도 똑같은 인간이다. 너도 당리당략을 위해 싸운다.’하는 일방적인 비난으로 좌절을 겪을 수 있다. 또한 한 그룹의 노동자들이 노동 소외에 맞서 희생적이고 당당한 걸음을 내딛을 때, 그것을 ‘단순히 돈 몇 푼 더 받겠다는 임금투쟁에 불과하다. 세상이 다 그렇다.’하고 지극히 협소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쳐다볼 수도 있다. 
이것은 의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감각 역시도 속물화 된다. (역시 지면 관계상 길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 결과, 고통과 비극은 신파가 되고, 희극과 시니컬함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 타인의 절망은 무시된다. 개성은 통합적 인식을 상실해 균형을 상실한 과장되고 괴팍한 돌출이 되고, 그 과정에서 소통보다는 난해한 자족감이 우위를 차지한다. 창의력은 돈벌이 능력과 동일시되고, 자아의 정체성과 계급은 소비 속에서 획득된다. 

13.
나는 이제까지 신문 위의 또 다른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역시 지면 관계상 많은 부분들은 축약해서 서술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양해 바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이명박 정부가 야기하는 혼란이 단순히 이명박 정부만의 한계가 아니라, 대형화되고 고도화된 자본이 점령한 이 땅 위의 역사의 한계이자 풍토의 한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지금과 같은 양상의 갈등을 야기하는 또 다른 정부의 형태를 선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경계를 넘거나 혹은 생활사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방안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의석수나 정치적 입장의 승리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재웅∙200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와 창작집 럭키의 죽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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