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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현실·발언/이동하라, 변태하라 ― 새로운 정치시를 위하여/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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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12회 작성일 09-12-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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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라, 변태하라
―새로운 정치시를 위하여
장석원|시인



2009년 오늘의 현실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광장의 촛불이 떠오른다. 꺼지지 않은 불꽃들이 일렁인다.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좌․우익 계급 갈등이 본격적으로,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문제라고도 말한다. 용산에서 다섯 명이 죽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문학이다, 시이다. 2009년의 현실 앞에서 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80년대에 시는 무기였다. '노동의 새벽'은 현실이었고, '만국의 노동자여'는 투쟁의 교범이었다. 오늘의 현실에 1980년대의 시를 주입시킬 수는 없다. 그때의 시가 낡아서 용도 폐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시는 ‘용도’에 따라 써내고, 사용하여 목적이 달성되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시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가 프로파갠더․아지테이션의 유용한 도구였던 때가 있었다. 1회용 물품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새로운 ‘정치시’가 필요하다.”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 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전문(≪현대시≫ 2008.3. 이 글에서는 ≪서정시학≫(2008 겨울)에서 재인용)

새로운 정치시 한 편을 읽었다. ‘새로운 정치시’에 대해 술자리에서 한 선배 시인이 말했다. 그와 나는 ‘이 나라의, 이 현실의, 이 땅의, 파쇼의, 억압의’ 같은 단어를 꺼냈다. 그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시’를 언급했다. 시의 응전 말이다. 나는 정치와 미학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묻고 싶었다. 새로운 정치시의 새로운 미학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목전의 과제이다.

“그 둘은 둘 다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동시同時’라는 명사에 갇힌다. 동시라는 명사 바깥에서 두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동시에 사랑한다. 어느 한 쪽의 사랑으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동시성은 그래서 시간의 그물에 포박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서로의 존재를 위치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의 주어 ‘나’는 언제나 ‘너’ 또는 ‘당신’과 한 패를 이룬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3인칭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다른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두 사람은 ‘나-너’의 감옥에 갇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라는 문학 장르가 시대와 역사와 언어와 불가해한 사랑에 빠지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을까. 시인이라는 주체가 사랑에 빠진다면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또는 무엇일까. 시가 사랑에 빠질 수는 있는가. 사랑에 빠진다면 어떤 상황을 두고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고 해도 시와 시인, 시와 언어, 시와 사회, 시와 역사, 시와 독자, 시와 다른 시인 등등. 규정내릴 수 없는 수많은 시의 대상들 가운데 과연 무엇을 시의 연인으로 상정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흔히 모든 관계를 폐쇄하여 그들만의 시간에 기꺼이 유폐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시가 사랑에 빠졌다는 비틀림이 조금이라도 용인되는 너그러움을 기대할 수 있다면, 시가 빠진 사랑에는 시 자신과 시의 연인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무시간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우연에 의해, 또는 직감에 의해, 첫눈에 사랑의 대상에 반해버리는 순간, 시간이 정지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꺼번에 사랑의 순간으로 몰려드는 그 순간의 무규정성. 개념으로 쪼갤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인 사랑의 순간이 시에, 문학사에 존재할까. 서로 상반되는, 서로를 배척하는, 서로를 극복해야 발전할 수 있는 그런 두 존재들이 사랑에 빠져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동시에 두 남녀가 시계를 쳐다보았듯이, 이질적이고 대립되는 두 요소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는 사랑의 신비함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이해를 요구하는 두 대척점 사이에 놓여 있는 시. 이제 사랑이라는 비개념적인 단어를 지우고 ‘동시에’를 남겨둔다. 대립되는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 시간의 순차적 질서는 축출된다.

시는 개인적인 장르였다. 시는 서사나 논설과 다르다. 어쩌면 근대의 핵심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한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을 시에서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시가 지니는 개인적 특질은, 문학이 사회․역사라는 문학 외적 요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만큼, 사회․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혹시 망상 아닐까. 두 개의 극 사이를 오가는 진자가 있다. 양극을 벗어날 수 없지만 두 극 사이를 오가면서 끝없이 운동하는 진자. 자유롭게 운동한다면 두 극을 모두 지니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두 극을 모두 지니고 있어야 다양한 좌표의 아라베스크를 통해 시대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고, 유동하여 하나에 붙박히지 않는 문학의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단성적이고 단일한 문학보다도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주인은 ‘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언어는 주체인 ‘나’의 외부에 존재한다. ‘나’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언어는 실상 저기 저 바깥에 떠돌아 다니는 언어를 내 것이라고 우기는 일종의 착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문자와 음향이 언어인가. 내가 그 코드들에 담고 있는 의미는 그러면 무엇인가. 언어라는 허상에 의해 주체 ‘나’는 규정되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규정하고 있는, 나와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저’ 사람, ‘당신’, ‘그’는 누구인가. 그들 역시 허깨비 아닌가. ‘나’의 언어가 내 것이 아니라면 저들의 언어 역시 저들 것이 아니란 뜻도 성립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떠다니는 언어들, 묶이지 않는 언어들, 상황의 노예인 언어들. 부유하는 기표들, 풍선들, 의미들, 죽은 의미들. 의미의 규정이 철폐되는 순간, 의미가 부정되는 순간, ‘나’와 ‘너’와 ‘그’라는 견고한 인칭 삼각형도 무너지게 된다. 나는 ‘나’가 아니고, 그가 ‘나’이다.

나는 모든 언어와 모든 관계들이 지나가는 간이 정류장이며, 나는 모든 관계의 교직으로 만들어진 성근 섬유이다. 내 언어 역시 그렇다. 기원이 소실된 움직이는 언어가 나를 관통하여 순간의 의미를 만들고는 곧장 기화하여 다른 의미가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기표들. 물질적 증거인 기표들.

의미의 단일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너의 텍스트이고, 너는 나의 텍스트이며, 그는 우리 모두의 텍스트이다. 나는 너에게 읽히기를 선망하며, 너는 나에게 텍스트라는 욕망의 도구일 뿐이며, 그는 나와 너를 동시에 장악하고 주재하는 존재이다. 나를 읽어라, 너를 읽겠다, 그를 읽기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너를 거쳐 거기 닿겠다. “상호텍스트적 분석의 첫 번째 규칙은, 이를테면 상호텍스트가 원천(source)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원천이란 명명된 기원이지만, 상호텍스트는 식별할 수 있는 기원이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도, 소설도, 대화도, 일상의 작은 파편도, 그리고 언어도 모두 상호텍스트이다. 바흐찐이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말했을 때, 그때 화용론은 이론이 아니라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 안에 스민 너를 읽어라, 내 안에 스민 그를 읽어라. 그리고 스며 있는 것들의 권력을 파헤쳐라. 나의 언어에 스며 있는 욕망과 권력을 살펴라.

“한 언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다른 언어를 억압하지 않으며, 미래의 주체가 어떤 후회도 억압도 없이 자신의 소유하에 두 개의 언어 구현태(instance)를 구사하는 즐김을 체험하며, 법칙이 아닌 변태에 의해 이런 저런 것을 말할 수만 있다면.” 두 언어의 존재, “욕망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어들”을 갖고 싶은 욕망을 변태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혼란과 분열. 무한한 이동. 새로움을 향해 나가는 변태變態. 어둠 속에서 불 밝히고서 사랑하는 사람의 빛나는 육체를 볼 때 찾아드는 경이. 변태를 받아들였을 때 전복되어 나타나는 쾌감은 강렬도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이런 도착, 이런 혼란 그리고 오늘의 새로운 정치시.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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