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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신작단편/ 무채색의 풍경/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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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풍경
―경마공원에는 별들이 산다(3)
유민
보슬비가 내린다. 멀리 오름의 능선을 따라 흘러온 안개가 타원형 주로走路 위에 머물러 있다. 안개는 강한 바람이 불어야 물러갈 듯하다. 바람은 소리 없이 보슬비만 흩뿌린다. 오늘 경기는 난전亂戰이 될 것이다. 나는 헬멧 버클을 단단히 조인다. 오늘처럼 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낀 날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시장豫示場 바닥은 이미 질척거리고 있다. 보조요원이 기승하라고 눈짓을 보낸다.
나는 작은탄생의 갈기를 쓰다듬는다. 오늘 2경주에 출주出走하는 3번 처녀마處女馬다. 말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하다. 기수복을 입고 빨간 헬멧을 쓴 내 전신이 선명하게 비친다. 반드시 1승을 올려야만 해. 나와 한 몸이 될 수 있겠지? 나는 작은탄생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멋진 한판을 벌이는 거야. 작은탄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발을 들어 지면을 찬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의 아래턱을 쓰다듬는다. 기갑의 형태가 옹골차고 밤색 털에서 윤기가 흐르는 모양새가 아주 건장한 말이다.
나는 말의 볼을 몇 번 쓰다듬고는 말 등에 올라탄다. 허리에 찬 납주머니가 조금 불편하다. 출주마의 부담중량 미달로 중량을 보충하기 위해 납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있다. 내가 너무 가벼워서 출주할 때마다 매번 있는 일이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말굽목걸이를 웃옷 속에서 꺼내며 주변을 돌아본다. 많은 사람들이 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예시장豫示場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 그녀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고향은 제주도, 이곳 어느 작은 마을이다. 그녀는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떠났다. 열한 살 되던 해에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수가 된 건 순전히 그녀 때문이다. 아니다. 주희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는 너무 작아. 물빛공원 한 가운데를 걷던 주희가 말했다. 백오십이 센티미터가 뭐니. 하지만 귀여워. 주희는 내 볼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나 애인 생겼어. 너처럼 작은 애랑 애인한다는 건 정말 바보짓이야. 주희가 손을 흔들었다. adieu~.
내 나이 스물한 살. 주희는 열등감이 증폭되는 충격을 주고 떠났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슬프지가 않았다. 아주 잠깐 씁쓸한 눈물 몇 방울 떨어뜨렸을 뿐이다. 슬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슬프지 않은 것이다. 내 몸은 너무 말랐다. 41kg. 내 깡마른 몸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오줌도 아주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슬프거나 긴장을 하면 땀을 많이 흘린다. 주희가 떠났을 때 나는 1.5리터짜리 생수를 사서 통째로 마셨다. 그제야 아주 조금 눈물이 나왔다. 나는 주희에게 처음부터 작은 키가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떠나면서부터 내 키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주희는 휙, 바람을 일으키며 아주 빨리 떠나가 버렸다.
예시장을 평보平步하기 전 잠시 주로를 바라본다. 바람이 조금 불고 있지만 주로 위의 안개는 걷히지 않고 있다. 안개가 조금 더 짙어지면 경주는 취소될지도 모른다. 안개의 미립자에 두 여자의 냄새가 스며있다. 나는 폐부 깊이 안개를 마셔본다. 주희는 잘 지내고 있을까. 떠난 주희가 그립다. 그녀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주희가 떠난 후 나는 오래도록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성장하지 못한 작은 키는 너무 초라해 보여 슬펐다. 나는 작은 육신을 사회와 철저히 격리시켜 버리고 싶었다. 군대를 지원했으나 받아주지 않았고 한강에 투신했으나 너무 가벼워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초라한 육신을 자취방에 구겨 넣으며 울었다. 밤늦도록 울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찾아 마시고 다시 울었다. 그제야 눈물이 조금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옷과 이불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갑자기 그녀 품이 그리웠다. 술독에 빠진 난쟁이 아버지는 그녀가 고향에 갔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왜 떠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품을 찾아 어렵게 구한 나이트클럽 홍보맨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지도를 구입했고 서부에서 동부산간마을로 그녀를 찾아다녔다. 그녀는 없었다. 아홉 살 즈음인가 다녀간 기억이 있던 그녀의 고향마을은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오래도록 할 일을 찾지 못했고 노을 지는 바닷가를 서성이거나 여관방에서 정물처럼 누워 지냈다.
목적을 상실한 초라한 육신은 무료하게도 수마에 허덕였다. 늘어진 육신이 인체의 모든 감관感官을 지배하고 있었다. 수마에 허우적대던 어느 날 나는 아주 잠깐 꿈을 꾸었다. 붉은 별이 허공에서 말처럼 뛰어다니는 꿈이었다. 그 별은 말처럼 울더니 내 가슴속을 순식간에 헤집고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순간 시큼한 클로버 파릇파릇 돋아난 물오름 들녘이 끝없이 펼쳐졌다. 바다 끝자락에 붉은 노을이 걸려있고 종달새 하늘 높이 날아오른 고즈넉한 물오름 들녘의 풍경. 여자와 어린아이가 말을 타고 천천히 풍경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다. 나는 그 물오름 들녘의 위치를 기억해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아득하고도 먼 기억이었다. 혹시 TV속에 그곳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주의 바다, 그리고 오름’이라는 프로에 채널을 고정시켜 종일 바라보았지만 물오름 들녘과 흡사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여관방 침대 밑으로 기어가 누웠다. 캄캄하고 음습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나는 며칠째 침대 밑에서 쥐며느리처럼 몸을 바짝 오므리고 잠만 잤다.
침대 밑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자고 있었는지 모른다. 너무 목이 말라 눈을 뜨자 나는 물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온몸의 물이 모두 빠진 것처럼 힘이 없었다. 허우적거리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오자 혼자 떠들던 티브이 속에서 말들이 뛰어다니고 있었고, 푸른 들녘 한 가운데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푸석해진 얼굴을 황급히 쓸어내렸다. 그 순간 그녀와 말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른 들풀이 뿌옇게 날아오른 들녘 위로 기수모집 자막이 점점이 떠오르더니 오랫동안 화면에 박혀있을 뿐이었다. 나는 목마름도 잊은 채 문득 기수가 되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키가 호꼴락 헌 사람이 기수허는덴 좋덴 고라라. 여관 주인은 친절하게 경마장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경마장을 찾아 서류를 접수했다. 3차까지 진행된 선발전형시험에 합격하고 2년의 합숙생활로 기수면허를 취득했다. 수습기수 32개월 동안 통산 39승을 올렸다. 그러나 정식기수 진입을 위한 1승을 남겨놓고 있는 지금까지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기수가 되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저 수습기수에 불과한 내게 그럴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만남은 부정행위방지를 위해 철저히 보안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정식기수로 선착 진입하는 거야.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올 때 담당조교가 말했다. 기자들이 몰려들 거야. 정식기수로 등극하는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지. 저 주로를 달려 선착으로 홈스트레치를 돌파하는 순간에 말야. 조교는 어스름 저녁이 밀려드는 주로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식기수가 되기 위해 주어진 경기마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7개월이 넘도록 1승을 올리기 위해 고독한 투혼을 발휘했지만 허사였고 나는 오래도록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러나 오늘 새벽, 드디어 나는 길고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 우승을 확신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기억의 편린을 조합하려 그녀를 향해 편지를 쓰던 중 나만의 붉은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새벽에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붉은 별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가만히 자리를 잡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오늘 새벽에만 꾼 꿈이 아닙니다. 기억에서 잊혀질만하면 붉은 별은 고즈넉이 꿈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문드문 꾸었지만 꿈의 내용은 늘 똑같았습니다. 그 별은 궁수자리 속에 있는 어떤 하나의 별이거나 또는 팽팽한 활의 시위를 당기듯 촘촘히 박혀 있는 수백 수천 개의 빛나는 별이기도 했습니다. 꿈을 꾸게 된 시기는 당신이 말굽목걸이를 선물로 주고 떠났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주희가 떠났을 때부터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기수가 될 때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늘 등외로 밀려 마방馬房에서 눈총을 받느라 반드시 1승을 올려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초조해진 요즘 들어서 부쩍 꿈속에 별이 나타났습니다. 혹시 당신이 주고 간 은빛으로 빛나는 말굽목걸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던 그 목걸이가 더 이상 행운을 가져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별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에겐 별이 없었으므로 수많은 별들 속에서 나만의 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오늘 새벽 꿈속에서 나는 수천여 개의 별들이 안개 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개의 미립자는 붉은 기운에 쌓여 있었고 별들조차 붉은 빛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 중에 붉은 빛을 내는 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명이 열릴 때까지 붉은 별에 대한 고민은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새벽의 꿈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별의 내부에서 새로운 별들이 만들어지고, 그 새로운 별들은 끊임없이 발광發光하며 주변을 붉게 물들이다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애써 보이는 모든 것들을 나의 별이라고 단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째 같은 꿈을 꾸면서 자세히 생각해 보았고, 오늘 새벽의 꿈까지 종합해 보면 그것은 별이 아닌 붉디붉은 성운星雲처럼 보였습니다. 별이라면 퍼렇게 빛나야 하겠지만 붉은 빛이 감도는, 안개 같은 그것은 분명 성운이 틀림없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조금씩 슬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만의 별이 아닌 산개성단을 둘러싸고 있는 성운이라니. 그렇다면 나의 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창문을 열고 새벽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중충한 회색구름은 대기 아래로 한껏 내려와 있었고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내가 별과 성운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내 가슴속에서 붉은 빛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밤하늘 붉게 빛나는 별이 나만을 향한 나의 별이길 빌었습니다. 그러나 안개처럼 뿌옇고 넓게 흩어진 모양새가 아무래도 성운이 틀림없음을 확신했을 때, 나는 별이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성운이란 존재가 내 가슴속에서 나와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고무했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도취되었다가 책꽂이를 뒤져 ‘우주의 실루엣’ 이라는 책을 꺼내 붉은 빛을 내는 성운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책에서는 성운을 윤곽이 확실하지 않은 구름모양의 천체로서 우주의 기체와 먼지 티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기체와 먼지티끌들이 모여 있는 성운이 내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고무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별을 찾아 내 가슴속에 심어야 할 것인지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기체와 먼지티끌들이라면 어느 한 순간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창가로 가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실망하고 침대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안개가 살짝 주로 위를 덮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안개는 미립자들끼리 단단히 뭉쳐있다. 나는 천천히 말의 고삐를 잡고 예시장을 평보한다. 말과 함께 예시장을 도는 것은 경마공원을 찾는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다. 출주마의 건강상태나 컨디션을 확인하고 우승예상마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들은—패트론Patron들은—심각한 표정으로 말들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그 심각함 속에는 어떤 결연한 의지와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기 위한 절박한 소원이 담겨있다. 10경주가 있는 오늘 매 경기마다 열두十頭의 출주마중 2두를 가려내 대박을 터트리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단승식이나 연승식은 푼돈밖에 벌지 못한다. 대다수가 배당률이 높은 복승식과 두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쌍승식으로 마권을 구입하는 것이다. 배당률이 높을수록 그들의 이마에는 핏대가 서고 흥분상태로 몰입된다. 상한선이 십만 원이지만 한 경주에 기백만 원어치 마권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마다. 그들은 가방가득 지폐를 담고 귀가하는 꿈을 꾸며 참을성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천 원으로 천만 원을 벌었고 십만 원으로 억대를 벌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이길 빌면서. 그러나 10경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오후가 되면 차비마저 탈탈 털린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대다수 패트론들의 성스러운 의식은 극소수의 베테랑과 마음을 비운 고객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경주가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큰소리칠 것이다. 오늘은 기필코 잡아 낼 거야. 문제없다니까. 그러나 호언장담이다. 희망과 실망의 공존 속에서 희망이 크면 클수록 대박의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의 주머니는 한없이 초라해질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므로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예시장을 몇 바퀴 돌아 나올 즈음 사람들이 마권발매소 입구에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마권을 산 사람들은 다시 옆줄로 옮겨 또 하나의 줄을 만들고 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마권을 구입한다. 서로에게 소스source를 묻고 확신에 찬 어조로 소스를 흘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루머 형 소스일 뿐이다. 남들에게 아는 체 하려는 심리의 작용이거나 자신이 구입한 마권의 배당률을 높이기 위해 다른 마권을 사도록 유도하는 소스들이다. 고배당에 대한 욕구는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절대적 심리로 작용한다. 마음을 비우지 않는 사람들은 루머형 소스에 기대며 부푼 희망을 품었다가 절망하곤 한다. 그들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적중률이 높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다. 알면서도 대박의 유혹에 심취해 모른 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대박이란 뿌리칠 수 없는,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 아니던가. 한평생 살면서 한번쯤 대박을 맞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난쟁이 아버지는 대박을 꿈꾸었었다. 그러나 당신 생애는 그야말로 쪽박이었다. 나는 패트론들에게 제발 쪽박은 차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쪽박이야말로 은하궤도를 유영하는 별의 무리에서 낙오된 빛없는 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낙오 되는 순간 모든 존재는 격리되어 사라지고 만다. 쓸쓸히 사라지는 초라한 별. 그 존재야말로 잔인한 형벌이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스스로 그 잔인한 형벌을 즐기고 싶어 몸부림치는지도 모른다.
나는 예시장을 나오며 아주 잠깐 하늘을 쳐다본다. 보슬비의 미립자가 얼굴에 끈적이듯 달라붙는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보슬비는 그칠 줄 모른다. 나는 비 내리는 날이 좋다. 보슬비는 고즈넉해서 좋고 장대비는 바람을 몰고 와 단조로운 삶의 여백을 두드려 내면 깊이 처박아 두었던 그리움을 종일 펼쳐내 쓰다듬을 수 있어서 좋다. 그녀의 얼굴이 설핏 떠오른다. 보슬비 촉촉이 내리던 새벽 그녀는 떠났다. 그녀는 떠나기 며칠 전 내 목에 커다란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은줄에는 은빛으로 도금된 커다란 말발굽이 달려 있었다. 이 목걸이는 네 외증조할아버지한테서 받은 거란다. 너에게 선물로 주마.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구나. 이 목걸이를 매일 걸고 다니렴. 그럼 네게 행운을 가져다 줄 거다. 그녀는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흐느껴 울었다.
술독에 빠진 아버지는 그녀가 떠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이 좋아서 제주도로 간 것이다. 아니다. 강원도 그 산골짜기가 지긋지긋해서 떠난 것이다. 일궈먹던 밭과 집을 투견장에 갖다 바친 아버지가 죽도록 얻어맞고 돌아온 후에 그녀는 떠났다.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원기회복을 하더니 결혼패물만은 절대 안 된다며 패물상자를 온몸으로 사수하던 그녀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고는 다시 투견장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새벽부터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는 오래도록 나를 껴안고 울더니 말없이 떠났다. 나는 그때 깨어있었고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발소리가 방에서부터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래도록 어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혼자 누워 있는 방이 너무 고요하고 쓸쓸해지자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멀리 산길을 바라보며 훌쩍거렸다. 보슬비 내리는 아직 박명인 산길은 고즈넉했고 멀리 흰 옷이 나풀거리며 한 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께니 밤일이라도 잘 해 주던가. 말자지를 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더래니끼니. 그녀가 떠난 며칠 후, 나는 등교할 때마다 당산나무 정자 밑에서 동네 아낙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 말이랑 거시기 한 거 아닌가 몰라. 새벽마다 마구간에서 나오는 모습을 많이 봤더랬지. 아이고오, 망측해라.
동네 사람들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옆집 마구간에서 벌건 말자지를 잡고 울고 있었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말자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말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아이들이 놀리거나 말거나 나는 그날 새벽 그녀의 포근한 품을 떠올렸고 들큼한 젖내음과 따스한 온기를 잊지 못해 그녀를 찾아다녔다. 아이들은 내 목에 걸린 내 얼굴크기만한 말발굽을 보고 정말 말의 자식이 틀림없다고 떠들었다.
나는 유도마誘導馬를 따라 경주로로 출장한다. 경주를 진행하기 전 경주로의 출장은 출주마의 근육을 풀어주고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마지막 준비운동이다. 경주로를 출장하므로 해서 말은 주로상태를 확인하며 경주에 적응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다. 말이 자신감을 얻을수록 기수에게 그 기운이 투지로 뻗쳐오고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된다. 말이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울수록 경주는 예상외로 선전할 수 있다. 지금 작은탄생의 움직임은 아주 경쾌하고 부드럽다. 나는 그런 말에게 더없는 고마움과 애정을 보내며 작은탄생과 함께 선착으로 홈스트레치를 돌파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정식기수로 등극하는 순간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 두 팔을 벌릴 것만 같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말은 있잖니. 이렇게 쓰다듬어야 좋아한단다. 물오름 들녘에 서서 그녀는 내게 말의 볼과 갈기를 쓰다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내 작은 머리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쓰다듬던 그녀의 손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사리 손을 꼭 쥐어 주었을 때 나는 말갈기를 쓰다듬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말이란 녀석은 외롭고 마음 약해서 부드럽게 타일러주고 쓰다듬어주면 좋아한다고 했다. 말은 혼자 있으면 외로워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던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음을 나는 기억한다. 어쩌면 그녀는 마구간에 홀로 있던 수말이 외로움을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감감무소식인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 또한 너무 외로워 말과 함께 서로의 외로움을 위무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별은 그 별의 주인이 희망을 품었을 때 그 희망을 먹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운이란 실체는 무엇을 먹고 성장하는 것일까요.
나에겐 별이 없었습니다. 내 가슴속에 별이 없었으므로 이제 막 알기 시작한—오래전부터 꿈속에 나타났던, 별이었다고 생각했던—성운을 나의 희망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운도 희망을 먹고 자랄 수 있을까, 내심 자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면서도, 나는 별과 같이 퍼렇게 빛을 발하기를 기원하며 붉은 성운을 나의 행운의 지표로 삼고자 했습니다. 더 이상 내게는 다른 그 무엇도 행운의 지표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주고 간 은빛말굽 목걸이도 7개월째 행운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앞으로의 행운도 멀고 먼 아득한 존재로만 느껴져 나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빛을 발하는 성운에게 희망을 걸고, 그 빛의 힘을 빌려 무력감을 탈출하고픈 욕망이 내면에서 아주 강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나에겐 절박함이었습니다.
나는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붉은 성운의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행운의 지표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순간이었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잠시 눈을 감았던 것인데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잠깐 졸았지만 나는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우주를 유영하는 붉은 성운의 입자들이 내 몸속으로 미세하게 박혀들더니 폐부 전체를 장악하면서 놀라우리만치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빠르게 숨을 몰아쉬며 성운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성운은 폐부 전체를 장악하고 신체의 내면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을 향해 스스로의 영역을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듯 아주 빠르게 확장하며 거대해져 갔습니다. 따라서 내 몸도 성운과 같이 커져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들뜬 기분으로 성운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습니다. 성운의 붉은 빛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렬해지면서 몸 밖으로 튕겨나가기 위해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몸속에서 스프링처럼 탄력적이면서도 대담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붉은 빛이 피하지방조직을 뚫고 몸 밖으로 서서히 나오려는 순간 나는 온몸이 터질 듯한 격정적인 열기 때문에 눈을 떴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기상 시간은 한 시간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는데, 내 키가 조금 자란 듯 느껴졌습니다. 나는 피부를 만져보았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서 붉은 빛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폐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붉은 빛의 존재를 확인하려 웃옷을 벗었지만 붉은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갈빗대가 마른 거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깡마른 모습만 보였을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입을 크게 벌려 거울 속에 비친 내 몸속 어딘가에 있을 붉은 빛의 존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목 젖 속에 붉은 혀뿌리와 검고 어두운 터널 같은 구멍만 보일뿐이었습니다. 몸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해 빛의 미립자들끼리 서로 투쟁하며 먼저 거죽을 찢고 튀어나오려는 듯 팽창하던 성운의 실체는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조바심에 다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경주로에 들어서자 팡파르가 울리고 관람석에 앉아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패트론들은 자신들이 배팅한 번호를 가진 출주마와 기수에게 더없는 존경의 눈빛과 기대에 찬 환호를 보내며 잠재된 투지를 끌어올려주기 때문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럴 때 눈앞에 주희가 있었다면 내가 먼저 ‘adieu~’ 하고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아니다. 경마의 꽃인 기수와의 애틋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만들어보자고 주희에게 하소연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패트론들에게 말의 컨디션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달린다.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불고 있다. 안개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완강하게 버티고 있지만 오늘 경주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지독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지만 않는다면 경주가 취소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주로상태는 포화상태다. 주로에 깔린 모래가 말발굽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상태이므로 속도는 떨어질 것이다. 작은탄생은 자신의 발굽에 달라붙는 모래의 습함을 아는지 상완골과 요골의 운동 각도를 크게 벌리고 뒷다리를 지면 깊이 박고 있다. 참으로 총명한 말이다.
경주로를 돌면서 나는 말 등에 가슴을 착 붙인다. 나의 체구는 너무 작고 가벼우므로 말이 움직임을 따라 허공으로 통통 튀어 오른다. 내 기분까지 통통 튀어 오른다. 말 등이 따스하고 포근하다. 그녀의 품에 안겼을 때도 이처럼 편안하고 포근했다. 주희가 안아주었을 때도 포근했다. 동네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넌 말의 자식이야. 잠지도 말만 하잖아. 어쩌면 나는 아이들이 노래하던 말의 자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 등이 편안할 리가 없다. 정말 그녀는 말과 관계를 해서 나를 낳았을까. 아직까지 말과 관계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이들 목소리에 섞인 주희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너는 다 볼품없는데 이거 하나는 참 커서 좋아. 단단하면서도 무척 뜨거워. 주희는 내 성기를 잡고 흔들더니 제 몸 깊숙이 집어넣으며 몸부림쳤다.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주희는 하늘로 솟구치며 탄성을 질렀다. 나는 그런 주희가 조금은 무서웠다. 혹시 내 그것이 닳아 없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주희가 하늘로 솟구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라 나는 두려웠다. 말굽은 닳아 없어지기 전에 새로 갈아주어야 한단다. 그래야 말을 보호할 수 있고 건강한 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란다. 은빛목걸이를 쓰다듬던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인생도 똑같은 거란다. 닳아 없어지기 전에 새로운 굽으로 바꿔주어야만 해. 무언가를 찾고자 갈구한다면 말이다. 네가 크면 알게 될 거다.
나는 그녀가 했던 말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 달에 한번 정도 말굽을 갈아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인생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무얼 갈아줘야 하는지 그 말뜻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아직 내가 완전한 어른이 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희가 매일 밤마다 내 성기를 잡고 온몸으로 비벼댈 때면 정말이지 오래된 말굽과 같이 그것이 닳아 없어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웠다. 내 그것은 말굽처럼 어떻게 새것으로 갈아줄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그것은 주희만 보면 힘을 잃었고 조금씩 죽어갔다. 주희는 축 쳐진 내 그것을 잡고 화를 냈고 나를 천천히 멀리하기 시작했다.
너 그거 아니? 떠나기 전 주희가 빈정대듯 말했다. 뭘?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오메가 성운 말야. 그게 뭔데? 네 목에 걸린 게 오메가야. 말굽 성운이라고도 해. 주희는 길고 긴 손가락으로 내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르고 목걸이를 걸고 다녔니? 선물로 받은 거야! 그래? 넌 그걸 차고 있어서 아랫도리가 말처럼 됐나 보다, 킥킥. 오메가성운은 성단 주변을 배회하는 먼지덩어리에 불과해. 너에게 더 이상 행운은 없어.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건 행운의 목걸이야! 주희가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마. 오메가성운은 자꾸 팽창되면 폭발해서 죽어 버려. 지금의 네 것처럼 말야. 킥킥. 주희는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따라 웃었지만 괜히 씁쓸했고 슬퍼졌다.
지나왔던 경주로를 되돌아 발주기를 향해 가면서 관람석을 한번 쳐다본다. 마권발매가 마감된 지금 급속 하향하며 배당률을 나타내던 빨간 숫자는 멎어있다. 패트론들은 자신이 배팅한 번호를 확인하고 배당률을 예시한 전광판을 쳐다보며 초조해 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단한 긴장과 기대로 입안이 바짝 오므라들고 있을 것이다. 고배당이 터지고, 그 주인공이 제발 자신이길 자신들의 희망인 별들에게 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소원은 앞으로 몇 분 후에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운이 좋아 대박을 거머쥐면 천상에서 훨훨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운 좋은 별과 나쁜 별은 어떻게 생긴 별들인지 나는 모른다. 아버지는 자신의 체구는 초라하여 볼품없으나 희망을 향한 자신의 별만큼은 아주 크면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오늘 투견장에 가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거라며 그녀를 사정없이 패주고는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서곤 했다. 정말이지 아버지 말처럼 별의 크기와 빛이 밝기에 따라 행운의 크기가 달라지는지도 모른다.
밤새 꿈속에서 희망과 행운을 안겨주고자 발광했던 패트론들의 별은 얼마나 크고 밝게 빛나는 별들인지 나는 무척 궁금해진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초라한 별을 가슴에 품고 루머소스에 흔들려버린 자신을 원망하며 어깨를 늘어뜨릴까. 중력에 의해 형성된 요란擾亂을 냉정히 거부하지 못하고 낙오된 별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잠시 생각해 본다. 낙오된 별들은 성단星團조직에서 냉정하게 거부할 것이다. 동네를 넘어 읍내에서까지 철저히 외면당하고 고립되어 한없이 초라한 몰골로 술독에 빠져버린 아버지처럼 말이다.
나는 패트론들이 몇 번 말에 배팅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7번마를 선착으로 배팅했을 것이다. 7번마는 추입마로 선천적인 영향을 받아 지구력이 아주 강하다. 경주 혼전시 순발력 또한 강하지만 오늘처럼 보슬비가 내릴 때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초보자들은 단, 연승식에 푼돈을 걸고, 대박의 꿈을 꾸는 이들은 쌍승식과 복승식에 걸려 있는 몇 십 배, 몇 백배의 고배당에 투자했을 것이다. 오늘의 우승마는 3번과 2번이 틀림없다. 2번마는 출주경력 횟수로나 통산전적으로나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아주 훌륭한 말이다. 예시장에서 잠깐 보았을 때도 2번마의 컨디션은 아주 좋아 보였다. 발굽도 평평하고 중간크기로 보슬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씨에 속력은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다른 말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그러나 나는 2번마를 제치고 선착 할 것이다. 오늘 아침 장안소에서 출주마필을 검사하고 마필계량을 측정하는 사이, 내 가슴속에 자라던 붉은 성운이 극도로 팽창하더니 조금씩 피하지방조직을 뚫고 용수철처럼 튕겨 나와 아주 강렬한 빛으로 발산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나만의 붉은 성운이 그토록 강렬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는 데 고무했고 우승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확신은 오늘 정식기수로 등극하는데 2번마는 아주 좋은 희생물이 될 것이라고 나는 조금 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탄생이 갖고 있는 3번의 배당금은 979.5라고 전광판에 붉은 숫자로 찍혀 있다. 누군가 몇 백 원 내지 몇 만 원의 푼돈을 작은탄생에게 배팅했다는 증거다. 그들은 운이 좋아 오늘 작은탄생과 나로 인해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의 배당금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옆에서 천천히 달리고 있는 2번기수를 흘끔 쳐다본다. 그의 입술이 냉정하리만치 굳게 닫혀있다. 그는 정식기수 타이틀을 움켜쥐기 위해 19개월의 고통을 인내해온 훌륭한 기수다. 두 번의 낙마로 대퇴부 골절상을 입은 그는 기수생활도 이젠 끝이라는 주변의 우려와 안타까움을 비웃으며 재활치료로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8경주에 출주하면서 놀랍게도 전승을 거두며 39승 고지에 올랐다. 오늘 그는 나처럼 승착勝着만 하면 정식기수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옆에 있어 조금 불안하다. 그는 너무 강인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붉은 별의 강렬한 빛의 힘을 빌어 반드시 우승하고야 말 것이다. 나는 어금니를 바짝 깨물고 그를 노려본다. 멋지게 한판 붙어보자.
어머니.
우주의 실루엣’이란 책 속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새벽마다 꿈속에 보이던 그 붉은별은 궁수자리에 있는 산광성운散光星雲이 확실했습니다. NGC6618 또는 M17로도 불리는 거대한 성운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새벽의 꿈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동그란 붉은 원형 속에 검고 텅 빈 공간은 마치 말굽의 모양처럼 보였고, 붉은빛 한쪽 주변으로 푸른빛이 조금씩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지해졌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책장을 넘기며 M17이라는 성운은 남서쪽하늘에서 빛나는 거대한 발광성운으로 신생별을 만들며 활발하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폭발하여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가슴속으로부터 울리는 어떤 알 수 없는 강한 떨림을 감지하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그 붉은 성운이 금방이라도 피하지방조직을 뚫고 폭발하며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심장 속에서 펄떡이는 붉은빛이 보였고 성운을 둘러싼 입자들이 서로를 삼투하며 고도로 응축되더니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그 빛 속을 뚫고 들어가자 성운 중심부로 우주의 기체와 먼지미립자들이 아주 빠르게 융합하며 고밀도 상태로 전환하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붉은 에너지가 급속도로 팽창하며 피하지방조직을 뚫기 위해 모세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나는 그 빛의 빠른 속도와 팽창력에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을 뜬 나는 주로를 질주하고픈 강렬한 욕구가 육십 조나 되는 세포와 이백여 개의 골격과 육백 오십여 개의 근육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음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깡마른 몸뚱이에서 근육들이 펄떡펄떡 일어서며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발주요원의 안내에 따라 3번 스타팅게이트starting gate 속으로 들어간다. 오늘의 경주에서 단 한 번의 출주기회가 주어진 지금 나는 터져 나오려는 흥분으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이제 우승만 하면 정식기수가 되는 것이다. 작은탄생은 3살 된 제주산마로 신마新馬다. 장구단배長軀短背로서 장안소에서 마필체중계량 확인 결과는 268kg다. 저번 주에는 전력질주라는 재래마를 타고 경주초반 선두로 질주하다가 중반 추입을 당해 6착했다. 가급적이면 선착을 해야만 한다. 정식기수로 등극하는데 선착을 할 때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고 조교는 말했다. 지금의 경주는 서울과 제주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교차 쌍승식에 배팅할 수 있는 1400M 2경주다. 전국 경마 패트론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신마가 선착한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예상을 뒤엎고 1등으로 들어올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녀를 찾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조교말대로 바로 선착이다. 나는 조금 무리하기로 한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보슬비에 젖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리에 찬 납주머니를 조금 밑으로 내린다. 허벅지에 손바닥에 묻은 물기를 닦고 고삐를 살짝 비틀어 말에게 긴장을 유도시킨다. 그리고 은빛말굽 목걸이에 입맞춤한다. 은빛말굽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지금 작은탄생은 전신의 근육 속에 에너지를 한껏 응축한 상태로 서 있다. 빨리 뛰쳐나가 전력 질주하고 싶다는 갈망이 폭발직전에 돌입했음을 나는 감지한다. 그래, 너도 내 마음을 읽었구나. 이제 준비해 둬. 나는 말에게 속삭인다. 나는 헐거워진 헬멧 버클을 단단히 조인다. 잠시 눈을 감고 길게 호흡을 고른다.
기상 벨이 울렸습니다. 나는 책을 덮고 당신이 내게 준 목걸이를 만져보았습니다. 말굽목걸이가 M17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행운의 에너지가 다되었다고 생각했던 은빛말굽목걸이에서 강렬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자 나는 붉은 성운을 나의 지표로 삼았다는 사실을 무척 대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침구보를 하고, 식사를 하고 마방을 돌고 오늘 경주와 관련된 출주점검을 하면서도, M17의 에너지가 몸속에서 거침없이 팽창하고 있음을 느끼며 터져 나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7개월 동안 내 전신을 지배했던 무력감은 오늘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사라질 것임을 절실히 믿으며, 폭발하여 강렬한 추진력으로 홈스트레치를 돌파할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1승만 올리면 내 생애 소원인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그 기쁨이 절정에 달아올라 마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내 성장하지 못한 작은 키는 당신을 만나자마자 훌쩍 커버릴 것만 같아 심장은 불규칙적으로 요동칩니다. 내 오로지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어 기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보슬비에 젖은 주로는 고요와 정적에 묻혀있다. 안개가 조금씩 짙어지고 있다. 경주에 장애를 받을 만큼 짙은 안개는 아니다. 이제 저 주로를 달려 홈스트레치를 돌파하면 되는 것이다. 1분 40여초 후면 승패가 난다. 나는 내 목에 걸린 은빛말굽이 그녀가 알아볼 수 있도록 보슬비 오는 주로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빈다. 이제 내 몸속에 붉은 성운마저 자라나고 있으므로 은빛말굽은 붉은 성운과 더불어 더욱 강렬한 빛을 낼 것이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오!
사!
삼!
나는 침을 꼴깍 삼킨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친다. 폐쇄공간인 게이트 속. 단단한 긴장으로 호흡이 급격히 거칠어진다. 짧은 호흡으로 아주 빠르게 숨을 고른다. 발주요원 깃발이 올랐다. 순간 탁! 소리가 나며 스타팅게이트가 열렸다. 가자! 나는 고삐를 내리쳤다.
말발굽 소리에 주로의 정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출주마들의 굽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옴을 느끼는 순간 작은탄생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다급하게 말의 늑골을 차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작은탄생은 아주 짧게 울부짖더니 엉거주춤 옆으로 뛰쳐나갔다. 작은탄생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은 아찔해졌다. 신마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거네. 부담 갖지 말고 경주에 임하는 게 좋지. 어제 저녁, 말발굽을 갈아주던 노인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말을 타고 경주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나는 어깨를 두드리는 노인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반드시 선착해서 정식기수가 될 거예요.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아무리 경험이 없어도 그렇지. 1승을 올리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날들이 찰나 스쳐 지나갔다. 제발! 나는 고삐를 힘껏 당겼다가 풀고는 채찍을 강하게 내리쳤다. 작은탄생이 겅중겅중 앞으로 뛰었다. 다시 한 번 채찍을 내리쳤다. 작은탄생이 천천히 트랙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제발 달려라. 제발 달려줘.
작은탄생이 자신감을 얻은 듯 했고 플레이를 찾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주로에 말굽을 힘차게 박으며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총알처럼 가차없이 질주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강렬한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작은탄생은 꼴찌에서 앞선 말들을 하나씩 제치고 4번대로 질주했다. 보슬비가 바늘처럼 얼굴을 후벼 팠다. 예상했던 대로 2번마가 선두를 선점하고 있었다. 그 뒤로 복병인 9번마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나는 작은탄생을 재촉했다. 3코너에서 작은탄생은 응축된 에너지가 터져 나왔는지 거칠게 속력을 내며 4코너를 돌고 우회할 때 2번마를 제치고 선두에 섰다. 좋아! 작은탄생! 더 빨리! 이제 정식기수로 등극하는 일만 남았어. 나는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작은탄생은 결승점을 향해 바람처럼 질주했다. 2번 말과는 대차였다. 나는 홈스트레치와 불과 50여 미터를 남기자 정식기수가 되었다는 기쁨으로 전신이 충만해짐을 느꼈고 흥분은 절정에 달아올랐다. 바람처럼 달리는 작은탄생 위에서 가슴을 활짝 폈다. 보슬비가 질기게 내려오는 홈스트레치 건너편에서 그녀가 웃고 있었다. 나는 빛나는 은빛말굽 목걸이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몸속에서 팽창하고 있던 붉은 빛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더니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강렬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무언가 삐끗, 하는 느낌을 받는 듯하더니 나는 그대로 작은탄생과 함께 주로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주로를 한 바퀴 구른 말은 벌떡 일어나 홈스트레치를 넘어 저 홀로 절뚝이며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를 따라 경주마들이 홈스트레치를 밟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털썩 주로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이 끝도 없는 늪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감겨지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득히 높은 우주 끝에서 초신성超新星 폭발음이 들리더니 이제껏 보지 못했던 강렬하면서도 눈부신 빛줄기 쏟아져 내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붉은 파편 한 조각이 몸속 깊숙이 박힘을 느낄 때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고 의식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주로 깊이 머리를 박고 말았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여기가 어딜까. 나는 몸을 뒤척여본다. 전신이 석고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다. 옴짝 못햄수다 예. 몰을 너무 거칠게 몰안 푸더전 마씀. 그러게 말이야. 침착했던 녀석이었는데……. 사람들이 소곤대고 있다. 다친 말은 이틀 전에 안락사 시켰다는군. 그나저나 앞으로 기수생활은 가능한 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래도록…….
나는 꿈을 꾼다. 세상은 온통 암흑에 쌓여 있다. 어디선가 밝은 빛줄기 하나 별똥별로 스러진다. 한 무리의 성단에서 낙오된 별일 것이다. 우주에서 방황하는 별을 본다. 별은 안주할 곳을 잃어 어둠속을 헤매고 있다. 나는 그 별을 가슴에 품고 우주를 유영한다. 갑자기 정체 모를 비애가 엄습해온다. 울고 싶다. 경마공원으로 가는 나를 발견한다.
경마공원에는 별들이 산다. 우주를 향해 자신의 빛을 관통시키려 애쓰고 있는 기수들의 별, 패트론들의 별. 찬란한 빛을 뿜었다가 스스로 빛을 잃어가는 별들이 많이, 아주 많이 산다. 그들은 빛이 없다. 그래서인지 빛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별을 찾는다. 그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거대한 성단조직에서 찬란히 빛나는 신생별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아직은 수습기수인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유민∙본명 김성군.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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