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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①/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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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①
마침내 ‘모심’의 시가 지구를 구하리라
정우영|시인
나는 전쟁을 인류가 저지른 가장 참혹한 도발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범죄이다. 다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공격의 무기를 치켜들었을 때 나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지우고 ‘지구의 공적’이라고 하늘에다 썼다. 처참하게 찢겨지는 저 여리고 어린 뭇 생명들을 보아라. 여기에 무슨 명분이 필요할 것인가. 저 낱낱의 우주보다 더 귀한 가치가 세상에 있는가. 진저리치는 분노와 통곡을 삼키며 모진 학살을 지켜봐야 하는 대지의 신음은 또 어쩔 것인가.
나는 새삼 몸부림을 친다. 절로 “아이구, 어머니!”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머니의 마음, 모심母心만이 이와 같은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모심 아니고는 안 된다. 모심으로 모시는 생명 사랑, 그 대지적 포용 아니고는 이 전쟁과 약탈과 욕망으로 치달려 가는 지구적 위기를 극복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남성과 양, 하늘의 눈이 아니라, 여성과 음, 땅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그래서 남성적 문명보다는 차라리 여성적 야만을 택해 그 혼돈 속에서 지친 몸과 맘을 누이고 싶다. 이제 나는 사냥이 아니라, 채집의 시대로 들어서고 싶다.
이걸 퇴행이라 부르는 이도 분명 있을 테지만, 퇴행이면 또 어떤가. 그 퇴행이 죽음과 절망의 공포를 넘어서는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선택해야 하리라. 우리에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기득권을 다 버리는 이들 또한 날로 늘어나고 있다. ‘도심’이라는 문명 속 야만에서 ‘숲’이라는 비문명 평화 속으로의 아름다운 이전移轉이다. 나는 그 이전에서 죽임이 아닌 생명을 본다.
나는 문학도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리라고 여긴다. 지금은 약간 퇴색해 버린 유행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한동안 생태문학의 전개는 상당히 눈부신 바 있었다. 특히 생태시의 울림은 적잖은 성과물과 메아리를 풀어냈다. 너무 재바른 사유와 서투른 접근이 생태시의 위용을 많이 떨어뜨려 놓기는 했어도 그 의미까지 바래버린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관심 갖는 부분은 생태시의 태동胎動이다. 굳이 거명하자면, 고정희, 허수경, 나희덕, 김선우 등과 같은 여성시인들의 등장이다. 나는 이들 시인에게서 생태시의 모체를 본다. 이들 모성성의 시인들에 의해 우리 생태시의 흐름이 비로소 확연해졌다고 여긴다. 그 이전의 여성 시인들에게서도 생태시의 양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시인에 이르러 대지적 모심(이때의 ‘모심’은 ‘어미의 마음’이자, ‘존귀한 대상을 받드는 것’으로서의 모심이다)에 의한 생태시의 양상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들 이전 여성 시인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여류 시인이라는 이름도 이들의 활약과 함께 천천히 사그라졌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쓰는 시는 있지만 더 이상 여자라는 굴레에 머물지는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남성성의 세계를 압도하는 빛나는 시들이 이들에 의해 씌어지고는 했다. 차라리 시적 본류를 생산하는 어미의 모습이라고 불러야 할 두드러진 성취였다.
나는 이제 그 뒤를 잇는, ‘지금 여기의 여성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현재를 사는 시인들의 시가 궁금한 것이다. 모심의 시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고 싶은 것이다. 살생이 아니라 생장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지금 여기, 지상의 속삭임이 더 매혹적이지 않은가.
1. 달의 여자들
김사이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은 펼쳐드는 순간부터 아픔이 전달된다. 가리봉으로 상징되는 과거가 여전히 현재로 살아나 연민과 고통을 자극한다. ‘살갗으로부터 오는 긴장’이 뼛속 깊이까지 스며든다. 도저히 ‘반성하다 그만’둘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낮은 자리 사람들에게 ‘단절’과 반성 없이 지금도 여전히 끈질기게 저질러지고 있다. 우리의 누이가 당했던 고통이 이방인들과 그 딸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되고 있다. 역사적 과오라는 말은 두렵게도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이 말의 반복되는 치떨림으로 목이 멘다.
선대가 저지른 허물과 오류는 반드시 후대에 그 몇 십 배의 고통을 수반한다. 누가 이 허물을 뒤집어쓰는가. 여성들이다. 누가 역사적 과오라는 이 허물을 걷어낼 것인가. 모성이다. 모성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도 여성이고 그 허물을 걷어낼 수 있는 것도 여성이다. 모성적 포용과 모성적 든든함 없이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다. 남성이 역사의 중심에 선 이래 지금까지 여성은 늘 사회적 약자이고 늘 빼앗기는 자였으나 오래잖아 그 관계는 역전될 것이다.
구로동 가리봉오거리
불야성을 이룬 늦여름 밤
탱글탱글 여문 은행이 새끼들처럼 줄줄이 매달렸다
은행나무 밑 까만 봉고차에서
탱탱한 알들을 쑥쑥 낳는다
동그란 알에서 미끈하고 예쁜 여자들이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나비는 훨훨 날갯짓하며 날았다
30여 년 전 산업화의 발과 손이었던
여공은 노동운동사의 유물로 사라지고
사각 콘크리트 건물들이 자본의 기둥처럼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은 이곳엔
여공의 제복을 벗고 발가벗겨진 여성이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혀도 국경을 넘는 아시아 여성이
돈 벌러 홀린 듯이 모여드는데
노래방에서 식당 모텔 대화방 술집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싼 값에
노동을 팔아 삶을 사고,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어머니는 여공을 낳고 나비를 낳고
여자아이를 조선족 여자를 다시 어머니를 낳고
밥벌이에 충실하며 무던히도 살았건만
여전히 월세방 면치 못한 징그러운 밑바닥
안간힘 써서 희망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날갯짓에
찢어지는 나비의 몸뚱이
30년 후에도 나는 내 딸들은
대물림으로 이어받은 몸뚱이 팔고 있겠지
―「달의 여자들」 전문
이런 나와는 달리, 김사이는 위의 시 「달의 여자들」에서 보면, 미래마저도 침탈될 것으로 그린다. 그러나 나는 그 저변을 흐르는 분노를 읽는다.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느끼는 것이다. 달은 뱀파이어에게만 정기를 심어 놓은 게 아니다. ‘달의 여자들’에게도 정기를 심어 놓았을 것이다. 다만, 지금 ‘달의 여자들’이 그 정기를, 그 정기의 힘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 결계가 풀리는 날, ‘달의 여자들’은 “동그란 알에서” “허물을 벗은 미끈하고 예쁜 여자들”, 곧 “훨훨 날갯짓하며 날” “아름다운 나비”들을 깨어나게 할 것이다. 이 각성은, “30년 후에도 나는 내 딸들은/대물림으로 이어받은 몸뚱이 팔고 있겠지”라는 언술을 확 뒤집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체념과는 다르게 비애의 그늘진 힘 같은 게 서려 있다. 그는 이런 힘을 「여름날의 고요」에서 곡선의 힘으로 그리는데, 나는 이를 모성적 성채로 본다.
열려진 창문 너머로 여자의 둥그스름한 등이 보인다 미싱을 돌리는 여자의 등은 10여 년 동안 조금씩 둥글게 휘어지고 있다 그 순한 등 안쪽의 얼굴은 자주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여전히 둥글게 앉아 있다 드르륵드르륵 미싱은 돌고, 신자유주의가 바늘 끝의 실을 타고 세계화를 바느질해도 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기웃거려도 여자의 등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여름날의 고요」 전문
여자의 등이 휘어지는 것은 지구를 닮아서이다, 라고 나는 쓰고 싶다. 그 등은 지구처럼 고통마저 감싸 안은 포용의 등이면서 동시에 오랜 가난에 의해 고난의 행군으로 단련된 등이기도 하다. 여전히 “드르륵드르륵 미싱은 돌고, 신자유주의가 바늘 끝의 실을 타고 세계화를 바느질해도” 그 등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등은 또 무엇보다 활대의 등이어서 활대같이 휘어지고 휘어지다가 부당함이 극도에 다다르면, 어느 순간 불시에 퉁 튕겨 나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등은 좌절과 절망을 품어 안고 쪼그라드는 그런 등이 아니다. 자식과 미래의 소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등을 내어주는 방어와 방비의 모성적 성채인 것이다.
2. 세상의 등뼈
정끝별의 시집 '와락'에 실린 시들은 통통 튄다. 우리 시에서 드물게 만나는 생동감이다. 언어와 감성의 탄력이 팽팽하다. 그러나 그 팽팽함은 긴장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산뜻한 친밀감으로 다가온다. 음전한 여성성에 기댄다기보다는 물오른 여성성에 기댄다고 할까. ‘와락’ 안겨오는 그의 시는 당혹스러운 떨림으로 충만하다. 경쾌하고 활달한 여성의 발현이라고 나 할 그의 시에서 나는 시원한 모성의 손길을 느낀다. 친구 같은 모성, 어지러운 청춘의 질펀한 감정까지도 기꺼이 받아 줄 듯한 그런 모성이다. 이런 모성은 우리 통념 바깥까지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간다. 왜곡되고 비틀어진 모성애는 자칫 ‘아들의 연인’ 류의 집착에 이를 수도 있는데, 정끝별은 쿨하다. 딱 그쯤에서 멈춘다. 너저분하게 감정을 흘리지 않는다. “저린 두 몸이/서로에게 밑간이 되도록”(「저린 사랑」 중에서) 내어줄 뿐이다. 이때 그의 모성은 ‘세상의 등뼈’와도 같이 든든하다.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은,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세상의 등뼈」 전문
자, 물어보자. 세상의 등뼈처럼 내게 무언가를 대주는 그 “누군가”는 누굴까. “논에 물을 대주듯/상처에 눈물을 대주듯/끝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아낌없이 다 내어주는 그는 누굴까. 무엇인가를 “대준다는 것, 그것은”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에 답이 서려 있다. 세상에 밥이 되어주는 존재는 어미밖에는 없다. 나의 밥은 나의 어머니이다. 나의 어머니 젖이며 나의 어머니의 생애이다. 그러므로 나의 어머니는, “무작정” “전부를 들이밀며/무주공산 떨고 있는” 나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더 높은 곳으로” 나를 “올려주”고자 하고, “혈혈단신 땅에 묻힌” 나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배를 대고 내려앉아” 나를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전생애가 키운 ‘전생애의 우주’인 것이다. 나는 이처럼 존귀하다. 그러니 나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나를 지원해 주는 지극한 모성 앞에 경배 드려야 할 것이다. 모성은 나를 키우고 다시 나는 모성을 배양한다. 이게 순리다. 현실이 이를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3. 칼집
안명옥 시집 '칼'을 관류하는 것은 측은惻隱이다. 사물과 사물의 접경을 바라볼 때 그의 시선에서는 측은이 강하게 묻어난다. 때로 그의 측은은, 상처로 붉게 물들기도 하고 희생 제의에 떠받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측은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형상은 어미이다. 시집 매 페이지마다 어미의 측은한 눈이 떠올라오곤 한다.
자, 여기서 뻔한 물음 하나 던진다. ‘자신은 기꺼이 상처를 감내하면서 날선 세상을 품어 안는 이, 누굴까?’ 대부분 ‘어머니’라고 답할 것이다. 맞다, 어머니만이 자신의 상처와 흉터로 날선 세상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안명옥은 다르다. 칼집이라 답한다. 칼집, 칼의 집. 그렇다, 적절한 답이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라는 답변보다도 더 명확해 보인다.
나는 집 중에서 참 안쓰러운 집이 칼집이라 생각한다. 잘 벼린 칼을 품는 칼집일수록 더욱 안돼 보인다. 그러나 선득선득 잘 벼린 칼을 품는 칼집일수록 오히려 더 뿌듯하지 않을까. 좋은 칼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칼집이다. 칼집이 허술해서 아무 거나 베어버리는 칼이 있다면 그건 좋은 칼이 아니다.
아무리 어른 된 아픔이 저주스러워도
네 빳빳한 자세 굽히지 말아라
아무 곳에나 널 구겨 넣지 말아라
널 부러뜨리려는 누군가를
함부로 베어내지도 말아라
눈물 주르르 나는 하루를
내 품안에서 숨 고르게 하리라
칼이 지나간 자리
칼이 자라나는 네 감정을
부드러운 혀로 핥아주고
날선 네 언어들을 보듬어 주리라
이미 위험한 너를
온힘으로 떠받드는 여기가 네 아랫목이다
네가 걸어온 길을 나는 안다
나는 너를 칼로 보전해 주는
유일한 집이려니
―「칼집」 전문
최근 연쇄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라는 칼이 여럿 나타나고 있다. 정신 속에 정서가 아니라 칼을 기르는 자들이다. 이런 사이코패스들은 선천적으로 감정 없는 칼의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데, 이런 경향의 사람들이 다 사이코패스 살인자로 자라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따스한 모성에 감싸인 자는 사이코패스라는 칼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성이라는 힘이 선천적인 사이코패스 충동마저도 제어하는 것이다. 그런 점, 칼집은 어미이다. “칼이 자라나는 네 감정을/부드러운 혀로 핥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어미밖에는 없다. 그게 칼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부드러운 혀로 핥아주는 행위, 우리는 이런 걸 숭고한 희생이라 말한다.
나는 세상을 교화하는 극진한 힘은 바로 이 숭고한 희생에서 나온다고 믿는데, 모성애가 대표적이라 본다. 도탄에 빠진 지구를 구할 수 있는 힘, 제의적 성격의 힘이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모성이라 말할 수 있다. 모성이 지구를 구하리라, 라는 진술은 그러므로 허구가 아니다. 실현 가능하고 마땅히 실현해야 할 지구 공동의 슬로건이다. “이미 위험한 너를/온힘으로 떠받드는 여기(모성애)가 네 아랫목이다.” 지구여.
4. 승천
아직도 삶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은 요원한 것이어서 용산에서 안타까운 목숨들이 또 스러졌다. 한동안 눈에 보이지 않아서 영영 사라진 것처럼 생각한 죽음의 행렬이 또 나타날까 봐 나는 전전긍긍이다. 죽임의 통치가 재연될 것 같은 예감 때문에 나는 오금이 저린다. 민주와 자유, 평화라는 제단 앞에 바쳐진 수많은 목숨들이 미처 다 승천하지도 못한 시점이다. 김해자 시집 '축제'의 기원祈願은 그래서 미완성이다. 그의 기원이 미완성인 채로 떠도는 게 몹시 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그의 기원과 모심의 보살행이 완성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김해자 시는 대표적인 모심의 시이다. 어미의 마음으로서의 모심母心과 나 아닌 것들을 받들어 모시는 모심의 보살행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다사롭게 구현된 시편들도 드물다. 시의 곡진함은 눈물의 중추를 자극하여 마음 깊은 곳까지 젖게 한다. 젖은 마음이 닦는 이 길은 죽음 저 너머까지 닿는다. 아직 채 피우지 못한 이들의 꽃다운 목숨들이 한스럽지 않도록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반쯤 열”어 두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독다독 보살 같은 위무의 손길 펼치는 것이다.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안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2과 김정례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
방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승천」 전문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라는 쓰다 만 편지글과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반쯤 열린 눈/밖에 하얀 눈”의 대비가 이렇게 참혹하고 처연할 수가 없다. 나는 “방문턱에 걸린 두 발”이 내 발인 것 같아 차마 눈 걸음 떼지 못한다. 내 눈은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과 “반쯤 열린 눈”에 포박되어 있다. 정말 장한 노동으로 삶을 영위해 가던 한 젊은이가 돌연, 그 목숨 접어야 할 때 그 눈 어찌 감으랴. 김해자는 ‘하얀 눈’으로 그 눈 감기우고자 한다. 찢어질 것 같은 한스러움 이제 그만 접으라 한다. ‘승천’이라는 제목은 그리하여 참으로 따스하다. 이 제목으로 하여 이승 삶의 모든 구차함과 구질구질함, 목 메이는 미련 등이 둥실 떠올라 스르르 사라진다. ‘김정례’라는 개인은 이제 개인이 아니다. 승천하면서 그는 무릇 그와 같이 돌연, 삶을 접어버린 이들의 한까지도 해원해서 가져간 것이다. 이런 죽음이므로 김해자는 감히 ‘승천’이라 부르고 또 다음과 같은 축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물길 뚫고 전진하는 어린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떻게 말도 없이 서로 알아서
제각각 한 자리를 잡아 어떤 놈은 머리가 되고
어떤 놈은 허리가 되고 꼬리도 되면서 한몸 이루어
물길 헤쳐 나아가는 늠름한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난바다 물너울 헤치고 인도양 지나 남아프리카까지
가다가 어떤 놈은 가오리 떼 입 속으로 삼켜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군함새의 부리에 찢겨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거대한 고래상어의 먹이가 되지만
죽음이 삼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빙글빙글 춤추듯
나아가는 수십만 정어리 떼,
끝내는 살아남아 다음 생을 낳고야 마는
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를 보았는가
수많은 하나가 모여 하나를 이루었다면
하나가 가고 하나가 태어난다면
죽음이란 애당초 없는 것
삶이 저리 찬란한 율동이라면
죽음 또한 축제가 아니겠느냐
영원 또한 저기 있지 않겠는가
―「축제」 전문
“끝내는 살아남아 다음 생을 낳고야 마는/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를 보았는가” 하고 속삭이는 시인의 음성에 내 몸은 떨리고 내 정신은 송연해진다. 그리고 다시 그가 “죽음이란 애당초 없는 것/삶이 저리 찬란한 율동이라면/죽음 또한 축제가 아니겠느냐” 하고 넌지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풀어 버릴 때 ‘나’는 사라지고 ‘영원’만이 남는다. 그러나 그 영원은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 된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풀어져 하나로 엮이듯 경계 허물어져 뒤섞이는 것이다. “늠름한 정어리 떼”가 어찌 그냥 정어리 떼이겠는가. 저 생생한 군상들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실체 아닌가.
물길 뚫고 전진하는 어린 정어리, 그 고만고만한 것들에게 부어지는 모성의 보살핌이 넉넉하고 크다. 저 품안이라면 증오와 저주와 갈등의 모든 원천이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오로지 생명의 축제만이 으싸저싸 펼쳐질 듯싶다.
5. 무기의 마음을 녹이는 것들
서툴게나마 지금 여기서의 매혹적인 속삭임들을 펼쳐보았다. 좌절과 희망, 거룩한 충만, 측은의 포용, 보살행 축제 등으로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 시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한 곳이다. 사람살이의 사랑과 구원이다. 곡진한 보살핌과 다사로운 모심으로 세상을 살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시선詩線이 우리 시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심이 우리 사회의 내일을 열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무기를 제압하는 것은 더 강한 무기가 아니다. 무기를 녹이는 것은 무기의 마음이다. 무기에게 마음을 이입하는 것이다. 평화의 마음, 모심의 마음을 무기에게 전할 때, 무기는 무기력해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 전달 매개체의 중심에 시가 있다고 여긴다. 지구를 구하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단 한 편의 시이다. 단 한 편의 ‘모심’의 시가 새 생명의 숲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쓴다. 마침내 ‘모심’의 시가 지구를 구하리라고.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가 있음.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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