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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9/봄)/젊은시인집중조명/봄밤 외 9편/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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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봄밤 외 9편
한 여자 강물로 뛰어들었다
허공을 베며 날았다
영동대교, 청담대교, 아니면 잠실대교 어디쯤에서
꽃잎처럼 미련없이 몸 벗었을까
짙고 푸른 밤의 강 적막하다
물결마다 골을 파고 날카로운 각을 세웠다
119구조대 뜰채로 물고기 한 마리 뜨듯
여자를 한강 둔치로 건져냈다
물에 퉁퉁 부르튼 맨발,
어디 먼 길 재촉하며 가는 길이었겠다
강물도 뱉어버린
저 여자, 죽음에서도 쫓겨나
아가미 겨우 열고 닫듯 숨소리 흐리다
어디로 갈 것인가, 다시 몸을 거둬 입는다
벗어버린 신발짝을 찾아
꽃 내 지천으로 젖어 비리다
블랙커피
올해도 과꽃은 그냥, 피었어요 나는 배고프면 먹고 아프면 아이처럼 울어요 말할 때 한 자락씩 깔지 마세요 글쎄, 혹은 봐서, 라는 말 지겨워요 당신은 몸에 걸치는 슬립처럼 가벼워야 해요
천둥과 번개의 길이 다르듯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흙산에 들면 돌산이 그립고, 가슴의 A컵과 B컵은 천지차이죠 한 생에 딱 한 목숨 몸뚱이 하나에 달랑 얼굴 하나, 해바라기는 장엄하기도하죠
비개인 뒤 하늘은 말짱해요 당신이 나를 빙빙 돌 듯 지구 옆에는 화성, 그 옆에는 목성, 또 그 옆에는 토성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단순하게 돌아요
당신, 돌겠어요?
시간을 내 앞으로 쭉쭉 잡아당기다보면 올해도 과꽃은 담담하게 질 것이고, 때로는 햇빛도 뒤집히면서 깨지기도 하지요
광합성
키 큰 오동나무 한 그루
잎사귀를 넓게 펼쳐 허공을 받아낸다
그 아래 그늘이 어둡다
나무는 혼자 오래, 무엇인가를 견디는 듯
땅속에 뿌리를 단단히 박았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줄 모른다
저절로 물이 올라 싱싱한 이파리들
마치 남자 앞에 저를 맡기는 여자처럼
햇빛을 빨며, 울며, 불며, 바람 앞에 바르르 몸을 떤다
스스로를 먹이는
녹색식물이여!
톡, 톡, 톡, 크리넥스 티슈 세 장을 뽑아
미끈미끈 너무 미끈거리는
아래를 스윽 닦아낸다
꽉꽉 움켜쥔 손 안에 핀 오동꽃
어둠속에서도 창백하다
희생감각
다람쥐는 독수리 혹은 육식동물이 나타났을 때 그 것을 가장 먼저 본 녀석이 제 머리가 깨질 정도로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 부근에 있던 가족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가족을 구한 녀석은 정작 그 비명이 표적이 되어 그만 포식자에게 먹혀버리고 만다고 한다.
“멀리 가지마라, 물가에 가지마라.”
해질녘이면 또 “밥 먹어라.” 날 불러들이던 엄마, 머리에 실핏줄이 터져 쓰러졌을 때 그 목소리도 함께 깨졌다.
나 이렇게 나이 먹도록 멀쩡하게 피둥피둥 살아 연애하고, 또 연애하고 새끼 낳고 집 지니고 밥 끓여 배불리 먹는 동안 엄마,
엄마는 불안해, 엄마는 혼자 날 향해 뭐라, 뭐라, 또 소리 질렀겠지…… 그 목소리 듣고 싶어
엄마, 엄마, 왁살스레 어깨를 흔들지만 엄마, 깨어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아가리처럼 엄마를 먹었나, 먹었다. 엄마,
시
명달리 꼬부라진 길을 가다
해 아래 턱 받치고 눈 꼬리 바싹 치켜 뜬
칸나 꽃을 보았다
빨간 혀, 날름거리며
여자가 몰래 씹어 뱉는 욕 같다
고년! 참,
홀랑 까지기도 까졌지
무서운 것 하나 없다는 듯
초롱같은 눈을 뜨고
어디 다! 덤벼 봐
8월 염천에 겁도 없이
길가에 깨 벗고 서있는
고년, 원경에서도 혈흔이 낭자하다
낙인
#.
은사자*는 돌연변이다. 반짝반짝 은색의 갈기가 환하다. 먹이는 초식성으로 성정은 매우 온순하고 방어적이다. 당연히 사자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사자들과 멀리 떨어져서 초원을 누빈다. 궤도에서 이탈한 별똥별처럼 제 스스로가 빛난다.
#.
그는 하늘의 명을 받드는 사제였다. 늘, 침묵의 성소 안에 들어 사는 그를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어둠을 틈타 자전거바퀴에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 넣었다. 그는 무작정 도망치듯, 그 남자에게로 스며들었다. 세상의 눈을 피해 그들은 서로의 몸속으로 사무쳤지만, 비밀은 너무 깊고 집요해서 그는 조용히 신을 버렸다.
#.
그녀는 오늘도 뱀을 몸에 감았다. 뼈도 없는 것이, 소리도 없는 것이, 땅바닥을 스윽 기어가는 모습은 별들이 말없이 하늘의 궤도를 도는 것만큼이나 아름답다는데. 맨살에 ‘그린’이나 ‘파이톤’ 같은 징글징글한 것들을 감고 앉아서 애무하듯, 온 몸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라는데……. 그녀는 가끔 그것들을 탕으로 끓여 통째로 몸속에 잡아넣기도 한다.
#.
그는 제 집처럼 산을 들고 나는데, 함께 밥을 먹다가도 슬그머니 산으로 달아나고, 시를 쓰다가도 훌쩍 산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근사하게 양복을 빼 입고도 배낭 메고 등산화를 턱, 신고 나타난다. 그리고 뭘까, 그는 꼭 화장실에 들어갈 때 뽀득뽀득 손을 씻는다. 그럼 볼 일 본 손엔 뭘 묻혀 나오는 걸까, 제 몸에서 나온 것들만 믿는 거다.
#.
한 달에 한 번, 낮 시간에 옷을 몽땅 벗고 집안일을 한다는 ‘악녀樂女카페’가 있다. 처음에는 게시판에 올라있는 희귀한 사례들을 읽고 호기심에 한 번씩 따라했을 뿐이라는데, 알몸으로 가사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가볍고, 편리하고, 합리적이라는데, 철저하게 나의 나를 깨부수는 매혹이라는데, 무엇보다 창밖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즐긴다는 것.
#.
나 어릴 적, 애인은 내가 양다리 살짝 걸치는 것에 웬일인지 더 열광하고, 오히려 부추기며 나를 더 뜨겁게 열망 했었는데, 요즘은 영화를 봐도, 소설을 읽어도 여자 하나에 남자가 둘. 나는 모두 홀랑 까놓고 트라이앵글을 연주했었는데, 어느 순간 구원처럼 나는 그들로부터 버려져 지금도 떠돌면서…….
*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아직은 통화 중
산장능선 지나 영봉 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깊은 산속이어서 말이 뚝, 뚝, 끊어진다
반갑다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오는 당신은
누구시더라, 언젯적 누구시더라,
통화불통 지역을 지나자 찌르르 몸엣것이 돈다
내 속이지만 스스로는 닿을 수 없는 곳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몸의 말, 저릿하다
어느 세월에 잊혀진 누군가의 얼굴처럼
느닷없이 내 몸과의 교신 끊어질까, 떨린다 새빨갛게
아직은 한 달에 한 번, 나는 통화중이다
꿈 깨다
노적봉은 몸 밖의 몸이다
북한산 위문에서 용암문 쪽으로 내려오다
우회해서 겨우 당도한 곳
바위산이 내 앞에 턱 버티고 선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것 같지 않은
저 완강한 침묵, 입 꽉 다문 속내
여기가 세상의 끝인 것 같다
이 절벽 넘어갈 수 없겠다
온 몸으로 바위를 문지르며
홈과 틈을 헤집고 한 발 한 발
기어 올라가야 하겠지만
빛 한 점 들지 않는 자궁속의 태아처럼
깜깜하다
한파처럼 들이닥치는
주글주글 늙어버린 바위주름 만진다
햇빛과 바람과 물과 소리들이
소용돌이치며 다녀간 흔적 역력하다
갑자기 젖이 돌 듯 찌르르 바위 열이 올라온다
어떤 굉음에 소스라치게 놀라 깬,
꾸다 만 꿈처럼
그러나 나는 지금 편안하다
암흑도 내 집이다
살아있는 슬픔
송추 쪽에서 오르는 도봉산 길, 고갯마루 몇 굽이 넘다보면 민망하게 생긴 바위산 하나 만나게 된다. 암벽 중간이 쩍, 갈라져 계곡처럼 움푹 팬 것이 여자가 가랑이를 활짝 벌려 하초를 몽땅 드러낸 광경과 같다.
얼굴은 없고 음부만 깊이 패어있는 여자, 누구라도 그 깊은 곳을 밟고 지나서야 저 높은 봉우리에 닿을 수 있는데, 지나치는 발길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음핵을 꼭꼭 짚어 저 여성봉* 아찔한 꼭대기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늙어서나 젊어서나 누구에게나 곁을 내주었던, 한 때는 독약처럼 싱싱했을 저 여자. 얼마나 오래 시달리며 여자로 살았으면 숱한 사내들이 지나가도 물 한 방울 비칠 줄 모르게 되었을까. 음기가 살살 빠져 이제는 닳고 닳아 밋밋한 민둥산이 되었지만 메마른 샅을 연 채 여전히 살아있는 저 여자,
오봉 지나 오봉샘을 넘어 우이암에 이르도록 살아있는 슬픔이 한 땀 한 땀 내 발짝을 감는다. 낙엽만 모이다가 찢겨졌다.
* 도봉산 줄기에 있는 암벽의 이름이다.
맞서다
사진은 움직이는 빛을 붙잡는 거다
순광은 일상처럼 담담하고
역광은 칼로 베는 듯 날카롭다
간혹 사광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비명처럼 선연한 역광을 즐긴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해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한 장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의 눈은 오래 열려 있어야 하는 거다
보이는 것 말고도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
저 속의 내막을 자심하게 읽어내야 한다
본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것
시선은 집요한 애무다
나는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은 태양을 등진 채 나를 본다
눈부셔라, 총 쏘듯이 카메라의 셔터를 슛팅하자
오! 나의 아름다운 당신, 순식간 깜깜하다
시인의 말|
불면
―나는 지금 살짝 돌았거나, 약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꽃 내에 홀려 맨발로 뛰쳐나가 꽃구경하기도 하고, 어떤 굉음을 따라 두 손 두 발 휘저으며 한 없이 길을 걷기도 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공기방울처럼 머릿속에 떠다니면 그것을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 보면 새벽, 그렇게 한 밤을 까먹기 일쑤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문자로 세워져서 시가 되거나, 시적인 정신 활동을 돕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무엇에 머리끄덩이 잡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며 나는, 오늘을 통과하고 있다.
불면, 나는 그것을 제비꽃이라 부른다. 이 땅에서 나만이 볼 수 있는 내 속의 불꽃! 척박한 땅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파란꽃.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면 눈동자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광기를 담아 새파랗게 변하기도 한다. 마치 밤에도 심지를 돋아 불꽃을 일으키는 신의 장난처럼 불면은 종교 색체가 강한 무슨 제의를 닮았다. 작고 작은 인간이 신을 향해 바치는 기도 같은 것. 티베트 사람들 누구라도 일생에 한번은 순례의 길을 떠나듯, 나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밤이 되면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어디 먼 곳을 향해 간다. 일보 삼배처럼 팔, 다리, 손바닥, 팔꿈치, 무릎, 가슴과 배를 땅바닥에 대는 것도 모자라서 이마를 땅에 찧으며 오체투지로 가는, 그 길은 너무 멀고 가팔라서 종종 아침을 맞지 못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나는 왜, 도대체 어디를 향해서 밤마다 나를 살라 파란 불꽃, 제비꽃을 키우는 것일까.
폭넓게 바라보면 생존은 비극! 말없이 어떤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누구나의 생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터무니없이 작고 초라한 거다. 결국 나는 어디로 떠나가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도착하면 또 그곳은 먹고 입고 싸고 잠들지 않아도 좋은 곳일까. 이곳에서는 그곳을 향해 가고, 또 그곳에서는 또 다른 어떤 곳을 향해 가야 하는, 혹시 삶이라는 괴물은 장소를 바꾸어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윤회의 형벌 같은 것은 아닌지… 제비꽃을 옆구리에 끼고 시, 라고 생각하는 시적인 것들을 밤새 따라 다니다 보면 무섭다, 시! 우주의 중심을 한 바퀴 돌아 그만, 오늘이 순례의 끝이기를…….
손현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2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상.
시집 너를 훔친다.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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