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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신작시/유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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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영
단풍 외 1편
지난주 지리산으로 단풍놀이를 갔었다
오색 물감을 쏟아 부은 것 같은 산속을
휘둥그레 겅중대는 내 눈앞에, 순간
처음 세상을 열던 여린 연두빛 잎이 스쳤다
무슨 독에 쏘여 저리 울긋불긋해졌나
미풍처럼 다가온 사랑은
몇 번이나 뺨을 후려치고 갔는지
날것들에게 빨려 꿈마다 노랗게 빈혈이 들고
늘 모자라거나 너무 넘치는 빗물이
목을 조를 때마다 툭툭 터지던 실핏줄
불가마 같은 허공을 끼고 살아
비명소리 들리지 않았다
와와― 신나게 몰려가는 사람들
잘 구워낸 찬란한 상처 속에서
온갖 시름 풀어놓은 해맑은 얼굴에
오색 단풍물 들고 있었다
단풍은 세상을 치유할 자격이 있지
오늘 아침 내 거울 속에
고운 단풍잎 하나 영롱하게 떠있다
TV를 보며
다리를 쭉 뻗고 앉아 TV를 튼다
저 창은 영험해서 앉아 수만리를 보고
수천 년을 드나든다
저 창에서 삼라만상은 돌고 있는데
작은 바다로 혹등고래가 헤엄쳐오면
나는 절로 뱃심을 주고 숨을 뿜는다
날랜 표범이 먹이를 쫓을 땐 숨이 멎고
쫓기는 짐승 때문에 헐떡이다가
붉은 피를 헹궈내듯 단비가 쏟아지면
어느새 푸르러지는 내 숨결.
죽음을 질겅거리던 그 한 세월에도
하늘은 나를 깨끗이 간직했으리
창밖의 세상은 발버둥칠수록
점점 노예가 되는 수가 있지
고단함을 씻는 단비 같은 TV를 보며
배꼽 빠져라 웃다가 작은 감동에 눈물 맑은
외진 골 해맑은 산도라지꽃으로 앉아
나는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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