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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신작시/송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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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영
먹이사슬 외 1편
아이가 유효 기간이 훨씬 지난 우유를 먹는다
제때 버리지 못한 시간이 아이를 먹는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까마귀가 도로 한 복판에 호두를 떨어뜨린다
자동차들이 호두 껍데기를 깨뜨린다
까마귀가 호두를 먹자
자동차가 까마귀를 삼켜 버린다
배고픈 까치들이 강아지 사료를 먹으려다
갑자기 달려든 강아지에게 통째로 잡아먹힌다
무방비가 영리한 까치를 먹는다
그녀는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다
익명의 혀들이 소문을 지배하자
견뎌온 생애와 버텨 가야 할 생계를
스스로 결정한 그녀는
먹으면 안 되는 자신을 먹는다
굶주린 입은 허기를 채우는 통로 역할을 한다
먹을 것을 사이에 두고
앙칼지게 맞서기만 하는 비정한 입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
제일 만만한 자신을 먹는다
아바타
‘아바타 월드’라는 거대 통제 프로그램에서 내가 태어납니다
관리 도구 창에서 당신이 나를 꺼내주길 기다리며
창밖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시스템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나는
아바타의 허락된 구역 밖으로 멀리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 의해 철저하게 옷 입혀지고
표정 지어진 채 살아갑니다
나는 내 취향과 맞지 않는 옷을 거부할 수 없고
나 자신의 실제 감정과 전혀 다른 표정도 익숙하게 지어냅니다
비 오는 날 당신이 나에게 선글라스를 사 주면
나는 지레 놀라 알아서 얼굴을 가리고 맙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서만 내 감정이 표현되기에
당신 분신으로 살아가는 동안 불평을 할 수도 없습니다
아바타에게 아바타를 선물해 나를 달래주는 당신
나는 지극히 사무적인 당신 행동 때문에
때로는 감정이 복받쳐
차라리 내가 당신이었으면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현재 기쁨의 감정으로 설정된 나는
당신을 향해 방실방실 웃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우는지 당신은 본 적 없듯
나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 하는 게 내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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