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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유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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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41회 작성일 09-02-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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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영혼의 집 한 채
 유시연|소설가


이윤기 감독의 영화 '멋진 하루'에는 도시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자주인공 병운 역에는 하정우가 희수 역에는 전도연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며 감독의 의중이랄까, 의도가 짚어진다. 감독은 남자 주인공을 통해 조금은 어리숙하고 그러면서도 심성 고운 청년의 이미지를 심어주려 하는 게 보인다. 불안정한 여자 희수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넉넉한 태도로 감내해내는 병운에게서 현대판 돈키호테를 본다. 순수한 도시 청년 병운에게서 감독의 착한 남자 콤플렉스를 본다. 감독은 주인공을 통해 인간이 희망임을, 그리하여 인간 내면에 잠재된 선의 본령을 보여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 역시 작가의 의중이 등장인물에 투사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 적이건 간에 등장인물의 행태는 작가의 무의식의 소산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보다 몇 세기 더 오래 전 사회제도적으로 불균등한 힘의 분배가 남성에게 주어졌을 때 여성들이 의식에 눈뜨는 것을 기득권계층인 남성들은 못견뎌했다. 지식에 목마른 여성이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위험 인물로 분류된다. 특히나 지성을 겸비한 층은 책과 가까운 관계였으며 더 나아가 마녀로까지 단죄되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여성의 의식은 닫힌 세상으로부터 열린 세상으로 건너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편견이 존재하고 상처와 배신과 관계의 일그러짐이 되풀이 된다. 이 순환의 고리 틈새에 만약 작가의 시선이 머문다면 현실의 모순은 걸러지고 재해석되어 독자 앞에 펼쳐진다. 그러므로 작가의 시선은 일정 부분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작가는 끝없는 길 위를 떠돈다. 한평생 길 위에 서 있는 존재, 생의 길 위를 서성이며 멈출 수 없는 운명의 바윗덩이를 굴려올리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삶의 생채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길 위의 존재는 고독하다. 또한 외롭다. 외롭고 고독한 영혼은 사물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사물 안에 포착된 물체 즉, 인간의 군상은 작가의 내면 순례에 연민, 혹은 상처 입은 자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현실은 참담하다. 비루한 현실 저 너머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세헤라자데의 밤의 이야기처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자는 점점 줄어든다. 가벼움이 넘쳐나는 시대, 가벼움과 함께 있는 시대에 가볍지 않음이 오히려 이상한 곳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제 왕에게 죽임을 당할까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야 하는 세헤라자데처럼 작가는 밤을 고뇌한다. 밤은 길 위의 여정이다. 길 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잠들지 않고 걸어간다. 작가는 마음 안에 영혼의 집 한 채씩 짓는다. 누군가는 그 영혼의 집에 머무르며 위안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안을 받는 것은 작가 자신이다. 내면의 상처나 열등감 혹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은 영혼의 집에 발을 담그고 있는 동안 서서히 치유되는 것인지도.
현실이 독이라면 소설은 물이다. 흐르는 물은 독을 희석시킨다. 그러나 앞으로 소설에 독을 타야하지 않을까. 현실이 너무 지독해서 물로도 희석되지 않아서 독을 독으로 희석해야 하지 않을까. 부정을 부정으로, 극단을 극단으로 맞서야 하지 않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와 문화 전 분야에 걸쳐 하나의 조류로 자리잡을 때 문학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인간 해방, 자유, 해체…… 급격한 사회변화는 현대인을 더욱 외골로 몰아간다. 현대인은 외롭다. 현대인은 고독하다. 외롭고 고독한 현대인은 지구의 이방인이다. 이방인이 찾는 것은 따뜻한 방과 먹을 것 그리고 소통이다. 무당이 신령한 존재와 속의 세계를 매개했듯이 이 외롭고 험난한 시대에 문학은 성과 속, 자연과 인간,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무당이 된다. 그리하여 따뜻한 집 한 채 지어 그곳으로부터 위무 받을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살만하지 않을까.
문학이 위기라고들 말한다. 현학적 풍속이 판을 치는 문명사회에 그렇다고 문학인이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의 작품에 빠져 살 수는 없다. 예술지상주의를 말하기에는 현대사회구조가 수만 가닥의 미로와 같기 때문이다. 작가는 촛농을 녹이고 밀납을 녹여 새의 깃털을 붙여 미궁 탈출을 꾀할 수 있는 다이달로스의 창의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플라톤이 말한 어둠의 동굴에서 한 가닥 빛을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만을 쫓는 삶이 아닌 빛을 찾아 가는 행로는 험난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풍요도 과학문명의 편리도 표피적인 외적 조건일 뿐. 
영혼의 집에 거미줄이 걷히고 밝은 빛살이 퍼지기를 기대한다. 
성서 설화에는 신이 엿새 동안 창조를 한 뒤 하루 쉬는 장면이 나온다. 창조의 고뇌는 신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땀방울은 지상을 낙원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러나 현실은 낙원이 아닌 연옥이다. 낙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결핍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예술을 낳는다. 예술이 결핍의 뇌를 지닌 인간의 숙명이며 끊임없이 시지프스의 바윗덩이를 굴려올려야 하는 것처럼 삶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작가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의 이면을 직시하는 눈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이 아니면 결코 통찰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관심은 때때로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삶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때 문학은 개개인의 생이 거대한 사회구조나 제도 혹은 이데올로기의 물결에 휩쓸려 그 존재 가치조차 못 느낄 때 문학은 예리한 칼날로 그 상황을 포착한다. 
수목의 화신인 ‘숲의 왕’의 죽음에 대하여 프레이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자기 몸에 닥친 재난을 다른 것에 전가하는데 전가 받은 사람은 살해되거나 추방된다. 그것은 주술사에 의해 고대 사회에서 되풀이 되어오던 행사이며 그 사회를 떠받쳐주는 신화이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에 의하면 미개인들은 왕을 신과 동일시했으며 자연의 일부로 여겼다. 숲의 왕에서 보듯 자연의 일부인 왕은 늙거나 약해지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왕의 쇠약이 풍요를 위협하게 되고 결국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만 한다. 계승자는 왕을 죽임으로써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식물이며 자연이며 자연운행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문학이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늙거나 쇠약해진 왕의 처지와 같다. 따라서 문학의 위기는 곧 문학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도나 권력, 사회적 억압에 대해 구조적 모순에 대해 암묵적 동의 내지는 방관한다면 노쇠해진 왕처럼 새로운 조류의 후계자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서 무당은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의 심리치료사였다. 작가가 신내림을 받은 무당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숲의 왕’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설문학은 잡설이자 인간의 이야기이며 비천한 삶의 대변인이다.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은 리얼하다. 리얼한 현실을 객관화시켜 보여줄 때 독자는 미적 환상을 꿈꾸게 된다. 비천하고 비루한 삶의 조건이 인간을 옥죄어 올 때 꿈꿀 수 있는 것, 저 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출 수 있는 것, 그것은 문학의 문제이자 한계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더 이상 문학이 구원이 될 수 없는 시대라 하더라도 영혼의 집 한 채 지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고독한 이방인이 문지방을 넘어 쉬어갈 수 있다면 작가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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