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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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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31회 작성일 09-02-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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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고인 물이 흐르는 물 되고 흐르는 물이 고인 물 되듯
최진영|소설가


보름 전 담양 소쇄원에 다녀왔다. 게으른 바람과 겸손한 햇살, 대나무의 텅 빈 속 같은 고요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뒷모습을 생각했다. 해질녘 서늘한 바람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가 보였다. 주변에 산 것이라곤 착한 식물과 작은 벌레들, 서쪽으로 날아가는 새뿐이었다. 그리고 나. 나를 산 것으로 불러야 하나 살다 죽은 것으로 불러야 하나 아니면, 한 번도 살지 않은 것으로 불러야 하나. 소쇄원의 작은 개울에는 대여섯 마리의 오리가 한데 엉켜 자기들끼리 소리를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쉼 없이 먹고 싸우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무척 수다스러운 놈도 있었고 지나치게 과묵한 놈도 있었다. 뜻이 맞지 않아 소소하게 다투는가 싶다가도 건너편 뭍으로 나올 때는 또 다 함께 움직였다. 고요한 소쇄원의 공기와 그들의 분주하고 얄궂은 생활은 무척 잘 어울렸다. 주둥이를 놀리며 왁자하게 떠드는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고 싶었고 그들처럼 뭍과 물을 내키는 대로 오고가며 ‘살아 있다’는 티를 내고 싶었다. 나는 나의 뒷모습에 ‘죽은 듯 살아 있는’이란 길고 치사한 딱지를 붙여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계속 글을 써야겠다고 어린애처럼 다짐했다. 인과관계는 전혀 성립되지 않지만, 어린애의 말이니까 그냥 들어두자는 식의 관용을 나에게나 타인에게 구하는 심보로.
나는 내가 동경하는 인물처럼 예의바르지만 당차고 도도하지만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창밖의 풍경이 아까워 기차 창의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싶어도 주변을 의식해 수십 번 망설이다가 결국 그대로 도착지에 닿고야 마는 소심한 사람이다. 욕망은 얄팍하고 이성은 타인과 약간 다른 주파수에 맞춰져 있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말과 행동은 아주 가끔 농담으로나 한다. 과감하지만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한 순간마다 이성은 잠들고 마음은 전력질주를 시작한다. 몸과 현실은 언제나 주책없는 마음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예제를 보기도 전에 답을 써내려가는 대책 없는 청춘의 어디쯤에서, 내 인생은 아직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이다. 그러니 당연히 후회할 것도 없고 그 때문인지 언제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한때는 한 달에 한 명 이상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주위는 지나치게 적막하고 쓸쓸했다. 그리고 평화로웠다. 문득 엄마의 자궁을 기억해냈고, 주어진 우주와 그 속에서 내가 재정립하는 나의 우주를 꿈꿨다.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다루지 못하니, 글을 쓰기로 했다. 어쨌든 한글은 배웠으니까. 
글쓰기는 조용하고 검소했다. 옆방의 엄마나 옆집의 할머니가 들을까 목소리를 줄이거나 소음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다양한 색깔과 천만 가지 풍경은 종이와 연필만으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의 우주를 새로 만드는 데 글쓰기만큼 쉽고 간편한 도구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돈 들여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누가 시키기 전에 먼저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니까, 아마도 사춘기 정도였을 것이다. 나만의 세계가 절실하던 때였다. 부모님이 처음 ‘우리 집’을 마련했던 때였고, 그래서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던 때였다. 꿈은 없었다.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다. 읽어 담는 것보다 써서 배출하기에 급했다. 일기장 한 권을 다 쓰면 그냥 버렸다. 어제를 잡아두지 않듯 일기 같은 건, 간직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가 되어 태워지거나 묻혀서 흙이나 바람이나 물이 되었을 것이다. 민들레 꽃씨나 감나무의 뿌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가 먹기도 했겠지.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일기 대신 시를 많이 썼다. 법적으로 성인이라니까, 왠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어른도 아닌데 어른이라니까 억울한 줄로만 알았는데, 단풍 드는 걸 몇 해 동안 보다 보니까 억울하고 속상해 할 이유는 그 외에도 무척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응시하는 과녁에는 웅크리거나 사지를 뻗은 가족이 있었다. 시를 가장한 화살을 하루에도 몇 번씩 쏘아댔다. 진하고 독한 감정이 많이 묻은 화살일수록 멀리 나가지 못했다. 아무리 시위를 멀리 당기고 촉을 다듬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화살을 들고 직접 달리기도 했다. 못을 박듯 가족의 팔다리에 촉을 박았다.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돌보다 단단한 굳은살이 있어서 상처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화살을 든 내 손은 연하고 몰랑몰랑했다. 내가 원한 건 결국, ‘나를 더 사랑해 달라’거나 ‘나를 더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제발 나를 혼자 내버려 둬’라는 응석을 부렸으면서. 도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추라는 건지. 자식새끼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폐경기의 엄마는 말했다. 지금은 그때 그렇게 말해 준 엄마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뒤늦게 온 사춘기는 지겹도록 길었다. 어른이 되기 전 내 손으로 만들었던 나의 우주는 마른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라, 얕은 바람에도 쉽게 무너졌다. 그걸 스스로 망가뜨리면서 타인의 성에도 발길질을 해대는 마음으로 시 비슷한 걸 썼다. 졸업하던 무렵, 이젠 아무것도 탓할 게 없다는, 게워낼 건 일단 다 게워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시를 쓸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쏜 화살은, 그때 쓴 나의 시는 어디로 갔을까. 온전히 두기에는 부끄럽고 내가 도로 먹으려니 체할 것만 같은 그것들은 모두.
그때에도 역시, 꿈은 없었다. 꿈같은 건 사치였다.
‘제발 나를 혼자 내버려 둬’라고 말할 때나 ‘나를 더 사랑해 줘’라고 말할 때, ‘이건 나의 우주야’라거나 ‘여기 나의 우주도 있어’라고 보일 듯 말듯 손을 흔들 때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기억의 처음과 끝까지,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았다. 덕분에 깔때기를 목에 두른 고양이처럼 세상을 온전히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영화도 많이 보지 않고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음악은 늘 듣는 것만 들으며 만나는 사람만 만나며 산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나의 성격은 낯을 많이 가린다는 것이고 덕분에 나날이 껍질은 단단해지고 있다. 더불어 살아 있는 게 늘, 부끄럽다. 부끄러움만큼 넉넉하고 굳세지는 건 자존심이다.
핵심은 언제나 자존심에 있다. 애써 돌려 생각할 필요도 없다. 괜한 핑계로 자기연민에 빠질 이유도. 정직하게 생각의 허들 몇 개만 넘으면 그 끝엔 언제나 주제도 모르는 자존심이 고지식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그 모양은 당장 먹을 쌀 한 톨 없으면서 수염이나 다듬고 앉은 퇴락한 선비나, 남들 다 아는 뻔한 거짓말을 한 뒤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는 못된 어린애의 모습과 같다. 오해나 착각이나 망상이 아닌,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과 맞닥뜨렸을 때 얄팍한 외로움과 두꺼운 자존심은 공평하게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뭐라 핑계를 댈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그걸, 어쩌겠나. 다치고 상처 내며 살아야겠지. 자존심은 내가 몇 번이나 허물었다 다시 지은 나의 우주다. 자존심의 이면에는 원하는 걸 채우지 못하는 누추함과 자괴감, 그리고 자격지심이 있다. 이면의 이면에는 그런데도 꿈틀거리며 살아내는 스스로에 대한 징그러움과 애틋함이 있다. 그것의 이면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세상을 향한 눈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나와 세상의 닮은 점을 찾아 세상을 짐작하며 산다. 버려진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따뜻한 불을 피우듯 내 안에서 찾아 모은 세상의 파편은 약하고 가늘어 쉽게 부러졌지만, 저마다 세상의 형상을 제법 닮은 것도 같았다. 그것들을 모아 나는 나의 우주를 다시 만들고 있다. 어릴 때 마른 모래로 만들었다가 어른이 될 즈음 다 망가트린 그것을, 이번에는 조금 더 튼튼하고 그럴듯한 것으로. 세상의 주변을 어슬렁대다가 가끔은, 아주 가끔은 알맹이와 중심을 건드려보기도 하면서. 그리고 대부분, 다친 자존심에 앉은 딱지를 부러 떼고 다시 생채기를 내면서. 그러다가 혹시나 그것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붉고 축축한 생살을 만져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글을 쓸 때 나는, 나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맞닿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시시껄렁한 거짓말도 좀 하고 철없는 농담도 좀 하다가 언뜻언뜻 나의 진심을 내보일 때,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 웃거나 부끄러운 마음에 일부러 못 본 척하는 모양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럼 얼마나 재미있을까. 안심이 될까. 결국 글쓰기를 통해 내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나다. 숨 쉴 구멍을 찾는 것이다. 갈라진 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깥 세계가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아직 깨지지 않은 알 속의 짐승처럼. 어쨌든 숨은 쉬어야 하니까 본능적으로 몸을 버둥거리고 목을 뺀다. 알이 깨지거나, 깨지기 전에 썩어 죽거나, 알에서 나와 더 큰 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그건 두고 볼 일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꿈은 없다. 그런 걸 굳이 가져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세상에서 쓰는 행위가 가진 의미도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나뿐이고, 내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뿐이다. 버려진 나뭇가지에 이름과 사연을 붙이는 마음으로 나는 글을 쓴다. 쓰고 읽는 행위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래서 내가 조금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영화 '그랑블루'의 자크처럼, 바다의 바닥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아내듯 살고 싶고, 끊임없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온전히 나일 수 있어 가장 평온한 것은 사실이다. 일기를 먹고 시를 방류한 것처럼, 이런 식으로 쓴 나의 글도 나중에 도로 먹을 수 있을까. 놓치고 잊을 수 있을까. 글은 언제나 쓰고 나면 부끄럽다. 그래도 지금 나의 진심은 이뿐이니까. 
쓰는 게 나의 최선이니까.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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