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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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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악당과 네로와 막내와 나는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하재영|소설가
1.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없다면 되고 싶은 것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조차 없었다. 장정일의 아담은 ‘성스러운 3J’를 듣지만 나는 록이라고는 강산에밖에 몰랐다. 아담은 프레베르와 최승자를 읽고 시를 쓰지만 나는 시를 쓰기는커녕 읽어본 적도 없었다. 아담은 현대미술을 논하지만 나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도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도 몰랐고, 아담은 지강헌 사건과 1987년 대선 결과에 혼란과 충격을 겪으며 성장하지만 나는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 두지 않았다. 내가 열아홉 살이었던 1997년, 기억나는 사건이라곤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사건’뿐이다. 그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순정만화의 등장인물 같은 이름의 그 아이가 사체로 발견된 9월 12일이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
지미 핸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과 짐 모리슨을 들었다면, 프레베르나 최승자의 시를 읽었다면, 현대미술을 감상했다면, 부정한 사회에 터트릴 분노가 있었다면, 내 열아홉 살이 조금은 달랐을까. 가지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던 나는 존재하지만 부재했다. 던킨도너츠의 구멍은 부재한 것처럼 보이나 먼치킨으로 존재한다. 한 마디로 나의 열아홉 살은 던킨도너츠의 구멍만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원하는 걸 하나만 대라고 했다면 그때의 나는 ‘방’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방 두 개, 사람 여섯. 나와 동생,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방을 나눠 쓰고 부모님은 일터인 식당에서 먹고 잤다. ‘내밀함’을 소유할 수 없는 생활은 끔찍했다. 혼자만의 사색이 허락되지 않는 공간에서 사춘기를 보낸 여자애가 섬세한 어른으로 성장할 리 없었다. 경박하고 둔감한 성인으로서의 앞날이 예약되어 있으니 절망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른들은 너희 때가 좋은 거라고 타일렀지만 그 말은 십대의 기억을 지워버린 자의 착각이었다. 아니면 고통의 순간과 쾌락의 순간을 동일시하는 마조히스트의 궤변이거나. 희망대학은 기재해도 장래희망은 공백인 나이,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똑같은 일상을 똑같은 몸짓으로 견디는 게 전부인 시절. 십대가 가장 눈부신 시간이라면 일찌감치 인생이란 것을 포기해버릴 터였다. 미련도, 오회도 없이.
2.
이십대 초반, 여전히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가지고 싶은 것은 있었다. 집. 전세든 월세든, 반지하든 옥탑이든 집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스무 살 이후 나는 이십대의 대부분을 집이 아닌 방에서 보냈다. 집과 방은 다르다. 아주 많이. 국어사전에서 검색해본 두 단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집 : (풍우, 한서를 막고)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건물.
방 :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하여) 벽 따위로 만든 칸.
대학시절의 나는 ‘건물’이 아니라 건물 속의 ‘칸’에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잤다. 네 명의 하우스메이트와 한 명의 룸메이트가 있었던 월곡동에서는 그 애들이 내 일기를 훔쳐보지 않기 바랐다. 고등학교 동창과 살았던 신당동 원룸에서는 친구가 밤늦게 만취한 애인을 데리고 오지 않기 바랐다. 어느 신혼부부의 집, 방 하나를 빌려 썼던 동소문동에서는 내 귀가가 늦은 날 부부가 현관문의 보조 잠금장치를 채워버리지 않기를, 그리하여 화장실 창문으로 기어들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돈암동, 금호동, 안암동, 보문동, 제기동, 종암동……. 서울 북쪽, 수많은 타인의 방들을 떠돌며 내가 소망한 것은 집이었다. 방이 아니라.
몇 개의 방을 전전하고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고 자퇴와 졸업 사이에서 갈등하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뭔가가 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자. 그러자 가지고 싶은 게 또 생겼다. 컴퓨터였다. 글 쓰는 사람에게 자기만의 컴퓨터가 없는 것은 떡볶이 장수에게 떡이 없는 것, 까지는 아니라도 고추장이나 다진 마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피시방에서 글을 썼다. 일기도 에세이도 아닌, 그렇다고 소설은 더더욱 아닌, 뭐랄까, 아무튼 장르를 파괴한 굉장한 작품이었다고 해두자.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게임폐인들 속에서 센티멘털과 멜랑콜리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글을 쓰노라면 옆자리에선 두두두두 대포 터지는 소리와 함께 “시발, 저그부터 죽여”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그러므로 장정일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이십대 초반,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나만의 집과 나만의 컴퓨터였다. 단지 그것들만이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였다…….
3.
고시원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만 독립된 원룸을 가지게 되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중고품이지만 내 컴퓨터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하드웨어 안에 내가 쓴 글들이 하나 둘 쌓여갈 때. 나는 새로운 것을 욕망하게 되었다. 내 글을 읽고 비평해줄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 중앙대 전문가과정에 등록했다. 첫 소설을 합평 받던 날 나는 엘리베이터를 잘못 타고 엉뚱한 강의실에 들어가고 의자에 걸려 자빠지고 커피를 엎질러서 “재영 씨, 오늘 왜 그래?”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나의 첫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문장들이 난무한다. ‘그와 내가 흔들린 세월의 추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여 죽음을 담보로 쾌락을 질주하는 폭주족들의 요란한 엔진소리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나는 내내 하혈의 고통에 시달렸노라.’ 비문인 건 그렇다 치고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웬 폭주족? 그리고 웬 하혈?)
첫 합평 때 메모한 강의노트를 들춰보니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다, 주제가 모호하다, 소재가 상징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현학적 용어를 남발한다, 진정성이 떨어진다, 독자의 눈을 현혹시키려 한다, 지나치게 관념적이다, 그리고……. 하도 많아 다 쓰지도 못하겠다. 여기에 더해진 교수님의 일격. 이 작품 전체가 다 사변이고 요설이다, 이 작자는 겉멋만 들어 있다, 한국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국적불명의 소설이다.
그날 일기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다.
좋다 이거야!
4.
지금 나는 강원도 한적한 바닷가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닷가 민박집에 산 지 오늘로 29일째다. “거기서 뭐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여기서 뭐하냐고? 백사장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해. 썬크림도 바르지 않고 해변에서 낮잠 자. 민박집 아저씨에게 낚시를 배웠는데 첫 캐스팅에서 황어를 잡았어. 길고양이 세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줬어. 사납게 생긴 녀석은 ‘악당’, 검둥이는 ‘네로’, 새끼는 ‘막내’. 나는 천하장사 소시지와 마른 오징어를 준비하고 녀석들을 기다려. 며칠 전에는 막내에게 값비싼 안동 고등어를 구워줬어. 가장 경계심이 많은 놈인데 고등어에 홀딱 반했나봐. 가까이 오지도 않던 녀석이 이젠 내 옆에 앉기까지 해. 막내와 함께 바라보는 바다는 최고야. 악당이 자꾸 네로와 막내를 괴롭혀. 못된 자식. 어젯밤에도 막내를 괴롭히다 나한테 걸려서 빗자루로 된통 얻어맞았어. 그나저나 요즘 네로가 안 보여. 제일 살갑게 굴던 녀석인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이따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네로를 찾아봐야겠어. 모든 게 첫 경험이야. 길고양이를 사랑하는 것부터 내 손으로 일용할 양식을 잡는 것까지.
강원도에서 혼자 겨울을 보내는 것.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빈둥거리다 밤이 되면 소설을 쓰는 것. 이것은 등단 후 내가 꿈꿔왔던 일이다. 이탈리아의 나폴리도 아니고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도 아니고 단지 강원도였다. 하늘과 바다가 얼마나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파도의 소리와 모양이 매시간 어떻게 달라지는지,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서울에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한다. 내 집 앞 골목처럼 편해진 해변을 걸으며 돌이켜보니 나는 소원했던 것을 대부분 가지거나 이루었다.
당신의 문학세계는 어떤 것입니까. 이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소원했던 몇 가지 가운데 글쓰기가 가장 크고 깊고 그래서 버거운 갈망이라는 것뿐이다. 다만 내가 뭔가를 열망할 때, 그 열망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해 찾아올 희망과 절망의 과정이 소설이 되리란 믿음은 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악당, 네로랑 막내 괴롭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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