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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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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34회 작성일 09-02-2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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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나의 잡놈됨에 대하여
김정남|소설가


나는 아직 나의 문학 세계를 말할 처지가 못 된다. 작년 신춘문예 당선작과 함께 고작 네 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 뿐이다. 이런 주제에, 내 문학관은 말이죠, 라고 어떻게 떠벌릴 수 있단 말인가. 청탁에 응하면서도 겸연쩍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평론도 쓰고, 소설도 쓰면서 뭐 하나 잘 하는 게 없는 나는 그저 맥쩍을 따름이다. 이런저런 평론 원고들을 써대며 그런대로 문단 말석에 뭉개고 앉아 있지만, 그것으로 문명을 날린 적은 없고, 대체로 서평이나 계간평을 써 가며 연명하는 처지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도 있어 내가 글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니 눈물 나게 고맙고, 또 그런 원고들이 쌓이면 책이랍시고 낼 수 있으니 감지덕지할 뿐이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자리는 자질구레한 신세한탄이나 늘어놓으라고 마련해준 게 아니다. 몇 편 되지 않는 내 소설에 대해 말해보라고 내어준 귀하디귀한 지면이 아닌가.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맑고 순결했다면 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좀 잡스럽게 살아왔고, 좀 잡스럽게 상처받았고, 좀 잡스러운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기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이질음성들이 교차하는 다성적인 언어공간이 아닌가. (아! 이런 평론투의 말은 내뱉다니. 이런 자리에서 좀 역겹기까지 하다.) 어쨌든 잡놈에게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딱, 이다. 내가 하는 잡스러운 생각들이란, 잡놈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니 뭔가 고상한 생각이라기보다는 타락하고 더러운 공상들이 대부분이다. 그 생각들은 모두 내 안의 생채기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쾌락을 느끼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는다. 정신과 클리닉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나 그냥 안 미친 척하고 산다. 조울증과 자학증, 그리고 노출증이라는 정신병리학적 요인들은 내 삶의 발암물질이자 소설이 자라날 수 있는 마음의 숙주다. 
잡놈은 원래 어떤 관觀이랄까 이즘ism이랄까, 하여튼 그런 주의, 주장에 혐오를 느낀다. 일단 잘 모르니까 짜증이 나는 것이고 그런 생각에 나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하여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포스트가 들어간 그 어떤 사조든 간에, 그것들은 나에게 번지 없는 주막이다. 그런 얘기는 식자우환을 즐기는 지성적인 인간들이 대신 고민해 줄 것이고, 문학은 늘 그러한 틀 밖으로 벗어나기를 원한다. 어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치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내 소설은 그 어떤 주의로 요약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잡놈이라도, 자신이 선택한 필생의 업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없다는 것도 이상한 일일 터이다. 그럼 이렇게 얘기해 볼까.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은 사회에선 잡놈들이 할 일이 많다. 우선 이들의 병세가 더욱 악화될지라도 그 어떤 통각도 느끼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마취사들이 있겠고,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으나 병원균의 실체를 파헤쳐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몰랐던 아픔을 되살리는 못된 놈들도 있겠다. 통증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들이야 일차원적 인간들을 양산하는 체제수호의 첨병들일 테고, 진정한 잡놈이란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존재들이다. 중병이 걸려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실존적 위기의 국면을 예민하게 건져 올려, 이들의 단잠을 깨우는 것이 잡놈의 역할이다. 중심은 언제나 비만하고 썩어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참된 잡놈은 언제나 주변인이고 경계인이다. 내 소설 속 잡놈들은 수족관 관리인, 레커차 기사, 고시원생, 화상과외 교사, 안마사, 페인트공 등으로 다양한데, 이들은 모두 병들어 있거나 혹은 비일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놈들이다. 이들을 그려냄으로써 나는 나의 최대치의 깽판을 치고 있는 거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판대기를 앞에 두고 말이다. 

내 삶은 언제나 중심으로부터 비켜 서 있었다. 나는 늘 중심과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해왔고 그런 일들을 저질러 왔다. 그래서 난 가난하고 병들어 있으며, 내 가슴팍엔 오욕을 짓씹으며 만든 시기와 질투가 갈고리처럼 돋아있다. 

나는 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강원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시린 물이 목젖까지 차오를 때, 더 이상 숨쉬기가 힘겨울 때, 이따금 서울에 올라가곤 한다. 거긴 언제나 들끓었고 나는 뒤엉킨 말들 속에서 갈 곳을 잃었다. 책 속에서만 보았던 유명인들의 휘황한 모습들. 내 머리와 감각으로는 도저히 동화되기 어려운 그 현란한 말들과 세련된 몸짓들. 그런 도회의 공기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다시 갈 곳 없는 거리로 내던져지면, 나는 더러운 토사물을 질질 흘리며 밤거리를 헤매 다녔다. 결국, 서울의 먼지와 말 몇 마디를 덤으로 머리에 얹고 되돌아올 때면, 나는 아득한 세상 끝으로 떼밀려 가는 듯한 마음에, 울었다. 나는 변방에 사는 잡놈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평소에 존경하는 어느 분의 시집에 해설을 쓴 적이 있었다. 나는 평자라는 이유만으로 생전 처음 출판기념회라는 모임에 불려갔더랬다. (거기에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간 놈은 나 하나뿐이었다. 난 그렇게 촌티 나는 잡놈이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 형, 이번에 쓴 해설 좋던데? 언제 내 것도 한 번 읽어줘.” 그 말을 들은 순간 난 이상한 모욕의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언제 시간 나면 내 것도 좀 빨×줘.” 그곳은 진심을 위선으로, 웃음을 침묵으로 바꾸어 버리는 세계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내 감정상의 오독이었을까. “기회만 주세요. 잘 해드릴게요. 헤헤.”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처럼 치사하고 더러운 일이다. 나는 평자로서도, 더욱이 작자로서도 언더그라운드 가수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아는 가수는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변두리 밤무대나 라이브 카페에 가 보라! 도대체 이 인간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 중에서 중심으로 가는 자는 극소수다. 앨범만 냈다고 모두 가수는 아니다. 한 해에도 수십 명씩 등장하는 신인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 아는가. 나를 포함해 그들도 나름대로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지금 무슨 돼먹지 못한 넋두린가. 아무튼 이 판에서 살아남아서, 벽에 똥 칠하기 전까지 소설 쓰는 게 내 목표고 이상이고 신념이다. 대학 시절, 넌 싹수가 없으니 소설을 쓰지 말라고 했던 어느 고매한 평론가에게, 그 외에 내 기나긴 습작기를 비웃으며 나에게 오기를 심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언젠가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기를! 욕망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욕망을 낳으니, 질투는 나의 힘이다. 

잡놈의 얘기를 읽으시느라고 고생이 많습니다요. 왜 말본새가 이토록 유치하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눈물 하니까 작년 1월초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15년간 절차탁마한 구라의 실력을 뽐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시상식 장소는 한 신문사 8층 대연회장이었더라. 거기에선 그 행사의 품격에 맞게 모 국악 연주단이 가야금을 탄주하고 있었는데, 난 그만 그 계면조의 선율에 질금질금 눈물을 흘렸더랬다. 다행히도 좌우의 수상자들이 잔뜩 긴장하며 앉아 있었길 망정이지, 그 꼬락서니를 눈치챘더라면 정말 쪽팔렸을 거다. 잡놈은 어디서나 삼류 신파 흉내를 내야 직성이 풀린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을 때, 암실에서 홀로 조명을 받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보고도 나는 병신같이 울고 말았다. 세상의 번뇌와 고통을 한 몸에 안고 깊은 사유의 늪에 빠져 있는 모습은, 나 같은 잡놈의 마음 한 자락마저도 곱게 감싸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번다한 생각이 곰삭으면 비로소 고운 결의 아름다움이 비치는 것이다. 그런 문학, 그런 소설!
그럼에도 내 소설은 삼류를 지향합니다. 잡놈에 의한 잡놈을 위한 잡놈의 문학! 어느 유명한 사람의 말처럼, 지금은 천상의 별이 내가 가야할 길의 지도가 되어주던 때가 아니므로. 부패한 중심을 향한 잡놈의 반역! 이게 근대문학의 정신이며 지금도 유효한 소설의 질량값이라 생각한다. 하여튼 문예지 관계자 여러분들! 제게 종종 청탁 좀 주십쇼. 변방인도 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배의 정의냐굽쇼? 아, 네.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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