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 특집/김규나
페이지 정보

본문
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소설, 모든 것을 유보하더라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
김규나|소설가
어느 날 문득, 세상 모든 이들과 나와의 유일한 공통분모, ‘결핍’에 꼴리다. 보이지 않던 것들과 들리지 않던 것들이 궁금해지다. 말하지 못했으나 말하여진 것들, 쓰지 못했으나 산재해 있던 소설들이 발기하다. 라캉이 말한 ‘타자’를 만나기 이전, ‘허구적 나’를 더듬던 어린 시절부터 문학의 계곡에서 헤매고 있었음을 인지하다. 결핍된 존재로서 상처받는 영혼,이란 거대한 명제 앞에 나를 세우다. 존재와 소멸, 사랑과 결핍, 너와 나, 남자와 여자. 풀리지 않을 실타래를 풀어보기 위한 나만의 시니피앙을 꿈꾸다.
‘詩란 쓰는 것이 아니라 토해내는 것’이라고 어떤 시인은 정의하다. 소설도 토해내는 것인가 고민하다. 소설은 설계도면이 필요한 건축이고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수학이며 음계와 화성이 까다로운 음악이라고 정의해보다. 이 모두를 단박에 토해내는 소설가도 있을 것이나 아무런 재주도 가지지 못한 나는 쥐어짜거나 쥐어뜯거나 주리를 틀며 더듬더듬 소설쓰기를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유보하더라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 소설은 그렇게 내게 머물다.
채워지지 않는 원고지를 밀쳐두고 냉장고를 열어보다. 욕망을 누르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전진하고 싶어 안달하는 커서를 외면하다.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스티커들, 주문 가능한 메뉴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다. 글을 쓰지 못하는 내내 식탐에 동원되다. 불러 터진 배를 상상하다. 태어나지 못한 글 알갱이들이 터진 배 밖에서 꼬물거리다. 그것들이 가여워 부서진 자음과 모음을 사념의 자궁 속에 밀어 넣다. 바늘에 실을 꿰어 터진 배를 꿰매다. 한 달에 한 번 생리하듯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이 쏟아지기를 희망하다. 남성 작가들이 자위할 때 사정하듯 소설이 나오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다. 작가협회 앞에서 남성작가 자위금지,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는 공상을 깨고 다시 한 번 쓰게 웃다. 기어이 유자차와 오! 감자, 를 먹다.
하루 종일 글을 쓰지 않고도 어떻게 입에 음식을 밀어 넣을 수 있는가를 회의하다. 원고는 열어보지도 않고 하루 세 끼를 다 찾아 먹다. 채식과 육식을 가리지 않다. 어떻게 생명을 희생시키고 그 주검을 먹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다. 제일 처음 다른 생명을 잡아먹은 인류의 이름이 궁금해지다. 사자가 노루를 잡아먹는 걸 보고, 여우가 토끼를 잡아먹는 걸 보고, 뱀이 쥐를 잡아먹고 개구리가 파리를 잡아먹는 걸 보고 깨달았을 것이다. 난 사자보다 용감해.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어. 내가 여우보다 더 똑똑하잖아. 그러니 토끼를 먹을 테야. 생명에 대한 연민을 앞지른 건 생존을 위협하는 허기였을 것이다.
닭장 속 닭을 보며 더 큰 것으로 잡아달라고 가리키던 내 작은 손가락을 떠올리다. 닭이 불쌍하긴 했지만 엄마가 해줄 닭볶음의 감동에 대한 기대가 더 컸음을 기억하다. 극한의 굶주림이 없는 세상에선 감각이 우선이다. 감각적이라는 것, 오감을 흔들어 깨우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것. 문학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우겨보다. 주인에게 잡힌 닭은 목이 따이고 털 뽑는 기계 속으로 들어가 통닭이 되어 나오다. 우웩, 이라고 쓰면서도 난 지금도 삼계탕을 먹으면 맛있겠다,고 생각하다. 그리고 또 우웩. 문학의 품위라니. 역시 우웩.
한때 나는 사자였고 여우였고 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사자에게 잡힌 노루였고 토끼였고 쥐였고 파리였을 것이다. 식욕과 동시에 구토를 느끼는 건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것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같지 않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잊지 못한다는 것이 기억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는 것은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를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못한다는 것은 6하 원칙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몸 어딘가에, 뇌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는 뜻이다. 틀리다와 다르다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처럼 기억하다와 잊지 못하다는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내게 소설이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잊히지 않는 것, 내 안에 각인되어 있는 그 모든 것들이다.
존재란 눈부실 만큼 환하지도 않지만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어둡지도 않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동시에 죽음을 지향하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아프다. 수맥처럼 삶을 관통하는 것은 불안과 고독이며 이따금 찾아오는 행복은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다. 본질을 증언하기 위해 내가 현혹된 것은 충족되지 않는 사랑과 생명의 연장선에 있는 죽음이다. 모두가 소망하되 동등하게 소유할 수 없으며 영원하길 갈망하되 찰나적 진실만이 스쳐지나가는 사랑과 죽음만큼 인간의 소외와 유한성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의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갖다. 성품이 악해서가 아니라 자신만 외로운 게 아니라는 동질감을 발견하고 싶을 만큼 나약해서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 또한 삶의 냉혹함이 아니라 그 이면이 지니는 따뜻함이다. ‘어두운 문학이란 있을 수 없다. 세계를 아무리 어두운 색조로 그린다 해도 그 묘사는 오직 자유로운 인간이 그런 세계 앞에서 자신의 자유를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동의하다.
모든 이들이 존재의 본질과 명암을 꿰뚫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은 그러한 고통을 비추는 거울 앞에 돌을 집어 들고 덤비는 것이다. 그 안으로 힘껏 집어던지는 것, 그리고 산산조각 난 거울에 비친 수천가지 삶의 비틀린 모습을 하나하나 냉엄하고 치밀하게 써내는 것이다. ‘평행선이란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선’이라는 명제조차 부정하는 것이다. 둥근 구의 표면에서는 평행선조차 두 번의 교차점을 지나듯 삶은 평면적이지 않다. 소설이란 나란한 두 개의 평행선도 얼마든지 교차할 수 있는 무한한 입체적 공간이다.
원고지가 간혹 티라노사우루스의 아가리처럼 느껴지다. 아가리와 주둥이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어느 오락 프로에서 주워듣다. 저걸 문제라고 낸단 말이야, 비웃었지만 정의를 내리려니 자신이 없어지다. 큰 짐승의 큰 입은 아가리, 작은 짐승의 작은 입은 주둥이다. 말을 가지고 놀아야 할 소위 소설가 이름표를 단 자가 아가리와 주둥이의 정의도 내리지 못하는 비애, 동시에 궁금해지다. 인간은 큰 짐승일까 작은 짐승일까. 인간의 입은 작은 걸까 큰 걸까. 쉴 새 없이 지껄이는 끔찍한 입. 아가리 닥쳐, 혹은 주둥이 닥쳐,의 혼용이 그래서 가능한가 보다. 아가리든 주둥이든 입에서 뱉어지는 온갖 말들은 가엾다. 세상은 벽이고 입 밖으로 쏟아지는 말은 솔거의 나무에 부딪친 새들처럼 죽어 나자빠지다. 그러므로 다만 소설로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라다.
도로에서 낯선 표지판을 발견하다. <요절주의>. 아니다. 실은 <요철주의>다. 그러나 일단 엇나간 생각은 요절夭折로 치닫다. 요절의 상한선은 몇 살일까. 스물다섯 나도향, 스물일곱 이상, 스물아홉 김유정, 서른하나 전혜린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최소 마흔 전에 죽어야 요절로 대우받을 수 있을 듯하다. 더군다나 천재적 재능이 꺾였을 때 요절이란 말이 합당하게 와 닿다. 나이만으로도 요절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기묘한 슬픔과 비겁한 안도감과 초라한 조급함이 서둘러 자리를 펴다. 언제부턴가 작가의 작품집을 열 때마다 그 작품을 쓸 당시 작가의 나이를 헤아려보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남긴 최고의 작품을 접할 때면 가늘고 길게라도 살아야 할 부끄러운 핑계에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다.
아침마다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주워들다. 신문의 머리기사를 눈여겨보진 않다. 대신 하늘을 보다. 공기 냄새를 맡다. 곧 추워질 것이나 머잖아 또 봄이 올 것이며 계절의 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삶은 한 곳에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다. 때론 지나간 것들이 현재에 머물고 때론 오지 않은 것들이 현재를 점령하다. 기억하지 못하나 잊히지 않는 과거와 잊히지 않을 미래의 한 장을 곰곰 현재에 비추어 원고 위에 붙잡아 앉히다. 나의 현재는 과거일 뿐이며 과거는 곧 나의 미래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 즉 나의 현재를 오로지 문학으로 채우기를 희망하다. 10월. 나무요일. 젖은 바람이 불다.
추천2
- 이전글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장성규 09.02.26
- 다음글32호(2008년 겨울호) 특집/김정남 09.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