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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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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7회 작성일 09-02-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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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새로운 리얼리티와 ‘조선적 비평의 정신’의 현재화
장성규|문학평론가


한국문학사에서 현실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보여준 비평가 중 임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단편서사시라는 시적 리얼리즘의 구체적인 형식을 창안한 시인이자, 당대 문학의 장場에서 리얼리즘의 논리를 정치화시켰던 비평가, 그리고 카프를 통한 문예운동의 조직가로서 활동했던 임화는 일찍이 ‘조선적 비평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 批評은 文學이 文學으로써 必要로하는 現實上의 要求나, 文學固有의 美學的인 需要를 代辯한다느니 보다 오히려 文學이 自身의 土臺로 하고 있는 現實朝鮮의 보다 一般的인 廣汎한 欲求와 意慾을 代辯한 것이라고 보아 大體로 無關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까지의 朝鮮의 文藝批評은 作家, 作品과 審美學的으로 關係하는 대신에 더 많이 社會學的 또는 政論的으로 交涉한 것입니다. 이것이 朝鮮的 批評이 다른 諸外國의 文藝批評과 本質的으로 그 性質을 달리하는 主要點일 것입니다. 卽, 政論的 性質을 多分히 가진 社會的 批評 그것입니다.

임화는 조선적 비평의 정신을 당대 조선의 구체적인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문학의 가치를 읽어내는 ‘사회적 비평’으로 요약한다. 이는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생성된 문학 텍스트를 현실과의 교호 속에서 의미화하고자 했던 당대 리얼리즘 비평의 일반적 성격을 정확히 지적하는 발언이다. 이와 같은 리얼리즘 비평으로 표상되는 ‘조선적 비평의 정신’은 이후 해방공간에서의 민족문학론으로, 60년대 참여문학론으로, 70년대 민족문학론으로 이어지며, 80년대 변혁운동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일련의 급진적 문학론으로 분화, 발전한다. 
그러나 90년대, 소비에트의 몰락으로 표상되는 변혁운동의 좌절과 함께 ‘조선적 비평의 정신’은 일순간에 실종된다. ‘내면성’의 발견과 신세대론의 등장,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입 등 새로운 미학적 흐름이 한국문학과 비평의 주된 경향을 형성하며 2008년 현재까지도 ‘조선적 비평의 정신’을 온전히 복원하려는 시도는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학과 현실간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문학의 ‘불온성’을 복원시키려는 프로젝트는, 진부하지만 중요한 미학적, 실천적 과제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리얼리즘론 내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루카치류의 리얼리즘론, 즉 객관현실에 대한 반영과 총체적 형상화, 그리고 전망의 제시로 요약 가능한 고전적 리얼리즘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인 지금, 더 이상 유효한 미학적, 실천적 테제일 수 없다. 무엇보다 고전적 리얼리즘이 전제하고 있는 단일한 객관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만 한다. 후기자본주의 시대에서의 ‘현실’이란 단일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가상의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중층적인 층위에서 발현되는 리얼리티‘들’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새로운 ‘현실’이다.
가상의 이데올로기들은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개체들을 자본주의적 ‘주체’로 호명한다. 이 지배 이데올로기는 ‘가상’의 존재이지만, 그것이 개체에게 구체적인 ‘현실’로 실감될 때, 곧 ‘리얼리티’의 진리효과를 생성한다. 그렇다면 가시적인 객관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중층적인 ‘리얼리티’이다. 이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이 있을 때, 비로소 고전적인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2008년 현재 새로운 ‘조선적 비평의 정신’의 기획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한국문학, 특히 비평은 작품에 대한 주석달기나 쇄말적인 해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독해는 분명 비평의 덕목이다. 그러나 텍스트를 통해 우리시대의 리얼리티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비평의 존재 근거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혹은 못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징후적 독해’이다. 이 징후적 독해를 통해 ‘리얼리티’가 생성되고 유통되는 메커니즘의 ‘배후’를 탐색하고, 나아가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틈새’로 현현하는 또 다른 ‘리얼리티’의 가능성을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비평의 몫이다. 이러한 비평을 통해서만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그리고 문학의 전복적 상상력을 복원시킬 수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 자체가 모순의 통합물이기 때문에, 그 모순과 균열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임화는 다른 글을 통해 ‘조선적 비평의 정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컨텍스트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作品가운데 나타나는 知性과 感性의 對立, 그것으로 말미아믄 剩餘의 領域은 실상 作家에게 形成된 知性이 채 征服할 수 없는 새 世界의 一幅이라 할 수 있다./이것은 오래지 않어 새 知性의 母胎가 될 것이며 그런 意味에서 作家의 知性과 正面에서 對立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剩餘의 領域이란 作家의 意圖에 反하는 것이며 意圖에 意識性에 比하야 그것은 無意識性을 띄운다./다시 말하면 作家가 무엇을 欲求하든 間 作品이 感性界의 新鮮한 要素로 形象을 만들려는 限, 剩餘의 世界는 强力히 自己存在를 人間의 知性과 文學에 對하야 主張할려는 새 世界의 鮮明한 姿態다.

임화가 말하는 ‘잉여’란 새롭게 대두하는 현실이 작가의 논리적 인식 이전에 텍스트에 ‘투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신체제’의 대두 앞에서 이에 대한 명징한 역사철학적 인식을 지닐 수 없었던 당대의 문인들의 작품에서 바로 이 ‘잉여’를 읽어냄으로써 새로운 ‘조선적 비평의 정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 임화의 기대였다.
이와 같은 문학사적 정황은 현재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란 중층적인 층위에서 현현하는 리얼리티‘들’을 단일한 층위로 환원시키는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오히려 자본이 생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의 ‘이면’을 탐색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리얼리티‘들’의 가능성을 복원시키는 것이 보다 공세적인 문학의 전복성의 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새로운 비평은 텍스트의 ‘잉여’에 대한 ‘징후적 독해’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독법은 어떠한가? 윤이형의 「피의 일요일」을 통해 버츄얼 리얼리티 이면의 자본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것, 허혜란의 「즐거운 부케」를 통해 소수자의 저항 주체화 ‘과정’을 재현하는 것, 황정은의 「곡도와 살고 있다」를 통해 지배적인 발화형식에 의해 배제된 ‘유령’들의 발화형식을 복원하는 것, 윤고은의 '무중력증후군'을 통해 저항 이데올로기마저도 상품화하는 자본의 욕망을 전복시키는 것, 김사과의 '미나'를 통해 문화자본의 형태로 현상하는 계급대립의 구도를 읽어내는 것, 김선우의 ‘나는 춤이다’를 통해 하위주체들의 ‘대안역사’를 서술하는 것. 이러한 독법이 일찍이 임화가 말한 ‘조선적 비평의 정신’을 현재의 문제설정 속에서 새롭게 복원시키는 비평의 몫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로부터 진부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학과 현실의 대면이라는 미학적, 실천적 프로젝트를 구체적이고 귀납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이 바로 ‘조선적 비평의 정신’의 현재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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