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이정현
페이지 정보

본문
특집_무서운 신예들의 ‘나의 문학’
대답 없는 K형에게―뒤늦은 답변을 대신하여
이정현|문학평론가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들에 대한/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정일 「지하인간」 중
겨울밤이었어. 아마 내가 입대하기 전 마지막 겨울이었을 거야. 바람 부는 소리가 여자의 서러운 울음소리 같았던 그런 겨울밤. 욕 잘하고 까칠했던 학과 조교 K형. 당신과 나는 오랜만에 횟집에서 소주를 격렬하게 마셨지. 느닷없이 날아온 입대영장과 지금도 상처에 뿌려진 소금처럼 기억되는 실패한 연애 때문에 나는 습관처럼 아파하고 있었지. 미워할 수 없는 악의로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당신은 내게 말했어. 그런 연애 타령할 시간에 책이나 더 읽어라. 너의 아픔은 위악이야. 연애? 그건 사치지. 안 그래? 이제 곧 전방에 끌려갈 놈이.
K형,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후배의 아픔에 즐거워하면서도 같이 아파하는 당신의 목소리는 정말 악마 같았어. 아니지 철없는 악동의 잔인함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거야. 밤은 깊었고 나는 시를 읊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고 시작되는, 기형도의 유명한 시를. 돌이켜보면 나는 당신 말처럼 스스로를 연민하는 초라한 예비 군바리에 지나지 않았어. 당신은 밤이 늦도록 진저리나는 군대 얘기를 떠벌리며 나를 겁줬지. 나는 막막했어. 다가올 군대 생활에 대한 불안과 머리를 잠식한 활자들과 떠난 여자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장난처럼 끝나버린 몇 명의 여자들도 스쳐갔지. 나는 당신에게 물었어. 언제나 취할 때면 나의 단골 질문이었던 그런 말.
“형, 사랑이 뭔지 알아?”
사랑이 뭔지 아느냐고? K형,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더 많이 좋아하는 자가 지는 게임이자 거짓말의 힘으로 세월을 건너는 이상한 감정에 대해서 말이야. 형은 나에게 당신의 시시껄렁했던 몇몇 연애에 대해서 늘어놨지. 나는 다시 물었어. 그게 사랑이야? 형은 문득 진지해져서 나에게 질문을 되돌려줬지. 넌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냐?
문학이라니. 입대영장과 상처의 진단서를 동시에 받은 놈에게 문학의 정의를 묻다니. 나는 코웃음을 치며 소주를 털어 넣었고 어떻게 귀가했는지 기억에 없어. 주머니를 뒤집으며 이제 오링이다, 라고 중얼거리는 당신의 취한 눈동자를 본 것이 그 날의 마지막 기억이야.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더군. 나는 곧 입대했지.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얼마나 초라할 수 있는지 체득하는 세월이었어. ‘나’는 없고 군번과 계급만 있던, 이름이 아닌 숫자로만 존재하던 그런 세월. 휴가 나올 때면 몇 번의 술자리를 뒤엎고 서러움에 젖어 새벽녘에 혼자 학교 연못가에서 오래동안 앉아서 탄식했지. 그래도 군대에서의 마지막 봄이 왔어. 군복이 정말 어울리지 않았던 나도 작대기 네 개를 달고 포상휴가를 나왔지. 국방부 시계는 정말로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가더라. 형은 나에게 제대하면 같이 지리산 등산을 가자고 하며 남은 기간을 잘 버티라고 했지. 그 봄에 다시 물었어. 너는 문학이 뭐냐? 술 취해서 사랑이 뭐냐고 떠들지 말고 그걸 대답해 봐.
K형, 나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 몰랐지. 당신은 그 해 봄의 사쿠라와 함께 사라졌으니. 사쿠라. 벚꽃이라는 말보다 왠지 가벼운 뉘앙스의 사쿠라, 라는 발음이 더 어울려. 제대하고, 당신에 관한 몇 개의 풍문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지. 형의 초상화를 하나 그렸어. 나름의 방식으로 당신을 보낸 의식이었어. 나는 제발 앞으로의 내 인생이 군대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행복해지길 빌면서 도서관에서 소설과 시를 게걸스럽게 읽었어. 소화가 되지 않았지. 가끔씩 소화되지 않는 활자들을 알콜에 담아 토하곤 했지. 마음에 피멍이 드는 나날이었어.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 학과 조교를 하게 되면서 다시 형이 그리워지더군. 악동 같고 잔혹한 말들을 태연하게 내뱉던 당신이. 당신과 죽이 잘 맞았던 나도 작은 악마였던가. 연애하다 실패하는 후배들을 보면 낄낄거리며 지껄였지. 사랑이 뭔지 알아? 창 밖에 내리는 빗물이야. 잊을만하면 퍼붓거든. 이따금 어린 후배들은 물었지. 사랑이 뭐예요 선배? 아, 사랑? 그건 나쁜 년이야. 크큭. 나, 쁜, 년. 발음과 동시에 스쳐가는 기억들. 공허했어. 그런 날이면 혼자 술을 마셨지.
어설픈 반항 때문에 조교자리에서 금방 축출된 후에 다시 나는 술독에 빠졌지. 체면과 형식과 명분만이 중요한 답답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허무함 때문에. 당신이 있었으면 같이 밤새도록 마실 수 있었을까. 작년 겨울 억눌린 기분으로 썼던 글이 우습게도 신춘문예에 당선됐지. 어울리지 않았던 군복을 걸친 것 같이 평론가가 된 거야. 덕분에 나 같은 인간에게도 글을 써달라고 청탁이 들어와. 개인적인 회고담이자 편지가 되어버린, 청탁받은 이 글의 주제는 “내가 추구하는 문학과 쓰고자 하는 글” 이야.
K형, 이런 글을 쓰면서 문학평론가랍시고 진지하게 쓴다면 형은 금방 머리통을 쥐어박으면서 지랄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라고 했겠지. 그래 나는 진지하게 쓰지 않겠어. 딱딱한 논문체의 글. 지겹고 갑갑해.
세상에서 정말 난처하고 무모한 일 중 하나가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기회를 빌려서 형에게 뒤늦게 답을 하고 싶어. 사랑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던 나의 질문을 당신은 나에게 되돌려줬지.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 질문을 되돌려줬던 당신에게 이제야 대답할게. 문학은 바로 사랑과 같지 않을까. 싱겁지? 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지. 문학과 사랑은 분명 닮았으니까.
사랑하는 이는 나의 조바심에 응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그럴수록 내 갈망은 더욱 커져서 따라다니게 되지. 때로는 그 대책 없는 열망 때문에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돼. 체험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아니라면 사랑한다는 말은 공허하기만 하지. 많은 사람을 사귀어 봤던 사람도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당황하게 되지.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약자가 더 갈구하게 되고 끊임없이 성찰하게 되는 잔인한 것이지. 돈과 지식이 사랑을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 반대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반발심으로 인한 오기는 더욱 강해지지. 돈과 명예 같은 것이 없어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행복할 수 있지. 무엇보다도 사랑을 인정하고 믿으면 진정한 환상이 열리지. 더 말해줄까? 그래 얼마든지.
사랑하는 도중에는 누구나 슬픈 변덕의 늪에 빠지게 돼.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며 행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이 슬픔인 것을 알게 되지. 사소한 것들을 질리도록 곱씹고 기억하게 되지. 늘 뭔가 더 극적인 것을 추구하게 돼. 그것 때문에 연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아무리 사랑이야기를 많이 듣고 겪어도 모든 사랑 이야기를 알 수는 없지. 무엇보다도 삶을 좀 더 존중하게 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안을 얻지. 한 작가(천운영)가 작품에 적었듯이 위안이 될 수 없다면 사랑이 아니야.
K형, 이게 대답이야. 문학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사랑과 같지 않을까. 주절거린 말들 중에 ‘사랑’을 ‘문학’으로 바꾼다면, ‘사랑에 빠진 사람’을 ‘문학하는 사람’으로 대치시킨다면 질문에 답이 되지 않을까. 올해 초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나는 형이 정말 보고 싶었어. 이 말들을 모두 지껄이고 싶었지만 다가오는 기억들 때문에 서둘러 당선소감을 짧게 말했지. 문학은 위안이라고.
K형, 나는 무엇보다도 위안을 주는 글을 쓰고 싶어. 대립하더라도 상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위안이 될 수 있는 그런 글. 그럴 수 있을까. 다만 노력할 뿐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지. 다만 나는 K형의 취한 눈동자를 보면서 적어도 형은 사랑이 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어. 내가 틀렸던 걸까. 알 수 없었던 삶의 무게가 형은 끝내 버거웠던 걸까. 나는 남루할 수밖에 없는 삶을 존중하고 싶어. 절망이란 언제나 희망에 비례한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풍문을 믿지 않아. 난 형이 절망했던 만큼 삶에 희망을 지녔었다고 믿고 싶어. 그래야 남아 있는 내게 위안이 되거든. 위안이 될 수 없다면 사랑이 아니야. 문학 또한 마찬가지.
K형, 이만 줄일게. 형은 삶을 접을 때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형을 생각하면서 내 초라한 삶을 존중하겠어.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읽고 쓰면서.
추천2
- 이전글32호(2008년 겨울호) 신작단편/강인봉 09.02.26
- 다음글32호(2008년 겨울호) 특집/장성규 09.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