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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신작단편/방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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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60회 작성일 09-02-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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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후쿠오카 스토리―검은 먼지 정령의 정원
방현희


*
우리는 후쿠오카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요트는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의 직항로에 올랐다. 출항할 때 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것에 비하면 아예 먼 바다에 나서니 물마루가 코끝을 넘지 않았고 바람의 세기도, 그 방향이 자주 바뀌는 것도, 오 월 기후다운 정도였다. 여기서부터는 옛날 반도인들이 뗏목 하나를 의지해 물결 따라 흘러 흘러 왜에 닿았던 것처럼 가만 놔둬도 이틀이나 사흘이면 저편 기슭에 닿을 터였다. 
그러나 뗏목이 아닌 요트를 타는 이유는 그저 물결에 맡기려는 게 아닌 만큼 태훈은 어리석은 남자 둘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사사건건 타박을 일삼았다. 중앙 돛이 파닥파닥 흔들리자 메인 세일의 로프를 마구 잡아당기는 종호에게 태훈이 바로 지적했다.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제발 좀 보고 해! 지브 세일을 당겨야지! 선실에 들어앉아 술과 안주거리를 챙기면서도 갑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꿰뚫고 있는 태훈은 요트가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세일링을 할 때까지 잔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종호는 얼른 자리를 바꿔 앉아 보조 돛인 지브 세일의 로프를 잡아당겼다. 
나는 바람결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헝클어놔서 바람의 행방을 찾으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요트는 방향을 바꿔 바람을 비스듬히 안고 나아가고 있었다. 메인 세일에 팽팽하게 안긴 바람은 곧 지브 세일을 타고 넘어갔다. 두 대의 돛을 타고 거대한 바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세일 자락이 파라락 떨렸다. 돛에서 벗어난 바람은 드넓은 바다로 풀려나가고 요트는 성큼 성큼 나아갔다. 가슴 높이로 치오르곤 하는 물마루는 여지없이 배 밑창에 깔리고. 
종호가 선미의 도연에게 소리를 질렀다. 
-러더를 중립에 놔, 이제 순항이야.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두 개의 세일에 키의 방향을 맞추느라 종호의 싸인에 따라 긴밀하게 키를 움직이던 도연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도연은 아직도 선실에서 나오려하지 않는 은주에게 두 손 가득 키스를 날렸다. 
-은주야, 우리 후쿠오카에 내리면 진하게 뽀뽀하자!
종호가 나를 끌어안으며 대신 대답했다.  
-뽀뽀만으로는 안 될 걸!
종호에게 안기면 매번 그랬듯이 순식간에 가슴 깊은 곳에서 안타까움이 피어오르고 턱 끝까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후쿠오카에 내리면 스무 살 시절을 보낸 나카스의 백 년 된 찻집에 다시 앉아 긴 오후를 보내고 밤이 오면 포장마차 거리에 가서 실컷 즐기고 오자는 게 우리의 주말 여행 계획이었다. 후쿠오카에 가는 건, 도쿄나 교토, 또 다른 관광지에 가는 것과는 달랐다. 종호와 나, 도연과 은주. 우리 넷은 후쿠오카에서 대학을 다녔으니까. 각자 다른 이유로 후쿠오카에 와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친해지게 되었고, 종호와 내가 연인이 된 뒤에 도연과 은주도 연인이 되어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사 년을 견딘 것이니까. 
낯선 땅,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는 스무 살 시절에 우리 넷은 검은 먼지 정령이 깃들어 산다는 정원이 딸린 그 찻집에 기대 앉아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사 년을 보냈다.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눌러지지 않는 감정을 분출해야 할 때면 나카스에 앉아 아무나 불러내면 무조건 나가서 라멘과 함께 술잔을 기울여주는 게 우리의 불문율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사 년을 지낸 우리는 귀국했던 날을 맞아서 그동안 서로의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되었음을 축하하는 기념행사를 하자고 했다. 요트학교를 다니며 한강을 여러 번 오르내렸던 우리들은 마침 요트 학교의 첫 외해 출항 코스에 맞춰 강사 태훈의 지휘 아래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약 20시간의 항해를 하기로 했다. 새벽 네 시에 부산의 안개 속에서 출항하면 후쿠오카의 찬란한 야경 한가운데에 닻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 일본을 향해 배를 움직여 바다를 건넌다는 건, 아무리 대한해협을 네댓 번이나 홀로 건넌 태훈이 있다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을 수 없기에, 우리 삶에 다시없는 분명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스물여덟 살, 스물아홉 살인 우리들은 서로 생각을 주고받았다. 나 또한 지지부진한 관계와 지리멸렬하게 여겨질 만큼 분명한 게 하나도 없는 미래, 그것을 내 삶의 BC와 AD로 나누듯 항해 전과 후로 나누고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더 시달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이 무모한 용기는 무엇에 비견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밀월여행에 대한 기대가, 한편으로는 위험을 함께 감수했다는 동질감으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모한 용기를 부추겼을 것이다. 
태훈이 배 옆구리에 앉아 몸무게로 배를 확 기울이고는 바닷물에 오이를 벅벅 씻었다. 선실 밖으로 나오려던 은주는 배가 기우뚱하자 소리를 지르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태훈은 은주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 안에 있으면 더 어지러워요, 이리 나와요, 라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 씻은 오이를 자르고 북어포를 찢고 맥주에 소주를 섞어 한 잔씩 나눠주었다. 
-이제 해가 떠오를 거야.
태훈이 나눠주는 잔을 들고 그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직 하늘은 불그스름할 뿐, 태양의 머리끝도 보이지 않았다.  
-파이브, 포, 쓰리, 투! 건배!
태훈이 건배를 외치자마자 태양이 불쑥 솟아올랐다.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환성을 터뜨리며 술잔을 세게 부딪쳤다. 종이컵이 우그러지면서 싯누런 태양처럼 맥주가 흘러넘쳤다. 태양 아래의 바다도 맥주를 잔뜩 엎질러놓은 것처럼 누렇게 번뜩였다. 손등을 적신 맥주를 핥으면서 우리는 가슴을 뒤로 젖혀 크게 웃었다. 
이렇게 일상에서 훌쩍 넘어선 경험에 흥분한 나머지 나는 가슴이 꽉 메어오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고 가슴에 가득 찼던 물이 넘실대서 어떻게든 그 감정이 분출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 이번 여행은 정말 특별할 거야.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함께 했으니 우린 종착역에 도달할 거야. 그래야 하고 말고. 나는 애정과 기대를 가득 담고 종호를 바라보았다. 종호는 그새 나를 잊었는지 술을 따르고 들이키고, 크게 웃으며 좌중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분위기가 끝날 때까지는 그는 내가 자기 곁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그가 오직 내게만 집중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검은 먼지 정령이 깃든 정원. 검은 나무판자가 촘촘히 엮인 담장에 기대어 오죽이 자라고, 그 앞으로 등이 구부러진 작은 소나무 두 그루가 사이를 두고 서 있고, 반짝이는 이파리가 무성한 작은 나무들이 앉아있는 정원. 작은 나무들 사이엔 그보다 더 작은, 이파리가 축축 처져 땅에 닿은 화초들이 깔려있었다. 그런데 한 구석에 작은 화초들조차 자라지 못하는 공간이 있었다. 검은 대나무들과 땅을 기듯 가지가 나지막하게 드리워진 소나무 사이의 움푹 파인 공간이 바로 그곳이었다. 저 깊은 저곳에는 그 무엇을 갖다 놔도 먼지가 되어버려. 검은 먼지 정령이 하는 짓이지. 너희들을 갖다놔도 먼지가 되어버릴 걸. 할머니가 가끔 우리에게 겁을 줬다. 우리들은 믿음 반 의심 반으로 거기에 샌드위치나 쿠키를 던져놓고 지켜보곤 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우리 둘이나 셋, 넷이 어느 순간 모두 함께 다른 짓, 다른 생각, 다른 곳을 보느라 눈을 뗐을 때, 그것은 움직였다. 할머니! 할머니! 정말 사라졌어요. 샌드위치가 사라졌다구요! 우리도 저기 가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먼지가 되어버리는 걸까. 우리는 살짝 두려워지곤 했다. 그러면서도 우린 자주 그 찻집에 가서 앉아 있었다. 
언제나 고요하게 비어있는 그 뒤뜰에선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졌으니까. 고요한 뒤뜰의 반듯한 살창 앞에 앉으면 언제나 그의 입술은 내 목덜미를 자근자근 물었고, 그의 숨은 언제나 내 귓속에 가득 들어와 내 숨을 막히게 했고, 도란도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관심을 돌리는 찰나, 검은 먼지 정령이 우릴 먼지로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오직 서로만 바라보고 서로에게 열중하던 그 때. 

*
-어!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돌풍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맞는 바람에 돛이 휘청 넘어가면서 배가 왈칵 기울었다. 모든 컵의 맥주가 쏟아졌고, 은주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남자들은 기어서 제 위치로 갔다. 도연은 러더를 잡으려고 선미로 미끄러졌고, 종호는 지브 세일을 조종하는 로프를 도르레에서 풀고, 태훈은 메인 세일을 잡았다. 나는 남자들의 무게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겁을 먹은 은주의 팔을 잡아 맞은편에 앉혔다. 배가 기울어질 때마다 반대방향으로 다리를 짚고 버팅기느라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바로 눈앞으로 파도가 솟아올랐다가 곧바로 뒷전에서 치솟았다. 마스트가 높은 물마루에 묻혔다. 급한 김에 맨 손으로 지브 세일 로프를 반대쪽으로 잡아당기던 종호는 엄지와 검지 사이를 스쳐 살갗이 벗겨졌다. 피가 흘렀다. 태훈이 메인 세일을 활짝 열어주자 돌풍은 너무 쉽게 빠져나갔다. 
-야, 우리에게 행운이 잇따르는구나! 
도연이 소리쳤다. 
종호도 급박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한 기분 좋은 웃음을 물고 우리를 둘러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태훈 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동경34도 52분, 북위 129도 14분, 한국과 일본의 해상 경계야, 딱 절반 온 거지. 이제부턴 일본 바다야. 후쿠오카까지는 삼분의 일을 온 셈이지.
한 손으로 GPS를 가리키며 태훈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오이를 집어들었다. 그는 태연하게 바닷물에 또 쓱 헹구더니 우적우적 씹었다. 나는 로프 굵기만큼 파인 종호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탄력붕대로 단단하게 감아주었다. 아파? 많이 아파? 물었지만 종호는 약을 바르는 내내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찡그렸다. 복서처럼 붕대에 감긴 손을 내밀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찌푸린 미간을 보니 나카스에 혼자 앉아 소주를 기울이며 나를 불러내던 그가 떠올랐다.
그는 오른손은 잔을 잡은 채 탁자에 올리고 왼손은 꼿꼿이 세운 허리에 얹고 몸을 비슷하게 기울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했다.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세상을 향해 두고 봐라, 하고 호기를 물씬 보여주는 자세였다. 그는 내게 집중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향하곤 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항상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가령 일 주일이나 열흘 만에 가진 잠자리를 끝내자마자 그는 그토록 뜨거운 열기와 가쁜 숨을 싹 씻어내고 곧바로 세상을 향해 뛰어갈 준비가 되어 있곤 했다. 나는 흘러넘친 땀과 뜨거운 물로 흥건한 시트 위에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데, 그는 벌써 컴퓨터를 켜고 필요한 것을 검색하면서 푸쉬 업을 하거나 제자리 뜀을 뛰곤 했다. 가끔 나를 바라보지만 그것은 내가 그를 불렀을 때가 아니면 다른 것을 바라보다가 그저 눈길이 스쳐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뒤에 남겨진 것은 그게 무엇이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노려보면 그 눈에는 결기가 가득했고 꼭 다문 입술은 그 무엇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아물렸다. 정글에서 교미를 마친 수컷이 저럴 거야. 언제까지 교미의 황홀에 잠겨 있는 것은 정글의 수컷이 아니지. 가슴 아프면서도 그런 그가 아름답다고 여기던 때였다. 지금도 그는 베인 손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싸워야 할 대상을 노려보는 것처럼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빠져나간 돌풍이 저 앞에서 바닷물을 불쑥 잡아 일으키는 게 보였다.

*
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앞으로의 항해도 그리 어려울 게 없을 성싶었다. 뭐, 최악의 경우라 해도 다 함께 죽는 거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어차피, 망망대해에서 쪽배 한 척에 나눠 탄 처지니까, 우린 모두 똑같은 운명인 거다. 
해는 정수리에 내리쬐고 바다는 푸른빛이 증발하여 먼 곳은 바다 같지 않았다. 작은 물고기의 꼬리들이 여기저기 찰싹찰싹 부딪치는 것 같은 물결이 느껴질 뿐 각자 등을 돌리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손을 놓고 있는데 쿵 소리가 나고 우리의 발등 위로 누군가가 엎어졌다. 한줄기 파도가 등줄기에 왈칵 끼얹혔다. 누가 미끄러졌나, 했더니 태훈이었다. 먼 바다에서 눈을 돌린 종호가 반사적으로 태훈의 팔을 잡았다가 곧바로 억! 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태훈의 팔은 처음엔 약간 빳빳했다가 곧바로 힘이 풀려버렸다. 종호가 뒤로 잡아챈 탓에 어깻죽지가 꺾일 듯이 들춰졌다. 도연이 달려들어 태훈을 바로 눕혔다. 태훈의 눈동자는 이미 눈꺼풀 위로 돌아가 버렸고, 입술은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이럴 때 맨 먼저 기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나서 혀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얼른 태훈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은주의 목에 두른 손수건을 풀어서 나무젓가락에 둘둘 감아 입을 열고 물려놓았다. 태훈의 호흡이 일정하게 유지되어 가는 것을 보고 선실에 눕혀놓았다. 내가 근데 태훈 선생님, 뇌졸중 위험이 있었나? 묻는데 종호와 도연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구조 요청은? 
아, 우리 모두는 한꺼번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태훈이 항해를 지휘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조난을 당했다는 것을 뜻했다. GPS가 있고 겨우 방향을 가늠할 정도이며 한강을 오르내린 몇 번의 항해 경험 따위가 이 바다 한가운데서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모두 빳빳하게 경직되어서 몸의 어디 한군데를 툭 밀면 그대로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 순간 태훈의 목숨보다 자기 목숨이 더 중했다.
조난에 대한 훈련을 배운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배운 조난 대비법은, 배가 뒤집혔을 때 배를 바로 세우는 법, 항로를 이탈했을 때 구조를 요청하는 법, 물에 빠졌을 때 안전하게 올라오는 법 정도였다. 항해 지휘자가 정신을 잃었을 때에 대한 대비책은 익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항로를 이탈했을 때 구조를 요청하는 법 밖에는 없었다.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린 종호가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시도하고 은주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선 채 굳어있었다. 혹시나 하고 도연과 나도 집에 연락을 시도했다. 다행히 종호의 핸드폰이 119에 접속이 되었고 그는 GPS에 뜬 요트의 위치와 조난당한 사람들의 성명 등을 일러주었다. 그는 몇 가지 더 상황을 주고받으며 지시를 받는 것 같았다. 
종호가 핸드폰 폴더를 닫으면서 우리에게 지시했다. 내 핸드폰하고 도연이 것을 제외하고는 여자들 것은 꺼두는 게 좋겠어, 혹시 구조가 늦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배터리를 남겨둬야 하니까 말이지, 일본 해경에도 구조요청을 하겠다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종호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집에서 전화가 안 되면 굉장히 걱정할 텐데, 라고 은주가 조그맣게 대꾸하다가 종호의 눈빛에 질려 금방 전원을 끄고 말았다.  
종호는 우리 세 사람에 대해 혼자 책임을 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대마도가 가까이 있어. 후쿠오카까지 삼분의 일 온 거였으니까, 대마도는 아주 가까이 있을 거야. 해경에서 대마도에 구조요청을 보내면 금방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자주 먼 곳을 휘돌아보았으며, 세 사람을 똑같은 눈빛으로 한눈에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대마도로 가는 정확한 방향을 아는 건 아니었다.  남남서 방향이라고 알고 있어도 세밀한 방향은 태훈만이 알고 있었다. 태훈의 항해일지를 찾아서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풍랑이 일지 않는 한 어쩌면 그냥 그대로 바람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고, 구조대가 지시한 것도 그것이었던 것 같았다. 
모두 종호의 눈길을 피했다. 아마 모두들 이럴 때 감정을 적절히 억누르는 방법도, 적절히 분출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은주조차 도연 곁에 바짝 붙어 앉아있을 뿐 울거나 작은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남이 된 것 같은 종호 옆에 앉지도 못하고 되도록 그의 눈에서 비켜 있으려고 했다. 도연은 아까부터 우리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바람이 불어와 요트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도 로프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종호마저 어차피 크게 영향을 미칠 바람은 아니라는 듯이 돛을 흘깃 올려다보고 GPS를 내려다 봤을 뿐이었다.  
햇빛은 중천에 떠오르고 바다는 더욱 하얗게 질린 듯했다. 골을 이루며 퍼져나가는 물결조차 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연이 중얼거렸다.     
-구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얼마나 될까. 
아무도 대답이 없자 내가 종호에게 물었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한 거야? 아까 119하고 통화할 때 뭐래? 우릴 찾았다고 했어?
종호가 나를 휙 흘겨보았다. 나는 결기가 서린 그의 붉은 눈자위에 눌려 더듬거리면서도 끝까지 말했다. 왜, 통화를 오래 끄는 이유가 위치 파악 때문이잖아. 아까 너무 빨리 끊은 거 아냐? 종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더니 목소리도 깔았다. 네 어이없는 머리를 많이 봐주는 거라는 듯이.
-그러게 전원을 켜둔 거잖아. 신호를 주고받도록 말이야. 
-우리가 조류를 따라 흘러가도 우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방향을 바꾼 채 흘러가는 요트가 걱정되었다. 
-오히려 조류를 거스르는 게 더 문제가 될지도 몰라. 조류를 크게 거스르지 말고 역풍이 불면 그것만 피해서 가고 있으면 구조대가 우릴 찾기 쉬울 거야.  
상황은 분명했다. 우린 지금 아무도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거였다.  
종호가 무거운 분위기를 피해 선실에 내려갔다. 그가 아무리 선장역이나 지도자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도 없었다. 선실이 덥지는 않을까. 태훈은 숨을 쉬고 있을까. 나도 걱정이 되어 선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태훈의 눈을 열어보며 괜찮은지 물었다. 대답은 물론 없었다. 종호는 다시 태훈의 코에 귀를 가져다 대고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어떠셔? 하고 물으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으셔, 했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선실에서 나오지 않고 손으로 바닥을 여기저기 가만가만 눌러보았다. 
밖으로 나오는 종호의 얼굴이 아주 어두웠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태훈이 숨을 멈춘 건 아닐까. 
-선생님, 안 좋은 거야?
내 곁을 지나면서 종호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배가 새고 있어,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무 놀라 대답도 못하는데 배가 휘청, 했다. 종호가 반사적으로 선실 벽을 꼭 붙잡았다. 나는 엉거주춤 들던 엉덩이를 얼른 좌석에 도로 붙였다. 그러나 허벅지에 힘이 빠져서 등을 부딪치며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은주가 선미에서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가장 무거운 태훈이 선두에 누워있기 때문에 도연은 함부로 선미를 비키면 안 되고 도연 옆에 딱 붙어 앉은 은주도 제멋대로 움직이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야! 너는 징징대지 좀 마! 도대체 지금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도연 앞에 은주가 정면으로 마주 서 있고 도연은 은주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두세 번 찌르듯이 움직였다.  
-너 데리고 살 걸 생각하면 숨이 막혀! 너를 이렇게 오래 만나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가 질리는 일인지 알아? 내가 누구에게서 도망쳐서 너한테 가게 된 건지 정말, 모르겠어. 
은주의 옆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렸다. 누구에게서 도망쳤는데? 은주가 이렇게 말했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도연이 아래턱을 내밀어 입술을 야비하게 비틀고는 고개를 휙 돌려 배꼬리에서 갈라지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종호가 도연을 노려보면서 등뼈를 곧추세운 채 서 있는 은주를 다독거려 억지로 제 옆에 앉혔다. 은주가 마지못해 앉자 종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배가 새고 있어.
은주가 아니라 내게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조금씩이야. 
종호가 다시 말했다.
-조금 더 차오르면 퍼내면 돼. 저긴 너무 좁으니까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면서 퍼내자.
물이 차오를수록 그 속도는 빨라지겠지. 그러면 이 작은 배는 물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겠지. 점점 틈은 벌어지겠지. 어느 순간 쫙, 쪼개져버릴지도 몰라.
은주가 울지 않아서인지 내 울음이 그쳐지지 않았다. 그동안 버텨온 허벅지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은주는 여전히 도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우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은 팔년 전 일본에서나 지금 이 바다 위에서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 작은 정원과 붉은 불빛이 즐비한 포장마차거리에서 우리 넷, 더 좁게는 각각의 연인 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쩌다보니 우리는 현지인들과 그리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일본에서, 게다가 작은 도시인 후쿠오카에서는 더욱 그랬다. 후쿠오카는 고대부터 반도인이 가장 많이 넘어갔던 곳이고, 조선의 말이나 글, 풍속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던, 그래서 조금은 의지가 될 곳이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몸을 비비고 지낼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외로웠기에 더욱 친밀해진 사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감정이 칼날처럼 곧추서는 일도, 전혀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종호가 다시 한 번 선실에 들어갔다. 셔츠로 바닥에 고인 물을 닦아들고 나왔다. 그는 흥건한 셔츠를 짜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우리. 불안한 건 당연한데 이렇게 서로 싸우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돼. 이러지 말고 얘기나 하자. 뭐든, 그동안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거야. 어차피 시간이 필요하니까. 
울음을 그치고 종호를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누르는 종호의 미간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라고 어찌 두렵지 않을까. 자기도 두려워 죽을 것 같으면서 그는 우리 세 사람의 불안까지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여간해서 느끼지 못했던 종호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격앙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방법이라곤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얘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불안함을 잊는 데는 수다가 최고야. 천일야화가 있잖은가. 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나 스스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조하고 나섰다.
-그래, 그러자. 우리 재미있는 이야기하자. 은주야, 나카스에서 말이야, 네가 검은 먼지 정령이 사는 데를 또 한 곳 발견했잖아. 그 얘기 해줘. 그때 거길 어떻게 알아냈지? 
은주는 종호에게 이끌려 앉혀진 그대로 빳빳하게 굳은 몸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굳은 자세로 연신 흔들리는 배의 롤링을 견딘다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그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은주의 고집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내가 대신 말머리를 끄집어냈다.
-그 골목 맞은편에, 대칭으로 또 하나의 찻집이 있었대. 4학년 1학기 끝 무렵이었다고 했지? 이름도 기온이었고, 구조가 똑같았다고 했지? 그런데도 우린 끝까지 몰랐잖아.
내가 종호에게 동의를 구하며 눈을 맞추는데도 종호는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119를 누르는 것 같았다. 접속이 안 되는지 다시 누르면서 선실로 들어갔다. 은주가 갑자기 내 말을 가로챘다.  
-도연 씨가 어느 집으로 사라졌어. 나는 그 전날 약속했기 때문에 당연히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기온으로 가고 있었지. 도연 씨가 저 앞에서 다른 골목으로 휙 꺾어 들어가는 거야. 좀 서두르는 걸음걸이여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따라갔지. 기온과 똑같았어. 백 년 된 가옥과 거의 똑같이 지었지만 목재와 냄새는 훨씬 현실적이었지. 할머니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 찻집이었어. 그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나란히 앉아 정원 구석에 쿠키를 던지는 것을 보았어. 그러면서 말하더군. 여긴 검은 먼지 정령이 더 많이 사나봐요. 쿠키가 금세 없어져요. 흥, 던져놓은 쿠키를 지켜볼 시간이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아까운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거나.
나는 처음 듣는 도연의 비밀에 점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이번엔 도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은색으로 차갑게 벼려진 듯한 은주의 콧날을 바라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그 콧날이 도연의 내리깔린 두 눈을 겨누는 듯 보였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어가네, 싶었지만 지금 온몸으로 저항과 보복심을 표현하는 은주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과 함께 그 마음을 더없이 잘 알 것 같은 동조가 일시에 나를 사로잡았다.
-정령은 무슨 검은 먼지 정령! 너네들은 그 따위 환상에 빠져 있으니 항상……. 그게 쥐새끼 짓이지, 그런 걸 믿고 있었단 말이야? 나 원, 한심해서…….
물이 줄줄 흐르는 셔츠를 짜던 종호가 손을 휘익 저으며 말을 잘랐다. 나도 모르게 종호에게 왈칵 화가 치밀었다. 그게 쥐새끼든 정령이든, 그걸 믿든 안 믿든, 지금 그게 문제인가. 도연과 은주 사이에 심상찮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그러니까 은주 말은 도연이 그때 찻집의 그 아주머니와 은밀한 사이였다는 말인가? 그리고 종호의 말은 단지 정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그게 쥐새끼의 짓인 줄 알면서도 그걸 이용해서 사랑 놀음을 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 찻집에서 도망쳐 나에게로 왔다는 말이야? 응? 
은주는 작심한 듯이 캐물었다. 도연이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긴장을 풀자 창백함이 가시고 갑작스럽게 피로에 찌든 얼굴이 되었다. 도연의 저 얼굴을 잘 안다. 은주와 함께 있다가 가끔 저런 표정이 스며나오려 하면 그는 얼른 얼굴을 돌리곤 했다.
-너무 심한 거 아냐?
종호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흥, 남자끼리는 이해한다, 그거야? 싶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연이 선실로 내려갔다. 물이 점점 더 많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몇 벌의 옷가지로 해결 할 수 없는지 도연이 바가지로 쓸 그릇을 찾기 시작했다. 거칠게 가방들을 옮기며 구석을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구조될 때까지 배가 버틸 수 있을까?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종호가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핸드폰을 닫는 종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나도 종호 씨에게 할 말 있어. 
종호가 턱을 치켜들었다. 뭐? 너는 또 왜 그래? 하는 얼굴이었다.
-종호 씨 때문에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있었어. 자기가 헤어지자고 했던 그 때…. 나, 고양이를 죽였어.
너무 깊이 억눌러왔던 일이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종호는 싸늘하게 물었다. 뭐라고? 나 때문에 고양이를 죽여? 내 대신 화풀이 한 거야? 
-그게 아니야, 내가 우리 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잖아. 종호 씨가 그만 만나자고 했을 때 너무 힘들었어. 며칠 동안 죽을 거 같았지. 아마도 내가 미니를 잘 돌봐주지 못했을 거야.
미니는 내 변화를 일찍 알아차렸다. 일 주일 내내 자기를 쳐다봐주기만 기다린다는 듯이 코앞에서 눈을 맞추고 울어댔다. 혼자 누워서 숨만 쉬기도 힘든데, 미니를 돌봐줘야 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그러다 미니가 정수기 물을 다 빼놓은 사태가 벌어졌다. 주방 앞이 한강이 되었다. 너무 화가 나서 냉장고에 미니를 집어넣어버렸다. 잠시만 벌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종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고 있니, 나와라, 나와서 밥이나 먹자. 나는 앞뒤 분간 없이 달려 나갔고 종호와 마주 앉아서야 미니를 냉장고에 그대로 두고 왔다는 것을 기억했다. 벌떡 일어나 돌아가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양이는 털이 많으니까 추위를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고양이는 목숨이 질기다니까, 아홉 개나 된다니까……. 
나는 목이 꽉 조여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너를 떠날 수가 없었어, 나는 너 없이는 살 수 없나봐, 그런 말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종호는 그 동안 자기에게 일어난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번 학기 간신히 넘겼어, 고노 요시히로 선생이 학점을 안 주려고 해서 말이지. 가서 싹싹 빌었지. 그 얼굴을 보고는 빌 맘이 안 생길 거 같아서 고개 숙이고 있느라 정말 힘들더라. 아무렇지 않은 말투, 너무나 일상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아마도 나와 헤어지지 않았는가 보다.  
밥을 먹으면서 그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슴을 가리켰다. 이 집 음식 맛있다 해서 왔는데 먹어보니 그저 그러네 하는 말투로, 젖꼭지가 다 보이네, 엉덩이도 다 보이고, 하면서 벗은 발을 내 발 위에 얹었다. 나는 당황하여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스웨터는 잘 여며져 있었다. 네 젖꼭지는 그냥 다 보여. 그의 축축한 발이 얹히자 그의 존재가 실감났다. 맨 발을 맞비벼도 되는 사이란 분명, 남남은 아닌 거겠지?  
우리가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찰나 검은 먼지 정령이 우리의 사랑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까, 나는 두려워했다. 검은 먼지 정령은 우리 사랑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악귀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태연한 표정과 너무 심상해서 알 수 없는 속내를 읽기 위해 미니를 잊었다. 아니, 가끔 냉기가 엄습하고 몸의 어디서부턴가 찌릿찌릿한 전율이 일어나 턱이 떨리곤 했지만 나는 종호에게만 집중했다. 그 사람이 없어진다면 내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절박감에 시달렸다. 마침내 그는 술을 한잔 입에 털어넣고 나서야 없었던 일로 하자, 라고만 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세 시간을 기다렸다. 겨우, 그 말을 듣기 위해 나는 미니를 죽였다. 
그런데도 그가 평소처럼 엉덩이를 꽉 움켜잡는 바람에, 그의 손에 의해서만 연주되어지는 반도네온처럼 내 아랫도리는 벌써 탄식으로 젖어들고 길고 높은 음을 내지를 준비가 되어버렸다. 나는 끈에 묶인 개처럼 그를 따라 갔다. 
밤 늦게 집에 들어와 숨을 멈추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미니가 툭 떨어졌다. 풍성한 회색 털 속에 빳빳한 몸이 만져졌다. 털은 벌써 바삭바삭 부서질 듯했다. 미니의 죽음과 그를 맞바꾸고, 나는 울음을 꾹꾹 눌러참았다. 울음을 터트림으로써 미니에게 용서를 빈다는 건, 미니를 죽게 만든 내가 할 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꽁꽁 언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심리적 추위와 전율에 시달려야했다. 
추위가 엄습한 듯 몸이 마구 떨려와서 가슴을 싸안는데 종호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왜 그랬어. 고양이 얘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서.
뭐라고? 너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갈 힘이 없어서 고양이를 냉장고에 넣었다는 얘기를 하지 그랬느냐고? 왜 하나도 급할 게 없는 일 때문에 고양이를 죽였느냐고? 그의 무심한 말 한 마디에 과거의 모든 원망이 왈칵 쏟아졌다. 

*
배는 또다시 바람을 따라 빙글 돌았다. 은주는 반듯이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꽉 물고 있다가 배가 휘청거리자 두 손을 뻗어 난간을 붙들었다. 도연이 키를 제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배가 억지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면서 앞머리가 불쑥 일어섰다. 나는 선실 바닥에 고인 물을 바가지로 닥닥 긁다가 배가 들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종호도 배가 움직인 만큼 메인 세일의 방향을 바꾸고 돛에 바람을 받았다. 배가 천천히 돌아 앞으로 나갔다. 도연도 종호도 방향이 맞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이 분위기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저 해본 것이라는 것쯤 알 수 있었다. 얘기가 끊어졌다. 돛에 안겨 파라락거리는 바람소리도, 햇빛의 뜨거움도, 가끔씩 부드럽게 부풀어올라 꼬리뼈에 와서 부딪쳐 등줄기를 움찔거리게 하던 물결도 고요했다. 물이 새어 들어오는 소리, 그것이 들리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일까? 아까 연결되려다 만 건 어찌된 것일까? 해경들은 우릴 찾긴 찾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들이 우릴 지나쳐 가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가 떠 있는 이 자리는 그 누구의 시선도 미치지 않는 검은 먼지 정령의 정원인 건 아닐까. 
어디선가 냉기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에게서 도망쳐 내게로 왔다는 말이야? 왜 그랬는데?
우리는 한꺼번에 은주를 바라보았다. 이 목소리가 과연 은주의 목소리란 말인가? 종호조차 화들짝 놀라 은주를 쳐다보고 도연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닌지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종호는 은주를 쳐다보던 눈빛을 확 구기면서 뜨거운 태양을 힐긋 올려다보더니 어디선가 찾아낸 망원경을 들어 먼 바다를 관찰했다. 도연이 다시 은주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은주도 그 눈을 맞받았다. 순간 배의 흔들림 같은 것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검은 먼지 정령의 정원이었다. 우리의 행복했던 쿠키와 샌드위치를 흔적도 없이 수장시키는. 
-나는 두 번이나 도망쳐서 너에게 갔어. 그녀들은 내가 갈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너였어.
도연과 은주의 눈이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더 이상 물을 퍼낼 수가 없었다. 그냥 주저앉아서 도연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등학생 때 친구의 엄마를 좋아했어. 친구의 엄마를 말야.
친구의 엄마는 연약해보이는 여자였어. 친절하고 세심하고 조그맣지만 풍만했어. 그리고 언제나 아름다웠어. 여자의 원형 같았지.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가는 것은, 가슴 떨리게 흥분되는 일이었어. 친구 방에서 놀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과일이나, 음료 같은 것을 갖고 들어오기를 기다렸지. 나는 친구와 약속을 한 것처럼 친구가 없을 때도 그 집 문을 두드리곤 했어. 그리고 친구는 없지만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싶어서, 나는 문 안에 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갔어. 
그러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았지. 그녀가 들어오라고 했어. 그리고 소파에 나를 앉혔지. 친구 녀석은 다른 녀석들과 어울리고 있어서 늦어질 것을 난 알고 있었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때,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향기와 부드러운 살에 나는 미쳐버렸어.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 그녀가 내 어깨와 뺨과 팔과 손을 물어뜯었어. 나는 그것을 포옹이라고 여겼지. 그녀가 내 뺨을 때리고 할퀴고 발로 찼어. 내게는 격렬한 포옹이었어. 그녀의 손바닥과 무릎은 어떻게 닿아도 좋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었거든. 친구가 문을 열고 들어왔지.  
친구 손에 죽지 않으려면, 난 어디로든 도망가야만 했어. 집에서 일본에 있는 삼촌에게 빨리 학교를 알아보라고 했고, 급하게 후쿠오카에 오게 된 거야. 
-그래서 어렸을 적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거였군. 항상 그게 이상했어, 고등학생 때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너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아? 
-변태가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아니었던 거지. 다른 아줌마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도연의 뺨이 빳빳해진다 싶더니 그가 있는 힘을 다해 꽝 발을 굴렀다. 선미가 푹 내려감과 거의 동시에 물의 반동으로 배가 불쑥 들리면서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마스트가 무겁게 휘청, 내려왔다가 휘익 올라갔다. 순간 푸르른 장막처럼 파도가 활짝 펼쳐지더니 요트 안으로 쏟아졌다. 파도가 등짝을 후려쳤다. 다들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배의 난간을 꽉 움켜잡았다. 바닷물이 끼얹힌 등줄기가 바짝 오그라들었다. 그렇잖아도 두려워죽을 지경인데 이런 식으로 위협하는 도연에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런데 종호는 도연이 아니라 은주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만 좀 해! 
은주가 아니라 내가 맞받아 소리쳤다. 
-왜 그만 하라는 거야? 
도연의 위협은 당연하다는 건가? 종호에게 또 해묵은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핸드폰을 꾹꾹 누르려던 종호가 붉은 얼음 같은 눈으로 나를 찌르듯 노려보았다. 그의 눈 깊은 곳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너라도 좀 참아주면 안 되냐? 그의 눈에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높은 파도는 잦아졌지만 남은 파도가 여진처럼 요트를 흔들어댔다. 아직도 마스트 꼭대기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휘돌고 있었다. 마스트가 돌고 배도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마치, 아무 느낌 없이 반복되는 섹스 같았다. 처음엔 돌풍과도 같이 나를 뒤집어 바다에 빠뜨려버릴 듯했지만 이제 잔열과 미진한 메슥거림만을 남긴 것처럼. 
그리고 저 바닥으로 소리도 없이 차오르는 물. 점점 빨리 차오르는 물. 은주 차례였지만 은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물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두려움이 커지는 속도만큼 물이 빨리 차오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이 두려움을 몰고 왔다. 다른 얘기를 하면 저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도 몰라.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종호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행여 바다 끝에 무엇인가 나타난  것을 놓칠까 싶어서 먼 바다를 짯짯이 살펴볼 뿐이었다. 
-종호 씨하고 섹스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오르가즘을 느낀 적이 없었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종호가 픽, 하고 웃었다. 
그의 반응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해의 위치를 자주 확인하여 사방 방위정도는 알아내고, 배가 나아가는 방향과 자기가 가늠하는 방향과의 일치, 혹은 상이에 대해, 물이 차오르는 속도를 엄밀히 가늠하며, 구조선이 아직도 안 나타나고 교신이 실패한 것에 대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사이 건성으로 대꾸를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이야길 갖고 그러네, 싶은지 도연과 자신의 핸드폰을 번갈아가며 누르고 있었다. 연락할 만한 전화번호는 다 눌러보는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올라가고 싶은데 올라갈 수가 없었어. 종호씨는 내게 쾌감을 주지 못했어. 매번, 절정 앞에서 끝을 내야하는 게 얼마나…… 고통인지 알기나 해?
-나도 알아. 네가 좀 불감증인 것 같더라. 
종호가 시큰둥하게, 그러나 선선히 대답했다. 종호에겐 지금 그 따위 오르가즘이 문제가 아니리라. 자신만큼은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지도자로서, 비록 대마도에 가기 위해 뱃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하는지는 모를망정, 친구들을 안전하게 지킬 책임이 있고, 조금이라도 빨리 구조가 이루어지도록 무슨 일인가는 해야 하는 인물로서, 내가 거는 시비 쯤 간단하게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투였다. 더구나 불감증이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니까. 
-내가 불감증이라구? 미안하지만 다른 남자와는 엑스터시를 느끼거든.  
은주가 구역질을 하더니 배 밖으로 몸을 내밀고 토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예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눈물과 분노와 두려움을 포함한 그 모든 것을 쏟아버리고 싶은지, 오물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계속 쏟아냈다. 
그것을 보자 나는 오히려 메슥거림이 가라앉았다. 내 대신 그녀가 우리의 오물을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쥐새끼처럼 새어들어오는 물도 은주가 대신 토해버렸으면 싶었다. 
-다른 남자는, 나를 죽여줬어.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너랑 할 때는 힘들어. 너는 도무지 올라갈 줄을 모르거든.
-넌 여자를 몰라.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슨 소리야. 나, 어떤 클럽에 가입해있는데 말이야. 말하자면 일종의 밀교클럽이지. 거기서 여자를 만날 수도 있거든. 근데 그 여자들 모두 나하고 완벽하게 절정에 올랐어. 절정에 오른 여자들의 파동을 함께 타는 기분, 너, 그거 알아? 너도 좀 개발해봐.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란 클럽이야. 내가 가입하는 거 도와줄까?
은주가 문득 구토를 멈췄다. 그녀가 계속 토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다른 여자들의 절정의 파동, 파도. 나는 배에 와서 부딪치는 파도를 느꼈다. 끊이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 점점 높아지는 물마루. 요트를 집어삼키고 마스트를 집어삼키고, 검은 먼지 정령의 정원보다 더욱 어두운 죽음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저 높은 파도, 파동. 모든 남자들을 자신의 파동으로 저 깊도록 어두운 물마루까지 말아올려버리는, 여자들의 무지막지한 성욕. 그것을 함께 탄다, 더욱 깊은 죽음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며. 
나는 내 몸에 몰아치는 낯선 파도, 낯선 여자들의 파동 때문에 메슥거림이 심해지고 구토가 치밀어오름과 동시에 음부가 저절로 벌어지면서 간절히 남자를 원하는 것을 느끼고 뱃전에 몸을 숙였다. 이제 내가 오물을 쏟아낼 차례였다. 종호가 해치운 여자들, 혹은 종호를 해치운 여자들을 다 토해버리고 싶었다, 물론 종호와 함께. 
은주가 난간에 가슴을 기대고 긴 머리카락을 온통 바다로 쏟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해경 쪽에서 연락을 해오는 것 같은데, 접속이 안 되네. 그래도 우리가 어디 있는지는 알 테니까, 마음 놓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끝까지 종호는 우리의 지도자 역할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바람직했다. 그의 강하고 확신 넘치는 목소리 덕분에 덜 두려웠으니까. 종호가 선실로 내려갔다. 참 성실한 사람이다. 바가지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태양이 넘어가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관계가 깨지는 속도도 너무나 빨랐다. 팔 년 간의 사랑은 단 여덟 시간 만에 끝이 났다. 팔 년 간의 사랑은 순식간에 깨질 만큼 언제나 위험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마 팔 년 내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조선은 마치 언덕 아랫길에서 불쑥 올라온 것처럼 나타났다. 구조요청이 있은 뒤 곧바로 우리를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보니 우리 뒤를 계속 따라온 꼴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예정보다도 빨리 후쿠오카 앞 바다까지 흘러왔던 것이다. 
큰 고통을 치르고 여기까지 왔으니 검은 먼지 정령의 정원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은주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도연도 기온이라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서 비롯된 이 모든 불행을 어서 빨리 끝마치고 싶다는 듯이. 마치 일초라도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은 심정처럼, 일초라도 빨리 서로에게서 빠져나가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종호와 함께 나카스를 향해 걸었다.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
백년의 정원은 없었다. 우리는 기온이 있던 길가에 서서 거기까지 밀고 들어온 거대한 쇼핑몰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쇼핑몰을 세울 때 철거됐을까. 아니, 우리가 바다에 떠 있던 그 순간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이십 대를 다시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시절이 검은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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