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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신작단편/김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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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컴포지션(composition) 7
김규나
달은 없었다. 차갑고 푸른 악어가 달을 삼켰다. 암스트롱이 깃발을 꽂은 건 말캉거리는 혓바닥 위였다. 물고기는 있었다. 지느러미를 팔랑거리자 마른 바람이 일었다. 갈매기가 있었다. 날개를 길게 펴고 검은 분화구 위를 선회했다. 와디 럼 붉은 사막, 도마뱀이 축축한 입김을 뱉어내고 밤이 왔다. 호수는 멀었다. 꼬리를 자르고 태곳적 바다, 그 납작한 사막에 누워 바라본 건 수면 위 물거품, 달은 없었다. 갈매기는 푸들푸들 깃털을 털었다. 개구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38만4,400Km, 먼 달 속으로 뛰어내렸던 레밍들의 아우성, 귓바퀴가 쫑긋거렸다. 달은 없었다. 붉은 바람이 일었다. 열 개의 발톱을 뽑아 사막 한가운데 묻었다. 피를 핥던 혓바닥이 달을 토해냈다. 푸른 달.-컴포지션/소묘1
가로등이 점등된 시각은 저녁 7시 45분이었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아야 하는 러시아워, 꽉 막힌 남부순환로에서 짜증이 오르고 있을 때였다. 파란 신호등, 그러나 빨간 브레이크 등, 혹은 끼어들고 싶은 노란 점멸등. 앞 운전자가 차창 밖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푸른 드레스셔츠 소매와 날렵한 손, 그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있었다. 담배, 하고 발음했다. K가 선물했던 라이터는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 퐁, 퐁,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거슬려서 담배를 끊을 뻔했다. 핸드백 안에 담배는 없었다. 빈 갑을 버린 건 커피숍 주차장에서였고 편의점을 찾아 나서기엔 하이힐이 너무 높았다. 퐁,퐁 라이터는 사무실 책상 서랍 어딘가 처박혀 있을지도 몰랐다.
어스름 속에서 키 높은 가로등이 일제히 불을 켰다. 가로등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둡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앞 차의 브레이크 등 외에 인지해야 할 것이 없었다. 당연히 상존하는 것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지 않는 한 언제나 망각 속에 위치한다. 가로등의 자동 조도 장치는 어둠의 농도를 측정했을 것이고 불을 켜. 바로 지금이야. 혼자서 선포했을 것이다. 세상이 문득 환해진 건 아니었다. 불빛은 그야말로 느리고 나긋하고 소심했다. 나트륨가스의 압력이 열에 의해 높아지면서 유리 발광관의 빛이 차츰 밝아졌다. 시속 10킬로미터로 50미터쯤 지났을 때 다시 한 번 팟, 하고 도로변에 나열된 조명의 채도가 명료해졌다. 어쩌면 그 사이 어둠이 진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헤드라이트를 켰다. 신호는 빨간 색으로 바뀌었고 도로가 다시 빨간 브레이크 등에 묻혀 정지했다. 앞 차의 운전석 밖으로 또다시 담뱃재가 털렸다. 핸드백을 열었다가 닫았다. 담배가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길가에 잠깐 차를 세우고 어디서든 담배를 사지 않은 걸 후회했다. 좌회전 신호로 바뀌었다. 직진 신호까지 아직 30초의 여유가 있었다. 기어를 파킹에 놓고 핸드브레이크를 건 뒤 안전벨트를 풀었다. 운전석에서 내렸고 망설임 없이 앞 차 운전석으로 갔다. "담배 한 대 빌려주시겠어요?" 어둠의 초입에서 가로등의 불빛을 인지한 순간처럼, 그런 눈빛으로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예술의전당 앞에서 일차선으로 들어섰을 때 남자의 차가 앞에 있었다. 남자와 나 사이엔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리 코를 들이밀어도 끼워주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누군가의 도움도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그들도 나를 방해하지 말아야 했다. 정체된 도로에서 담배가 간절히 필요했을 뿐이었다. 내게 담배가 있었고 누군가 불쑥 나타나 담배를 원했다면 나도 기꺼이 건넸을 것이다. 고맙다고 할 일도, 미안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의 담뱃갑엔 겨우 한 개, 남아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마지막 한 개비, ‘돗대’를 내게 건넸다. 애연가는 안다. 돗대가 얼마나 달콤한지, 그래서 한 갑을 되갚는 것이 예절이라는 것을. 기회가 되면 갚을게요. 예정에 없던 말을 했다. 담배를 받아들었다. 남자가 조수석에 있던 팸플릿을 건넸다. <붉은 달의 침묵, 와디 럼 사진전> 안내장이었다. 시간 되는 날 오세요. 남자의 눈가에 번진 미소가 싫지 않았다. 자동차로 돌아와 기어를 풀기 전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뒤차가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눌러댔다. 몇 미터 전진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달릴 수는 없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중년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담배를 빌리러 오지 않은 걸 더 괘씸해하는 것 같았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 3초쯤 더 화를 돋궈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밤새 시를 썼다. 꿈이었다. 소설가가 소설은 안 쓰고 시를 썼다. 기억하고 싶어서 잠을 깼다. 눈을 감은 채 두 번이나 암송했다. 다시 까막 잠이 들었고 해가 떴을 땐 기억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대신 비가 내렸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맛보았다. 짜고 비렸다. 손바닥이 쪼글쪼글해졌다. 어깨와 등과 머리도 온통 빗물에 절여졌다. 수분이 모두 빠져나갔다. 천둥번개가 쳤다. 어두웠지만 불을 켜지 않았다.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여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진공청소기를 밀었다. 위이잉, 머리카락과 먼지와 빗물과 구름과 어둠이 빨려들었다. 바람이 휭휭 일었다. 먼지주머니 속으로 여자도 빨려 들어갔다. 헝클어지고 부서진 여자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비가 그쳤다.-컴포지션/소묘2
남자의 사진 전시회에 간 건 그로부터 2주 뒤 금요일이었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요르단의 사막, 와디 럼이 펼쳐져 있었다, 금빛 모래 물결은 없었다. 바람에 깎인 바위 언덕, 아득한 절벽, 메마른 황무지에 붉은 달이 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카라반도, 선사시대 유목민도 그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곳, 그 중심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남자는 과하지 않을 만큼 나를 반겼다. 남자가 자주 들른다는 와인 바에서 가볍게 마셨다. 블랙 인테리어, 간접 조명과 느슨한 음악과 지나치게 푹신하지 않은 소파는 대화에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시켰다.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린 사진작가는 사교적인 대화에 능숙했다. 음악과 영화, 미술과 여행에 관해서도 해박했다. 특히 사막과 중동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요르단은 사막을 팔고 바다를 얻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로 넘어간 사막에서 석유가 나올 줄은 몰랐던 거죠. 요르단은 중동국가 중 유일한 비산유국이에요.” 남자가 웃었다. 석유가 있다는 걸 알았어도 나는 바다를 택했을 거예요, 말하는 대신 나는 잔을 비웠다. K를 포기한 것에 미련은 없었다. 그리고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한참 후에 명백해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결혼과 아이 모두를 얻을 수 있었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결정은 번복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선택이 언제나 이익과 상식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화이트 와인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밤 9시쯤 바를 나서며 남자가 자신의 홈 메이드 커피를 제안했다. 남자의 오피스텔은 멀지 않았다. 작업실과 사적인 공간이 뒤섞여 있었다. 지나치게 깔끔하다거나 참을 수 없을 만큼 어수선하지 않았다. 음악을 튼다거나 흐트러진 침대를 치운다거나 소파 위에 던져진 옷가지를 감추지도 않았다. 초대를 거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이 비로소 가벼워졌다. 남자가 익숙하게 커피를 준비했고 그 사이 나는 창을 등지고 서서 그런 남자를 쳐다보았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은 커피에만 집중해야 해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비결이지요. 남자가 머그잔을 내밀었다. 남자는 공간적 거리를 의도적으로 좁히지 않았다. 사진작업에 관심을 갖는 내게 남자는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전문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웃었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하고 이야기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리게 된다. 쏟아낸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게 말 걸어주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는 정도면 충분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그날? 남자가 소파에 앉아 물었다. P 신도시.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은 커피는 진했다. 왜요? 남자가 다시 물었다. 아,이, 보러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촉촉해졌다. 남자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왜, 화가 나있었어요? 내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나는 남자에게 내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남자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순간을 포착하듯 단숨에 상대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지도 몰랐다. 문득 자기연민에 빠져 남자에게 많은 이야길 해버릴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남자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이 떠올랐다. 키보다 한참 높았다. 까만 하늘에 달이 뽀얬다. 카메라 렌즈로 1,200배 확대해 본 달 표면은 페인트 조각이 떨어져 나간 습기 먹은 베란다 천장 같았다. 토끼도 계수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건너편 고층 아파트 불빛이 일곱 개쯤 남아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좁은 골목길에 들어왔다.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달은 더욱 둥글어지고 달빛은 점점 투명해졌다. 밤공기는 찼다. 오소소,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추워, 하고 말했다. 노래를 몇 개 흥얼거렸다. 잠 든 사람들은 하늘에 달이 뜬 걸 알까, 궁금했다. 봐주는 이 적어져서 심통난 거라고, 그래서 일 년에 3.8센티미터씩 지구에서 멀어지는 거라고 달의 외로움을 이해했다. 나도 쌩 토라지면 한 시간에 3.8센티미터씩 너에게서 멀어질지 몰라, 소리 내어 말하려는데 후후훗, 달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가끔은 뒷모습도 보여주면 안 돼? 내가 물었고 달은 못들은 척 했다.-컴포지션/소묘3
당신에게선 항상 똑같은 냄새가 나. K의 손이 등을 토닥였다. 당신을 기억하게 하는 건 따뜻한 이 냄새야, K가 내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말했다. 눈을 감았다. 내게도 K의 체온과 체취가 묻었다. 안개 냄새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냄새, 뿌옇게 눈앞을 흐려놓아 길을 헤매게 만드는 냄새, 안개가 K를 기억하게 할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K가 떠나고 혼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던 새벽, 아이의 태동을 느끼며 몸을 돌려 누울 때면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올랐다. 장롱 밑이나 침대 아래였을 것이다. 갈라진 방바닥 틈새로 기어 나온 안개는 발치에 서서 유령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뿌연 알갱이들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눈을 꼭 감고, 작게 몸을 웅크리고, 안개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잠결에 더듬던 K의 손길과 체온의 부재를 깨닫던 그해 여름은 내내 발이 시렸다.
아이를 낳던 날 K는 결혼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더 끔찍한 현실은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당신이라는 거야, 말하고 돌아선 K였다. 결혼하자는 K의 제안을 거절한 건 나였다. 프러포즈는 아이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임신한 섹스파트너에 대한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K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를 사랑한다고 믿지 않았다.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잘 지냈을 관계였다. 그러나 일주일에 몇 시간 함께 잘 지내는 것과 결혼은 달랐다. 오래 가지 않아 더 큰 상처를 주고받을 거라는 것은 나보다 K가 더 잘 알고 있었다. K는 나의 결단에 대해 설득도 회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베푼 한 번의 선의를 거부한 나를 용서하지 못할 뿐이었다. 아이를 낳던 말든 상관 안 해. 당신이 싫다고 한 거야. 그러니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 책임감이 강한 K는 그렇게 자신의 무죄를 확인받고 싶어 했다. 배가 불러올 때쯤 K는 자신의 결혼을 통보했다. 책임질 수 없었던 아이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임질 다른 무언가를 가져야 했을 K를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K에게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결혼하자,가 아니라 사랑한다,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의 잔인성은 동시에 시작하지 않고 동시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같은 회전판 위의 목마를 함께 즐거워했을지라도 폐장시간에 나란히 손잡고 퇴장할 수 있는 사랑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침대를 함께 쓰는 사이가 되기 전에 K는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을 모색 중이었다. K는 내게 X-연인이 덜 상처받는 이별법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별을 결심했다면 톱질하지 말고 단칼에 베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덜렁거리지 않게, 너덜거리지 않게, 그것이 목을 베는 망나니가 베풀어야 하는 자비다. K도 나도, 서로가 알고 있는 규칙에 충실했다. 상대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까지 잘라내지 못했다. 살고 싶은 의지를 전하려는 듯 아이가 꼭 움켜쥔 것처럼 조여 오는 아랫배와 매일 아침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두 개의 유방, 익숙하지 않은 현기증과 힘겨운 입덧, 생명은 내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추상이 아니었다. 병원 앞까지 갔지만 생명의 의지를 거스를 용기는 없었다. 아이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서 약해졌다. 생명을 품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K를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자각에 행복했다. 하지만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빠에게 버림받은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K는 친자소송은 물론 양육권까지 주장했다. 뱃속에 있던 아이를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법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무명작가보다는 안정된 가정과 직업과 재산을 소유한 남자에게 아이를 안겨주었다. 아이는 K의 호적에 올랐다. 아이는 K와 결혼한 여자의 자식이 되었다. 나와 아이는 법적으로 그 어떤 관계도 증명하지 못했다. 아이가 내게 머물렀던 흔적은, 배냇저고리와 작은 양말 한 켤레가 전부였다. 한 달에 두 번, 첫 돌이 채 못 되어 내 품을 떠난 아이를 안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돌이 지나자 잠깐씩 친모를 만나는 것은 아이에게 혼란을 줄 뿐이라며 K는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모든 상황을 이해할 만큼 성장할 때까지 모른 척 살아달라는 것이었다. K가 그토록 완강하게 나와 아이를 갈라놓으려는 건 우습게도 K의 여자의 인위적 모성 때문인 것 같았다. K를 지켜야 하는 여자의 안간힘이라는 게 더 적절했다. 불임판정을 받은 여자는 내 아이를 제 아이인 양 끌어안고 내주려 하지 않았다.
벌써 석 달째 면접권을 거부한 K는 그날도 커피숍에서 보자고 했다. 아이는 건강하다고 했다. 뉴질랜드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한 달 후에 떠난다고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결심이라고 했다.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K를 뿌리치고 카페를 나왔다. K도 따라 나왔다. 나쁜 놈. 현관 앞에서 돌아선 내가 K의 뺨에 손바닥을 올렸다. 이렇게까지 잔인해야 해?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 아이의 발가락은 얼마나 여물었을까. 한 달에 한두 번만이라도 볼을 비벼댈 수도, 새큼한 젖 냄새를 맡지도 못한다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두고 또다시 법정에서 싸우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K의 말대로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K는 그런 나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잘 키울게. K가 다짐했다.
아이를 만나고 오지 못한 밤이면 젖몸살을 하듯 온몸이 아팠다. 그날도 열이 오르고 몸이 으슬거렸다. 위장은 뒤틀리고 먹은 것도 없이 토하고 설사를 하며 뒹굴었다. 새벽에 혼자 찾아간 응급실에서 진통제를 섞은 링거를 맞았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레지던트가 소견을 말해주었다. 휘청거리며 병원을 나선 건 새벽 다섯 시였다. 바람이 몹시 차게 느껴졌다. 창문이 모두 열려 있는 택시를 탔을 때 아저씨, 추워서 죽을 거 같아요,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젊은 기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와서 약을 먹고 누워 깜빡깜빡 잠을 잤다. 약을 털어 넣기 위해 죽을 먹을 때를 제외하곤 30시간 이상을 꼬박 침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늦은 밤 휘청거리며 일어나 창을 열었다. 속이 헐렁한 인천행 막차가 지나갔다. 방충망을 열고 허리를 내밀고 골똘히 9층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중력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수도 있겠구나, 발가락이 끝내주게 간질거렸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 하고 발음하자 파열되었던 공기가 입 안에 갇혔다. 입술을 둥글게 모아 뿌우우, 소리를 내며 바람을 뺐다. 통,통,통, 바람이 빠져나갈 때 몸부림치는 빨간 풍선을 상상했다. 풍선이 탱탱한 건 압력을 거부하는 공기의 저항 때문이다. 공기의 압력이 일정하다면 바람은 불지 않을 것이고 작은 구멍으로 바람이 새어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저항을 참아낼 수 없는 풍선은 터져버릴 것이다. 일단 빠져나간 바람은 자신을 가두었던 풍선의 쭈글쭈글해진 몰골 따윈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 무엇도 나를 가둘 수는 없어. 바람이 속살거렸다. 사랑은 결핍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 그 이상이어야 해. 가끔은 멀리 있는 것이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지. 원망하고 미워하는 건 내 재능이 아니야. 그러니 선한 마음만 기억해봐. 내가 한 말들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허리를 펴고 방충망과 유리문을 닫았다. 철로엔 더 이상 전동차가 지나가지 않았다.
나를 일으킨 건 잡지사 편집부에서 온 전화였다. 지난 주 마감이었던 ‘칸딘스키의 구성(composition)-7과 소설적 소묘’에 대한 원고청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편집장이 일주일의 말미를 더 주었다. 노트북을 켜고 앉았지만 초점이 자꾸 어긋났다. 원고의 글자들이 흐릿하게 뭉개졌다.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누르고 문질렀다. 눈 속을 굴러다니던 수많은 모래알갱이들이 암흑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우르르 빨려 들어갔다. 모래들이 입 안의 혓바늘처럼 터져버렸다. 꼭 감은 눈 속으로 퍼진 어둠에 쩍쩍 금이 갔다. 사선으로, 직선으로, 빗금으로, 갈라지고 부러지고 흩어진 빛의 실금들이 스스로 발광하며 심해를 헤엄치는 괴생물체처럼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이 빛을 따라 유영했다. 깊었다.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오직 빛의 유희만이 현란하게 어둠을 희롱했다. 빛의 실체를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눈을 뜨고 빛을 직시하는 순간 빛은 처참히 해체되고 분해될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둠에 갇혔다.
사자는 거울 앞에 앉아 갈기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빨강과 초록으로 염색한 얼룩말이 샹젤리제 거리를 달렸다, 이글루에 둥지를 튼 참새들은 얼음을 맛있게 쪼았고 북극곰은 지구본을 미끄러져 내려와 남극에 무사히 정착했다. 펭귄들은 철새처럼 떼를 지어 열대우림으로 날아갔다. 숲을 누비던 원숭이들은 비키니 한 벌씩 챙겨 바다로 떠났고 태평양의 혹등고래는 시베리아 벌판의 벌목공이 되었다. 고양이 몸에는 비늘이 돋기 시작했다. 상어는 두 발로 멀쩡히 걸어 육지로 올라왔다. 지느러미 팔랑거리며 아틀란티스를 찾아가는 사자死者 무리들. 바람이 멈추었다.-컴포지션/소묘4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눈을 떴다. 책상 위엔 읽었거나 읽을 예정이거나 읽고 있는 책이 대여섯 권 쌓여있었다. 글자가 빼곡한 책은 열지 않았다. 칸딘스키의 「컴포지션」 연작이 실린 화보집을 펼쳤다. ‘그림은 균형과 비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몬드리안이 주는 긴장과 달리 칸딘스키와 눈이 마주칠 때는 열린 빗장 사이로 모든 것이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겨우 다져놓은 마음이 흐트러졌다. 색채와 선과 면의 교차, 부드러운 혼돈 위로 여러 개의 달이 솟아올랐다. 우연히 옆으로 돌려놓은 자신의 그림에 칸딘스키조차 탄성을 질렀을 정도로 추상은 추상, 그 이상인지 몰랐다. 똑바로 직시해선 안 되는 것이 햇빛만은 아니다. 섬광처럼 찰나에 포착되는 것, 존재란 그런 것이다.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이토록 헝클어진 시간도 되돌아보며 고개 끄덕일 날이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햇빛이 필요했다.
텅 빈 냉장고를 핑계 삼아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화단에서 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다. 어미가 새끼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서 나를 경계하는 네 개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새끼의 눈은 순진했다. 어미의 눈은 금방이라도 할퀼 듯 나를 노려보았다. 고양이도 제 새끼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는 떠날 것이고 나는, 더 이상 아이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작고 보드라운 아이의 두 입술이 엄. 마. 하고 부르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할 것이다. 코끝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이의 살 냄새를 맡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단단해진 아이의 뽀얀 종아리를 만질 수 없을 것이다. 크레파스로 엄마 아빠를 그릴 때, 아이는 나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기억 속에도 없는 나를 찾아와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해버렸다고, 아이는 언젠가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장 본 것들을 화단에 그래도 버려둔 채 미친 듯 지하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호수를 꿈꾼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은 머물고 싶기 때문이다. 둥글던 달이 반쪽이 되었을 때 계수나무는 어디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일까. 반달이 다시 그믐달로 사라질 때 토끼는 어느 나무 밑동에 숨는 것일까. 분화구, 검게 솟아오른 모래언덕 위에 토끼털 조끼를 입은 도마뱀이 계수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달의 이쪽과 저쪽에 서 있는 당신과 나는 멀다. 밤새 걸었으나 거리는 좁혀들지 않았다. 토끼가 없는 달을 당신은 떠나지 못할 것이다. 계수나무 사라진 달을 나는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떠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비는 땅을 적시지 못할 것이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 도마뱀은 잠들지 않을 것이다. 달은 뜨지 않을 것이다.-컴포지션/소묘5
야생의 영혼들이 몸 밖으로 뛰어나와 달을 노래하는 밤이 있는지도 모른다. 운전을 하는 동안 동물들의 주검을 목격했다. 이 산과 저 산을 오르내리고 이 길과 저 길을 가로지르며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어야 했던 궁극의 시간, 생과 사를 뛰어넘을 만큼 필사의 목적이 그들에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갓 도살한 뒤 도마 위에 무질서하게 내장을 꺼내놓은 것 같은, 가죽과 내장을 홀라당 뒤집어놓아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어떤 짐승의 사체가 처음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보다 두세 배는 큰 몸집이었다. 죽은 지 30분도 안 되었을 것이다. 피가 흥건했다. 유리창을 닫고 잠깐 스친 것뿐이었으나 내 목구멍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네 다리를 양 옆으로 쭉 뻗고 죽어있는 갈색 들 고양이도 있었으나 질주하는 차바퀴에 무참히 밟혀서 너덜너덜해진 내장과 털가죽이 뒤섞여 있거나 아예 아스팔트와 몸이 분간되지 않을 만큼 납작하게 밀착되어 있는 죽음이 대부분이었다. 갓길에 널부러진 까치도 보았다. 야생동물의 장례식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자신의 주검 옆에 앉아 있는 그들의 영혼을 본 것도 같았다. 저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과감히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들을 스치는 찰나의 순간, 나는 그들이 어미의 자궁을 떠나 탯줄을 끊고 눈을 뜨고 젖을 빨았을 평화로운 한 때를 생각했다. 어미를 떠나 혼자 먹이를 찾고 굴을 파고 추위를 견디던 시간도 떠올렸다. 짝을 찾고 새끼를 낳고 그들을 떠나보낸 뒤 다시 혼자가 되어 어둠을 견디던 외로움의 시간도 함께했다. 그들이 맥없이 생을 끝내던 순간의 고통이 전해져 살갗이 찢기는 것 같았다. 오싹 몸을 떨었다. 그들의 생을 대신 살아 낸 것처럼 지치고 힘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도로를 질주하는 새끼고양이였다. 그는 내가 악, 하고 소리 지를 사이도 없이 왕복 8차선을 건너 시야에서 사라졌다. 녀석은 단거리 신기록 수립이라도 하려는 듯 필사적이었다. 삶은 얼마큼 빨리 살아내느냐가 아니라 생각하고 돌아보고 헤아려야 한다는 걸 녀석은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작고 여린 눈엔 오직 목표점을 향해 달려야한다는 집념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녀석은 자동차에 치여 아스팔트에 나동그라질 때까지 길을 건너고 또 건널 것이다.
나는 아이가 사는 도시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길이 닿는 대로 끝없이 달렸다. 어둠이 내렸고 꼬리에 꼬리를 이은 붉은 브레이크 등이 내 시야를 어지럽게 흐려놓았다. 수많은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건 내가 견딜 수 없는, 견디고 싶지 않은, 그래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삶의 본질과의 힘겹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천천히, 지금껏 회피하고 싶었던 어떤 두려움과 경계가 무너지고 해체되었다. 그건 내가 목격한 주검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살아냈던 찰나, 그들과 내가 겪었을 끝없는 삶과 죽음의 반복, 그 무한한 윤회와 영겁이 무화되는 순간이었다. 생에 대한 부담을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오만한 홀가분함. 외면하고 싶었던 죽음을 고통스럽지 않게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은 만용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8차선 도로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생에 대한 무모한 사랑. 또 다시 꿈틀거리는 삶에 대한 욕망이 새삼 고개를 들이미는, 그런 어리석은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밀란 쿤데라였다. “인격이란 그들이 맞이하는 아침 시간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은. 나는 휴일의 인격이 어떠해야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페시미즘의 미래' 따위를 가늠하고 있을 뿐이었다. 랭보,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그의 탄식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그렇게도 사랑했던 남자의 잘려진 머리를 두 무릎 위에 얼싸 안고 따라 갔던 마틸드를, 차라리 찬미할 것이다. 반올림 된 생의 의미,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 생에 대한 의지는 붙잡아두고 싶지 않았다. 해탈과 열반을 염두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나에게 현재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 있을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으나 과거의 미래였던, 지금 이곳에서 무한의 혼돈을 호흡하고 있을 뿐이었다. 초신성은 1조 개의 수소 폭탄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과 같은 힘으로 우주에 태어난다. 카오스 이론을 신뢰할 수 있다면 혼돈 속에서야 말로 진정, 모든 것이 잉태되고 있다는 뜻이다.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파괴된다는 것, 휴일의 인격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허무와 폐허, 태만과 방조를 칭칭 몸에 두르고 오직 시작과 끝을 꿈꿀 뿐이었다.-컴포지션/소묘6
인생에 꼭 하나 예측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돌발’이에요. 무난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삶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탈선이죠. 당황하거나 놀랄 필요는 없어요. 어떤 것은 사라지고 또 어떤 것은 남아 우리를 더 풍부하게 해줄 테니까요. 당신이 어느 날 문득 내게로 뛰어든 것도, 내게 말하지 않지만 지금 당신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남자가 말했다. 운전을 하다가 정체가 되면 어김없이 당신이 떠올랐어요. 또 담배가 떨어졌으면 어떻게 하나, 아무한테나 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더라구요. 갚으려고 내민 담배 한 갑을 남자는 내게 다시 건넸다. 이 담배 떨어지기 전에 다시 만나요. 글 잘 안 풀려서 힘들면 문자 보내고 밤새 말하고 싶으면 내게 전화해요. 혼자 빈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와요. 커피 내려줄게요. 남자의 미소는 나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었다. 돌발이 다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위험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기대고 싶게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옆에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달아나고 싶었다. 움찔,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안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자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남자가 커피를 건넸듯이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나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남자가 자신과 내 입술에 물린 두 개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자와 함께 내뿜는 담배연기가 퍼져 오르며 허공에서 하나로 뒤섞였다. 세상은 어두웠고 멀리 도로엔 오렌지 빛으로 늘어선 가로등이 밤을 지키고 있었다.
배웅 나온 남자가 운전석의 문을 닫아주었다. 창 안으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이 남자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기어를 풀고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 작아지고 있었다. 손에 닿았던 체온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도 어깨에 닿았던 남자의 체온을 기억할 것 같았다. 남자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남자를 기억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각인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침반은 필요 없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다. 오래 묵은 이야기들이 죽은 심장을 열고 뛰쳐나왔다. 물 밖으로 던져진 은 갈치처럼 파닥이다 숨을 죽였다. 당신의 시선이 머물던 책을 펼쳐드는 일, 당신의 입술이 닿았던 찻잔으로 차를 마시는 일, 당신의 손이 쓰다듬던 나신을 거울에 비춰보는 일은 위험하다. 떠난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는 추락의 지점을 모색하고 있을 뿐이다. 자전거가 페달을 굴리며 지나갔다. 자동차는 더 빠른 속도로 앞질렀다. 기차는 길게 꼬리를 흔들며 멀어졌고 비행기는 눈 깜빡할 사이 구름 뒤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모두가 스쳐갔고 스쳐가고 스쳐갈 것이다. 그 사이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별이 돋았다. 나침반은 이제 서쪽과 동쪽을 가리키고 시계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었다. 나침반은 필요 없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 컴포지션 / 소묘7
가로등이 점멸된 시각은 6시 37분이었다. 팟. 도로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 세상이 환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해는 아직 솟아오르지 않았다. 걷히지 못한 어둠이 선명하게 제 무게를 드러냈다. 헤드라이트를 끄지 않았다. 희미한 달이 푸르스름한 하늘에 낮게 걸려 있었다. 도시에서 창백하게 기운 달은 곧 붉은 사막 위로 떠오를 것이다. 달은 풍화된 절벽과 마른 바람이 부는 세상의 중심을 비출 것이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녹색 신호등이 길을 재촉했다. 가속페달을 밟은 채 조수석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다. 한 손으로 포장을 뜯었다.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다가,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입에 물었던 것과 열아홉 개비가 들어있는 담배 갑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창문을 열었다. 그렇게 창밖으로 던져진 담뱃갑이 허공을 날아올랐다가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빠른 속도로 뒤따라오던 자동차 바퀴 밑으로 사라졌다.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도시의 아침은 나른하고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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