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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8년 겨울호) 신작단편/최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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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최대봉
바람이 불어왔다.
한 생애의 물기란 물기는 다 빠져 나가버린 마른 갈대들이 쓸쓸히 흔들리고 있는 죽계수竹溪水 둑에 몸을 숨기고 나는 기다린다.
억울하고 비루했지만, 정겨웠던 이들로 하여 은성殷盛했던 한 시절이 있어 그리 짧지만은 않았던 내 생애의 마지막 칼을 받게 될 그를 기다린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갈대며 마른 수수대궁들이 서걱거리는 소리, 냇물 건너편 야트막한 산 그림자에 드리운 추색秋色의 은근함.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떠난 후에도 여기 남을 것이다. 나는 이제 곧 작별해야 한다. 가을 쪽빛 하늘로 흩어지던 선혈과 살점들, 짓이겨지고 베어지면서도 끝내 다 뱉어내지도 못한 외로운 비명소리들과, 오라를 지고 돌아서던 대군大君의 마지막 일별과, 연蓮의 희디 흰 가슴에서 울음처럼 베어 나오던 뜨거운 핏물과, 내가 떠난 후에도 아마도 우리 모두가 떠난 후에도 여기 남아 있을 모든 것들과 나는 곧 작별할 것이다.
사랑했으나 온전히는 사랑하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며 만지는 일의 쓸쓸함은 힘겹다. 지리멸렬했던 내 한 살이生와 이 마지막 순간의 쓸쓸함에서 벗어나게 해줄 나의 칼. 곧추 잡아보는 손안에서 나의 쇠붙이 칼은 써늘하다.
이제 곧 저녁 이내가 내리기 시작할 저 길 끝에서 그는 나타날 것이다.
피의 향연에서 아직 다 깨어나지는 못했을 그와 그의 부하들은 조금은 부질없었던 살육에 대한 자책에 휩싸여 내 앞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의 종형從兄 한명회만큼 권력에 목말라 했지만 그 만큼은 노회하지도 용의주도하지 못한 한명진은 아마도 그의 부하들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건들거리며 다가올 것이다. 내가 몸을 숨긴 낮은 언덕과 그와의 거리는 십여 장丈. 나의 칼은 순식간에 그의 심장에 닿을 것이고 그의 몸속에 스산한 가을 저녁 바람이 넉넉히 스미도록 크게 단면을 만들며 그어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나머지는 놀란 가슴을 수습한 그의 부하들의 몫일 것이다. 저 죽계수를 붉게 물들인 수많은 순흥부 민초들의 억울한 피에 그와 나의 피를 보태고 그렇게 나는 떠날 것이다. 내가 떠나고도 오백 년이 지나야 이 땅에 오게 될 어떤 시인이 읊었듯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아니,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나는 떠나갈 것이다.
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버렸다. 세상에 버리고 싶어 버린 것이 있으니 이름이었고 버리고 싶지 않으나 버려야 할 것이 있었으니 시인詩人의 길이었다. 온전한 양반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고 독서인으로 살아가기에 시대는 너무 편협했다. 울분을 품지 않고 한 세상을 살아내는 방법은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애오라지 푸른 뜻을 버리는 일 뿐이었다. 나는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았다.
저잣거리 난전판과 술청들을 홰를 치고 다니면서 타고난 완력과 간교한 머리로 너나없이 애옥살이이기는 마찬가지인 사람들을 때로는 배를 문지르고 때로는 등을 쳐서 살아가는 일 또한 나쁘지 않았다. 한성 바닥에 떠르르한 불한당이 되어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뒷골목 노름방이나 색주가를 휘젓고 다니거나 권세 있거나 재물 있는 자들에게 주먹 품을 팔며 연명하는 일은 적당한 긴장감과 자유로움까지 덤으로 얹어져서 사내의 거칠 것 없는 삶의 방편으로는 제격이었다.
낮술에 취해 동소문 밖 변변한 울 하나 없는 갖바치네 쪽마루에 널브러져 잠이 들기 전 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삶의 마지막 자리에서 부질없이 생각해 본다. 두어 해 전 그 날 낮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가 본 적도 없는 그 한미한 골목길로 접어들지 않았더라면, 하필이면 그 울도 담도 없는 갖바치네 초가집 쪽마루에 몸을 누이지 않았더라면 내 죽음의 자리는 얼마나 달랐을까? 모주 몇 사발에 취해 걸어가는 밤길에서 뱃구레에 어느 왈짜의 칼침을 받는 일과 이제 곧 내 마지막 일이 끝난 후 아직 피 냄새가 다 가시지 않은 관군들의 칼과 창과 쇠뭉치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과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이 어디 따로 있으랴?
부질없는 일이다. 생각을 말자. 지혜로운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고 어리석은 자는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죽은 것처럼 산 자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 두어 해 전 그 날 갖바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로 인해 겪게 된 일들과 그 일들로 인해 조우한 사람들과의 날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토록 의연하게 이 죽음의 자리에 와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백 년 뒤쯤의 이 땅의 후학後學 홍명희라는 글쟁이가 이르기를 ‘이것은 옥견이가 발로 맨든 것이야’라고 했는데 그의 소설 ‘임꺽정’에서 그 갖바치의 가죽신 짓는 솜씨를 빗댄 말이다. 이옥견이라는 자는 당시 장안에서 가죽신 만들기로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니 갖바치의 상품도 하품도 아닌 그저 그런 중품의 솜씨를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불규칙적으로 뚝딱거리는 소리에 낯선 집 쪽마루에서 선잠을 깬 내가 조우하게 된 것이 바로 그 갖바치였다. 앞으로도 이백 년을 더 살아 정암 조광조와 희대의 도적 꺽정이와 빼어난 여류 황진이의 스승이 되기도 할 그는 옹색한 마당 한 귀퉁이에서 털을 뽑고 기름을 뺀 소가죽을 나무망치로 무두질을 하고 있었다. 두어 번의 마른 기침소리로 내가 깨어난 기척을 알아채었으련만 그는 잰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그빡에 먹물 든 도적눔 여게 또 한 눔 자빠져 있었네.
아직 술과 잠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 있던 나에게 그는 덧붙여 말했다.
-이눔아 사지 멀쩡한 눔이 머하능겨. 어여 우물에 가서 물 한 동이 길러 오지 않고. 남의 집에서 공으로 퍼질러 잔 값은 해야지.
아주 낮은 목소리였지만 천둥처럼 우렁우렁 귀를 울렸다. 가볍고 무심한 어조였지만 천근처럼 무겁게 온몸을 눌러와 나는 몽유병자처럼 물동이를 찾아 들고 희적희적 우물로 향해야만 했다.
-아주 우물 속으로 들어 가그라, 이눔아.
첨버덩.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뚜레박 소리에 잠이 반쯤은 달아났을 때, 등 뒤로 날아든 그의 나지막한 일갈이 족쇄처럼 나를 옭아 메었다. 한 인간의 삶을 일거에 다른 방향으로 돌려 세우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운명적인 힘이 그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칼 잡는 법 쫌 배워주십쇼.
갑자기 양순해진 짐승처럼 물 길러 와 큰 독에 부어넣는 일, 군불 떼어 밥하는 일은 물론이고 무거운 소가죽을 한 지게 가득 져 나르는 일까지 마다 않고 한 달포쯤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엎드려 있던 내가 그에게 처음 던진 말이 그랬다. 꿰지 못한 시문詩文이 없고 통하지 못한 경서經書가 없는 그 갖바치 선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참이나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굳어진 낯 색으로 말했다.
-실없는 눔. 칼 드는 그 자리가 니 죽는 자리여.
미복을 한 조정의 벼슬자리인 듯한 사람들과 금강산이나 묘향산쯤의 어느 너럭바위에서 막 가부좌를 풀고 내려 온 듯한 도사 차림의 위인들이 그 초라한 모옥을 몸을 낮추어 공손히 찾아 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아 온 터였고, ‘모르긴 해도 저 냥반이 한 백 오십 살은 거뜬히 넘었을 거야’ 어쩌고 하는 주위 사람들의 수근거림도 숱하게 들어 온 터여서 세상을 들었다 놓을 비술秘術 하나쯤은 꼭 배우고 말겠다는 욕심 하나로 주전부리 달라고 종작없이 졸라대는 아이놈처럼 나는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가셔 못쓰겠다는 듯 ‘옛다, 먹고 떨어져라’는 투로 그가 말했다.
-정녕 니가 죽는 자리라는데도. 오냐, 좋다. 약속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쇠붙이 칼은 아니 들겠다 약조부터 해라.
-예, 천 번이라도 합지요.
-오냐, 좋다. 마촘한 나무 하나 칼 모양새로 깎아 오너라.
그날로 어디에 써야 할 지 어떻게 쓰이게 될 지도 모르는 나의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
모옥을 들어서는 안평대군의 등 뒤에 그녀가 서 있었다. 아직 겨울의 한기가 다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오시午時가 조금 지난 시각. 마당 한 켠의 매화나무에는 간밤의 냉기에 얼어 있던 꽃망울이 막 부풀어 오르고 있었고 그녀가 서 있었다. 비취빛 저고리의 앞섶이 아직은 싸늘한 봄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채로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 푸른 보자기로 싼 거문고를 안고 다소곳이 서 있는 그녀의 연한 비취빛 소매 자락 아래로 보이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아, 참 가슴 아프구나’하게 시려 보였다.
가까운 산그늘에서 갑자기 들려 온 장끼 소리가 아니었다면 선생의 집을 두어 번 찾은 적이 있는 대군에게 예를 갖추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다.
지난 해 가을 처음 만나던 날, 월동용 싸리 빗자루를 엮고 있던 내게 그는 물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송구합니다, 나으리. 이름이…… 없습니다.
-어허, 이름이 없다? 그 무슨 말이냐?
머뭇거리고 있던 나를 갖바치 선생이 거들었다.
-얻고자 하던 이름을 버리고 나니 가진 이름조차 성가시었다고 합니다.
-어찌된 사연인지는 묻지 않겠다만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너를 무어라고 부르랴?
선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눔이라고 부르지요.
-내가 그리 부를 순 없고…… 나는 이보게라고 불러야겠군.
그러고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었다.
-이보게. 그러고 보니 자네와 나는 같은 이가李哥로세. 허허.
당대에 이미 그 서체書體로 독보적인 경지에 있었고 서화書畵를 보는 안목은 따를 자가 없었으며 음률 또한 우륵과 왕산악이 따로 없다고 세간에 자자한 세종 임금의 셋째 아드님은 그렇게 처음부터 내게 농을 놓으며 격의 없이 대했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하는 무언가가 그 당대의 풍류남아에게는 있었다.
그 날 이후 대군에게는 늘 흠모하는 마음이었는데 그의 등 뒤 두 발짝 쯤 떨어져 서 있는 흰 이마 아래 깊고 써늘한 눈을 가진 저 여인, 저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하는 조바심으로 그들을 안내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내 다리는 허방을 짚는 듯했고 방문을 여는 손에 잡힌 문고리가 물색없이 떨리었었다.
매화나무 아래 서 있었다. 아직은 떠나기 싫은 겨울 끝자락의 차가운 날을 숨긴 바람이 푸릇푸릇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매화나무 가지들을 에멜무지로 흔들어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 가지들을 따라 나도 흔들리며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두런두런 이야기가 오고 간 뒤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당대 일류의 솜씨를 이루었다는 대군의 연주였다.
어느 날 선생이 물었었다.
-거문고가 왜 백악지왕百樂之王으로 불리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음률을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세상 모든 악기 중에 자연의 그것과 가장 닮은 소리를 가졌기 때문이지.
대숲을 지나는 바람소리, 천둥소리, 토란잎 위에 비 내리는 소리, 봄밤의 개구리 소리, 추녀 끝에 눈 쌓이는 소리까지 그 여섯 줄에 다 들어 있다는 선생의 설명이었다.
-거문고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여. 그 겉에 있는 유有와 동動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보아야겠지만 그 안에 숨은 무無와 정靜을 들어내려면 그것 만으로선 턱없이 모자라지.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또 들숨으로 그 소리를 깊이 끌어들여 몸속이 온통 화해진다 싶으면 그때 턱 놓아버리는 거여. 유무불이有無不二, 동정불이動靜不二의 언저리까지는 가야 되는 거여.
고요와 소리의 경계를 허무는 것, 그것이 음률의 시원始原에 가장 가까이 가 닿는 것이라고 선생은 말했었다.
-선생, 이번엔 이 아이 소리 한번 들어 보고 품평을 놓아 주시오. 너무 고요하다 싶으면 어느 순간 격정이 묻어 나오고 그 격정에 정신을 놓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깊은 적요 속으로 달아나 버리지. 묘음妙音이지요.
한 차례 연주를 끝낸 대군의 말에 선생이 화답했다.
-그렇찮아도 아가씨의 일품 소리를 한번 듣고 싶었습니다. 이 미거한 사람의 귀도 좀 열어주시지요.
-연아. 나도 니 소리 들어 본지 꽤 오래구나. 연주해 보거라.
스르렁. 현이 무언가에 스치는 소리. 둥둥 줄 고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묘음이라는 연주가 시작되었다.
눈을 감았다. 얇은 창호지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소리뿐만 아니라 향내까지 느껴졌다. 연蓮. 입속으로 가만히 뇌어 보았다. 눈꺼풀의 떨림이 온몸을 싸고돌았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그윽하게 눈을 감았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연蓮. 입속으로 가만히 뇌어 보며 ‘아, 참 가슴 아프네’하게 시려 보이던 그녀의 흰 손가락을 떠올렸다.
그 손가락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술대가 판을 스치며 현이 떨릴 때마다, 현이 괘를 누르며 이이잉 울 때마다 흰 매화 꽃망울들이 하나 둘 툭툭 벙글어지며 짧은 봄날은 저물어갔다.
돌아가는 그들의 등 뒤로 땅거미가 내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이걸 가지고 저 사람들 뒤를 따라가 보거라.
불안한 기색을 종내 감추지 못하던 선생이 뒷방 시렁 위에 먼지를 쓰고 걸려 있던 박달나무 목검을 건네며 말했다. 영문도 모른 채 멀찌감치 그들의 뒤를 밟았다. 거문고를 안고 대군을 뒤따르는 아가씨의 뒷모습이 소슬해 보였다.
갖바치 선생은 언제나 옳았다. 동소문을 눈앞에 둔 으슥한 행길에서 칼을 든 놈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직 어두워지기도 전인데 복면도 하지 않은 대담한 녀석이었다. 대군과 아가씨의 입에서 ‘왠 놈이냐?’라는 호통과 나지막한 비명이 동시에 새어 나올 때 나는 이미 그들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하관이 빠르고 눈초리가 사나웠다. 갈데없는 자객의 모습이었다. 뜻밖의 상대에 긴장하면서 놈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 오른 발을 앞으로 내밀고 칼을 수직으로 세워 머리 위로 들었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칼날은 번득였다. 상대에게 노출되는 단면을 최대한 줄이면서 신속하게 자신의 공격 반경을 확보하는 전형적인 관군의 검법이었다.
나는 팔을 늘어뜨린 채로 무심히 서 있었다. 이제 곧 놈은 왼발과 오른 발을 동시에 내딛으며 사십오 도 뒤로 치켜 든 칼로 내 정수리를 쳐 오겠지만 그 정도의 허점을 보이지 않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녀석이라면 그의 눈앞에 전신의 허점을 다 드러내 놓고 서 있는 나의 대응에 당연히 경각심을 갖기 마련이었다.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진 그가 거정세擧鼎勢, 솥을 들어 올리는 자세로 바꾸어 나의 목 오른 쪽에서 허리 왼 쪽으로 길게 그어 올 때 나는 놈의 왼 쪽 옆구리와 허리에 생기는 찰나의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박달나무 검에 일격을 당한 그가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목검을 칼집에 넣으며 돌아서는 내게 대군이 말했다.
-빠르구나.
아직 놀라움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 연 아가씨의 두 눈이 정면으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대군의 치하에 고개를 숙이는 내게 대군이 무심히 말했다.
-그냥 돌려보내게.
한명진은 아직 오지 않는다.
사흘 밤낮이 지났건만 불타버린 집들에서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가 멀리 보이는 순흥 하늘을 가득 덮고 있다.
한성으로부터 수양이 보낸 철기군 삼백이 당도한 것은 지난밤이었다. 그들이 한명진에게서 인계받을 것은 짓이겨지고 찢긴 백 수십여 구 무고한 양민들의 주검과 불타버린 집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숨죽인 호곡소리 뿐일 것이다.
그 잔인한 살육의 현장으로부터 이제 곧 한명진은 올 것이다.
대군과 아가씨를 사가까지 호종하고 돌아온 며칠 뒤 대군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선생은 내 등을 밀었다. 목검을 내밀며 선생이 말했다.
-이제 이 칼은 니꺼여. 삼백 년 묵은 참박달 겉으로 맨든 거다. 어지간한 칼로는 흠집도 안 나니 아예 쇠붙이 칼은 따로 잡을 생각 마라. 살다 보면 그게 사람이든 눈에는 안 보이는 무어든 간에 지켜내고 싶은 게 생길 거다. 그때는 이 칼이 필요할 거여.
그가 내민 칼은 무거웠다. 지켜온 것도 지키고 싶은 것도 없던 내게 그의 말도 그 칼처럼 무거웠다.
대군의 사저로 들어서자 집사인 듯한 중늙은이가 본채와는 조금 거리를 둔 별채로 안내했다. 매죽헌梅竹軒이라는 현판의 필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조선에 더 덮을 자가 없지.’라고 갖바치 선생이 찬하던 바로 그 명필이었다.
대군은 도포차림을 한 중년의 선비와 때 아닌 봄눈이 날리는 걸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좀 두터워 보이는 솜옷을 단아하게 차려 입은 연 아가씨가 찻물을 올려놓은 화로를 부채질하며 앉아 있었다.
-내게 있어주게나.
두어 번을 고사하다 당상에 오른 내게 대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상대를 따라 웃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녜, 나으리.
때로는 한 번의 오고 가는 웃음만으로도 신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내가 그의 집에 머무른 일 년 남짓의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져버려진 적이 없었다.
연 아가씨가 건네주는 찻잔의 온기가 손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나는 무언가 다른 따뜻함이 가슴을 덥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봄눈이 매화와 산수유 고목의 가지 위로 쌓이는 걸 내다보면서 가슴 속에 다른 무언가가 쌓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훈훈해진 봄바람에 매화 흰 꽃잎들이 분분히 날리던 어느 날, 봄날의 짧은 낮잠에서 깨어난 대군이 안견을 불러들였다. 대군의 남다른 총애를 받고 있던 그 화원이 화구를 챙겨 들고 달려 와 매죽헌에 오르자 대군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는데 말일세. 세가 좋은 산들도 첩첩이고 명경 같은 계간수가 도도히 흘러 가히 세외世外에나 있을 법한 절경이었다네.
화선지를 펼쳐 놓고 연 아가씨가 대군이 아끼는 단계연에 갈아놓은 먹물에 붓끝을 적셔 보면서 안견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꿈같은 경치에 취해 한참 달리다 보니 어디선가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복사꽃 향기가 풍겨 왔다네. 마침 물 위에 배를 띄워놓고 낚시를 하고 있는 방갓을 쓴 노인에게 물어 봤더니 저쪽을 가리키는 거였네.
대군은 꿈속에서 본 풍경을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 어옹漁翁이 가리키는 곳에 이르니 무슨 석굴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수천 그루의 복숭아나무에 붉은 꽃이 만발하여 마치 불붙은 듯했고 그 향기에 넋이 다 나갈 지경이었네. 오호라,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이 바로 예로구나라는 생각에 한참이나 정신을 놓고 보고 있는데 그만 꿈에서 깨어나 버렸지 뭔가.
말을 마친 대군은 아직 그 꿈속에 있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다가는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엔 그런 데가 아예 있을 리 없고 내 다시 꿈속에라도 가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자네가 그림으로 그려주게. 그림 속으로라도 두고두고 가볼 수 있게.
안견이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워 그림을 완성한 날. 대군은 사람들을 청했다. 김종서,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이개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둘러 앉아 더러는 안견의 운필運筆에 감탄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 감명을 시로 지어 적어 넣기도 하는 중에 대군이 붓을 들어 제자題字를 써넣었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짧으면 몇 달, 길어야 일 년 뒤에 그 자리를 함께 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극명하게 갈라질 것인지를 아무도 모르는 채 그렇게 그 봄날의 여흥은 무르익어갔다.
이듬해 계유년의 봄.
긴 꼬리별이 조선의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세월은 수상했고 소문들은 저자에 무성했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또 그 소문은 피바람을 불러왔다. 세종 임금이 풀뿌리를 씹으며 수양산에서 나오지 않았던 백이, 숙제의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지조를 닮으라고 이름 지었다는 수양首陽은 조카인 어린 임금을 윽박질러 스스로 전하가 되었다.
역모를 추궁하는 국문장에서 끝까지 수양을 전하라 부르기를 거부하고 나으리라고 부르던 성삼문은 전하의 소들이 끄는 수레에 사지가 찢겨 죽었다. 김종서가 머리에 철퇴를 맞고 박팽년, 이개가 일가를 적몰당한 채 처참하게 죽어갔다. 정인지와 신숙주는 목숨을 지켜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한명회와 권람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세상은 시류를 좇는 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로 가득했고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들로부터 떠나는 자들이 그 위에 보태졌다.
안견은 대군이 아끼던 단계연을 일부러 훔쳐 대군의 내침을 자초해 구차한 목숨을 이었고 대군의 집은 수많은 적들로 둘러싸였다.
내가 지켜내야 할 것들에 대한 결의로 목검을 움켜쥐고 지내던 어느 날 대군이 은밀히 불렀다. 비장해야 할 순간에 그는 담담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연아를 데리고 경상도 순흥 땅에 가 있는 내 아우 유瑜에게로 가거라. 기개가 남다른 인사라 종내 무사할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서는 거기 밖에는 믿을 데가 없구나.
연 아가씨가 대군이 약관에 여염의 여인에게서 얻은 서녀庶女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녀를 아끼는 대군의 각별한 부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지켜내야 할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나으리와 함께 있겠습니다.
대군은 냉기가 돌 정도로 엄격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하고는 돌아섰다.
-나와 같이 있어봐야 죽은 목숨 하나를 더할 뿐이다. 니 목숨이 지금의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밤으로 떠나거라.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내게 대군은 다시 자애로운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집 밖을 지키고 있는 아이들을 너무 상하게는 하지 말거라. 너희 가는 길이 고단해질 수도 있을 테니.
자정을 넘겨 뒷문을 나서자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다. 두어 놈의 목뼈를 부러뜨려 놓기는 했지만 뒤쫓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위에 있는 적들은 까짓 목검을 든 사내 하나와 쇠락한 대군의 서녀 따위가 그들이 빼앗아 가진 것을 지키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으로 추쇄꾼들을 풀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군이 넣어준 노자도 넉넉했고 우리의 용모파기가 파발로 전해졌을 인근의 몇몇 고을만 기찰을 피해 빠져나갈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경상도 순흥 땅은 멀었다.
가슴속은 울분으로 가득 찼건만 얼굴을 간질이는 훈풍과 온 산과 들에 앞 다퉈 피어난 봄꽃들과 진달래 피어 앉은 산그늘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로 시절만은 좋았다. 때로는 소풍 나온 의좋은 오누이 행세로 때로는 갓 혼인해 내외하는 가시버시 행세로 낮에는 걷고 또 걷고 밤이면 어수룩한 주막집 봉놋방에 들어 행전을 풀고 지친 다리를 쉬이었다.
원주 어름의 어느 저잣거리 주막에서는 대군의 부처付處된 일을 들었고 충청도 단양 땅 어느 봉놋방에서는 대군이 사사賜死된 소식을 들었다. 아가씨는 걷다가도 울고 쉬다가도 울었다. 오르막 삼십 리 내리막 삼십 리 아흔 아홉 구비 죽령 고갯길을 내 등에 업혀 오르면서 서러운 눈물로 내 무명 배자를 적시었다.
순흥 도호부 관아 뜰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찌르렁 찌르렁 매미들이 울어대고 있었다.
늦은 봄 떠났던 길이 어느덧 여름의 중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잘 왔구나. 안평 형님의 소식은 들었다. 니 마음고생이 자심하였겠구나. 나를 숙부라고 불러도 좋다.
-아닙니다, 나으리. 큰 나으리께도 혈육의 이름으로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때로는 부르는 이름이 화를 부르기도 하지. 이 부사께서 잘 돌봐주실 게다.
편히 지내도록 해라.
세종 임금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 유瑜는 근엄해 보이지만 자상한 데가 많은 사람이었다. 수양에게 고분고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순흥 땅까지 쫓겨난 대군은 그와 의기가 투합한 이보흠 부사의 배려로 편안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부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대군은 내게 말했다.
-안평 형님과는 좋은 인연이었다고 들었다. 이 부사와 내게도 안평 형님 대하듯 하거라.
근엄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에서도 그의 진심이 전해져 왔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순흥 땅에서의 일 년여는 내 생애의 다시없는 꽃다운 시절이었다.
남순南順 북송北宋. 살기 좋기로는 북쪽에는 송도요 남쪽에는 순흥이라 했다. 송학산을 우백호 연화산을 좌청룡으로 하여 소백의 빼어난 준봉들이 병풍처럼 둘러 선 풍광도 풍광이려니와 자애로운 목민관에다 부민들의 인심 또한 더없이 따뜻하였다.
사방 십여 리를 기와지붕 처마 밑으로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고 아침저녁이면 집집마다 참나무 숯으로 쌀밥 짓는 냄새가 자욱히 골목들을 흘러 다녔다.
죽계수 원류를 따라 올라가 용추비폭 명경 같은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았으면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곳이 바로 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려조의 안축이 경기체가의 으뜸이라 할 죽계별곡에서 ‘이 경치 어떠하오景幾何如?’라고 탄하였던 바로 그곳임에랴?
순박하고 정 깊은 그곳 백성들에 대한 정도 쌓이고 작은 대군과 이 부사에 대한 우러름도 커져가고 연 아가씨를 연모하는 마음도 깊어지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와 나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었다. 그것은 내가 더 절실히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둠이 오고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려야 할 시간이 되면 내게 남겨질 상실감과 분노도 그만큼 더 커질 것이었다.
큰 대군이 그랬었다. 금성대군은 기개가 남다른 사람이라고. 그 대군의 남다른 기개와 이보흠 부사의 올곧은 독서인으로서의 의기義氣가 만난 지점에서 비극의 싹은 움트고 있었다. 어린 조카를 내쫓고 빼앗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아버지의 충직한 신하들과 아우까지도 죽여 버린 수양의 죄를 묻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어린 조카에 대한 대군의 애정은 남달랐다. 상왕의 자리에서 노산군으로 격이 낮추어진 단종은 강원도 땅 영월로 유배되어 청령포 깊은 물에 둘러싸여 외로운 신세가 되어 있었다.
대군은 초하루 보름 마다 영월과 순흥의 중간 어름인 고치재로 나를 보냈다. 순흥 도호부에서 놋점, 좌석, 질가메골을 지나 말도 다닐 수 없는 험한 길을 꼬박 하루를 걸어 고치재에 올라 영월에서 온 엄흥도에게 이쪽의 소식을 전하고 그쪽의 안부를 물었다. 엄흥도는 나중에 활줄에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해 물에 던져진 어린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건져내어 예를 다해 매장해주게 되는 충직한 영월 백성이었다.
대군과 부사는 머리를 맞대고 거사 계획을 세워나갔다. 순흥과, 이웃한 영주, 풍기의 군사들을 모아 죽령과 조령을 봉쇄하고 영월에 있는 단종을 모셔와 다시 임금으로 세워 격문을 돌리면 천하의 지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들과 뜻을 함께 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들의 피는 뜨거웠고 뜨거웠던 만큼 순진했다.
부사의 관저와 대군의 거처를 오가며 봉기 격문을 논의하는 그들을 엿듣는 귀가 있었다.
관노 중에 급창 노릇을 하는 이동이라는 놈이었다. 목청이 좋아 부사의 명을 관속들에게 큰 소리로 전하는 급창의 소임만으로도 위세를 떨던 놈은 언제나 더 크게 위세할 날을 꿈꿨다. 대군을 깊이 연모하였으나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에게 분한 마음을 키워온 시비侍婢 월이에게 접근하여 사통하고 대군의 방에서 격문을 빼내 같이 달아나자고 꼬드겼다.
격문을 손에 넣은 놈은 월이는 나 몰라라 하고 혼자 서울로 내뺐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부사는 평소 신임하던 풍기 현감 김효급을 급히 보내 뒤쫓게 했다. 말을 타고 뒤쫓은 김효급은 제천을 조금 못미처 이동을 잡았다.
격문을 빼앗아 읽어본 김효급은 부사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기회는 언제나 사악하고 비겁한 자들에게 더 자주, 더 확실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김효급은 그길로 곧장 말을 달려 그에게 내려 줄 더 많은 것을 가진 수양에게로 갔고 순간의 낭패를 보았으나 애써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이동은 길을 돌려 안동 부사 한명진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도적처럼 왔다.
자시子時를 조금 못 미친 시각에 곤히 잠든 순흥 부민들과 부사와 대군에게로 그들은 도적처럼 다가왔다.
한명회의 종제從弟인 안동 부사 한명진이 예천과 의성의 관군들까지 끌어 모은 오백의 토포군들을 이끌고 이동을 앞세워 열나흘 달빛이 교교한 순흥 고을을 덮쳤다. 역모를 처단한다는 공명심으로 부추겨진 살의殺意가 달빛 아래 번뜩였다.
막손이는 대군의 장작을 패주었다는 죄목으로 칼을 맞고 나근네는 추석에 송편을 빚어 올렸다고 창에 찔리고 주막거리 판쇠는 아무 이유 없이 머리에 쇠뭉치를 맞았다. 이 부사와 관아의 나졸들은 칼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포박을 받았다.
부사가 보낸 포교로부터 몸을 피하라는 전갈을 받은 대군은 포교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명진을 만나야겠다고 관아로 향했다. 따라 나서는 내게 대군은 말했다.
-내일이 보름이다. 고치재로 가 영월 사람들에게 조용히 있으라 일러라. 상왕까지 위태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어서 연아를 데리고 몸을 피해라.
주먹을 움켜쥐고 울분에 떨고 있는 내게 대군은 말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이곳의 일들은 잊어라. 너희 둘이 서로 괴이는 마음 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고치재에서 내려오거든 연아를 데리고 산속 깊이 들어가 화전이나 일구며 살아라.
갑자기 들이닥친 토포군들의 오라를 받으며 대군이 소리쳤다.
-빨리 가거라.
떠나지 않겠다 몸부림치는 아가씨를 들쳐 메고 무작정 산으로 뛰었다. 고치재를 오르내리며 보아 두었던 질가메골 어귀의 숯막에 닿았을 때는 날이 희부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밥을 짓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던 숯장이 영감이 영문도 모른 채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요기나 든든히 하시고 오르시어요. 힘든 길인데…….
아침상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아가씨가 자기 밥그릇의 밥을 한 술 가득 떠 내 밥 위에 눌러 주면서 말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불행으로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이 땀으로 얼룩져 더러워져 있었다.
-얼굴부터 씻어야겠소.
무안해 하며 얼굴을 가리려는 그녀의 손을 내리게 하고 가만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의 뺨은 따뜻했다. 이제 내가 지켜줘야 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인 그녀의 뺨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슬펐다.
눈물이 솟아났다. 그녀의 얼굴도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럽고 슬픈 몸을 안고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만히 대었다.
그녀와 나의 눈물이 만났다.
늦은 오후 고치재에서 내려온 숯막은 고요했다. 무언지 모를 불길한 느낌으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아래 숯장이 영감이 흥건한 핏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끝이 곤두서 방문을 열었다. 선혈로 물든 이부자리 위에 반듯이 누운 연의 가슴으로 아직 굳지 않은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미 늘어져 버린 그녀의 몸을 안고 피 묻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명치가 턱 막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뒷덜미를 어루만지는 손이 있었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이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녁은 천천히, 나중에…… 아주 나중에 오셔요.
한명진은 아직 오지 않는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길은 가을 저녁의 적막 속에 그림처럼 잠겨 있다.
연의 시신을 묻고 내려 온 순흥 고을은 전날 밤의 살육으로 인한 흥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토포군들과 한성에서 막 도착한 철기군들로 가득했다. 고을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월교 쪽이었다.
토포군 넷이 사람들이 청다리라고도 부르는 그 다리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찢기고 베이고 짓뭉겨진 고을 사람들의 시신을 던져 넣고 있었고 아비 어미를 잃은 아이들이 그 옆에서 울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나의 목검에 머리와 어깨를 맞은 놈들은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놈들 중 한 놈의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아직 피가 묻어 있었다.
‘칼을 잡는 자리가 니 죽는 자리여. 쇠붙이 칼만은 절대 잡지 말어.’ 갖바치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참 먼 길을 흘러 왔구나. 그 시절이 아득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대군이 거처하던 곳으로 가보았다. 달빛 아래 희끄므레한 것이 대들보에 매달려 있었다. 월이었다. 순간의 원망으로 저질은 자신의 실수가 이렇게 큰 사단이 될 줄은 몰랐던 그녀가 연모하던 대군의 옷가지를 묶어 대들보에 걸어 목을 매고 달빛 아래 매달려 있었다. 니 사랑도 퍽 고단했었구나. 끌어내려 반듯이 눕혀주었다.
뒷문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동이었다. 덜미를 잡아 돌려 세워 가슴을 쥐어지르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가는 재빨리 무릎을 꿇더니 ‘살려줍쇼’를 뇌었다.
-어느 손으로 밥을 먹느냐?
나의 쇠붙이 칼의 첫 희생자가 될 그는 무슨 소린 줄 몰라 한참이나 어물거리더니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오른 손입지요.
나는 그의 왼팔을 자르고 돌아섰다.
그는 아직 오지 않는다.
나는 그를 기다린다.
나는 세상에 나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세상의 악의惡意는 언제나 나의 의지보다는 더 크고 엄혹하고 음험했다. 나는 그 모든 악의들을 그냥 두고 떠난다. 내가 떠나도 꽃 피고 잎도 지면서 이 모든 것들은 남을 것이다.
서방의 밥상에서 맛이 변했다고 내쳐진 녹두 콩 나물을 돼지 죽통 속에 처박아 넣으면서 아낙은 ‘망할 놈의 숙주나물. 이렇게 쉬 변한단 말이야?’라고 욕설을 퍼부을 것이고 어미 아비를 비명에 보내고 청다리 밑에서 울고 있던 아이들 몇을 서울로 돌아가는 철기군들이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어미들도 ‘나 어디서 났쑤?'라는 아이의 난감한 질문에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라고 둘러댈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옛 숙수사 자리에 생기게 될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취한대 앞 죽계수에서 밤마다 들리는 귀신들의 호곡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퇴계라는 걸출한 선생이 취한대 밑 바위에 붉은 글씨로 공경 경敬자를 써 넣어 원혼들을 달랠 것이고 이제 곧 저 죽계수에 한명진과 나의 피가 보태어지면 제월교 아래에서 시작되어 십여 리를 흘러 온 저 붉은 핏물이 멈출 것이고 후세의 사람들은 내가 지금 몸을 감추고 있는 이곳을 ‘피끝’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늦은 저녁바람에 서걱이며 흔들리는 갈대 사이로 보이는 물 위로 바람에 날려 떨어진 굴참나무 잎들이 흘러가고 있다.
지난 봄 이 물가에 앉아 바람에 날려 물 위에 떨어져 흘러가는 복사꽃잎을 보면서 연은 노래하듯 탄식하듯 나직이 중얼거렸었다.
한 세상 봄 가는 것 저와 함께 보렸더니,
어이하나 붉은 꽃 물 위에 떠가네.
멀리 아스라한 길 끝에서 작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오고 있다. 이제 곧 그는 내 앞을 지날 것이고 나의 쇠붙이 칼은 그의 몸속에 스산한 저녁 바람이 넉넉히 스미도록 크게 단면을 만들며 그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떠날 것이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아니,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나는 떠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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