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정낙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37회 작성일 09-02-26 17:08

본문

정낙추
共生 외 9편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금씩 갉아먹었다
한 잎에서 누리는 안락한 욕심을 버리고 
이 잎에서 저 잎으로
까마득 높은 허공에 매달려 
목숨을 건 곡예를 했다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은 그를 흔들지 않았다
그늘진 잎들을 위해 
동그란 상처 속으로 여러 개의 푸른 하늘이 들어와
찬란한 햇빛을 쏟아냈다

가을이 가는 동안
삶의 고통을 나누고 흙으로 돌아간 
그 누군가를 위해
불만 없이 떨어진 나뭇잎이 수북이 쌓였다








그 여자 전설이 됐네


그녀는
나절 동안 불은 젖을 감싸며
논머리를 자꾸 쳐다보았네 
점심때 시아버지 등에 업혀온 어린 것에
눈치 보지 않고 박통처럼 불은 젖을 물리는 여자
그 순간 들판의 푸른 바람 엎드려 경배하고 
천지가 고요해졌네

어하 농부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소, 못줄 한 번 넘기면 뒷걸음 두 발짝,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가깝네, 못줄 세 번 넘기면 굽은 허리 한번 펴고, 이놈의 봄날 해는 길기도 하구나, 

그녀는 
논둑에 돌아앉아 불은 젖을 짜냈네
사내들은 몰랐어도
흙 속에서 새끼를 키운 여자들은 모두 알았네
젖몸살을 참으며 땅에 쏟아낸   
하얀 눈물
텅 빈 젖방을 오월 바람이 쓰다듬었네  

그 여자 젖 쪼그라들었네 
이제 고단한 들판에서 
새끼에게 젖먹이는 여자 없네




불은 젖을 땅에 쏟아내는 여자 없네
그 여자가 땅에 흘린 하얀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않네 








무명가수


저 노래는 
울음보다 처절하다

입추 지나 처서
짧은 한 생애
더러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더러는 꿈으로 끝난 꿈에

밤새
풀숲을 끌고 다니다
너덜너덜 헤진
투명한 옷자락을 찢는 
저 애절한 노래에

가을꽃 피고
여름꽃 진다








미움의 힘


그래, 사랑하니까 흉보고 미워한다

더럭더럭 앓으면서 아프다고 하면 속 터지지나 않지 먹을 것 다 챙겨먹고 할 일 다 하다가도 딸네들 오면 괭이밥 먹듯 하고 골치를 싸맨다니까, 툭하면 죽는 타령 하면서도 약이라면 환장을 하기에 약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 했더니 아, 대뜸 보약 한번 사줘봤냐고 역정을 내더라니까, 늙으면 애 된다고 하는 말처럼 꼭 미운 일곱 살 심술쟁이여, 귀 어둡다고 해도 살짝 흉보는 귀속 말은 얼마나 잘 알아듣고 따지러 드는지 꼭 귀신같다니까,
야, 이 잡것들아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거여, 너도 늙어 봐라 그렇게 안 되나 아마 그런 시어미 밑에서 보고 배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라

흉 실컷 보고 욕 실컷 해라 그래야 근력 난다
하루 종일 팔랑팔랑 부채질하는 콩잎에 
신명 난 아낙들 
입 따로 손 따로 놀려도 일머리는 봄꽃 지듯 빠르다
여름 해 막 기울어서야
호미질 멈추고 입 다문 채 콩밭에서 나오는 맑은 얼굴들 
저녁놀이 살짝 베물었다 놓는다

그래, 흉보고 욕하는 것도 사랑이다








벚꽃놀이


할미꽃도 꽃
꼬부랑 안노인들 
큰맘 먹고 꽃구경 나선
관광버스 떠나자
마을이 한풀 죽었다

피는 둥 마는 둥
부스럼 같은 살구꽃 아래 
서성이는 늙은 벌 
하루 종일 구시렁댄다

제기랄,
눈 깜짝할 새 폈다 지면서 
소란 떨기는








상추꽃


똑딱단추 같은 자잘한 노란 꽃
빈혈처럼 어지럽다

봄 내내 
이파리 뜯어낸 상처 채 아물기 전 
한 이파리씩 피워내는 어미의 힘 
악착같은 생명줄이
무수한 꽃송이를 만들었다
이파리 뜯어낸 자리마다 
거칠게 아문 상처
들일로 한평생을 보낸 어미의 정강이 같다

이제 한줌 바람에도 
쉬 날려 보낼 수 있게 솜털까지 만드는 
마지막 힘
백발이 되어서도 새끼 걱정을 하는 
사람살이와 같다








오늘 아침 밥상


식구들이 둘러앉은 아침 밥상에서
초등학생 녀석이 반찬 투정을 한다
집에서 만든 단무지에 묵은 짠지
입이 나온 녀석 옆자리 아버지는 
이빨이 빠져 주름이 깊어진 입안으로
잠자코 밥을 떠 넣으신다
반찬 투정은 내가 하고 싶었지만
녀석에게 눈을 흘기며 
배부르니까 밥지랄을 한다고 
아버지가 자주 쓰는 文字를 인용하며 역정을 냈다

어머니의 다독거림에 
녀석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괜히 화가 난 나는
묵은 짠지를 꽉꽉 깨물다 입술을 깨물었다
찝찔한 피가 입 안 가득 슬픔으로 고였다

끝내 식구들은 아무 말 없이 아침상을 물렸다
어머니는 손자에게 빵값으로
동전 한 닢 주어 학교로 보내고
부엌에서는 아내의 조심스러운 설거지 소리
아버지의 헛기침이 봄볕처럼 번지는
마루 귀퉁이에서




나는 주눅들은 죄인으로 걸터앉아
형벌처럼 긴 장화를 신었다








이빨論


잇몸이 무른 아버지 이빨은 
슬쩍 잡아당겨도 쉽게 뽑혔다
아파 본 적 없이
젊어서부터 솟쳐 빠지기 시작한 이빨
그래서인지 세상을 향해 이빨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남의 밭 무 뽑듯 손수 쑥 이빨을 뽑는 아버지

어머니는 경악했다
세상을 향해 자주 이빨을 가는 어머니 이빨은
단단한 잇몸에 뿌리 깊게 박힌 차돌이다
견고함엔 견고한 고통이 따르는지
차돌이 흔들릴 때마다 어머니는 반 주검이 됐다
예전엔 치통을 가라앉히느라 돌팔이 금니쟁이 말을 듣고
오줌찌끼 묻힌 솜을 불에 구워 지진 적이 있었는데 
이빨이 바싹 부스러져도 잇몸은 고통을 놓아주지 않았다

참을성이 없다며 아버지는 어머니를 경멸했고
이빨 아픈 심정을 몰라주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는 이빨을 갈았다
집착을 버린 이빨과 소유욕이 강한 이빨의 불화를 
잠재운 것은 세월이다
하나 둘 이빨 다 빠지고 
깊이 팬 볼우물 속에 




태어날 때처럼 잇몸만 남았다고
씹어야 될 삶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깨물어야 할 이빨이 없다는 것 뿐

나도 어느새 
흔들리는 이빨의 안부를 물으며
씹어야 할 날들을 헤아려 본다








賢者, 우리 어머니


쇠비름은 잘 뽑히지만 
쉽게 말라죽지 않는다

참비름은 잘 뽑히지 않지만
쉽게 말라 죽는다 

만물은 공평한데 사람짓만 공평치 않구나.

호미를 오래 든 사람은 안다  
어떻게 해야 쇠비름 참비름을 쉽게 뽑는지
어떻게 해야 쇠비름 참비름을 맛있게 무쳐 먹는지








시인의 말


우리 집 여자는 시 字가 들은 말은 다 싫어한다. 詩도 싫어하고 시금치도 안 먹고 시내버스 타는 것도 싫어하고 시어머니도 싫어하고 시계도 생전 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시에 홀려 닥치는 대로 시를 읽던 시절이나 쓰는 시늉을 하는 지금이나 사람들 몰래 시와 가깝게 지낸다. 그러다가 울림이 큰 쉬운 시를 만나면 큰 소리로 읽는다. 그래도 우리 집 여자는 도무지 반응이 없다. 그런 날은 따돌림 당해도 기분이 좋다. 들판으로 가서 중얼거리면 내 평생 벗인 곡식들은 푸른 손을 마구 흔들기 때문이다. 
추천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