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2호(2008년 겨울호) 정낙추 시 해설/김남석
페이지 정보

본문
|해설|
그 남자가 사는 법
김남석|문학평론가
1.
나는 정낙추를 잘 모른다. 그를 만나본 적이 없으며, 시집에 실린 약력 소개 이상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가 농부라는 것,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의 시가 솔직하고 담백하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 문단이 그의 시를 꼭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정도이다. 추측해서 짐작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는 아마 나이 든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을 것이고, 어린 아들을 둔 아버지일 것이며, 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여인의 지아비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흙을 파먹고 사는’ 농부일 것이다. 그의 시가 그 모든 정보를 말해주고 있다.
그의 시는 도시화되고 인공화 된 우리 시에 신선한 충격일 수 있다. 도시시의 개념이 제창되고 시의 분야로 인정될 때만 해도, 도시시가 우리 시의 반경을 이처럼 넓게 차지할 것이라고는 예측되지 않았다. 이제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도 결국에는 ‘도시’라는 대타 개념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어졌고, 노래하는 자연이라는 것도 도시 안의 공원처럼 인간의 손길에 보호받는 대상에 불과해졌다.
이제 웬만한 시에서 노래하는 자연은, 대자연의 성스러움을 간직한 대상이 되지 못하고, 기억의 본향이 되지 못하며, 우리의 삶의 정신적 지주가 되지 못한다. 도시의 현란함과 번잡함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고, 세련됨을 가장한 경직된 논리가 당연한 듯 우리 자아를 붙잡고 있다. 이 때 그의 시가 나타난 것이다. 약간은 촌스럽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고 이질적이기도 한. 나는 그래서 그의 시가 규격화되는 우리 시단의 신선한 충격일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
기존의 정낙추 시와 비교할 때, 다음의 시는 매우 어려운 편에 속한다.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금씩 갉아먹었다
한 잎에서 누리는 안락한 욕심을 버리고
이 잎에서 저 잎으로
까마득 높은 허공에 매달려
목숨을 건 곡예를 했다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은 그를 흔들지 않았다
그늘진 잎들을 위해
동그란 상처 속으로 여러 개의 푸른 하늘이 들어와
찬란한 햇빛을 쏟아냈다
가을이 가는 동안
삶의 고통을 나누고 흙으로 돌아간
그 누군가를 위해
불만 없이 떨어진 나뭇잎이 수북이 쌓였다
―「공생」 전문
이 시의 매력은 1연과 2연과 3연의 화자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1연을 보자. 1연의 시적 화자는 벌레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뭇잎에 사는 벌레는 이 잎 저 잎을 갉아먹었다. 한 잎에 너무 큰 상처를 내서 잎을 통째로 망가뜨릴까 걱정하는 벌레였다. 한 자리에 머무는 ‘안락’을 거부하고, 이 잎 저 잎 옮겨 다니며 조금씩만 갉아 먹는 삶을 택한 것이다. 이 시의 제목대로 하면 ‘공생’의 미덕을 아는 벌레였다.
하지만 2연의 화자를 벌레로 보는 것은 조금 무리이다. 물론 1연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2연을 이해할 수도 있다. 가령 ‘그늘진 잎을 위해’ 라는 구절은 나뭇잎에 첩첩히 가려 빛이 닿지 않는 감추어진 나뭇잎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벌레는 그 잎을 가리고 있는 위의 잎들에 구멍을 내서 동그란 햇살을 밀어주는 선행을 베풀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1연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2연의 화자도 벌레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2연을 해석하는 것이 더욱 온당할 듯 하다. 2연의 첫 행에 ‘그’는 벌레라기보다는 초탈한 자아를 상징하는 것 같다. 벌레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머금고 자연의 변화를 감내하는 어떤 존재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늘진 입장을 배려하고 상처를 예쁘고 가치 있게 탈바꿈시키는 어떤 존재. 만일 1연의 해석대로 화자가 벌레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한다면, 2연의 벌레는 깨달음에 도달한 벌레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여기서 시인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을 상처로 생각하기보다는 그 상처를 통해 광영을 불러내는 성숙한 자아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3연은 더욱 철학적으로 변모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가 가는 시간동안 그 ‘누군가’는 ‘삶의 고통’을 이웃과 나누고 자신의 몸을 희생해 ‘흙’으로 돌아갔다. 그 누군가는 여전히 벌레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벌레는 이제 벌레라는 기호로 지칭되기보다는 ‘시’라는 통찰을 통해 의미 부여된 성숙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삶의 고통을 나누어지고 흙의 너그러움 속으로 사라지는 존재일 수 있다면 그 누구나,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다. 벌레도 괜찮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괜찮고, 큰 깨달음으로 세상에 광영을 준 성자도 괜찮고, 이 시를 읽으면서 나무와 흙과 벌레와 햇빛의 공생을 이해하는 독자도 괜찮다. 사라진 존재, 남에게 해를 끼친 존재마저 ‘불만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괜찮다.
3.
삶에 대한 통찰은 말로 구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말이 그러한 통찰을 구현할 수 있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통찰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삶에 대한 통찰은 구체적인 실천과 깨달음에서 나와야 한다. 정낙추는 그러한 깨달음을 농촌의 삶에서 구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녀는
나절 동안 불은 젖을 감싸며
논머리를 자꾸 쳐다보았네
점심때 시아버지 등에 업혀온 어린 것에
눈치 보지 않고 박통처럼 불은 젖을 물리는 여자
그 순간 들판의 푸른 바람 엎드려 경배하고
천지가 고요해졌네
어하 농부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소, 못줄 한 번 넘기면 뒷걸음 두 발짝,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가깝네, 못줄 세 번 넘기면 굽은 허리 한 번 펴고, 이놈의 봄날 해는 길기도 하구나,
그녀는
논둑에 돌아앉아 불은 젖을 짜냈네
사내들은 몰랐어도
흙 속에서 새끼를 키운 여자들은 모두 알았네
젖몸살을 참으며 땅에 쏟아낸
하얀 눈물
텅 빈 젖방울 오월 바람이 쓰다듬었네
그 여자 젖 쪼그라들었네
이제 고단한 들판에서
새끼에게 젖먹이는 여자 없네
불은 젖을 땅에 쏟아내는 여자 없네
그 여자가 땅에 흘린 하얀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않네
―「그 여자 전설이 됐네」 전문
첫 연은 펄벅의 '대지'를 연상하게 한다. ‘오란’은 출산을 한 몸으로 농사를 짓고 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곤 했다. 시에는 오란을 닮은 여자가 등장한다. 오란처럼 ‘불은 젖’을 주체 못하고 아이를 보자마자 빼앗듯이 안으며 젖을 물리는 여자. 이 여자의 모습은 시인의 언어 속에서 전설처럼 그려져 있다.
시인은 예전에는 이러한 광경이 드물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4연을 보면 이제 이러한 광경은 보기 드문 광경이 되었다. 그 이유까지야 설명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어떤 여인도 들판에서 일하며 아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삶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농촌에서 살거나, 힘들게 일하거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젖을 나누는 삶, 그 어떤 것도 기쁜 일일 수 없다고.
3연을 보면, 과거 민간 신앙처럼 내려오던 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세계 각지의 풍속을 모아둔 책들을 보면, 다산과 풍요를 위해 자신의 논과 밭에서 섹스를 벌이는 의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한밤중에 몰래 나와 논밭에 거름을 주듯, 자신들의 성 의식을 치른다. 그 연장선상에서 논밭에 젖을 뿌리는 의식도 치러지곤 했다. 3연에서 젖을 짜내는 여자의 모습은, 비록 고의는 아닐지라도, 과거의 선조들이 그리고 오지의 주민들이 지금도 빌고 있는 풍요와 다산의 의식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지금 농촌에서 이러한 풍경이 이미 사라졌다. 시인은 4연에서 ‘이제 고단한 들판’에 나서려는 여자도 없고, ‘불은 젖을 땅에 쏟아내는 여자’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소위 말해 농촌이 황폐화되고 농촌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도시 사람들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면, 그 의미의 폭과 깊이가 그리 깊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1, 3, 4연을 통해 한 여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여자는 마치 ‘대지의 여신’처럼, 왕룽의 인내력 있는 처 ‘오란’처럼 들판에 발 딛고 있는 여자이다. 그 여자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화려한 것이나 깔끔한 것, 혹은 정돈된 것 이외에도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여자는 노동에 시달리고 마음 고생에 시달리고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땅에서 아이를 키우고 땅을 키우고 삶과 문명을 키웠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지만, 그 여자의 삶은 대지를 일으키고 우리 삶을 지켰을 거름이었으며, 그 거름을 위해 고통을 인내로 바꾸어야 했을 누군가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1, 3, 4연만으로도 이 시는 흥미롭다. 하지만 아직 해석하지 않은 2연을 풀어보면, 더욱 흥미롭다. 2연은 나머지 3연과는 다른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 3연이 여자를 부각시키고 그녀의 삶을 조명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면, 2연은 한가한 농촌의 풍경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는데 비중을 둔 것처럼 보인다.
2연은 「농부가」의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대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못줄이 하나 둘 씩 뒤로 가면 그 거리만큼 들판은 모내기한 모들로 채워지게 된다. 해는 서산을 향해 나아가고, 사람들은 앞산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 뒷산 가까운 곳에서 일을 마치게 된다. 이러한 풍경은 대단히 한가롭다. 마치 1연의 여인이 무심결에 바라보는 풍경 같다.
하지만 3연에 견주면, 2연은 지나치게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3연이 고통에 관한 것이고, 4연이 잊혀짐에 관한 것인데도, 2연은 어울리지 않게 활기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정낙추는 ‘그 여자’의 삶에, 어쩌면 전설처럼 스러져 가는 여자의 일대기 속에, 왜 한가한 농촌의 풍경을 삽입했을까. 어떤 미학적 충돌을 유도했던 것일까.
정낙추의 시는 외형적으로 잘 짜인 시가 아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시어들로 정련된 시도 아니다. 정낙추의 시는 다소 허름하고 빈틈 많고 이러저러한 곁가지를 끌어안고 있는 시이다. 기본적으로 2연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2연으로 인해 이 시는 윤기와 생기를 머금을 수 있었다. 무심한 일갈 속에, 천지가 고요해지는 순간을 만끽할 수도 있었고,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풍경(젖을 물리는 여인)의 가치를 음미할 시간을 벌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가 쓸 데 없어 보이고 불필요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적 장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2연에서 구현된 ‘늘어진 리듬감’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4.
때로는 시인의 마음가짐이 리듬감을 만들기도 한다. 아래의 시는 줄글로 쓰인 시이지만, 묘하게도 어떤 가락을 느낄 수 있다.
그래, 사랑하니까 흉보고 미워한다
더럭더럭 앓으면서 아프다고 하면 속 터지지나 않지 먹을 것 다 챙겨먹고 할 일 다 하다가도 딸네들 오면 괭이밥 먹듯 하고 골치를 싸맨다니까, 툭하면 죽는 타령하면서도 약이라면 환장을 하기에 약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 했더니 아, 대뜸 보약 한 번 사줘봤냐고 역정을 내더라니까, 늙으면 애 된다고 하는 말처럼 꼭 미운 일곱 살 심술쟁이여, 귀 어둡다고 해도 살짝 흉보는 귀속 말은 얼마나 잘 알아듣고 따지러 드는지 꼭 귀신같다니까,
야, 이 잡것들아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거여, 너도 늙어 봐라 그렇게 안 되나 아마 그런 시어미 밑에서 보고 배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라
흉 실컷 보고 욕 실컷 해라 그래야 근력 난다
하루 종일 팔랑팔랑 부채질하는 콩잎에
신명 난 아낙들
입 따로 손 따로 놀려도 일머리는 봄꽃 지듯 빠르다
여름 해 막 기울어서야
호미질 멈추고 입 다문 채 콩밭에서 나오는 맑은 얼굴들
저녁놀이 살짝 베물었다 놓는다
그래, 흉보고 욕하는 것도 사랑이다.
―「미움의 힘」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어떤 가락이다. 특히 2연이 그러하다. 2연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과 뒤의 화자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연 앞부분의 화자는 며느리이다. 며느리는 자기 시어머니의 흉을 보고 있다. 평소에는 아프다고 하지 않다가도, 딸 그러니까 시누이들이 오면 죽는 시늉을 하며 아프다고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먹던 밥도 그날에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며느리로서는 면목 없고 할 말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평소 약을 너무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먹으려고 하기에 말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때마다 보약 안 사줬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아마 며느리는 친구나 이웃 혹은 친정 식구에게 시어머니 흉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이런 말이 대개 그렇듯, 같은 상황도 보는 방법에 따라, 혹은 전달하는 말의 방식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2연 뒷 부분에 투영된 시어머니의 항변을 보면 더욱 절절하게 감지할 수 있다. 시어머니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참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악담을 퍼붓는다. 아마 며느리는 더 할 거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실제 말하는 것처럼 꾸며졌다. 며느리나 시어머니가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정낙추의 시어를 따라 읽으면, 그녀들의 억양을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환청처럼, 세상의 많은 고부간이 그렇듯, 상대를 헐뜯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재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생겨나는 것이 리듬감이다.
이 리듬감은 대화 음성의 구수한 재구에서 생겨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미움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2연의 흉은 상대에 대한 미움이지만, 그 미움은 거친 삶을 살아야 하는 인내의 산고이기도 하다. 그렇게 미움이라도 쏟아내야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찾을 수 있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3연에서 이러한 심정이 솔직하게 공개된다. 흉 실컷 보고 욕 실컷 해라 그래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수다와 험담으로 힘을 얻은 아낙네들. 그녀들은 틀림없이 고단했을 농촌에서의 하루를 미움을 쏟아내듯 풀어낸 것이다.
2연에서 엿보이는 대립, 그리고 3연에서 풀어내는 신명. 두 감정은 극단적이지만 삶의 결에서 함께 용해되어 드러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도시적 삶, 특히 깔끔함과 냉정함을 지향하는 논리적 삶 속에서는 용인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만일 도시의 아파트 평상에서 2연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 될 수 있고, 그것을 3연처럼 풀어버린다면 절차가 잘못되었거나 정상이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정낙추의 시는 논리, 이성, 냉정, 체계, 이분법, 예의 등으로 도저히 해석될 수 없는 삶의 미세한 결―그 결은 도시적 삶에도 분명 내재하지만 좀처럼 용인되지 않아서 마치 농촌과 삶의 주변부에만 남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을 짚어내고 있다. 자칫하면 모순되고 불분명할 수도 있는 감정의 결. 이 결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구수한 입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토착민의 언어와 감각 그리고 정서가 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정낙추의 시가 주목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의 시에 태생적으로 배어나는 공동체의 정서와 공유된 감정의 결 그리고 이를 에워싼 특유의 리듬감.
5.
정낙추의 모습은 다음의 시로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노래는
울음보다 처절하다
입추 지나 처서
짦은 한 생애
더러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더러는 꿈으로 끝난 꿈에
밤새
풀숲을 끌고 다니다
너덜너덜 헤진
투명한 옷자락을 찢는
저 애절한 노래에
가을꽃 피고
여름꽃 진다
―「무명가수」 전문
과거에 시는 노래와 분리되지 않았다. 연극의 언어는 시였으며, 그 시는 곧 운율과 음악성을 가진 노래였다. 산문과 운문으로 발전 분화한 이후에도, 연극 대사가 시이고 시가 운율을 가진 음악적인 말이라는 사실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시를 음악으로 만들기도 한다. 유명한 시들은 곡조를 붙여 음악으로 애송되었다. 그런 면에서 시는 음악과 그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곧 가수이다.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의 흥을 돋운다는 점에서 두 직업은 같다. 아니 두 직업 모두 삶의 외형보다 본질을 추구하고, 삶의 양적 가치보다 질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정낙추는 자서에서 시에 빠져 한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노래에 빠져 세상을 떠돌며 자기 흥에 취해 울음과 웃음을 반복하는 무명가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정낙추는 농촌이라는 정주의 공간에서 속해 있지만, 어쩌면 그 속함으로 인해 방황과 방랑을 더욱 갈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 「무명가수」는 그러한 갈구가 은밀하게 나타난 있는 시이다.
밤이슬을 맞으며 풀숲을 헤매면서 무명가수는 무엇을 했을까. 노래를 했을까. 아마 그 노래는 소리로 이루어진 노래이기도 했겠지만 마음 속의 또 다른 자기와 나누는 애절한 대화였을 수도 있다. 「무명가수」를 바라보는 시인의 말투에서도 방랑과 방황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한 자리에서 평생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그곳을 벗어났을 수도 있고, 그의 꿈은 그곳이 아닌 곳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시는 그의 방황을 너덜너덜 헤진 옷자락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애절한 울음에 빚대고 있다. 아마 원했으되 이룰 수 없었고, 쫓아가고 싶었으되 갈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 섞인 한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여름꽃이 지고 가을꽃이 오는 계절의 순환 속에,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오는 인간사의 원리 속에 묻어버린 것이다. 그가 이룬 정주의 삶은 방황의 삶을 묻은 자리에서 시작되고 또 마무리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 위의 시 중에서 다음과 같은 어구는 눈에 띤다. ‘밤새/풀숲을 끌고 다니다/너덜너덜 헤진/투명한 옷자락을 찢는/저 애절한 노래’. 시인은 노래라고 했지만, 지금의 언어로 바꾸면, 여기서의 ‘노래’는 차라리 ‘시’에 가깝다. 운율 있는 언어로 이루어진 정신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농촌에 살면서 가족들을 부양하고 농사를 지어 한 해의 수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의 ‘낮’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밤’에 시를 짓는다. 방황하는 정신의 총합을 찾으러 어두운 숲을 헤매고, 못다 이루 꿈과 열정에 뜨거운 울음을 흘리기도 한다. 어쩌면 ‘밤’이 되면, 농부의 삶을 상징하는 ‘낮’의 구속물인 옷을 찢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나 엘리아스의 말대로 문명의 발달이 본능의 포기를 뜻하고, 이것이 피터 브룩의 말대로 육체와 육체의 기능에 대한 훈련을 뜻한다면, 시인에게 낮의 시간은 문명의 시간이자 육체의 제어를 인식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는 무명가수가 되어 길들여진 영혼 구석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방황을 시작한다. 문명의 상징인 옷을 찢고 그 안에 감추어진 자아의 속살로서의 육체를 불러낸다. 특히 자기 조절과 억제로부터 풀려나온 음성, 즉 시는 그러한 방황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3연이 ‘방황의 절정’이고 ‘감추어진 내면의 폭발’이었다면, 4연은 ‘조심스러운 거두어들임’이다. 바깥으로 터져 나왔던 시의 힘을 응축하여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여름이 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쏟아내었던 정신의 총합을 자신의 자리로 갈무리하는 셈이다. 그는 그 순간 한 아이의 아버지이고, 어떤 노부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지아비이고, 도시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르는 농부가 된다. 이렇게 시인 정낙추의 밤은 시와 함께 기운다.
6.
새로 발표된 정낙추의 시 중에서는 소박하고 조촐한 시들이 많지만, 이 자리에서 모두 소개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조용히 그리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의 나머지 시들을 일일이 파헤치기보다는, 시 속에 숨은 시인의 삶 혹은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적어두기로 한다.
나는 정낙추의 시가 세련되거나 기교가 뛰어나다거나 혁신적인 시도가 나타나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확실히 정낙추의 시는 형식적 정제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시는 마음대로 내지르는 판소리 가락 같기도 하고, 몸 가는 대로 움직이는 덧뵈기 같기도 하다. 틀 지우려는 순간 그의 시는 평범한 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시인이 발 딛고 있는 시인의 대지, 시인이 씨 뿌리고 거두는 들판과 연관 지으면, 그의 시가 지닌 평범함은 다르게 이해된다. 그의 시는 삶의 체험에서 잉태된 것이며, 우리가 지금은 가치 없게 느끼는 소외된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려하고 복잡하고 욕심 사나운 삶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질박함은, 그의 시가 담겨 있는 삶의 그릇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낙추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시로 구현한 ‘쇠비름’, ‘참비름’은 다른 시인들의 시에도 인용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때 그 식물들은 관조의 대상이었고, 경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정낙추의 시에서는 일상의 도구일 따름이다. 어떻게 뽑아야 하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따져야 할 생활의 도구인 셈이다. 이러한 차이가 정낙추의 시가 놓인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또 이러한 차이는 정낙추의 시가 다른 도시 계열의 시보다, 정주의 삶에 근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낙추는 분명 잃어버린 인간의 공간, 농촌이라는 버려진 공간에서, 그 공간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전수해주고 있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인위적이거나 특별한 기교를 가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시 계열의 시인들 중에서도 전원의 삶, 안주의 삶을 희구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생태학자의 말대로, 일주일의 6일은 도시에서 화려한 삶을 추구하다가 단 하루 근교의 산이나 시 외각으로 놀러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에 대해 감탄하는 척 하는 태도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는 이러한 상태에서 쓰인 시가, 그곳에서 정주해 살아가며 평범한 삶의 일부로서 자연이나 대지를 끌어안은 시와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정낙추 시의 한 부분에서 이러한 혼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구절들을 본다. 그것은 정낙추가 밝히고 있는 내면의 은밀한 바람이다. 마음껏 내지르고 싶고, 이곳을 떠나고 싶고, 또다른 삶을 살고 싶고, 어쩌면 지겹다고 말하고 싶은 내밀한 바람들. 그 바람들이 ‘가짜 전원시’의 ‘가짜 진정성’과 그의 시를 갈라놓고 있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내면의 방황이 끝나고―더 정확하게 말하면 ‘방황’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포기하고 난 후―그는 흙냄새 나고 거름 냄새나는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이루어 놓은 삶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정주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쩌면 그는 시를 쓰는 지도 모른다. 물론 가짜 전원시를 쓰는 사람들은 1/7 일주일의 시간이 끝나면 도시의 일상으로, 화려한 삶의 영역으로 복귀한다. 같은 복귀이되 한 쪽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를 쓰고, 다른 한쪽은 일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시를 쓴다. 그것이 이 남자, 정낙추가 사는 법이다. 그리고 넓게 말하면 우리가, 이제는 잊어버린 삶의 법이다.
추천2
- 이전글32호(2008년 겨울호)/신작시/하종오 09.02.26
- 다음글32호(2008년 겨울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정낙추 09.02.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