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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기획/이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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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토양을 객토할 지역 문예지의 역할
이희환|문학평론가
1. 제도와 자본에 갇힌 지역문학
지역문학이 우리 문학의 활력을 높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영역으로 논의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구체성을 바탕으로 우리 문학의 창조적 상상력을 선보여준 작품들이 드물지 않게 출간되었다. 필자가 생활하고 있는 인천 지역과 관련한 문학작품을 언뜻 떠올려보더라도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나 이세기 시인의 '먹염바다' 같은 작품들이 쉽사리 떠오른다. 인천이라는 도시의 주변부에서 떠도는 삶의 이야기와 서정을 통해 우리시대를 관통하는 생의 통증과 그 극복의 지향점을 음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좋은 작품이라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멀리 김소월과 백석, 조명희와 채만식, 김유정 같은 우리 근대문학사의 뛰어난 작가들의 문학적 성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역은 “전통적인 의미인 소외를 나타내는 표지이기보다 새로운 의미에서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진지”로서, 그리고 “자기 땅으로부터 나와 자기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치를 창조하는 문학”의 태반이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생태학적 전망을 제시하는 문학 생산”의 싱싱한 가능성을 지닌 지역문학의 종요로운 존재가치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로 두루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문학을 둘러싼 이러한 논의의 풍성함에 비하여 실제로 지역문학을 둘러싼 제도와 그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을 접할 때 우리는 ‘중앙/지방’, ‘중심/주변’ 혹은 ‘보편/특수’의 이항대립에 쉽사리 사로잡히고 만다. 지역문학을 기껏해야 특수한 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다룬 작품들에 대한 소재주의적 접근에 머물거나 아니면 작가의 신원과 관련된 연고주의 정도로 치부하거나, 여기서 좀 더 나간다면 특정 지역의 역사적 사건이나 전통을 다룬 문학작품이나 행사 정도로 한정된 용법에 가두는 경우가 흔하디흔하다. 그도 아니면 특정 지역 작가들의 나태한 자족적 문학 활동이나 배타성에 근거한 자립적 문학 활동을 일컫는 것쯤으로 지역문학을 박제화 하고 폄하하는 것이 우리의 고착된 관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지역문학을 바라보는 이러한 편향된 시각은 지역문학을 둘러싼 제도적 기반을 더욱 열악하게 한다. 물론 오늘날 지역문학이 처한 환경은 과거에 비해 훨씬 좋은 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역마다의 편차가 존재하지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크고 작은 문학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가 이루어진 이후로 각 지자체마다 지역민의 복지와 함께 생활문화의 진작을 목적으로 문예지원 제도가 뿌리 내리기 시작하면서 예총 중심의 관변문화 활동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문화단체와 활동들이 생겨났다. 곤궁한 지역의 문학 동인들이 비용을 갹출하거나 아니면 독지가에 의지하여 배 골면서 시낭송을 하고 동인지 발간을 자축하던 과거와는 다른 제도와 지원의 수혜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오히려 지역문학의 창조적, 전복적 상상력을 제약하고 억압하는 역설적 상황이 지금 전개되고 있다.
과거와는 없었던 관의 지원과 혜택이 오히려 지역의 질서 속에서는 낡은 체제의 온존과 확장에 도움을 주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의 위계적 질서’(구모룡) 아래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지역마다의 문화적 자율성을 몰각한 채 형식화된 제도와 지원의 균등한 확산이 지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창조적 씨앗을 거세하고 있다.
한국 사회와 같이 모든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농단되는, 특히 문화 분야에 있어서는 중앙 집중 현상이 두 겹, 세 겹으로 서열화 되고 구조화된 한국 문화계의 현실에서, 지역에 살고 있는 문인들이 보편적인 문자언어인 문학 매체를 통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듬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1995년 이후 지방자치제의 형식적 실시로 인해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구두선으로나마 외쳐대는 저간의 저속한 현실은 여기서 제쳐두더라도, 모든 것을 금전으로 환금 가능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가치조차 평가절하 되고 마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지역 문예지를 통해 한국문학을 객토하겠다는 이 꿈은 허황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요사이처럼 문학이 나날이 변방의 하위 문화장르로 뒤쳐져가고 있는 문화지형 속에서 지역의 문학 매체를 계간으로 발간하는 일이란 참으로 무모하고 외로운 일일 터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여기저기서 발간되는 문학잡지의 종수만 살펴본다면 오히려 문학잡지의 범람을 걱정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역의 문예지도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역 문예지가 처한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지역의 작가들이 이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왜 지역의 문인들은 문예지 발간에 뛰어드는 것일까. 도대체 지역 문예지를 통해 그 누가 그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있기에, 오늘도 문예지의 발간은 지속되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발간되는 지역 문예지는 과연 한국 문화에 있어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는가. 이제는 냉정하게 되돌아볼 시점에 다다랐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바로 지역 문예지의 존립근거에 대한 냉정한 반성과 성찰인 셈이다.
2. 지역 문예지의 전사
여기서 잠시 한국근대문학사 초창기 있어 지역 문예지의 전사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중앙 집중의 문화권력이 완고하게 자리 잡기 이전인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 신문학운동의 형성기에 있어 근대문학의 서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동인잡지들의 주요한 문학적 태반은 오히려 각 지역의 문학청년들이었다.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로 3·1운동 발발 직전에 도쿄에서 김동인에 의해 창간된 ≪창조創造≫의 주요한 문인들은 모두 평북 지역의 문학청년들이었다. ≪창조創造≫에 이어 1920년 염상섭, 오상순 등의 서울 청년들에 의해 창간된 동인지 ≪폐허廢墟≫와 1922년 홍사용, 노자영ㆍ박종화 등이 창간한 ≪백조白潮≫ 등이 서울에서 발간도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이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1924년엔 다시 김소월, 주요한, 김동인 등의 평안도 지역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영대靈臺≫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깊이 있는 분석이 아닌 예단에 불과하긴 하지만, 한국 신문학 형성기에 있어 드러나는 한국문학의 지역적 원천은 비단 문인의 출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식민지 문단구조가 서울 중심으로 편재된 이후인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향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학잡지의 분출함으로써 지역문단이 가동할 문학적 토양을 만들었던 것 같다.
대구·경북 지역의 문예지를 연구한 박태일 교수에 따르면, 대구에서는 1925년에 ≪여명黎明≫이라는 월간 종합지가 발간되기 시작하여 1927년까지 14개월 동안 모두 4호가 발간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 중반 문학의 주요한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여명黎明≫의 발간은 선산 출신의 청년 김승묵金昇黙이 주도하였다. 필진으로 지역 안팎의 여러 계층과 유형의 인사들로 구성하여 서울의 매체에서도 하기 힘든 다채로운 편집 기획력을 보여주었고, 현진건, 이상화, 장적우, 흑도, 이원조, 김승묵 등의 글이 실려 있어 마치 “1920년대 우리 문학의 주류 작가를 그대로 지역에 옮겨 놓은 듯한 선도적인 모습”을 보인 문예지라고 박태일 교수는 평가하였다. ≪여명黎明≫에 이어 1930년 김천 지역에서는 청년 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 신진 문사 38명이 집필 동인으로 참가한 작품집 ≪무명탄無名彈≫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1926년 8월 통영에서 시조를 중심으로 다룬 동인지 ≪참새≫가 1928년 8월에 발간되기 시작하여 모두 4호까지 발간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11월 진주에서도 ≪시단詩壇≫이란 제하의 시 전문 문예지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들어 통영에서 다시 ≪상성上聲≫이라는 시를 위주로 한 문예지가 발간되기 시작하여 모두 5호까지 발간되었다. 1928년 8월에는 진주에서 엄흥섭의 주도로 ≪신시단新詩壇≫이라는 시전문 문예지가 발간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1925~7년 무렵이 전국 각 지역에서 청년 문사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문학매체로서 지역 문예지가 본격적으로 태동, 확산되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925년 무렵부터 인천 지역에서도 청년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한 지역문화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문예지의 발간이 시도되었다. 1927년 2월 1일 창간호를 발간한 월간잡지 ≪습작시대習作時代≫는 인천 지역에서 발간된 최초의 순문예 잡지였다. 1927년 2월 1일 발행된 ≪습작시대≫ 창간호는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화백의 표지그림과 함께 격려사에 해당하는 주요한朱耀翰의 문단시평 「습작시대」로 첫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수필과 평론 6편, 창작시 11편, 창작소설 3편의 결코 왜소하다 할 수 없는 문학적 역량을 선보였다. 이 중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주요한의 「습작시대」를 비롯,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의 시 「월미도해녀요月尾島海女謠」, 박팔양朴八陽의 시 「인천항」, 초기 아동문학 동요 부문을 주도하였던 유도순, 한정동韓晶東의 동요와 엄흥섭의 시 「내 마음 사는 곳」 등이 실려 있다. 「편집여언」에 따르면 애초에는 춘원을 비롯 육당六堂 최남선이나 팔봉八峰 김기진 등도 글을 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정가 10전으로 인천 지역을 토대로 해서 창간된 순문예 월간지 ≪습작시대≫는 창간호부터 지방에서도 많은 투고가 들어오고 각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부수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4호까지 발행하고 폐간되었다고 엄흥섭은 회고하고 있다. 또 <동아일보> 1927년 3월 9일자 기사에는 이미 2호까지 간행된 ≪습작시대≫에 대하여 지역 사회의 호응이 높고 전도가 유망하다고 소개하면서, 3호부터는 표지와 지면을 일층 확장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예고 기사대로 제3호인 1927년 4월호가 발굴되어 그 체제와 내용을 바꾸어 혁신호로 간행된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엄흥섭은 ≪습작시대≫를 뒤이어 그 후속잡지로 공주에서 ≪백웅白熊≫, 진주에서 ≪신시단新詩壇≫이라는 잡지가 간행되었다고 회고하였는데, 때마침 공주의 문예지 ≪백웅≫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광고를 월간 ≪문예영화≫ 창간호(1928. 3)에서 최근 확인하게 되었다. “월간문예 白熊”이하는 표제로 게재된 ≪백웅≫ 제2호(1928년 3월호)의 중요목차를 보면 진우촌의 희곡 「불 붓는 마을」, 엄흥섭의 소설 「갈등에 억매인 무리」, 박아지의 시 「南족 한울을 바라보며」 등이 수록되었다. ≪백웅≫이 전하지 않기에 그 실물을 확인할 수 없는 이 작품들 또한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다. 발행소를 충남 공주 상반정常盤町 1번지 백웅사에 두고 총판은 경성 종로2정목 82번지에 있던 박문서관을 이용했던 ≪백웅≫까지 놓고 보면, 1920년대 중·후반은 지역 문예지가 각지에서 분출했던 지역 문예지의 개화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중·후반 지역문화의 역량을 보여주는 이러한 지역 문예지의 발간 붐은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주춤했던 것 같다. 부산·경남 지역에서도 부산과 통영에서 ≪신흥시단新興詩壇≫(1934) ≪생리生理≫(1937) 같은 시를 중심으로 한 문예지를 발간하나 1~2호에 그쳤고, 대구·경북에서도 ≪동성東聲≫(1932) ≪문원文園≫(1937) 같은 문예지를 낸 기록이 남아있지만, 그 실물를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단명했던 것 같다. 인천 지역도 마찬가지여서 1927년 ≪습작시대≫ 이후로 1930년대에 발간된 문예지로는 1937년 1월에 발행된 ≪월미月尾≫(발행인 김도인)가 유일하다. 인천부 용강정 24번지에서 4×6배판 50면의 문예지로 나온 ≪월미≫의 창간사를 보면, “인구 10만을 算하는 인천에 이곳을 本位로 삼은 출판물 한개쯤 없을소냐? 미력이나마 공헌이 있고져 출생하였으니”라 밝히며 지역 문화의 정체성을 확인을 표 나게 내세우며 창간되었다. 그러나 창간사의 커다란 포부와 달리 ≪월미≫도 창간호를 끝으로 종간하고 말았다.
일제 말에 숨죽였던 지역의 문학적 역량은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시에 고양되었다.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지역 문예지들이 생겨나며 시대의 문제를 다투는 논설과 문학작품들을 궁핍한 종이난 속에서도 발간하였던 것이다. 인천에서도 인천청년문학동회에서 ≪문예탑文藝塔≫(주간 신영순)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하였고, 우봉준 주간이 주도한 ≪동화세계童話世界≫라는 아동문예지도 발간되다가, 이 두 문예지와 인천신문화협회의 작가들이 모여 인천문학동맹(위원장 엄흥섭)을 결성하고 기관지 ≪인민문학≫을 발간되었다. 그러나 해방기에 고양되었던 문화적 열망은 분단체제의 구축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으니, 1950년대 분단체제 하의 남한에서 전후복구의 일환으로 예총과 문협 중심으로 문학지형이 재편되는 한편, 서울 중심의 문단구조가 확대재생산 되면서 기나긴 문학의 중앙 집중화 현상이 구조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지역의 문예지는 예총이나 문협의 기관지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왔다. 문협 중심의 보수우익문단이 장기집권으로 문단권력을 독점한 가운데 1960~70년대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으로 대변되는 민족문학과 자유주의 문학의 문학 매체가 실질적 문학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지역문학은 숨죽였다. 그런 가운데 민족문학의 저변이 확대되고 분화되는 1980년대에 이르러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발간되기 시작한 동인지와 무크지의 출현으로 새로운 문학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1980년대 비상한 시의 시대는 이러한 문학적 환경 속에서 배되었으니 ≪반시≫, ≪시와경제≫, ≪오월시≫, ≪시운동≫, ≪시힘≫ 등과 같은 문학동인지 내지는 무크지가 각 지역에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상업출판자본이 발간하기 시작한 문학매체가 문학권력을 주도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동인지 시대는 저물었던 듯하다.
3. 오늘, 지역 문예지의 양적 확산
저마다의 어려운 역사적 시기에 문학을 매개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문학적 발언을 던져왔던 지역 문예지의 역사에 견주어 오늘날 지역 문예지는 양적으로 비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권위를 구가하는 듯 보인다.
2007년 현재, 한국문인협회 산하에 17개 지회와 160개의 지부가 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산하에는 12개의 지회와 8개의 지부가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 두 단체 모두 지회별로 기관지를 발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 잡지의 대부분은 “많은 경우 지역에 바탕을 둔 문화자본은 중심부 문화산업에 흡수되거나 중심부 유행 장르들을 모방하며 또 다른 경우 박제된 지역성, 지역의 박물지 기술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문학단체를 기관지로 제도화의 혜택을 받고 있는 지역 문예지의 안타까운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1990년 직후부터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각 지역에서 새로 창간된 적지 않은 수의 문예지들이 출판자본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문학성을 놓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어 주목된다. 지역의 문학동인과 연구자, 창작자들이 뜻을 합쳐 중앙의 유수한 문예지와 경쟁하면서 그 나름의 문학적 성과를 이어가고 있는 이들 지역 문예지들은 전체적으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저변을 풍성하게 하면서 고착된 문학 장에 의미 있는 문학적 파문 던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럼 여기서 지역 문예지 중에서 그 나름의 문학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주요한 문예지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1990년 5월부터 시 합평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제주의 ‘다층’ 동인은 ≪다층≫이라는 동인지를 10여 차례 발간하다가, 1999년 봄에 전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 중심의 계간 문예지 ≪다층≫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시를 중심으로 제주뿐 아니라 다른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싣는가 하면, 시 분야의 논문이나 평론도 꾸준히 게재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와의 대담, 신춘문예의 문제점 진단 등 의욕적인 기획들을 선보여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2007년 여름호(통권 34호)에서는 기획특집으로 “시의 ‘시다움’을 찾아서”를 내세웠는데, 시조를 게재하고 시학연구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제주작가회의의 기관지 ≪제주작가≫가 최근 통권 20호를 맞으면서 계간으로 전환하였는데, ‘4·3’으로 상징되는 제주문학의 역사성을 천착하는 ≪제주작가≫에 비한다면 ≪다층≫은 상대적으로 지역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시 전문지이다.
전북 지역에서 발간되는 ≪문예연구≫는 표제 그대로 창작과 더불어 연구논문에 비중을 두어 편집하는 것이 두드러진 문예지이로 1993년 창간되어 2008년 여름호로 통권 57호를 발간하였다. ≪문예연구≫는 창간호에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소개한 것을 포함, 개화기 한국 문학, 민촌 이기영 평전, 이상 60주기 기념 특집, 톨스토이 탄생 1백70주년 기념, 인기 여류작가론 등의 특집과 함께 문학의 해 시화전 등의 행사 등을 꾸준히 갖어 왔다. 뿐만 아니라 서정주, 고은, 최명희, 신석정, 윤흥길, 최일남 등 전북 지역 문인들의 작가세계를 조명한 기획 특집을 포함, 다양한 주제로 근대문학 발굴, 문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왔다. 또, 1998년 12월 12일 등단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문예연구문학회를 결성, 모두 1백50 여 명의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동인지 '텃밭'을 발행해왔다. 2008년 여름호의 기획특집으로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5명의 연구자가 글을 게재하고 있다.
전남 광주 지역에서 발간되는 시전문지 계간 ≪시와사람≫은 1995년 창간 이후 우수한 신인발굴과 함께 지역을 연고로 작가들의 작품 발표의 장으로 꾸준히 발간해왔다. ≪시와사람≫ 2008년 봄호를 보면 기획특집 “21세기 리얼리즘의 현재와 반성”을 비롯해 시인연구 조정권 편, 신작특집, 송수권 시인이 쓰는 「남도정서·남도정신」 등 지역성을 가미한 다채로운 내용을 싣고 있다. 이 잡지는 올해 초 종합문예지 ≪서정과상상≫을 봄호를 창간하더니, 7월에는 ‘광주·전남 현대문학연구소’를 개관하였다고 한다. 연구소는 각종 전시회와 문학모임, 정기적인 시낭송회 및 시화전, 유명작가 초청강연 및 세미나 개최 등 다양한 문학행사들도 열어나가기로 했다. 2005년 8월 광주에서 종합문예지로 창간된 ≪문학들≫은 비록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작품론과 작가론을 중심으로 한 문학적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광주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병진해왔다.
대구 지역에서는 ≪시와반시≫와 ≪사람의문학≫이 오랜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 1992년 창간된 계간 ≪시와반시≫는 창간사에서 표 나게 “우리는 ≪시와반시≫가 서울이 아닌 이 지역에서 창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되기를 바란다”고 환기하면서 “문화적 갈증과 허기는 우선 문학 저널리즘의 서울 집중과 관계”가 있다고 진단하고 “이른바 중앙시단의 그것과는 다른, 신선한 산소와 양질의 영양을 공급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출발하였다. ≪시와반시≫는 창간 이후 2008년 여름호, 통권 64호를 내기에 이르기까지 주목받지 못한 뛰어난 시인을 지속적으로 발굴하면서 우리 시의 새로운 진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1994년 지역문학 활성화를 위해 김용락, 배창환, 정대호, 정만진 시인등 <분단시대> 동인들이 주축이 돼 대구에서 창간한 ≪사람의문학≫은 종합문예지를 표방하며 통권 56호를 발간해왔다.
충청 지역에서 발간되는 지역 문예지로 ≪애지≫와 ≪시와정신≫이 있다. 통권 35호를 발간한 충북의 ≪애지≫는 발간 초기에 도발적인 비평담론을 개진하면서 큰 주목을 끌었다. 동업자간의 침묵과 방관이 팽배한 문단에 직설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비평을 선보였던 ≪애지≫는 최근 들어 시 전문지로의 갱신을 도모하면서 서정시의 새로운 모태가 되고 있다. 2002년 창간된 대전의 시 전문지 ≪시와정신≫은 “시대 언어의 속살이며 심장”인 시 장르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문제와 새롭게 만나고자 한다”는 취지 아래 창간되었다. ‘우리시대의 시정신’ 같은 꼭지를 통해서 우리 시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천착하고 있는데 두 잡지 모두 충청 지역의 구체적 지역성에 대한 천착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08년 여름호로 통권 22호를 발간한 강원도의 시 전문지 ≪시와세계≫는 그 지속적 발간 그 자체가 우선 주목할 만하다. 강원도의 문화적 환경이 결코 시 전문지를 간행하는 데 있어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잡지 또한 지역성보다는 시 문학의 문학적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어 발행되고 있다. 한편, 필자가 살고 있는 인천 지역에서도 통권 60호를 맞는 인천문인협회의 계간 ≪학산문학≫과 통권 30호를 맞은 계간 ≪리토피아≫, 그리고 반년간에서 계간으로 전환하여 통권 25호를 발간한 ≪작가들≫ 등이 발간되고 있다. 지역성보다는 종합문예지를 표방하고 있는 이들 문예지 중에서 ≪리토피아≫가 문학 그 자체의 보편성을 중심에 둔다면, ≪학산문학≫은 절충적으로, 그리고 ≪작가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지역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상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지역 문예지가 가장 활발하게 발행되어온 곳은 부산이다. 부산에서는 시전문지 ≪시와사상≫, ≪신생≫을 비롯하여 비평전문지 ≪오늘의문예비평≫, 그리고 종합문예지로 ≪작가와사회≫ 등이 발간되고 있다. 1994년에 창간된 ≪시와사상≫은 “중앙문단의 지방문단 소외화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중앙문학과 지방문학의 이분법”이나 “서울지방-중심문학이라는 고정관념”를 넘어서서 “시를 쓰고 예술을 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세계적인 사건”이라는 지향 그대로 창간 이루로 줄곧 모더니즘에 바탕한 세련된 시 문학을 천착해왔다. 2008년 봄호(통권 56호)에서는 기획특집으로 “현대시와 언더그라운드문화”를 다루었다. 부산에서 발간되는 또 하나의 시 전문지인 ≪신생≫은 생태주의적 지향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시 전문지이다. 창간 10년을 앞두고 있는 ≪신생≫을 통해서 주요한 지역 내외 시인들 신작이 발표될 뿐만 아니라 생태주의적 관점 아래 우리 시를 다시 읽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는데, 2008년 여름호의 좌담 “위험사회, 신생의 글쓰기를 모색한다”나 ‘신생의 현장을 찾아서’ 같은 꼭지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비평전문지로는 거의 유일하게 발간되고 있는 ≪오늘의문예비평≫ 또한 부산 지역의 독자적 지역문학담론의 역량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창간 초기부터 부산 지역의 문학적 전통을 조명하면서 지역문학 담론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온 ≪오늘의문예비평≫은 연전에 지면을 혁신하면서 전국 유일의 본격비평전문지로 의욕적인 문학담론을 개진하고 있는데, 통권 69호로 출간된 2008년 여름호에서는 ‘특집’으로 “비평의 존재방식과 비평의 자유” “한국문학과 진보” 같은 묵중한 주제를 다루는 것과 함께 ‘지역을 주목하라’ ‘아시아를 보는 눈’ 같은 꼭지를 통해서 문학의 지역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부산작가회의의 ≪작가와사회≫가 부산 지역의 정체성을 담는 문예지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상에서 거칠게 일별한 지역의 문예지들의 면모만을 놓고 보더라도 현재 지역 문예지가 한국문학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결코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시 전문지들이 주로 지역에서 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데, 우리 시의 중요한 문학적 근거지가 바로 지역에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비단 시 전문지뿐만 아니라 종합문예지를 표방하고 있는 지역 문예지들도 그 문학적 역량이 중앙의 문예지에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은, 우리 문학의 저변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4. 지역 문예지의 역할-지역성과 문학성의 긴장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문제도 들어가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몇몇 문예지들을 예외로 한다면 위에서 살펴본 거개의 지역 문예지들은 지역성보다는 문학성에 천착하는 모습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지역성과 문학성이 기실 선명하게 변별된 성질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의 문예지가 창작란을 중심으로 한 비슷한 편집체계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형식적 면모를 놓고 볼 때도 이는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지역의 문예지가 문학적 보편성에 추구에 경도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예지의 고유성과 지역성은 희소해지거나 무화되고 마는데, 이러한 문예지들을 과연 ‘지역 문예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지역 문예지라고 해서 꼭 지역성을 천착해야마나 한다는 법은 없다. 지역이 곧 중심이고 지역을 새로운 문학적 중심을 형성하려는 노력 그 자체는 상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구태여 지역이 아니더라도, 지역문학이 그간 철저히 소외되어 왔다고 지적해왔던 소외의 원처인 중앙에서 발간되는 유사한 잡지들을 닮아간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고봉준이 지적한 대로 “스스로를 중앙 문단의 타자로 설정함으로써, 주변이라는 조건을 새로운 중심의 근거로 삼는 아마추어리즘의 권력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한 세련된 문학성을 통해서 그 자신을 중앙 문단의 대리자로 권력화 하는 것 또한 지역 문예지들이 경계해야 마땅하다. 문학성과 지역성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기한 터한 삶터의 구체적 삶의 세목을 문학적 감동으로 선사하는 지역 문예지의 찬란한 분화야말로 지역 문예지가 한국문학에 신선한 영양분을 제공한 객토가 될 수 있는 제일의 조건이 아닌가 한다.
거듭 환기하거니와 지역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갖고 있는 소우주이다. 특히나 오늘날의 지역은 그 어느 곳이든 격절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의 문제는 나라 전체, 전인류적 차원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딛고 사는 고장의 삶을 자기 삶의 일부로 접수하고 그 공간속으로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지역적 실천 속에 전지국적 사고를 벼리는” 창조적 응전이 전개될 수 있는 역동적인 장이 바로 지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역은 중심부의 새로운 체제와 시스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낡은 질서와의 갈등과 투쟁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공간적 후진성과 보수성을 갖고 있는 곳 또한 지역이다.
이제 지역의 문예지는 더 이상 ‘시골뜨기문학’(임화)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서울 것들 뺨치는 세련된 ‘깍쟁이문학’으로 동네를 내가 사는 동네를 마냥 비워서도 안 된다. 지역의 완고한 질서에 맞서기는 고사하고 안주하거나 아니면 하나의 새로운 지역 권력에 편입되어 스스로 비판했던 낡은 권력을 닮아가는 늙은 얼굴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지역문학은 과도한 중앙 중심의 문단권력을 해체하고 지역의 특수한 현실 속에서 보편적인 문학적 형상을 꽃피워냄으로써 소수의 문단권력이 행사해왔던 문학적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저변을 넓혀나가는 새로운 문학적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지리멸렬한 오늘날 한국문학의 낡은 토양을 갈아엎고 새로운 상상력의 줄기와 열매가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 객토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역문학의 싱싱한 가능성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지역의 문예지들인 것이다.
이희환∙1966년 충남 서산 출생. 1999년 계간 ≪작가들≫로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 김동석과 해방기의 문학이 있음.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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