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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기획/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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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지역문학을 새롭게 읽는다
다시 생각하는 지역문학의 운동성
김동윤|문학평론가
1. 들머리
일찍이 만해는 “아아 온갖 윤리․도덕․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당신을 보았습니다」)라고 읊었거니와, 2004년 10월에 나는 “그 중에서도 법률은 더욱 그렇습니다.”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싶었다. 참담했다.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황당했다. 수백 년 동안 서울이 수도의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라는 사실이 관습적으로 인정된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 되는가? 사실 나와 같은 제주도 사람의 입장에서야 수도가 서울이건 대전이건 크게 상관은 없다. 문제는 그 실익 여부가 아니다. 이전 불가를 주장하는 헌법재판소의 논리가 황당하여,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크게 구겨졌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은 수도를 절대로 옮겨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서울사람들의 ‘연기’일 뿐이다. 탄탄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옹색한 논리일 따름이다. 어디 수도 이전 문제뿐이겠는가? 이 나라의 교육정책, 부동산정책, 복지정책 등 ‘온갖’ 것들이 ‘칼과 황금’을 소유한 서울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있다.
그러니 ‘서울을 해체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유독 강조되는 국민으로서의 삶 또한 서울중심주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그동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고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여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야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겠는가. 아직까지도 전국 방방곡곡이 서울 중심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식민성이 엄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주도 사람들은 ‘물로 뱅뱅 돌아진 섬’에 살면서도 삼면이 바다인 반도의 특성만을 익혀야 했고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를 우리 역사로 줄기차게 공부하면서도 탐라국의 역사는 모른 채 살아야 했다.
지역문학운동은 이런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진지한 진단과 성찰이 없이 지역문학을 운위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행여 문학의 자율성 운운하며 그런 현실과 문학은 별개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생각을 추호라도 지니고 있다면 아예 지역문학을 두고서 함께 논의하는 자리에 끼어선 안 된다.
2. 어째서 지역문학이며, 왜 운동성을 가져야 하나
변방, 주변부성, 비주류, 소외……. 지역문학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지역문학이 처한 현실을 나름대로 잘 설명해 주는 단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단어들에서 패배주의적인 부면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지역문학에 대해 논의해선 안 된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중심에서 소외된, 주류에 끼어들지 못한 등의 수식어를 연상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면 그것은 이미 패배주의에 젖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열등함을 인정하면서 중심부로 편입되고자 하는 태도야말로 “맹목적인 모방의지(굴종, 노예의지)”의 발현이다. 이런 패배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것이 지역문학운동의 시작이다. 패배주의적 인식으로는 운동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여기에서 왜 지역문학이 필요한지, 그것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구모룡․김승환․박태일․이현식․이희환 등 여러 비평가 혹은 연구자에 의해 충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제기된 바 있다. 그 방법론으로 구모룡은 ‘비판적 지역주의’를, 김승환은 ‘신지역주의’를, 박태일은 ‘지역구심주의’를 각각 내세웠는데, 다소의 차이들이 없지 않지만 지역적 실천을 토대로 세계를 내다보는 문학을 공히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지역에 굳건한 바탕을 두면서 중심과의 변증법을 도모함으로써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해 나간다는 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앙이나 민족문학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관계 설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분법적 논리나 배타적 혹은 대타적 개념을 내세워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지역의 대타항이 꼭 나라나 중앙을 상징하는 게 아니”며 “지역문학은 민족문학의 외연을 확장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채워”주므로 “지역문학과 민족문학은 (…) 대타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을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민”하지 않은 채 지역만을 내세우려고 한다면 곧 지역이기주의나 맹목적 향토애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지역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한 나라는 물론 세계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맥락을 찾아”냄으로써 “지역을 통하여 나라와 세계를 본다”는 전략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 단계 지역문학의 성격과 방향을 잘 짚어낸 다음과 같은 발언은 매우 주목된다. 지역문학운동의 방향 설정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지역문학은 자기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활현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7,80년대 리얼리즘문학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은 생활을 구체적인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상의 차원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80년대 문학이 갖고 있는 한계로부터 탈출한다. 아울러 방향 없는 일상성과 거리를 둔다는 면에서 90년대 신세대문학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방향성이 분명한 구체적인 생활과 일상 현장의 문학이 지역문학이라는 주장이다. 바로 이런 점은 “지역문학의 강조로써 구체적인 삶을 담지 못하는 현대문학에 대한 경계가 되기도 한다.” 지역문학이야말로 위기에 빠진 오늘의 한국문학을 구하는 명약이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판의 현실은 막막하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아직도 문학을 붙잡고 있느냐, 게다가 그 변두리인 지역문학이라니 도대체 정신이 있느냐, 하는 뜨악한 눈길들이 만연하다. 이른바 문학권력의 대부분은 거들떠보지 않거나 경시하는 태도가 역력하며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조차도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이중 삼중의 장벽에 맞닥뜨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하다. 몇몇 뜻있는 이들의 외침이나 주변 사람들의 심정적 동조만으로는 장벽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지역문학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1980년대에도 지역문학(문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때는 민주화투쟁의 지역적 분산이라는 전략의 측면이 강했다. 그래서 전략과 전술의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설정된 타도 대상이 있었다. 반면에 지금의 목표는 다원화되어 있고 전략 전술은 다소 희미해졌다. 독자적 생명력의 확보와 세계사적 변화에 대한 지역적 대응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지난한 여정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한국문학 혹은 세계문학만이 아니라 지역문화, 민족문화, 세계문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지향이기에 반드시 걸어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문학운동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지역문학을 통해 문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신념과 소신을 가져야 한다. 지역민으로서의 치열한 삶을 회복해야 국민으로서도 세계인으로서도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3. 현 단계 지역문학운동의 방향
1) 작가: 리얼리즘 정신
우리가 지역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삶의 현실성을 회복하자는 의도”가 가장 크다. 삶의 현실성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자기가 정신적․육체적으로 발을 디딘 곳에 대한 각별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가 딛고 사는 터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 지방에서 살았던 또는 살아가는 민중의 꿈과 투쟁과 좌절, 곧 지방의 혼을 자기 안에 정성스럽게 받아들이는 대지에 대한 경배이다. 이 마음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발 디딘 지역에 대한 경배의 마음만이 진정한 지역문학을 생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역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지역에서 지역의 독자성을 말하면서도 정작 사고방식은 서울의 작가들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역을 빙자해서 문단권력을 탐하는 짓”에 다름 아니다.
지역의 구체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시야는 민족과 세계를 향해야 한다는 지역문학의 논리는 리얼리즘 정신을 필요로 한다. “타자화, 대상화, 사물화되고 있는 지역에 역사성과 구체성을 불어넣어 형성적인 서사를 그려내”려면 리얼리즘 정신에 바탕을 둔 지역문학에서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지역문학은 지역의 정신을 갖고 있어야 의미가 있다. 지역의 정신을 제대로 갖기 위해서는 작가가 지역에 단단한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취지로 취재하고 공부하여 쓴다고 하더라도 다른 지역의 문제에 다가서는 데는 한계가 많다. 그것도 나름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지역문학으로서의 가치는 적을 수밖에 없다. 다른 지역의 역사와 현실은 논리적․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경험적․감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의 경험은 해당 지역의 작가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지역의 작가들은 그런 숙명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인천에서 간행된 조혁신 소설집 '뒤집기 한판'(2007)은 주목할 만하다. 인천 송림동 산동네를 배경으로 변두리 인생의 신산한 삶을 밀도 있게 파헤쳤다는 점에서 젊은 작가가 보여준 지역문학의 전범이 될 만하다. 제주에서 나온 오경훈의 연작소설집 '제주항'(각, 2005)도 18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전개된 제주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제주항을 매개로 삼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는 문제작이다. 제주항이 그동안 여러 면에서 계속 탈바꿈해 왔듯이, 제주항을 둘러싼 역사와 사람들의 생활상도 시시각각으로 변모해왔음을 아홉 편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었다.
지역문학은 지역의 정신을 견지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의 현실과 사람과 역사와 삶에 뿌리를 내리는 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역의 작가들은 조급하게 인기 작가의 경향을 따라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지역 문제에 대한 치열한 탐색을 우직하게 전개해야 할 줄로 안다.
2) 독자: 대중 속으로
근래 들어 문학이 대중과 유리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문학 내적인 요인으로 나는 문학이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고 본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에는 굿이 매우 성행했다. 그런데 굿판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즐겼다. 아이들이야 그저 신나서 굿판을 기웃거렸지만, 어른들은 왜 그랬을까? 굿판에서 살아 있는 신화인 본풀이가 흥미 있게 구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들으면서 제주사람들은 웃고 울었다. 본풀이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기도 했다. 그들은 글을 잘 몰라도 구전되는 본풀이를 통해 문학을 향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굿을 탄압하고 텔레비전이 안방을 파고들면서 굿판은 점점 시들어갔다. 그들은 이제 신화를 멀리하고 전파를 타고 오는 서울 사람들 얘기에 이목을 돌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글을 안다. 문학작품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잘 안 읽는다. 남의 얘기나 흥밋거리는 텔레비전에도 얼마든지 있다. 자신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데 왜 거기에 기웃거리겠는가. 문학과 생활이 밀접히 연관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이런 문제를 지역문학이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지역문학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제 문학은 더 이상 권위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 문학이 문화권력의 자리에 있던 시대는 가고 그 권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우리나라는 근대와 더불어 문학에 지나친 권위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서양의 문물이 권력처럼 다가왔듯이, 서양문학의 영향을 받은 문학이 선비를 존중하던 전통과 맞물리면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책을 내는 것도 어려웠으니 작가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흥밋거리는 도처에 있는 데다 누구나 쉽게 책을 펴낼 수도 있다. 어찌보면 책을 내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측면도 있다. 과거엔 평소에 써둔 글은 스스로 혹은 주변에서 묶어서 책을 내지 않았던가. 팔리기를 바란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런 면을 본다면 이제 누구나 작가인 시대를 지향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한다. “중앙문단의 얄팍한 명성을 무기로 지역에서 군림하려는 몇몇 문학적 토호”가 있다면 과감히 배척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제는 “글쓰기의 생활화, 생활화된 글쓰기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일”을 통해 생활문학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문학, 생활 속의 문학, 작은 중심이라도 우리가 그 중심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문학의 밤, 시낭송 행사, 문학교실 등이 자주 열려야 한다. 그런 행사를 통해 문학과 생활, 문학공간과 일상공간이 별개가 아님을 인식토록 해야 한다. 특히 지역문학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일은 지역문학의 장소성 회복과 더불어 지역 가치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제주작가회의에서 해마다 4월에 개최하는 ‘작가와 함께 떠나는 4․3문학기행’은, 4․3문학의 현장을 답사하며 문학강좌, 시낭송, 이야기마당 등을 가짐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서, 의미 있는 기획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밖에도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한 문학기행, 읍․면이나 마을 등 소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학기행, 주제를 중심으로 한 문학기행 등 다양한 문학기행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를 지키면서 대중을 이끌려고 하기보다는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서 대중과 함께 하는 문학적 풍토를 조성해 가야 한다. 생활문학운동은 지역문학인들이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요긴한 일이다.
3) 비평과 연구: 지역의 눈
지역문학 전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하며, 지역의 특성이 녹아든 문학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지역문학에 대한 비평과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지역문학 창작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지역문학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도 지역문학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는 아직도 미미한 편이다. 비평과 연구가 없이 지역문학이 활성화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니만큼 창작 못지않게 비평과 연구의 활성화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부산․경남지역은 지역문학의 연구와 비평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지역이다. 이희환은 근래 이 지역의 지역문학론에 대해 의미 있는 분석을 하였다. 구모룡의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2005), 박태일의 '한국 지역문학의 논리'(2004), 하상일의 '주변인의 삶과 시'(2005)를 통독하고서 세 저서가 묘하게도 지역문학론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이론과 실천상의 주요 영역을 각기 대표하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구모룡의 논저가 지역문학론의 이론적 지표를 마련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면, 박태일은 이를 실증적으로 보태면서 실천학문으로서 지역문학 연구의 영역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여주고 있다. 젊은 비평가인 하상일은 이러한 이론적 성과를 확인하듯이 지역작가와 작품에 대한 성실한 실제비평을 보여주었다.
이희환이 지적했듯이 위의 세 저서는 지역문학론의 실천영역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론적 틀을 세우고, 학문으로 연구하고, 실제비평에 힘쓰는 일은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이런 작업들이 작품 속에서 지역성을 찾는 노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려면 연구자나 비평가도 지역의 관점으로 문학작품, 문학현상, 문학사를 바라보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관련 학회의 창립, 대학에 관련 강좌의 개설 등도 필요한 일이다.
4) 사회: 연대
지역문학은 창작에서부터 연구와 비평 등에 이르기까지 인접 분야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지역의 역사․문화․자연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바탕으로 하여 형상화한 문학이라야 의미를 발한다. 확실한 천착 없이 지역적인 것을 대상화하는 작품은 관광객․여행객의 입장에서 쓴 작품과 다를 바 없다. 관광객․여행객의 입장에서 쓴 작품에서는,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역민의 삶을 왜곡하고 감상적으로 대상을 접근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지역의 제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관련 학자 등과 더불어 협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현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역문학의 성격 자체가 그러한 만큼 지역문학운동에서도 당연히 연대에 힘써야 한다. 그 연대는 지역 내의 시민운동 단체들과도 필요하고 다른 지역의 문학단체와도 필요하다.
그 구체적 실천의 방략으로 지역문학론을 포함한 지역문화운동이 지역시민운동과 슬기롭게 연대하는 것 또한 매우 절실한 과제가 아닐까 덧붙여본다. 이에서 더 나아가 지역문학론은 다른 지역의 문화운동 역량과의 교류와 연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간에 직면하였다고 생각된다. 아직 각 지역의 지역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경험을 추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안에만 매몰된다면 결국 과거의 향토주의나 지역 중심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바람직한 시민사회가 형성되어야 올바른 지역자치도 가능하고 지역문화도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기에 지역문학운동은 건전하고 역동적이며 민주적인 지역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비정부기구의 활동과 긴밀한 연계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역정부와는 사안별로 협조는 하되 언제나 긴장 관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는 가운데 지자체가 문화적 마인드를 갖고서 각종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한다.
“지역문학의 문화적 연대는 (…) 정신과 사상의 공유 그리고 정서와 삶의 경험의 교류로부터 시작하여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적 전망을 가”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 간 교류는 국내 타 지역과의 교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외로도 눈을 돌림으로써 바람직한 지향점을 모색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4. 마무리
우리가 이 冊子를 만들겠다는 情熱과 意慾은 값산 문학이 갖는 孤獨을 즐겨서가 아니라 오로지 現下文壇의 中央集權制와 그 派벌을 止揚하기 위한 二十代의 抗議의 姿勢 그것에 있고 現代文學이 갖는 人間救濟의 使命을 完遂하려는 데 있을 따름이다.
二十世紀 文學은 民主主義 文學이어야 할 때 우리 現代文學은 아직도 中央集權制란 테두리에서 모든 旣成의 思想이나 知識에 依存하므로서 自身의 人間的 實體를 喪失하고 있은 지 오래다. 이런 現實에서도 끈질기게 우리는 果敢히 實踐的으로 무엇인가 創造하고 싶었고 作業을 完遂하고 싶었던 것이다.
위의 글은 1959년 10월 제주에서 창간되었던 ≪시작업≫의 창간 취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시와 시론을 위주로 편집된 이 잡지는 한국문단의 중앙집권적 경향과 파벌 현상을 지양하기 위해 20대 청년으로서 항의의 자세를 가지고 창간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중앙집권제와 파벌의식은 문학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들은 지역에서 문예지를 만들어낸다거나 유명문인들의 작품들을 게재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적 삶을 바탕으로 삼는 가운데 문학적 실천이 전개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작업≫에 실린 작품들의 면모를 보면 지역적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지나치게 추구한 경향이 있음이 확인된다. 즉 이들이 말하는 탈중앙의 논리는 구체적으로 실천되지 못했기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지역문학을 부르짖되 선언적으로만 하는 것은 아닌지 50년 전의 사례를 통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지역적 실천이 없는 지역문학은 이미 지역문학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동윤∙1964년 제주 출생. 2001년 ≪리토피아≫를 통해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 기억의 현장과 재현의 언어, 우리 소설의 통속성과 진지성, 4․3의 진실과 문학, 신문소설의 재조명 등이 있음. ≪제주작가≫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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