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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초점/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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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의 내적 논리에 대한 투시
― 하종오의 장시 「마트」(리토피아 2008년 봄호 수록)의 시적 전언
고명철|문학평론가
1.
정녕, 소비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고,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적절한 정도의 욕망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돌아오는 답이 뻔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을 향해 묻고 싶다. 이제,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현실적이 아닌 비현실적 공상에 불과한 일일까. 하여,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을까. 어떻게 해서든지 소비자본주의에 친연성을 갖도록 우리의 일상을 조율해나가는 일이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일까.
잇따른 물음 속에서, 무엇하나 뾰족한(혹은 현실적) 대응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저 도저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자연스레 일상의 풍경을 이루는 온갖 상품들과 그것들이 한껏 발산해내는 매력은, 무기력감 자체를 망각하도록 함으로써 소비자본주의 욕망에 기꺼이 나포되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자연스러운 윤리임을 설파한다. 따라서 이 윤리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매우 행복한 일상의 삶을 사는 내적 논리를 구축하게 된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가치 판단은 소비자본주의 욕망을 일상의 내적 논리로 구축하는지의 여부를 놓고 가늠하게 되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예의 내적 논리에 반감을 갖거나 구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종오는 그의 장시 「마트」(≪리토피아≫, 2008년 봄호)를 통해 소비자본주의 욕망이 일상의 내적 논리로 구축되는 풍경의 세목들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마트」는 ‘지금, 이곳’의 일상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소비자본주의 욕망의 일상을 향한 내적 논리의 일거수일투를 투시해내고 있다. 하종오가 투시해내고 있는, 이 내적 논리의 일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큐브’라는 영화가 겹쳐진다. 너무나 일상적 친연성을 갖는 ‘마트’란 공간이, 마치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큐브(cube)와 같은 미로 속 공간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큐브는 어떤 공간인가. 정육면체의 똑 같은 공간들이 서로 면을 대하고 있는데, 그 공간 안에 있는 존재는 자유롭게 서로 다른 정육면체의 공간 속을 이동할 수 있다. 문제는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특정한 암호를 정확히 풀어야 한다. 잘못 계산할 경우 이동한 공간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어떤 가공할 만한 위험이 엄습해온다. 말하자면, 큐브는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두려움과 죽음의 공간이다. 따라서, 죽음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큐브의 논리에 빨리 익숙하여, 큐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상심을 잃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클수록 큐브는 그 욕망의 크기에 걸맞는 위험을 안겨온다. 큐브는 살아 있다. 큐브에 갇혀 있는 존재의 숱한 욕망으로부터 큐브의 자생적 논리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하종오가 주목하고 있는 ‘마트’란 공간은, 단순히 상품의 판매가 이뤄지는 정태적 소비의 공간이 결코 아니다. ‘마트’는 큐브처럼 ‘마트’에 놓인 사람들의 숱한 욕망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어떤 내적 논리들이 끊임없이 구축되는, 활물성活物性을 지닌 공간이다. ‘마트’는 엄연히 살아 있는 공간이다. ‘마트’를 찾는 사람들의 욕망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기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여기, ‘마트’를 찾는 익명의 사람들이 있다.
1.
무빙워크에 올라선 젊은 여자가/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위로 위로 올라가는 무빙워크에 탄/남녀노소들을 서로 못 본 척한다
“상행 무빙워크는 위로 위로 올라가고 올라가고/하행 무빙워크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내려”오는, 상승과 하강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무빙워크에 몸을 실은 채 불특정 다수는 상품 진열대 앞으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마트에선 반드시 봐야 할 것이/사람들이 아니라 물건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상품들이지 상품들을 소비하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 아니다. ‘마트’를 찾은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존재는 물건들이다. 물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트’의 상품 판매대에 놓인 물건들은 ‘물신物神’의 위상으로 격상된다. 그러니 ‘물신’인 물건들이 있는 곳은 바로 신전神殿이나 다름이 없다.
41.
물건들이 판매대에서/남녀노소들을 내려다보니/물건들은 물신들이 된다/남자들은 아내들을 여자들은 남편들을/늙은이들은 청년들을 젊은이들은 어른들을/골라 사서 저마다 카트에 모시고 싶어 한다/남녀노소들이 더 오래 마트에 머물면서/그들을 잠재우고 밥 먹이며/함께 감사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날/마트는 신전이 되지만
‘마트=신전’이니,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는 구차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물신을 모시는 신전을 찾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물신의 지배를 기꺼이 받는, 아니 받아야만, 물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절대적 믿음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 절대적 믿음으로부터 행복의 감로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얼마나 절대적인가 하는 것은 다음의 시행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42.
여자는 마트에서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여자가 상품들을 만지작거리면/상품들이 여자를 더듬는다/둘이 아주 황홀한 동안/몸속으로 들어와서/가슴이 되는 상품도 있고/자궁이 되는 상품도 있고/난자가 되는 상품도 있어/여자는 접신의 상태가 된다/뱃속에 아이가 들어선다면/출산 준비물이 갖추어진/마트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서/가재도구와 먹을거리가 풍부한/마트에서 살게 하면 걱정거리 없을 테니/여자는 임신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임신 중에 입맛에 맞게 골라 먹은/사과를 얼굴이 닮는다고 해도/바다가재를 팔다리가 닮는다고 해도/아이에게 마트가 능력 있는 아버지가 되어 준다면/여자는 상품들과 언제든지 애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3.
여자가 상품들을 만지작거리는/그 옆을 덤덤하게 지나치는 남자는/자신만 마트와 결혼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마트는 얼마나 여자 같은가/풍족하게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날까지/날마다 찾아오겠다고 남자는 다짐한다/마트는 얼마나 여자 같은가/다 가져가서 비워놓으면/또 가져와서 채워주니/날마가 사가겠다고 남자는 다짐한다/누군가 마트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면/많은 마트를 낳을 것이고/나중엔 마트와 마트가 성혼하여/그 후손들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자/조급해진 남자는 마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무조건 상품들을 카트에 담는다/그러자 마트가 생기에 차서/남자를 품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역시 마트는 여자 같다고 남자가 여긴다
하종오는 ‘마트’에 대해 묵시록적 관점을 취한다. ‘마트’는 살아 있는 존재이되,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트=신전’으로, 온갖 물신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던가. 이곳에서 인간은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이곳에서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막연한 욕망을 품는다. 게다가 새 생명을 잉태하여 낳는 꿈을 꾼다. ‘마트’는 모든 물건들이 완벽히 구비되어 있는 지상낙원으로 간주된 채 비루한 삶의 속박에 시달리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신전과 같은 역할을 맡는다. ‘마트’에서는 인간의 모든 소망이 곧 이루어질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곳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여 낳고 싶다. 어디 이러한 욕망이 여자들뿐이겠는가. 남자들도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남성들이 소원하는 것, 즉 물적으로 풍족한 삶을 추구하는 행복을 ‘마트’가 충족시키고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사정이 이럴진대, ‘마트’는 뭇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마트’는 결코 환상을 심어주는 곳이 아니라 엄연히 소비자본주의의 경제 질서가 횡행하고 있는 곳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엇엔가 빙의(憑依)된 것인 양 자동화된 관성에 떠밀려 무빙워크에 몸을 실은 채 여전히 상품 판매대로 발길을 옮긴다.
46.
마트 안에서 계속하고픈 일들이 아주 많은/남녀노소들은 계산대를 지나고 나면/속절없이 꿈이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고/마트 밖에서 실컷 사지 못하는 나날이 두려워/일시에 카트를 되돌려 깊숙이 돌아가/상품들을 내려놓고 다시 구매하기 시작한다/계산대는 하염없이 남녀노소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마트’를 찾은 그들이 쉽게 ‘마트’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매우 간단하다. “마트 안에서 계속하고픈 일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물건을 구매하는 일은 물론,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그들은 가뭇없이 스러져 가는 ‘그때, 거기’의 어떤 기억들을 떠올린다. 이 또한 ‘마트=신전’이 지닌 위력이다.
하종오의 「마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마트’가 일상의 틈새에서 부정적인 공간으로만 부각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령, 하종오가 주목하고 있는 몇 사례를 소개해보자.
2.
중년 남자가 사과를 들고 만지작거린다/제각각 카트에 상품들을 채운 남녀노소들이/과일 판매대에 모여들어 사과를 들고 만지작거리니/다른 과일들이 갑자기 싱싱해진다/산자락에서 과수원을 해보는 게/평생 꿈이었던 가난한 아버지를/중년 남자는 떠올리며 가만 있는다/마당 귀퉁이 두엄더미 옆에나/앵두나무 감나무 살구나무를 심어놓던 아버지였다/식구들에게 제철에 양껏 따먹게 놔두고/논에서 피 뽑고 밭에서 풀 매던 아버지였다/(중략)/아버지는 지금 중년 사내의 아파트에서 노망 중이다
13.
생리대를 사가는 모녀를/몸이 말 잘 듣지 않는/겉늙은 여자가 부러워한다/십대 후반부터 공장 다녔고/이십대 중반에 결혼하였고/사십 전반부터 생리가 끊긴/겉늙은 여자에게 병명을 대며/의사는 오래 된 산업재해라고 진단했다/(중략)/봉급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공장들을 전전하면서도/끝내 사지 못했던 물건들보다/더 질 좋은 물건들을/이제 양껏 살 수 있게 되자/그만 사라져야 하는 몸이라니/아무 것도 사지 못하는/겉늙은 여자는 씁쓸하게 웃고 만다
33.
늙은 아주머니가 흰콩 검정콩을 산 뒤/이어서 한 봉지씩 산 곱게 늙은 여인은/보리쌀 한 봉지 더 찹쌀 한 봉지 더/판매대에서 가볍게 들어 카트에 가볍게 놓으며/장날 싸전거리 길가에서 가마니때기에 쏟아놓고/되로 팔고 말로 팔던 어머니를 떠올린다/곡식 장사는 가꾸는 사람과 먹는 사람을/똑같이 여기고 사서 팔아야 한다며/어머니가 돈을 받아 세었던가/(중략)/평생 곡식을 팔지 않고 사면서 잘 살았구나/평생 곡식을 가꾸지 않고 먹으면서 잘 살았구나
중년 남자는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예전 그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비록 지금은 치매를 보이지만, 예전에는 가족들에게 햇과일을 먹이기 위해 사과나무를 정성껏 길렀던 아버지가 아닌가. 하필, 아버지와 연루된 아름다운 시절이 ‘마트’의 사과를 통해 반추되는 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마트’에서 생리대를 사가는 모녀의 모습을 보며, 불임의 고통을 안게 된 자신의 박복한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데 대한 회한에 젖기도 한다. 그리고 ‘마트’에서 곡물을 사고 가는 늙은 여인은 곡식 장사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곡식 장사는 가꾸는 사람과 먹는 사람을/똑같이 여기고 사서 팔아야 한다”는 어머니 특유의 삶의 철학을 곱씹는다. 이 모든 게 ‘마트’와 연루된 기억들이다. 말하자면, ‘마트’는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 공간만이 아니라 어떤 물건들로부터 산포된 기억들을 슬그머니 끄집어내는 기억의 저장소와 같은 역할도 맡는다. 정말, ‘마트=신전’의 권능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제 ‘마트’의 권능 없이 우리는 삶에서 소중한 ‘그때, 거기’의 기억들마저 소멸해버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재래식 시장이 맡았던 예의 역할, 즉 기억의 저장소와 같은 역할을 현대식 시장-마트가 전적으로 맡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마트’의 이 같은 권능은 점차 커질 것이다.
3.
그런데, 하종오의 이번 장시 「마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마트’가 현시하는 섬뜩한 일상이 특유의 운율에 의해 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트’의 내적 논리가 이미 일상의 풍경 속으로 자연스레 구축되고 있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마트’로 대별되는 소비자본주의 욕망이 더 이상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의 자연스러운 삶과 친연성을 갖는 것이라면, 그러한 세계의 양상에 밀착한 하종오의 장시에 관류하는 운율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남녀노소 불특정 다수의 일상이 ‘마트’와 유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가장 평범하면서도 널리 회자(膾炙)될 운율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민요의 율격을 창발적으로 섭취한 것으로, 3음보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민요의 3음보 율격은 기층 민중의 정감과 잘 어울리는바, 3음보 율격을 통해 민중의 일상(노동, 가사)은 자연스레 민요로 불리운다.
하종오의 장시 「마트」를 곱씹을 때마다 민요의 안정된 3음보 율격이 입가에서 쉽게 떠나질 않는다. 예컨대, ‘마트’의 일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임을 징후적으로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부분은, 3음보 율격이 지배적임으로 인해 한층 우리의 일상과 밀착돼 있다는 것을 들려준다. 아래의 시를 편의상 3음보 율격으로 구분해본다.
48.
장보러 간∨남녀노소들이∨돌아오지 않자/한 도시가∨마트 안으로∨들어와서/개들이∨어슬렁거리는∨골목과/낡은∨아파트를∨뭉갠 뒤/반듯하게∨택지를∨정리하고/새롭게 집 짓고∨넓게∨도로를 닦는다/판매대를∨채우고 있던∨상품들이/오래 참았던∨숨을∨내쉬며/남녀노소들로∨일어나∨술렁거리자/마트 안으로∨한 국가가∨들어와서/판매하고∨구매하는∨방법과/옷 입고 밥 먹고∨잠자는∨장소와/외출하고 귀가하는∨시각을∨정한 뒤/생산자와 관리자와∨소비자를∨조직하고/공장들을 신축하고∨회사들을∨신설하여/다른 도시를∨더 만들어서∨놓는다/남녀노소들이∨국민이∨되어/매대와 판매대∨사이마다∨거주하니/마침내∨마트가 권력이 되어∨마트 밖으로 나가/온 강에서∨물도∨퍼와/온 들에서∨햇빛도∨가져와/온 산에서∨바람도∨물어와/그들에게∨적당하게∨내어준다
다소 도식적으로 각 행을 3음보 단위로 나눈 감이 없지 않으나, 각 행은 3음보의 율격 속에서 자연스레 시행이 배치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3음보의 율격이 갖는 미적 특질은 소비자본주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내밀히 일상의 내적 논리로 작동하고 있는 ‘마트’의 삶이,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일상의 풍경 속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트’의 내적 논리를 자연스레 포착하면서, 그 내적 논리에 나포되지 않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미적 거리를 확보하도록 하는 데 3음보의 율격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여, ‘마트’의 내적 논리가 모종의 문명 비판적 성격을 갖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에 의한 게 아니라 뭇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성찰되어야 할 시적 진실이라는 것을, 하종오는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마트」란 장시에서 특별한 시적 수사학을 애써 구사하지 않는다. 그는 일상 깊숙이 들어온 ‘마트’란 공간을 담담히 관찰하며, 그 공간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람들의 온갖 욕망의 현상을 투시해낼 뿐이다. 그것을 그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율격을 통해 들려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마트’의 내적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길들여져 있는 묵시록적 현실을 보여준다. ‘마트’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현실화되는 공간이라는 것을.
정통 민요의 3음보 율격이 기층 민중이 고단한 삶을 응시하고, 그것에 나포되지 않는 삶의 저력을 생성해내고 있다면, 하종오의 장시 「마트」는 소비자본주의의 욕망 속에서 부유하는 우리들 삶을 투시하고, 그것의 내적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정직하게 노래한다. 하여, 우리는 부정한 현실에 대한 시적 대응은 부정성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데 있으며, 그 부정을 넘어설 수 있는 시적 진실의 힘이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을, 하종오의 「마트」로부터 숙고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종오는 「마트」의 묵시록적 현실을 통해 도리어 이 같은 삶을 내파內破하는 시적 대응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고명철∙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저서로는 순간, 시마에 들리다, 칼날 위에 서다, 논쟁, 비평의 응전, 비평의 잉걸불, ‘쓰다’의 정치학 등 다수. 고석규비평문학상 및 성균문학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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