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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서평/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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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연,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화남)
■황정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
‘얼음 땡’이라는 놀이가 있다. 술래가 ‘얼음’이라고 외치면 꼼짝 않고 서고, ‘땡’이라 외치면 내닫던 그런 놀이. 살면서 그런 순간이 있다. 무언가에 포박되어 옴쭉달싹을 못하게 되는 순간. 그것이 객관적이고 폭압적인 상황이 되었든 혹은 무기력함이 되었든 삶이 ‘얼음’이라고 외치면, 질주하던 우리의 삶은 잠시 정지되고 마법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놀이는 일종의 삶의 예행 연습이었던 셈이다. 유시연, 황정은 두 작가의 첫 창작집은 상처와 고통에 포박되어 결빙되어버릴 위기에 놓여있는 인물들이 어떻게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는지, 혹은 어떻게 절멸되어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두 작가 모두 인간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절망과 고통에 민감하지만, 이를 빗겨나가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상처의 사회학’이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이 지적하고 있듯, 유시연의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에는 상처입은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창작집의 인물들이 지닌 상처란 ‘사랑의 실패’ ‘배신’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밖에도 사업실패, 이주 노동, 불임 등 다양한 생채기에 주목함으로써 일상을 지속할 수 없는 ‘얼음인간’들의 생태학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정상적인 일상의 흐름에서 결빙된 얼음인간들은 어떻게 이 빙하기를 건너는가.
우선 표제작인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이하 「알래스카」로 표기)를 살펴보자. 「알래스카」에는 두 명의 고독한 남녀가 등장한다. 얼음 조각가인 남자 ‘그’와 알래스카의 토착민인 ‘아네’. 이 둘은 때로 함께 술을 마시며 낚시도 하고 몸을 섞기도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이 두 남녀 사이에 사랑의 리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이 둘 모두 사랑에 실패한 후, 일체의 욕망과 의지가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둘은 실연의 상처와 지독한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는, ‘혼자들’인 것이다. ‘그’가 알래스카에 온 것은 얼음 조각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한국에서 ‘미희’라는 회사 동료를 사랑했으나 그녀는 그 말고도 다른 남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냉동창고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그녀를 잊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위장 결혼을 하고 다시 알래스카로 건너간다. 그가 미국에서 캐나다로, 또다시 지구의 극점으로 달려간 것은 삶에 대한 열망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다. 그의 북극행은 막다른 곳으로 몰린 것이며, 보다 나은 삶이 아니라 “죽을 작정으로”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을 찾은 것이다. 한 여자의 배신과 죽음으로 인해 한순간 결빙된 그는 알래스카에서 황폐해지고 차가워진 자신의 영혼보다 더 차갑고 막막한 빙원 위에 선다. ‘겨울의 심장부, 영하 50도의 혹한’ 속으로 자진하려 했던 그,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스스로 가슴 안에 집어 넣은 단단하게 결빙된 덩어리를 녹여줄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다. 결빙된 삶을 꽁꽁 얼려 산산조각 내고자 했던 그는, 그 끔찍한 통토에서 움을 틔우는 싹처럼 자라나는 뜻밖의 ‘열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열치열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방식은 아네에게도 역설적인 생존전략으로 작용한다. 아네 또한 과거의 사랑의 상처로 인해 결빙된 삶을 살고 있는 여자이다. 그녀는 하버드대를 휴학하고 고향인 알래스카로 돌아와서 외지인들의 사냥 감시 등을 하며 살아간다. 마을의 변화라고 해봤자 간혹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순회가 전부인, 이 삭막하고 권태로운 설원마을에조차 견디지 못하고 아네는 택시로 서너 시간이나 들어가는 오지의 오두막에서 혼자 살아간다. 이 철저한 고립은 ‘그’의 방식처럼 고통과 고독을 이기기 위해 더 지독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네가 얼음 벌판에 석고처럼 서 있었고 그가 다가갔을 때 이미 몸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네를 들쳐업고 급하게 오두막으로 달렸다. 침대에 눕힌 후 마사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심각한 상태였다. 거의 동사 직전에 이른 아네의 몸은 쇳덩이 같은 냉기가 돌았다.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화남, 2008, 50쪽)
죽음을 무릅쓰고 혹한과 강풍의 빙원 위에 자신을 내팽개치는 것, 이를 나무라는 ‘그’에게 아네는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나만의 방식”이라 답한다. ‘그’와 ‘아네’ 이 둘은 고독과 상처를 견디기 위해 더한 극한의 통점들을 자신에게 가하는, 일종의 자학의 방식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파멸로 흐르지 않는 것은, 앞서 ‘그’가 결빙된 자신의 가슴에서 발견한 뜻밖의 온기, ‘생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극한의 부정 끝에 얻은 이 결연한 긍정, 이는 지구 끝으로 자신을 몰아내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삶을 회생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알래스카」에서 ‘알래스카’라는 이국이 낭만적 공간이 아니라 절멸의 땅이듯, 유시연의 작품에 등장하는 비일상적인 공간, 가령 ‘하늘’이나 ‘숲’ ‘호수’ ‘동굴’ ‘농장’ ‘오지 마을’ ‘탄광’ 등은 대부분 일체의 생을 부정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회생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인물들은 대부분 세속의 도시에서 상처입고 일체의 관계맺음을 거부한 채 뚜벅뚜벅 이 고립무원의 공간으로 걸어간다. 「숲의 축제」에서 주인공 ‘그’는 고층 아파트에 밀려난 무허가 산동네에서 개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야산의 깊고 어두운 숲에서 평온함과 안락함을 누리는데, 그가 이 황폐한 곳을 찾는 것은 「알래스카」의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실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수연’이라는 여자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수연’의 손길이 생각날 때마다 숲으로 간다. 숲에서 그는 자신의 결빙시켰던 ‘절망’의 순간들을 떨쳐버리려고 하고 인간과 세속에 대한 환멸감을 키워간다. 그가 숲에서 마주친 여자, ‘그녀’에게도 숲은 도피의 공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둘은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에로스를 통해 서로를 위무하는데, 여기에서 숲이 그들의 황폐한 내면을 상징하고 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의 에로티시즘은 회생의 기미를 알리는 일종의 ‘성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 동굴」에서 주인공 장이 그의 플로라 김하늘을 만나고, 그녀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소인 ‘동굴’, 한때 잘나가던 펀드매니저였으나 실패하고 장기까지 떼인 김태영이 또 다른 상처입은 영혼을 만나는 공간인 ‘호수’(「물결이 친다」), 불임과 이혼으로 괴로워하는 여주인공이 일곱 번이나 결혼한 이모 또한 결국 한 생을 혼자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골 마을 ‘하월리’(「달의 강」),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그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경비행기를 몰고 가로지르는 ‘하늘’(「도시 위를 날다」), 시한부 생을 선고 받고 자신의 삶을 곤경에 몰아넣은 장본인을 찾아 떠난 ‘사북’(「봄이 지나가다」), 이들 장소는 등장인물들에게 단순한 여행지나 도피처가 아니라 회생의 ‘의지’를 긷는 깨달음의 장소이자 치유의 공간이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상처 입은 유시연의 인물들이 박제된 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장소에서 자신의 삶을 정지시킨 바로 그 상처를 되새김질했기 때문이다. 되새김질은, 상처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그 고통을 반복하는 것이다. ‘얼음’이라는 삶의 부동명령이 또한 그들을 회생시키는 마법의 주문이기도 했던 아이러니. 그러나 그 마법의 주문은 물론 ‘얼음’을 적대적인 ‘생’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능동적으로 외쳤을 때 가능하다. 인물들은 ‘소금 기둥’이 될 것을 각오하고 과거를 반추한다. 트라우마의 순간을 반복함으로써 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전언대로 생을 멈춘 바로 그 냉혹한 순간들로 자신을 다시 밀어넣음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서서히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 것이다.
유시연 인물들의 치유과정은 과거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일상과 절연된 그곳에서 무한 자유가 아닌, ‘구속’을 발견하면서 이뤄진다. 「도시 위를 날다」에서 비행 교실의 사무실 보조로 일하고 있는 ‘나’는 5천피트의 상공에서 자유를 만끽하지만, 그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에게도 ‘무한한 자유’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새 떼가 이동하고 있다. 새들도 그들만의 소통이 있고 행로가 정해져 있다. 자유롭게 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들은 자유가 없다. 일정한 형태와 장소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이다.
―「도시 위를 날다」, 229쪽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끔찍이 혐오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 땅으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한교관’에게 ‘사막’이 그렇듯, 주인공의 비상과 착륙은 ‘얼음, 땡’ 놀이처럼 그의 불행한 나날들을 매일 매일 풀고 조이는 행위, 영구히 결빙되지 않도록 ‘갇힌 유빙’들을 내버리는 제의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해빙적 제의는 새들에게서 발견한 ‘구속’들처럼 일상과 세속, 관계맺음의 번잡함과 비루함의 ‘재긍정’과 ‘투신’을 통해 가능케 한다. 작가 유시연의 깊은 통찰이 전하고 있듯, “봄은 햇빛에 질척거리는 진흙땅으로부터”(36) 오는 것이다.
유시연의 인물들이 결빙을 견디기 위해 극한으로 자신을 내몰고 더 차가운 얼음을 가슴에 품는다면, 황정은의 인물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을 택한다. 가령, 무한 증식의 세계의 폭력성 앞에서 ‘모자’로 변신하는 아버지(「모자」)나 오뚝이로 변신하는 은행원 ‘기조’의 경우처럼, 황정은의 인물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그 힘들보다 더 빠르게 ‘사물’화 되어버린다. 이러한 공통된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유시연과 황정은의 소설은 공히 비극성에 바탕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를 형상화하는 작가적 태도와 그 방식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선, 유시연의 인물들은 대개 일상의 바깥으로 질주하여 죽음과 삶의 경계지점으로 자신을 몰아감으로써, 역설적으로 회생된다. 이들 인물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간 그곳에서 다시 생의 의지를 길어온 것은 죽음에 대한 ‘열망’, 즉 삶에 대한 ‘열정’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치열한 그 결기와 에너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유시연 작품은 일종의 ‘패전 용사들의 생환기’라 할 수 있는 처절함과 간절함 위에 서 있다. 반면, 황정은의 작품에는 이러한 처절함이나 열정 같은 것이 은폐되어 있다. 황정은의 인물들은 유시연의 경우처럼 실연이나 실업, 불임과 같이 그들을 ‘결빙’시키는 특정한 이유를 지니고 있지 않다.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이라고 지칭하는 법이 없는 황정은의 인물들은 결정적인 사건과 순간에 포박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조금씩 ‘결빙’되어 간다. 뜻밖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 변신은 다른 일상들과 섞이어 자연스럽게 그들 삶에 스며들고 그리하여 그들은 유시연의 인물들처럼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법 없이, 일상의 장소에서 ‘조금씩, 조용히’ 사물화되어 간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이러한 스케치는 어떠한 ‘치열성’과 ‘결기’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 대별되지만, 또 한편 비극과 희극성으로,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
이사를 하면 첫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장도리를 들고 다니며 벽에 박힌 못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못이 있으면 아버지가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거기 걸리고, 틀림없이 모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일단 모자가 되면 언제 아버지로 돌아올 지 알 수 없었다.
못이 있을 때만 모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남이 보는 곳에서도 곧잘 모자가 되곤 해서, 소문이 번지는 바람에 그들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모자」(문학동네, 2008), 39쪽
모자로 변신하는 아버지를 그리고 있는 위의 작품에서, 이 기괴한 환상을 얘기하는 작가의 필체는 담담하다 못해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이 신예작가의 독특한 환상풍을 이 책의 해설자(서영채)는 “명랑한 환상의 비애”, 혹은 “마조히즘적 유머”, “담담한 수채화풍”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그는 이 환상 세계를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와 비교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것은 황정은의 서사적 감수성이 지니고 있는 저 실없는 명랑성 때문인데, 이것은 카프카나 플라톤의 경우처럼 일종의 마조히즘적인 유머로 읽힌다. 그것은 곧,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는 현실의 질서 앞에서 자진하여 그 현실적 질서의 일부가 되고 짐짓 그 질서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그것의 불합리함을 비웃는 것, 즉 자진하여 합법적으로 우스꽝스러워짐으로써 오히려 합법성을 조롱하고자 하는 에너지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강의 나무되기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면, 황정은의 오뚝이 되기는 세상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서영채, 「명랑한 환상의 비애」,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해설, 277쪽
위 인용문은, 황정은의 환상이 유시연과 동일한, 세계의 ‘비참함’ ‘폭력성’ ‘적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직접성’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자 되기, 오뚝이 되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 「모자」에서 아버지의 모자되기는 아무데서나 언제나 발생하는 ‘변신술’이 아니다. 세 남매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최초의 모자변신은 각각 다른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은 상태”에서 형편없이 초라한 차림으로 전봇대 밑에서 모자가 되거나, 고장난 라디오를 붙안고 우는 둘째의 뺨을 때리고는 땀을 흘리다가 모자로 변신하거나, 학부모 참관일에 교실 사물함 위에서 모자로 바뀌거나 하는 것이다. 즉, 모자되기란 주체의 자기 소외와 동일한 것으로 존재의 추락과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뚝이 되기도 이와 흡사하다. 은행원인 기조는 어느 날 세상이 커져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줄어든 것. 결국 그녀는 다니던 은행도 그만두고 점차 폐물화되어 간다. 작가는 이 오뚝이 되기를 러시아 인형 ‘마뜨료쉬까’에 비유하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환기시킴으로써 유머로 둔갑시키지만, 동화같은 환상 내부에는 사실 다음과 같은 현실적 비애와 환멸감이 내장되어 있다.
1) 아무리 물장구를 크게 쳐서 파문을 만들어도, 그것은 내가 열심히 팔과 다리를 저을 때뿐이잖아. 뭔가, 물살을 엄청 저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언제까지고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팔과 다리를 멈춰버리면 곧장 가라앉기 시작해서, 일단 가라앉은 뒤로는 파문도 없이 그저 엄청난 양의 물만 있을 뿐이라면.
―「오뚝이와 지빠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197쪽
2) 보통, 보통, 보통. 저기, 무도씨, 보통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보통이라는 거야. 나무늘보나 달팽이 있잖아, 느리잖아, 하지만 걔네들의 입장에선 이 세계가 얼마나 빠른가, 생각하면 아득해지지 않아?
―「오뚝이와 지빠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205쪽
인용문 1)은 오뚝이가 되어가는 기조의 꿈 내용이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환상과 현실이 뒤엉키듯, 이 꿈은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밑그림으로 제출되고 있다. 즉,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뛰고 달려도 결국 제자리 걸음이라는 것, 그것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곧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는 끔찍한 현실 말이다. 기조는 합리와 효율과 수치로만 이루어진 ‘은행’ 직원으로, 이 거대한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부속품처럼 낡아간다. 개별자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존재 의미를 폐기하고 오직 경쟁사회에서 업무 수행능력에 의해서만 ‘활용’되는 기조, 그를 통해 작가는 그것이 오뚝이이든 모자이든 결국 ‘전인성’을 상실하고 기능적으로 기계화되는 현대인들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제출하고 있다. 또한 오뚝이 되기, 즉 ‘줄어들고 느려진다’는 설정은 위의 두 번째 인용문에서처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 ‘객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폭로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달팽이, 나무 늘보 입장’에서 세상을 사유하는 것은, 타자의 입장-장애인, 이주 노동자, 노인 등-에서 사유해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객관’ ‘보통 사람들’은 일상의 제도를 그들에 맞게 규격화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데리다와 아감벤이 비판하고 있는 ‘법’과 ‘인권’, ‘시민’의 의미에 함의된 폭력성 비판까지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정은의 인물들이 그 비참함에서 환상을 통해 길어올린 명랑성은 무엇인가? 서영채를 황정은식의 이 수채화풍의 유머를 “세계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를 상실한” 체념과 자진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환상성이 “세계의 폭력성으로부터 서사의 세계를 방어해내는, 얇지만 강렬한 보호막으로 작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이 유머가 갖는 또 다른 측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표제작인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의 줄거리는, 나, 파씨, 파씨의 동생, 이 셋이 동물원에 가는 이야기이다. 늦은 오후, 동물원을 방문한 이들은 코끼리 열차를 타고, 김밥을 먹고, 졸고, 약간의 대화를 나누고, 그러나 어찌되었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낸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독자들은 등장인물이 셋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즉 파씨는 ‘나’에 의해 불려진 환상의 존재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나’와 동일하면서 또 다르게 존재하는 ‘파씨’는 어찌하여 불려졌는가. 그것은 우선 「모기씨」의 불구자 소년이나 「문」에서처럼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나 외로움이 불러들인 환상일 수 있다. 혼자 사는 ‘나’는 퇴근 후 파씨와 카드게임을 하거나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거나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파씨’는 평온한 ‘나’로부터 과거의 상처입은 나, 혹은 원한의 파토스에 사로잡힌 ‘나’를 떼어놓기 위해 호명된 측면이 더 강하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도입부에는 실제로는 자신의 분신인 ‘파씨’로부터 파씨와 파씨 동생의 불운한 유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 파씨 형제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6년간의 끔찍한 성장기를 보낸다. 외삼촌의 잔혹함에 대한 기억은 “팔꿈치와 무릎이 닿도록 엎드려서 바닥에 손등을 대고 손바닥 위에 이마를 얹고 허벅지를 꽉 붙인 채 왼쪽 발바닥 위에 오른쪽 발등을 얹은 다음 관절을 딱딱하게 조인다”라고 서술되는, ‘하나의 자세’로 표현된다. 6년간의 끔찍한 시절을 보내고 이모에 의해 구출된 ‘나’즉 파씨는 외삼촌에게 되돌려줄 잔혹한 복수극을 상상한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외삼촌이 죽어버리자, 파씨는 끊임없이 되새기고 겨누었던 ‘다트’가 땅에 떨어지는 허망함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삼촌은 사라졌지만 표적 잃은 다트는, “사라지지 않고, 에너지를 가득 담은 채, 바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트에서 뿜어져나오는 저 여전한 적개심, 원한의 에너지를 어찌할 것인가? 거기에 사로잡힌다면, 얼음인간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을 파괴할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 그렇다고 현실에 포박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나를 둘로 쪼갠다. 그리하여 박제된 생에 결박된 ‘나’와, 그를 바라보는 ‘나’가 탄생한다.
외삼촌과 같은 인간이 되어서 어두운 얼굴로 어두운 짓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정말 끔찍하게 싫다, 라고. (중략) 내가 하력만 하면 뭘 할 수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했어. 다트가 있고, 그걸 지켜보는 내가 있어. 잔혹한 방법으로 어딘가에 보복하고 싶어하는 내가 있고, 그것을 하지 않는 내가 있어. 외삼촌과 나는 바로 여기서 구별되는 거야. 나는 다트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게 바로 그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이것은 상당히 안전하고 유리한 일이야. 있잖아. 자기 속에 그런 게 어디 있는지 모르거나 그런 걸 충분히 보려고 하지 않는 인간들은 자기가 받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남에게 되풀이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괴롭혔고 아버지가 자기를 괴롭혔고 이제 자기가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식의, 어쩔 수가 없다는 식의 지저분한 연쇄를 되풀이하는 거야.
―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89~90쪽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나’의 ‘분열’은 원한과 고통을 누군가에게 전이시키지 않기 위해 의도된 자발적 ‘격리’이다. 이러한 분열에 의해 ‘나’는 상처입고 적개심에 휩싸인 ‘나’를 감금시키고, 때로 위무하기도 한다. 결국, 황정은의 환상과 비애섞인 유머는 비참한 현실의 직접성을 차단하고 ‘주체’를 보호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폭력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비틀기’함으로써 그 원한의 에너지의 침투를 막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정은의 유머는 세계의 폭력성에 의해 희생된 자의 체념과 비관, 현실에 대한 승인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무한 경쟁 사회의 정글의 법칙을 거부하고, 자신을 가해한 자들까지 용서하고 품으려는 고귀함이기도 하다는 것.
암울한 ‘빙하기’를 건너 인간의 초원을 발견하기 위해, 이제 막 출사표를 던진 이 두 명의 진지한 신예작가들의 문학적 모험과 행로에 부디 더 멋지고 치열한 전투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정은경∙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웃음과 망각의 수사학-성석제론」으로 평론 등단. 저서로『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악의 표상』,『디아스포라 문학』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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