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1호 서평/전해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00회 작성일 09-01-19 19:38

본문

|서평|


■문인수, <배꼽>(창작과비평 2008.4.)

■고춘옥, <호랑이 발톱에 관한 제언>(리토피아 2008.6.)


시의 운율과 의미의 공존
전해수|문학평론가

문인수의 새 시집 <배꼽>과 고춘옥의 첫 시집 <호랑이 발톱에 관한 제언>은 시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의미심장한 전언이 담겨 있다. 문인수의 시는 운율보다는 의미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지만 시어의 함축과 긴장미를 잘 살리면서 범인凡人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어루만지고 있고, 고춘옥의 시는 자연물의 발견을 시적 리듬 즉 시의 운율에 기대어 묘파하되 풍부한 내적 깊이를 발산하고 있다. 이들의 시는 일견 시의 내용에 치중하거나 혹은 시의 형식에 부표를 던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시의 운율과 의미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시세계를 잘 보여준다. 최근 현대시의 감각적 사유와 시 운율의 약화를 떠올려 볼 때 두 시집이 지닌 시의 향기는 단연 돋보인다 할 수 있겠다. 시단 20년의 경력을 지닌 문인수의 시적 변화와, 첫 시집으로 주목을 요하는 고춘옥의 시집을 나란히 읽는 즐거움이 더욱 큰 이유다.


사람, 옷 속의 ‘몸’

문인수의 새 시집 <배꼽>은 한마디로 ‘사람’을 화두로 삼은 시편들이다. 시인 스스로 후기에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라 언명하고 있지만 시집의 전편全篇에 흐르는 인간 군상의 아스라한 슬픔과 “어둡고 습한 바닥” 인생은 “사람의 반은 그늘”이라는 시인의 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옷’ 속에 가려진 ‘알몸’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인데, ‘옷’이 시의 형식이라면 ‘몸’은 ‘시’의 내용에 비견될 만하다. 문인수의 이번 시들은 ‘몸’을 가꾸는 ‘옷’의 치장보다는 ‘몸’의 울림이 앞서지만, ‘옷’으로 가려진 ‘몸’의 사람됨이 어떻게 ‘옷’(시의 형식)과 ‘몸’(시의 내용)의 이중적 함의를 포괄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에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꼭지」 부분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온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 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금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만금이 절창이다」 전문


문인수의 시편들은 진솔한 삶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여타 시들과는 다른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다. 긴장된 시어와 이미지, 적절하게 구성된 행의 구분, 결구에 사용되는 함축적 시어가 그렇다. 물론 <배꼽>의 주요主要한 ‘사람’의 풍경은 ‘몸’의 풍경이다. 그의 시는 여자 즉 할머니가 된 여인네들, 남자 즉 도외시되고 피폐해진 사내들을 아우르고 있다.

우선 “여인네들”의 삶은 “누더기누더기” “흑백무성영화”처럼 “소리없”이 “쿵” “최후”를 맞이하는 비속함 속에 놓여 있는데, 할머니가 된 여인네의 “죽는 거시 났것어야”의 한마디는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을 살아온 할머니의 거친 삶이 가져 온 최후 깨달음의 언술과 다름없다. 이 평범하나 묵직한 할머니의 한 마디가 마른 “개펄”의 “침묵” 속에 “질펀하게 퍼진” 만금의 절창으로 들린다는 것이 주목된다. 늙는다는 것, 특히 여인네로 살다가 늙는다는 것은 노랗게 익어 “꼭지” 떨어진, 혹은 막 떨어지기 직전의 꼭지와 다를 것이 없는 비루함이다. 독거노인 할머니의 이름이 “꼭지”이건 아니건, “여생”을 “참 애터지게” 살아온 삶이 “꼭지”와 다를 바 없는 처량하고 아스라한 인생 그 자체란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외에도 여인네의 삶의 풍경은 할머니뿐만 아니라(「얼룩말 가죽」), 어머니(「저수지 풍경」, 「조묵단전」), 아주머니(「파냄새」), 큰누님(「뻐꾸기 소리」), 아내(「굿모닝」), 고모(「고모역의 낮달」)등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여성을 포괄한다.


어머니 모시고 아파트 단지 내 미장원엘 갔다.

연세 아흔일곱에 첫 입장, 근 백년 만에 드디어 개화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 나는 비녀를 받아 챙겼다.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머리채, 머리채 중에도 맨 꽁지, 세기말도 한 뼘 비닐봉지에 담았다. 서른 마지기 농사 뒤에, 대가족 뒤에, 일평생 동동거린 그 날랜 역할 다 어디 갔나. 아버지 뒤에 숨었나니, 채 한 줄도 안 되기 위해 야무지게 쪽진 머리, 노구엔 이젠 성가시겠다 싶어 자른다. 자식한테 맡긴 오늘자 가리마, 하얀 길 꼬리 한 가닥 짤막하게 사라진다.

어머니의 미용은 끝났다.

할머니, 두상이 참 예쁘세요. 파마가 아주 기가 막히게 나왔어요. 미용사가 여러번 공치사를 했으나 어머니, 도통 말없다. 거울 속의 웬 바글바글한 노파와 잠시 낯설게 눈 마주치다가 설마, 뒷머리에 손 가져간다. 처마 아래 걸어놓은 수수다발 같을까, 깜박 놓친 듯 자꾸 다독다독 더듬는다. 없다, 여기 있다. 나는 엄지 검지 중지 비닐봉지를 만진다. 말랑한 머릿결 속,

단한 이 비녀! 아, ( ) 탈골이다.

―「조묵단전」 전문


어머니의 “비녀 뼈”에 대한 기억은, 아흔 일곱 해 어머니의 인생이면서 한 여성의 숨 가쁜 삶의 역사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 탈골. 괄호로 배제된 삶이 비로소 괄호를 벗기는 탈골의 순간이 비녀 뼈를 세상에 내어놓게 되는 ‘미용’의 찰나이다.

어머니는 “단단한 비녀”로 일축될만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일평생 “아버지 뒤에 숨어” “서른 마지기 농사”와 “대가족”에 “동동거린” “날랜 역할”의 “비녀 뼈”! 이젠 “자식한테 맡”겨져 머리를 “싹둑싹둑 자른”다. “세기말도 한 뼘” 자른다. “노구”를 벗긴 “미장원”에서의 “미용”은 “처마 아래 걸어놓은 수수다발”처럼, “깜박 놓친 듯” 사라진 “탈골”처럼, “거울 속 웬 바글바글한 노파”의 모습과 교체되었다.

사내로서의 아들은 “비녀를 받아 챙기고” 어머니의 잘려나간 “머리채를” 비닐봉지에 담아 사라진 괄호( ) 안의 탈골과 비녀 뼈의 형체만을 만지작거린다. 「조묵단전」에 나타난 자식으로서의 사내의 모습은 삶에 능동적이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배꼽」 부분


“웅크린 한 채의 폐가”와 다르지 않은 “사내”의 “절망”, 그 중심에는 이를 지탱해주는 몸으로서의 “배꼽”이 있다. 사실 “배꼽”은 어머니인 여성과 사내인 남성을 이어주는 증거물인 몸의 실체인데, “나뒹구는 소주병”의 모습으로 “불의 화염”을 지나가는 듯 사내의 오랜 절망의 구원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깊은 절망이지만 한 채의 폐가가 된 사내가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길, 그것이 바로 배꼽이며 그 배꼽은 “비린” 물 내음을 갖고 있다.


나는 오늘도 ‘아마존’엘 간다.

올해로 만 십오 년 째 매달 한 번,

박달희 씨가 일자리를 옮기는 목욕탕마다 따라다니며

이발하고 샤워한다.

그는 멀지 않아 은퇴할 작정으로

고향 쪽에다 이미 귀농준비를 해두었다고 한다.

나는 또 슬쩍 따라붙고 싶다. 하지만

나와는 무관한 곳,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이하

그의 배꼽,

말단 본적지 지명은 자꾸 까먹는다.

-중략-

내게도 물비린내에 젖는 지느러미가 있구나.

박달희 씨가 새로 가위를 잡은 목욕탕에서

아마존 긴 강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존」 부분


자신이 나고 자란 곳. “배꼽”은 “말단 본적지”와도 같다. 만 십오 년 째 매달 “박달희 씨가 일자리를 옮기는 목욕탕을 따라다니며” 몸을 벗기는 “나는” 이 “말단 본적지 지명”을 “자꾸 까먹는다”. 그러나 “물비린내에 젖는 지느러미”가 있다는 것, 몸의 숨겨진 곳 배꼽으로부터 절망은 다시 희망이 되고, 목욕탕에 갇힌 삶의 비애 속에서, “아마존”의 긴 강을 “거슬러 올라”가리라는 박달희 씨의 “귀농”의 꿈을 “나도 슬쩍 따라 붙고 싶”어진다.

요컨대 사람의 풍경, 내면의 ‘몸’의 풍경이 시집 <배꼽>의 큰 줄기를 이룬다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만물의 근원이 사람이고, 사람의 사는 모습이 절경을 이루는 삶의 비속함이며, 거기에 그 몸을 덮고 있는 긴장된 시어의 울림을 덧씌워 ‘시’라는 장르의 ‘옷’이 아름답게 ‘몸’을 감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리듬, ‘몸’ 밖의 ‘옷’

반면에 고춘옥의 시는 시의 리듬에 충실한, ‘몸’ 밖의 ‘옷’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에 대한 진지하고도 성실한 방법론을 스스로 마련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서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서문에 시 리듬의 중요성을 일갈하고 있으며, 스스로 시의 원천을 ‘리듬’에 두고 있다. 고춘옥의 시는 크게 시조적인 것과 포스트(post) 시조적인 것, 즉, 시조적인 것에 실험적인 요소를 가미하되 리듬의 맥락을 내재한 시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나뉜다.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제대로 된 시 쓰기”의 접근방법이 ‘몸’의 요소만큼이나 ‘옷’의 기능도 중요함을 견지하고 있다. 그의 옷 속에 감싸인 몸의 윤곽은 옷의 실루엣을 통해 긴밀하고 호소력 있는 시의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내 나이 서러운 날에

어머니는 말없이

말여울을 내려놓고 빈 들판을 쓸었다

하얗게

옛길 건너와

억새꽃이 피었다

―「가을섬」 전문


단풍잎 지는 사이에 한 사람이 떠났다

단풍잎 지는 사이에 또, 한 사람이 떠났다

내, 잠시 흔들리다가 옛날의 내가 다 떠나버렸다

―「기록․4」 전문


고춘옥의 시는 대부분 간결하고 함축적인 시어로 운을 맞추거나 음보音譜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행과 행을 긴밀하게 연속시킨다. 즉 시상을 농밀하게 제어하면서도 입속말로 읊조리기 쉬운 리듬을 지닌다. 대체로 시적 대상은 자연의 상관물들이다. 그러나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에게 자연은 “피어”도 “서러운” 것이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다. 시 「가을 섬」은 “억새꽃”이 거듭 피고 지는 “빈 들판”에서, “말여울 내려놓고” 말없이 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 나이 서러운 날”과 오버랩 되어 있다. ‘어머니’가 ‘나’이고 중년의 ‘내’가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으며, 하얗게 핀 “억새꽃”만이 “말여울을 내려놓고” “옛길을 건너”고 있는 것. 제주의 “가을 섬”은 “단풍잎 지는 사이” “떠나”는 이별의 “기록”인 셈이다. 마침내 시인에게 ‘섬’으로서의 고향은 “빈 들판”이거나 “옛날의 내가 다 떠나버린” “옛길”로 남겨졌다.


이브가 사과 한 알을 기어이 따서 먹다

한 마리 사과벌레가 기차게 뺏어 먹다

한 차례 똥막대기가 뛰쳐나와 일 본다

찌루바 찌루바바 한 바탕 춤춰볼까


꽁지에 불을 붙여 달 착륙에 성공한 엉덩이는 빨개지도록 씰룩쌜룩 - 내 마음을 놔 주세요 그대여, 당신의 마법에 걸려 무아지경에 빠져 있어요 - 허리를 흔들어요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비트처럼 쏟아지고, 허리를 비틀어요 하느님이 취한 음식은 우리도 취케 하고 음, 음악에 맞춰 비틀비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느님의 생각을 몰라, 몰라 지그재그 째즈째즈, 볼 수가 없어 신비스러운 분, 그로 인해 우리가 태어나서 먹고, 살아간다네~


-중략-


한 소식, “헬로우, 모토,” 나를 깨워 흔든다

―「새빨간 사과벌레와 재래식 모토로라」 부분


그러나 고춘옥의 시가 시조의 형식을 따르되 고답적 창법을 지니지 않고 다양화되어 있는 것은 보다 자유로운 시 형식으로 확장시키려는 시인의 노력 때문이다. 그것은 ‘운율’을 고수하며 보완하려는 작업으로서가 아니라 ‘확장된’ 형태를 과감히 수용하되 의미의 파장을 감싸 안아 ‘내부의 리듬’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사실과 모토로라가 개발한 우주 통신용 무선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시인은 이 둘을, 시형식과 시내용으로 관련짓는데, 창세기 ‘이브’의 역사는 운율 안으로 가둬놓고 현대 문명의 대표격인 ‘모토로라’의 쾌거는 산문화하여 풀어헤친다. 1연과 2연이 서로 공존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기법이 충돌과 배반을 외면하고 화합과 공존의 함의를 이루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형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이 “찌루바 찌루바바 한바탕 춤춰볼까”라는 구절이다. “찔러봐 찔러봐봐”의 하등언어 표현인 이 구절은 새빨간 사과와 재래식 모토로라를 이어주거나 단절시키는 중간 단계 “찌른다”의 역습을 가장한 ‘제안提案’적 시행이다. 과거와 현재, 고전적 믿음과 미래적 대안의 적대감은 “똥막대기”와 “흔든다” ,“비튼다” ,“비틀비틀”, “지그재그” 등 “마법에 걸려 무아지경에 빠진” 우리를 “헬로우, 모토”의 광고문구로 부르짖으며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어울리지 않으나 어울리는 관계가 되어 “기어이”, “기차게”, “뛰쳐나와”, 공존하면서 “살아간다”.

이렇듯 고춘옥의 시는 과거의 (‘시조’라는) 묵은 형식을 끌어내되 현대적 방식으로 재현하고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시 「호랑이발톱에 관한 제언」은 중첩되는 의미의 교차와 사설시조적인 운율의 파격이 돋보이는 시이다.


호랑이 새끼를 기르는 홀에미 시간에는

도심지 악어타운을 건너려면 행복한가족사랑인생설계종신보험을 꼭 들고 가야만 해. 그 몫을 챙겨 바쁘게 걸어가다 모자란 나머지가 재빨리 앞질러 와서 이웃이 되었다가, 길벗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가족처럼 굴더니 오른쪽 어깨 냉큼 뜯어먹고 어느새 왼쪽 어깨 꽉 깨물어 눈썹을 치켜세운 그믐달밤 하늘은 썩은 밧줄조차 까맣게 잊은 지 너무 오래, 기어이 독이 올라 눈에 핏발서고 손톱에 막 날 서는데 손들엇, 떡값만 내밀고 뛰어 갓, 으르릉대는 악어사냥서바이벌게임에 나선 아이들의 송곳니 뾰죽 돋아나 어흥, 어흥 문풍지 파르르 떠는 바람에, 꽃담 두르고 쨍쨍 휘파람 불던 시절이야 캄캄절벽깊디깊은낭떠러지 가지 못한 길이야, 그만 넋을 놓고 퍼뜩 달아나버린 이빨 빠진 호랑이에미 떡가루 두툼히 손에 입혀 빚은 달떡 둥그런 대보름일때

어머니 옷고름 잡고 매달리네, 은파란호랑이발톱노리개.

―「호랑이발톱에 관한 제언」 전문


먼저 형식면에서 3행으로 이루어진 위 시는 2행의 파격이 돋보인다. 사설시조의 파격을 떠올려 볼 때 유사한 측면이 있다. 1행에서 제시된 화제話題는 2행에서 구체적인 묘사를 거쳐 3행에서 그 주제가 압축된다.

위 시는 “호랑이 새끼”와 “홀에미”의 관계가 동화와 현실을 오가며 중첩되고 교차되어 있다. 즉 동화를 연상하여 현대적 가족관계를 재생, 되새김질하여 보여주는데, 이야기 속, 어머니를 잡아먹는 호랑이는 다름 아닌 호랑이 새끼, 즉 “어머니의 옷고름을 잡고 매달리”던 자식들이며 “가족처럼 굴더니 오른쪽 어깨 냉큼 뜯어 먹고” “으르릉대는” “악어사냥서바이벌게임”에 나선 아이들이다. 반면, 어머니는 “이빨 빠진 호랑이 에미”이며 도심지 악어타운 “캄캄절벽깊디깊은 낭떠러지”를 헤치고 가야 할 운명이다. 그러나 “하늘은 썩은 밧줄조차 까맣게 잊은 지 오래”고 “호랑이 새끼”를 기르는 “홀에미”의 시간은 “도심지 악어타운”을 “행복한가족사랑인생설계종신보험”을 들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다.

그러므로 홀에미와 자식, 호랑이의 관계는 현실 속에서, “이빨빠진 호랑이 에미”와 “떡값”으로 표출되어, “이웃”이고 “길벗”이고 “가족”인 으르릉대는 호랑이 새끼와 “썩은 밧줄”도 용납지 않는 “도심지 악어타운”의 한가운데와 맞서게 된다. 여전히 자식은 에미의 옷고름을 잡고 매달려 있으며, 여전히 에미는 “떡가루 두툼히 손에 입혀” “달떡”을 빚어 팔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3행은 에미와 자식의 관계를 제기한, 은파란을 입힌 호랑이발톱 모양의 매듭 노리개의 제언提言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춘옥의 시는 시의 리듬이라는 자장을 테두리치고 다양한 현대적 의미의 메신저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그것은 나약해진 현대시의 운율을 끌어안고 폭넓은 의미의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고춘옥 시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면모이다.


전해수∙2005년 ≪문학선≫평론 당선. 저서 <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2006, 역락). 현재 동국대 문화학술원 전임연구원.

추천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