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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계간평(소설)/오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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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소설
성장이냐? 존재냐?
오윤호|문학평론가
∙김려령, <완득이>(≪창작과 비평≫, 2008)
∙김혜정, <하이킹 걸즈>(<비룡소>, 2008)
∙전아리, <시계탑>(<문학동네>, 2008)
광우병의 광풍이 휩쓸기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는 그동안 폄하하면서도 떠받들고 살았던 사회구원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촛불문화제를 불타게 한 장본인인 촛불을 든 중학생과 고등학생들 말이다. 중딩이나 고딩이라는 말이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저 표현들 속에는 왠지 모른 비하의 감정과 니들이 세상을 아니와 같은 반문을 담고 있다. 그러나 광우병 사태가 벌어지고, 촛불을 움켜쥔 그 중딩과 고딩들이 사회성원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무기력하고 이기적이며 멀티미디어와 인터넷 문화가 망쳐버렸다던 그들에게서 가장 건강한 시민의식과 긍정적인 저항의 민주주의를 보게 된다. 2002년 월드컵의 영향이다, 여전히 개념이 없어서 그런다, 부모가 뼈 빠지게 고생하는 줄 모른다 라는 여러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기원과 앞으로 우리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광우병 사태가 사그라든 이후에도 우리 사회가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계절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을 읽었다. 2007년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은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년3월)의 유쾌하게 철딱서니 없지만 가슴 뭉클한 권투 이야기, 2007년 제1회 비룡소 블루픽션상 수상작인 <하이킹 걸즈>(비룡소, 2008년5월)의 문제아 두 소녀의 힘겨운 도보 여행, 수상경력이 화려한 전아리의 첫 번째 장편 <시계탑>(문학동네, 2008년5월)의 어른보다 깊은 슬픔으로 생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진 아이 등이다. 다들 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30대 중반, 그리고 20대 초중반의 여성작가들이다. 한동안 인터넷과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귀여니 소설들을 생각한다면, 주제나 문체, 사회에 던지는 반문은 여느 소설 못지않게 뛰어나다. 귀여니 소설은 그 상업성은 인정하더라도, 청소년 문학을 천박하게 보이게 만든 경향이 없지 않다. 어쨌든 이 소설들에서 다루고 있는 청소년들의 삶과 성장이라고 하는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영역이며 흥미로운 소설적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형 출판사의 전략이든, 낭만적 감수성의 또 다른 변형이든 청소년들의 삶에 천착하는 여성적 시선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문제투성이 고등학생의 유쾌한 주먹질 _ 김려령의 <완득이>
김려령의 <완득이>는 포스트모던적이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난해하고 자기 중심적인 형식 파괴의 소설들이 떠오르지만, 알고보면 <완득이>는 소설의 진부한 무게를 줄이고 만화적 상상력을 적극활용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표지와 표지 안쪽은 원색의 만화 도안이 그려져 있고, 소설의 각장을 넘길 때에도 특정 장면이 만화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또한 주인공인 완득이는 문제아지만 전교1등인 여학생이 흠모할만한 분위기와 시니컬함을 갖췄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만화 속 반항아의 이미지이다. 심각해질 수 있는 극적 상황에서는 재치있는 말들로 분위기가 역전되고, 간결한 문체에 빠른 사건 처리는 얼른 한권 뚝딱 읽어버리고 싶은 독자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문자적으로 기술되고는 있지만, 만화적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과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소설 형식보다는 만화 쪽에 기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매체적 혼종이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가능성과 재현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완득이>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완득이>는 우리 사회에서 은폐하려 하고 불행한 일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결손 가정에서 자라난 문제아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험난한 고통의 순간을 독자가 떠올리기에는 교회에 나가 하느님에게 담임 선생님을 어서 잡아가라고 저주하는 완득이는 그저 귀여운 옆집 동생일 수밖에 없다. 전체 이야기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가 부각되지만, 전체 이야기의 유쾌한 흐름을 방해할만큼은 아니다. 난쟁이 춤꾼인 아버지와 외국인 노동자인 어머니라는 설정만으로도 우리 시대 하층민이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비극적 삶의 궤적이 그려지지만, <완득이>에서는 두 사람 다 가난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자신의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완득이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존재로 나온다. 또한 전교1등 여학생과 유일한 낙이 권투인 문제아의 연애 이야기는 무수한 비극적 버전들을 무색하게 할만큼 건전하고 밝게 그려지고 있다. 모든 비극적 조건으로부터 삶의 긍정성을 지향하는 낭만적 유쾌함이 <완득이>에는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완득이>는 우리 사회의 가족 환타지, 사회 환타지를 적절히 보여준다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장면에서 완득이가 마음 속으로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아스럽다. 완득이의 반항과 고뇌가 의도적으로 삭제된 체 서술되었을 수도 있지만, 돌연 현실을 긍정하고 바른 학생처럼 구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환타지의 가벼움과 해피엔딩을 믿는다면 완득이는 그 깨달음만큼 행복하게 살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완득이니까 용서해주자.
내 마음 속 낙타방울소리 _ 김혜정의 <하이킹 걸즈>
김혜정의 <하이킹 걸즈>는 감옥에 갈 청소년을 선도하려고 만들어진 도보 여행 프로젝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문제아인 은성과 보라는 여행 가이드인 미주언니와 함께 그 프로젝트에 맞추어 우루무치에서 명사산까지 도보여행을 하게 되고 그 일정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처음에는 은성이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지만, 뒤로 갈수록 얌전할 것만 같았던 보라가 거짓말과 도둑질, 사기까지 치면서 일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만다. 그런데 이 사건 전개의 변화가 은성에게 자기 삶을 새롭게 볼만한 기회를 준다. 문제아 은성이는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할머니의 손주, 엄마의 딸, 미주언니의 여행 파트너라는 관계 속에서 늘 보호받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엄마한테 혼날 때도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고, 친구를 패고 나쁜 짓을 한 이후에도 엄마의 도움을 받았으며 도보여행 중에 벌어지는 많은 일들 역시 미주 언니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약자 의식은 엉뚱한 우월감이나 폭력성으로 드러나고, 은성을 더욱 삐뚜러지게 만든다.
그러나 보라와 함께 여행 일정에서 일탈하게 되면서 보라와 친해지고 또 그러한 연대감 속에서 무엇을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 청소년의 ‘성장’이 <하이킹 걸즈>에서는 우연적이며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은성은 어느 순간 한 사람으로서 어른으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성장 소설류의 성장 내용과는 다른 점이다. 은성이 문제아로 자라온 배경에는 청소년기에 은성을 임신하고서 낳은 언니 같은 30대초반의 엄마가 있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엄마는 딸인 은성을 부정하게 되고 그러한 자책과 고통은 고스란히 은성의 삶 속에 내면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은성의 1인칭 독백으로 서술되는 소설 속에서 은성의 엄마는 중요한 하나의 이야기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며,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자기 나이 또래 때의 엄마와 동일시해 가는 과정에서 은성은 환청처럼 모래바람 속에서 일렁이는 낙타방울소리를 듣게 된다. 한 아이의 엄마이지만, 자기 삶을 사며 고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엄마를 은성은 인식하게 된 것이다.
미주언니의 말처럼,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많은 상인들이 죽음의 순간을 견뎌낸 여행길에 다시 올라야만 했던 숙명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여행의 끝이 삶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가 삶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크로드 이야기와 은성의 이야기가 좀더 유기적으로 맞물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소설에서 실크로드 도보 여행은 단순한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기에는 그것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다.
고장난 시계탑 속 공주 _ 전아리의 <시계탑>
성장소설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객관적 거리두기이다. 그러한 시선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전아리의 <시계탑>은 성장이 이미 11살에 끝나 버린 한 가난하고 문제 많은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 소설은 11살 소녀의 목소리를 서술되고는 있지만 잔인할만큼 건조한 목소리로 ‘나, 인생 살만큼 살아봤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시계탑>은 주인공이 연이가 11살에서 19살까지 성장하면서 겪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이는 결손가정의 아이가 겪을만한 상처와 성장의 고통을 충분히 겪고 있다. 엄마는 아버지의 폭행에 못이겨 딴남자랑 도망가서 죽고, 아버지는 지독히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친구 병욱이나 소영이 역시 가난한 학생들이 겪을만한 일들을 고스란히 겪으며 청소년으로서의 삶을 학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소시민들의 사는 허름한 동네의 풍경도 가감없이 소설 속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보다 그럴싸한 가치들과 비교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에 연이의 행동이 비난받거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희망없는 미래에 깊이 좌절하지도 않는다. <시계탑>의 미덕이란 근거없는 낭만적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이며, 어른이 아이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앞서 두 작품이 작품의 말미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으려고 노력했다면, <시계탑>은 19살된 연이가 비틀즈의 <The Inner Light'의 가사를 인용하며 “내 방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난 이 세상 많은 걸 알 수 있죠.”라고 말하도록 한다. 이것은 성장에 대한 거부, 미래에 대한 거부, 명료한 자의식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매맞다가 도망간 엄마가 죽는 일도, 친구 소영이가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도 주인공 연이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18살보다는 조금더 나이를 먹었지만 성장한다는 것에 겁먹지도 않았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만족감은 어느 왕궁의 공주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건조한 일상이, 순간순간 지쳐버리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목 ‘시계탑’은 11살부터 19살까지의 시간의 중첩과 그 무게감을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계탑이 조금씩 더 쌓이게 된다면 작가의 더 좋은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버릴 수 없다.
자유로울 수 있는 ‘성장’에 대하여
내가 중학교 때, 친구들과 시내로 영화를 보러가곤 했었다. 지금에야 버스든 택시든을 타면 15분이면 나갈 수 있었을 중소도시의 극장가를 그때는 친구과 걸어서 한참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난다. 동시상영관 앞에서 남들 다 들어갈 때는 못들어가고 서성거리고 있으면, 매표원 아저씨가 손짓으로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그 당시만 해도 비싼 1000원을 아저씨의 손에 쥐여주고 극장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간다. 이대근과 원미경이 나온 <변강쇠>와 임성민과 김청이 나온 <몸 전체로 사랑을․2>와 같은 영화들을 침만 꼴깍거리며 보다가 나오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전쟁터를 갔다 온 듯 왠지 모를 뿌듯함과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곤 했다. 그 이중적인 감정의 결을 따라 소리 없이 나이를 먹으며 나의 청소년기는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만약 성장했다면 단순하게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면 그 시간을 견뎌오며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바꿔 보자. 왜 우리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가? 왜 성장을 강요하는가? ‘성장’이라는 표현 자체가 너무 근대적이거나 어른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청소년을 압박하는 논리는 아닐까? 세 소설을 읽는 동안에 허구 혹은 환상이라는 소설 속에서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청소년들을 발견하고 가슴이 아팠다. 왜 모두 결손 가정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란 말인가? 현실에서 청소년들은 대학입시에, 주변의 불량배에, 못된 대중문화에 휩쓸려 정신을 못 차리고 살아가는데, 이야기 속에서마저도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고 성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질문을 던진다 하더라도 청소년 혹은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시선과 목소리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장르소설이라는 것이 특정한 형식과 주제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해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의 삶과 상상력, 그들의 욕망을 담을 수 있도록 그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기울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오윤호∙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저서 <현대 소설의 서사 기법>, <깨어진 역사 비평적 진실>. 평론 「그림자 사나이의 틈에 대한 악몽」 외. 서강대, 서울예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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