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1호(2008 가을호) 계간평(시)/장성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94회 작성일 09-01-19 19:40

본문

계간평/시
침묵 속의 먼지들
장성규|문학평론가



∙윤예영, 「거대한 침묵」(≪문장웹진≫ 2008년 8월호)
∙윤종영, 「시를 베다」(≪시와 정신≫ 2008 여름호)
∙맹문재, 「슬픈 웃음」(≪학산문학≫ 2008 여름호)
∙최서림, 「엉성하다」(≪작가세계≫ 2008 여름호)
∙정서영, 「그들, 수화처럼」(≪리토피아≫ 2008 여름호)
∙황규관, 「먼지」(≪실천문학≫ 2008 여름호)


1.
60년대 김수영의 시들을 침묵 속의 먼지라고 불러도 될까? 김수영의 시가 절규인 까닭은 그의 시가 혁명의 좌절 속에서 강요된 침묵에 맞서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침묵에 대해 “기침을 하자”(「눈」)고 말한다. 그러나 기실 이 “기침”은 강요된 시대의 침묵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울림일 따름이다. 따라서 그가 “기침을 하자”라고 절규하더라도 그 기침은 “한 번 정정당당하게/불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김수영의 시를 감히 ‘절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이 사소한 ‘기침’이 바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는 치열한 자의식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래와 바람과 먼지와 풀에 자신을 비추어 볼 줄 아는 그의 시적 윤리는 비겁한 침묵과도 맞서지만 동시에 섣부른 노래와도 다른 ‘기침’의 형식을 낳는다. 그리고 이 기침은 강요된 침묵에 맞서는 시적 윤리의 최대치이기도 했다.
2008년 여름에 발표된 시를 살펴보는 자리에서 김수영을 꺼내는 이유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의 ‘기침’이 절실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난 계절 내내 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소박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빚어낸 ‘촛불’이었다. 그러나 과거로 회귀하는 듯 한 이명박 정권의 ‘천박한’ 역사인식 속에서 촛불은 점차 꺼지는 듯 하다. 안타까운 것은 ‘촛불’의 자리에 우리 문학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김수영 만큼의 치열함은 아닐지라도 시대의 침묵 속에서 시의 윤리를 묻는 작업이 없다면 어찌 감히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부족하더라도 지금 우리 시의 ‘기침’을 모색하는 성과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먼저 필요한 비평의 몫이겠다.

2. 

톱니바퀴가 돈다 아무도 톱니바퀴를 대신 돌리는 사람은 없다 원래 톱니바퀴라는 것은 혼자 굴러가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대신 톱니바퀴는 연주를 한다 비플랫마이너로 트림을 한다 그것은 발이 무거운 군중의 발걸음 소리고 네 귀퉁이가 딱 떨어지는 정사각형의 잠이다 톱니바퀴는 굴러가지 않는다 바퀴랄 것도 못 된다 그냥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돈다 어둠을 뭉텅뭉텅 잘라 내는 일 이외에도 자기보다 더 큰 침묵을 만들어 내는 일도 한다 그러니 바퀴가 되지 못했다고 나무랄 일도 없다 세상만사는 그런 식이다 침묵은 항상 너무나 거대해서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이건 세상만사와 아무 관계가 없다 중세풍의 어릿광대가 물구나무를 서는 것과는 일말의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것과는 반대로 돌아간다 결국은 톱니바퀴는 돌아간다 침묵은 그런 식으로 굴러간다 침묵에는 아무런 미감도 없으며 공모도 없으며 싱싱한 눈알도 없다 그냥 침묵은 뚱뚱하고 거대하고 육중한 몸통이라 할 수 있겠다 침묵은 가끔 커다랗게 입을 벌리기도 하는데 그 속이 어찌나 시커먼지 간장을 뜨러 갔던 할매가 으매! 시꺼먼 거, 하고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이다 그러니 함부로 그 속에 고개를 들이밀지 말 것이다
―윤예영, 「거대한 침묵」, ≪문장 웹진≫ 2008년 8월호

윤예영의 「거대한 침묵」은 현재 우리 문학의 ‘거대한 침묵’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로 독해 될 수 있다. 거리에서 민주주의의 열망이 폭발하고 있을 때, 어쩌면 우리 문학은 “네 귀퉁이가 딱 떨어지는 정사각형의 잠”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세련된 담론의 층위에서는 이 “네 귀퉁이가 딱 떨어지는 정사각형의 잠”을 벗어나는 다양한 충돌과 전복이 전개되었지만, 정작 이 새로움들은 김수영의 ‘기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벼움에 갇힌 것은 아니었을까? 외양상으로 보이는 다양한 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시적 윤리라는 측면에서 우리 시는 결국 ‘거대한 침묵’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비단 시적 윤리의 층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시적 윤리와 미학적 성취는 동시에 하나의 ‘온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거대한 침묵’은 그 미학적 성취에 있어서도 한계를 지닌다. “침묵에는 아무런 미감도 없으며 공모도 없으며 싱싱한 눈알도 없다 그냥 침묵은 뚱뚱하고 거대하고 육중한 몸통이라 할 수 있겠다” 역동하는 민주주의의 열망과 호흡하지 못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미학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기법적인 완성도를 고민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어떠한 ‘미감’도 깃들지 못한다. 기실 ‘잘 빚어진 항아리’란 저 투박한 김수영의 ‘기침’에 비한다면 “뚱뚱하고 거대하고 육중한 몸통”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예영의 시가 유독 눈에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저 “비플랫마이너로 트림”하는 우리 문학의 ‘거대한 침묵’이 단지 “네 귀퉁이가 딱 떨어지는 정사각형의 잠”에 지나지 않음을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김수영의 치열한 ‘기침’을 예비하기 때문이다.

3.

마흔을 넘기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한 가지는
내게 슬픈 웃음이 많다는 것이다

업신여기는 사람 앞에서도
혐오스러운 사람 앞에서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 앞에서도
어느덧 습관이 된 나의 웃음

그리하여 기차역 대합실에서 웅크리고 자는 노숙자를 보면서도
해고 노동자의 부고를 읽으면서도
엉터리 심사위원의 변명을 들으면서도
나는 실컷 울지 못한다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도
놀아달라는 아이의 투정 앞에서도
나는 실컷 웃지 못한다
―맹문재, 「슬픈 웃음」, ≪학산문학≫, 2008 여름

맹문재의 「슬픈 웃음」은 소시민인 시인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웃음이 “슬픈 웃음”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어느덧 습관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웃음 뿐만이 아니다. 울음도 마찬가지인 바 “해고 노동자의 부고를 읽으면서도” 그는 “실컷 울지 못한다”. 이는 그의 위치가 이도저도 아닌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예 사회적 주류로 편입되었다면 위와 같은 일로 울 필요가 없을 것이며, 반대로 그가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면 실컷 울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소 소박한 발화이지만 이 지점에서 맹문재는 정직하다. 침묵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반대로 정면에서 이에 맞서는 노래를 부를 수도 없는 소시민으로서의 자기 인식. 이 인식이 소중한 것은 이 경계의 위치에 대한 치열한 자각으로부터 비로소 작지만 침묵을 깨뜨리는 ‘기침’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모처럼 마음을 열고 들어온다 <엉성하다>라는 말의 물렁물렁한 살갗에는 무수한 숨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엉성하면서도 엉성한 줄 몰랐다 알고도 모르는 척 속아주었다 속아주는 연기가 더 고수다 마른 쑥을 삶아다 놓고 만병을 통치하는 약으로 팔아먹던 어수룩한 시절, 그 물을 먹고 만병이 다 나았던 호시절이 있었다 어설퍼서 더 끌리던 춘향전과 심청전, 삼류 가수의 빈틈에는 그만의 눈물이 두만강처럼 깊게 출렁이고 있었다 동네 찌그러진 함석집 문틈으로 황소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내 마음이 삐끗 열리는 순간
―최서림, 「엉성하다」, ≪작가세계≫, 2008 여름

최서림의 「엉성하다」는 빈틈없는 언어의 구조물로서의 ‘시’가 보여주지 못하는 ‘엉성함’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의 표현대로 “<엉성하다>라는 말의 물렁물렁한 살갗에는 무수한 숨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엉성함’으로 인해 “마음이 삐끗 열리는 순간”이 가능해진다. 
기실 김수영의 ‘기침’은 바로 ‘기침’이기에 엉성하다. 잘 짜여진 언어적 구조물이 아니기에, 그리고 체계화된 발화가 아닌 침묵에 대한 ‘절규’이기에 그의 ‘기침’은 엉성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엉성함으로 인해서 그의 ‘기침’은 “마음이 삐끗 열리는 순간”을 생성한다. 이는 ‘촛불’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소박한 나머지 ‘촛불’은 체계화된 자본의 매끄러운 담론에 비해 엉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거리의 민주주의란 “춘향전과 심청전, 삼류 가수의 빈틈”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최서림의 작품은 이 ‘엉성함’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선험적으로 구성된 매끈한 가공된 소리가 아닌, 빈틈이 존재하기에 “무수한 숨구멍”이 존재할 수 있는 시. 사물화된 언어의 숨막히는 유희가 난무하는 지금 우리의 문학에서 정작 이 ‘엉성함’의 미학은 간과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로 인해 “춘향전과 심청전, 삼류 가수의 빈틈”과 같은 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이 “빈틈”이 지니는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 최서림의 「엉성하다」의 성취가 있다.

5.

명마가든 뒷마당에 먼지 낀 가로등 하나 기우뚱 서 있는데
아카시아나무 그림자 설렁설렁 지나가고 있는데
담장 위에 호박넝쿨 납작 엎드려 있는데
핼쓱한 달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자동차 한 대 곁눈질하며 뒷걸음질 치더니
마당 귀퉁이에 슬그머니 자리 잡는다

여자, 이따금 차 창가에 팔을 기댔다 내렸다
남자, 머리 뒤로 팔 깍지를 끼었다 풀었다
여자, 가로등을 바라보기도 하고
남자, 나무그림자 쪽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여자, 고개를 기웃거리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듯
남자,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

그들,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서로 손을 내젖다가
아주 오랫동안 앞만 보고 있다가

그대로 떠나갔다.

나는 그날 밤,
명마가든에 그들이 풀어놓은 말의 흔적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정서영, 「그들, 수화처럼」, ≪리토피아≫, 2008 여름

정서영의 「그들, 수화처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류적인 언어 외부의 또 다른 ‘언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들의 언어는 ‘수화’이다. 이 언어는 일반적인 시의 언어와는 다른 소수자의 언어이다. 김수영의 ‘기침’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기침’이 ‘거대한 침묵’과는 다른 소수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언어에 의해 억압되어진 언어를 복원시킨다는 점에서 ‘기침’은 ‘수화’와 유사하다. 이 소수자의 언어를 복원시킨다는 점에 정서영의 작품의 의미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서영이 이를 섣불리 일반적인 시의 언어로 포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 수화에 대해 자신은 “그들이 풀어놓은 말의 흔적을/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기실 소수자의 언어를 일반적인 언어로 환원시키는 것은 결국 소수자의 언어가 지니는 고유한 질서를 포획하는 폭력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이 점에서 시인의 정직한 고백은 빛난다. 더욱이 김수영의 ‘기침’이 문학의 장場에서 정전화되어 포섭되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 고백은 더욱 경청할 필요가 있다. ‘기침’과 ‘수화’는 지배적인 언어 외부에 존재할 때 그 불온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우리는 먼지가 만들어낸 존재다
연애라는 먼지 햇볕이라는 먼지
굽은 등에 들러붙은 모멸 섞인 시선이라는 먼지

그래서 먼지를 마시고
먼지를 세고 먼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먼지투성이인 현관문을 나선다
당신과 잠깐 나눠 가졌던 입술도
다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뜨거움도 식으면 먼지가 되고
세상이 정전되어 털썩 주저앉을 때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도 먼지다

그러니까 칠 년이나 산 집에
먼지만 가득하다 상심하지 말아다오

밤새 곤히 자고 일어나면
우리가 남긴 것도 뿌연 먼지뿐
아무것도 아닌 먼지 탈탈 털어보면
바람 따라 눈앞에서 사라지는 먼지

그게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
또 돌아가게 될 미래다
하늘을 떠가는 뭉게구름,
불타는 별이다

당신 옷깃에 묻은 먼지가 바로 나다
―황규관, 「먼지」, ≪실천문학≫, 2008 여름

황규관의 「먼지」는 김수영의 ‘기침’을 계승한다. 김수영의 ‘기침’이 무서운 침묵에 맞서는 절규라면, 황규관의 ‘먼지’는 이 지속되는 침묵 속에서 시의 존재 근거를 치열하게 자문하는성찰이다. 김수영이 그 결과 억압된 침묵으로부터의 자유에 도달했다면, 황규관은 억눌린 존재들의 가능성에 도달한다. 그 가능성을 ‘먼지’로서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로서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초라하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의 시란 기실 ‘먼지’와 같은 것은 아닐까?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굽은 등에 들러붙은 모멸 섞인 시선이라는 먼지”와 같은 시야말로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또 돌아가게 될 미래”가 아닐까? 그리고 이 ‘먼지’간의 우애로운 마주침에 의해, 그 연대의 힘에 의해 결국 “당신 옷깃에 묻은 먼지가 바로 나다”라는 고백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생성되는 시적 윤리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7.
그의 말년에 김수영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내일의 행동이 먼지를 쓰고 있다/위태로운 일이라고 落盤의 신호를/올릴 수도 없고 찻잔에 부딪치는/차숟가락만한 쇳소리도 안 들리고”(「먼지」). 그 이전 시기 자신을 ‘먼지’에 비추어보며 절규하던 김수영은 여기에 이르러 그 ‘먼지’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이 사소한 먼지가 기실 “내일의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 그러니 긴 침묵은 결국 그 먼지의 “위태로운 일”에 의해 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거리의 민주주의가 ‘촛불’로 아우성치던 2008년 여름, 우리 시는 부끄럽게도 너무나 ‘무거운 침묵’을 반복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여전히 김수영의 ‘기침’에의 호소는 유효하다. 그러나 60년대 김수영을 지금 반복할 수는 없다. 침묵을 깨는 다양한 시적 모색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윤예영이 보여주는 “네 귀퉁이가 딱 떨어지는 정사각형의 잠”을 넘어서는 시적 윤리와 미학의 필요성이라던가, 맹문재가 보여주는 시인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고백, 혹은 최서림의 ‘엉성함’의 미학과 정서영의 소수자의 언어에 대한 복원, 황규관의 ‘먼지’로서의 시에 대한 탐색 등은 조금은 소박하게 진술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2008년 여름, 우리 시의 현실을 살펴본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지속되는 침묵을 깨뜨리고자 하는 침묵 속의 먼지들. 이 먼지들은 김수영이 일찍이 간파한 것처럼 지금은 조그마한 먼지일 따름이지만, 바로 “내일의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니, 이들이 김수영의 적자임을 기대해 볼 따름이다.



장성규∙1978년 서울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한국현대작가와 불교(공저). 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추천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